성서의 하느님-신약성서(하느님은 사랑이시다)

 

1.2.3.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신약성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언급하는 三位의 양식을 전해주는데 주로 바울로 서간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양식들 중에서 잘 알려진 양식 중 하나는 우리가 성찬의 전례 때 입당 인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2고린 13,13) 이 인사에서 사랑이 아버지에게 속한다. 그리고 은총과 친교는 그리스도와 성령에게 속하는데 이 둘은 아버지의 사랑의 결과처럼 소개된다. 이 둘은 그들의 샘이신 아버지와 분리될 수 없으며 구세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화해와 성령의 역사에 의한 화해자들의 모임을 통해 드러나는 영원한 사랑과 분리될 수 없다.


우리는 사랑이 성령에 속한다는 바울로의 다른 양식을 발견할 수도 있다 : “[형제 여러분],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힘입어 그리고 영의 사랑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부탁드립니다.”(로마 15,30) 여기서 바울로는 하느님의 사랑이 근원자이신 아버지와 떨어지지 않고서 신자들의 마음을 확고한 사랑으로 변화되게 하는 것은 성령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사랑이 그리스도에게 속한다는 양식도 발견할 수 있다 :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격려가 있고 사랑의 위로가 있고 영의 친교가 있고 애정과 동정심이 있다면 여러분은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나누며 일치된 마음으로 한가지로 생각하여 내 기쁨이 넘치게 해 주십시오.”(필립 2,1-2)


에페 1,3-14에서는 또 다른 양식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먼저 ‘하느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대한 찬양’으로 시작한다(3절). 이 때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 받는 아드님’(6절)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이는 창조 이전에 간택된 이들을 위하여 마련하신 하느님의 사랑의 섭리를 연상하게 한다(4절). 하느님 사랑의 중개자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이 신비는 ‘약속의 성령’에 의해 상속받을 것으로 보증된다(13-14절).


이처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사이에 오가는 사랑은 각자에게 고유한 방법으로 사랑을 발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자기 선물을 교환한다. 이러한 완전한 자기 확인과 증여는 서로의 우열을 가리지 않고, 공존과 공동활동과 공동인식으로 스스로를 드러낸다. 하느님의 이러한 사랑이 구체적으로 구세사에 개입되어 진행되는 것을 ‘구세사적 사랑’의 경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요한이 전해주는 사랑의 신학을 살펴보면 위의 사실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8.16). 이 명제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살펴보도록 한다. 우선 요한 저자는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를 강조한다 :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아들도 똑 같이 하기 때문입니다.”(요한 5,19 ; 참조.4,34 ; 5,17) 그러나 이 관계는 사랑에 의한 것이다(5,20). 더 나아가서 죽은 자들을 살리는 일을 비롯하여 다른 신적 활동들을 아버지와 아들이 나누어 하는 모습이 동시에 표현된다(5,21.30.36참조).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의 활동을 나누어 할 때도 같은 방법으로 진행된다 :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여러분을 사랑했습니다. 여러분은 내 사랑 안에 머무시오.”(15,9) 신자들은 하느님을 따르는 예수님을 따르도록 초대되었다. 여기서 사랑의 ‘새 계명’이 주어진다(요한 13,34 ; 참조.15,12-17). 더욱이, 사랑의 하느님은 ‘친교적인’ 다른 구별성 안에서 그들에게 임하신다 :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 곧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분이 우리에게 계명을 주신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이는 그분 안에 머물러 있고 그분도 그 사람 안에 머물러 계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분이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심을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영을 통하여 압니다.”(1요한 3,23-24 ; 참조.4,7-12)


요한 저자는 우선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지만(요한 5,32.36.37 ; 8,1 ; 10,15 ; 13,31이하 ; 14,10이하 ; 15,26 ; 17,10.20 ; 1요한 7,1-5), 성령의 활동 또한 강조한다.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발하며 아버지와 함께 계시는 아들에 의해 파견되었다(요한 15,26). 성령은 아버지를 따라 아들이 행하신 것을 행하신다 : 말씀을 선포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을 하신다(요한 14,26 ; 16,13). 영광을 드러내시고(요한 16,14) 사람들로 하여금 사랑(Agape)을 준비하게 하시고(요한 14,23-26) 제자들로 하여금 죄를 사해 줄 수 있도록 하신다(요한 20,23이하). 예수께서는 야훼 하느님의 창조행위 때와 같이 새 창조의 표지로 제자들에게 영을 불어넣으신다(창세 2,7 ; 에제 37,9 ; 지혜 15,11 참조).


요한 복음의 “아버지께서는 나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14,28)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아버지보다 아들이 더 못한 존재라는 뜻이 아니다. 예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강생의 신비를 강조하는 의미일 뿐이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입니다.”(요한 10,30)라는 사랑의 표현은 등급에 있어서도 같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삼위일체 문제에 대한 갈등을 야기 시키는 다른 요인들의 실마리도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명제 안에서 신앙으로 풀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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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uest 님의 말:

     

    1.2.3.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신약성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언급하는 三位의 양식을 전해주는데 주로 바울로 서간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양식들 중에서 잘 알려진 양식 중 하나는 우리가 성찬의 전례 때 입당 인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2고린 13,13) 이 인사에서 사랑이 아버지에게 속한다. 그리고 은총과 친교는 그리스도와 성령에게 속하는데 이 둘은 아버지의 사랑의 결과처럼 소개된다. 이 둘은 그들의 샘이신 아버지와 분리될 수 없으며 구세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화해와 성령의 역사에 의한 화해자들의 모임을 통해 드러나는 영원한 사랑과 분리될 수 없다.

    우리는 사랑이 성령에 속한다는 바울로의 다른 양식을 발견할 수도 있다 : “[형제 여러분],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힘입어 그리고 영의 사랑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부탁드립니다.”(로마 15,30) 여기서 바울로는 하느님의 사랑이 근원자이신 아버지와 떨어지지 않고서 신자들의 마음을 확고한 사랑으로 변화되게 하는 것은 성령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사랑이 그리스도에게 속한다는 양식도 발견할 수 있다 :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격려가 있고 사랑의 위로가 있고 영의 친교가 있고 애정과 동정심이 있다면 여러분은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나누며 일치된 마음으로 한가지로 생각하여 내 기쁨이 넘치게 해 주십시오.”(필립 2,1-2)

    에페 1,3-14에서는 또 다른 양식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먼저 ‘하느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대한 찬양’으로 시작한다(3절). 이 때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 받는 아드님’(6절)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이는 창조 이전에 간택된 이들을 위하여 마련하신 하느님의 사랑의 섭리를 연상하게 한다(4절). 하느님 사랑의 중개자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이 신비는 ‘약속의 성령’에 의해 상속받을 것으로 보증된다(13-14절).

    이처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사이에 오가는 사랑은 각자에게 고유한 방법으로 사랑을 발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자기 선물을 교환한다. 이러한 완전한 자기 확인과 증여는 서로의 우열을 가리지 않고, 공존과 공동활동과 공동인식으로 스스로를 드러낸다. 하느님의 이러한 사랑이 구체적으로 구세사에 개입되어 진행되는 것을 ‘구세사적 사랑’의 경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요한이 전해주는 사랑의 신학을 살펴보면 위의 사실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8.16). 이 명제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살펴보도록 한다. 우선 요한 저자는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를 강조한다 :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아들도 똑 같이 하기 때문입니다.”(요한 5,19 ; 참조.4,34 ; 5,17) 그러나 이 관계는 사랑에 의한 것이다(5,20). 더 나아가서 죽은 자들을 살리는 일을 비롯하여 다른 신적 활동들을 아버지와 아들이 나누어 하는 모습이 동시에 표현된다(5,21.30.36참조).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의 활동을 나누어 할 때도 같은 방법으로 진행된다 :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여러분을 사랑했습니다. 여러분은 내 사랑 안에 머무시오.”(15,9) 신자들은 하느님을 따르는 예수님을 따르도록 초대되었다. 여기서 사랑의 ‘새 계명’이 주어진다(요한 13,34 ; 참조.15,12-17). 더욱이, 사랑의 하느님은 ‘친교적인’ 다른 구별성 안에서 그들에게 임하신다 :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 곧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분이 우리에게 계명을 주신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이는 그분 안에 머물러 있고 그분도 그 사람 안에 머물러 계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분이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심을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영을 통하여 압니다.”(1요한 3,23-24 ; 참조.4,7-12)

    요한 저자는 우선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지만(요한 5,32.36.37 ; 8,1 ; 10,15 ; 13,31이하 ; 14,10이하 ; 15,26 ; 17,10.20 ; 1요한 7,1-5), 성령의 활동 또한 강조한다.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발하며 아버지와 함께 계시는 아들에 의해 파견되었다(요한 15,26). 성령은 아버지를 따라 아들이 행하신 것을 행하신다 : 말씀을 선포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을 하신다(요한 14,26 ; 16,13). 영광을 드러내시고(요한 16,14) 사람들로 하여금 사랑(Agape)을 준비하게 하시고(요한 14,23-26) 제자들로 하여금 죄를 사해 줄 수 있도록 하신다(요한 20,23이하). 예수께서는 야훼 하느님의 창조행위 때와 같이 새 창조의 표지로 제자들에게 영을 불어넣으신다(창세 2,7 ; 에제 37,9 ; 지혜 15,11 참조).

    요한 복음의 “아버지께서는 나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14,28)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아버지보다 아들이 더 못한 존재라는 뜻이 아니다. 예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강생의 신비를 강조하는 의미일 뿐이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입니다.”(요한 10,30)라는 사랑의 표현은 등급에 있어서도 같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삼위일체 문제에 대한 갈등을 야기 시키는 다른 요인들의 실마리도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명제 안에서 신앙으로 풀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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