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하느님 나라

3. 하느님 나라

하느님 나라는 인간의 모든 희망을 집약시킨 그리스도교적 희망이다. 마르코 1,15에서 시작부터 하느님 나라를 외친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의 일생 전반에 걸쳐 이룬 공생활을 요약시킨다. 마태오는 하늘나라로 표현한다. 루가의 진복팔단과 마태오의 진복팔단에서 서로 다른 표현을 볼 수 있다 (하느님 나라, 하늘나라). 하느님 나라를 보다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다스림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이는 영토적 개념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묵시작품에서 하느님 나라는 하나의 흐름이다. 그러나 예수는 하느님 나라가 미래의 도래할 것이 아니라 지금 도래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 하느님 나라는 예수의 희망이었고, 우리의 모든 희망적 단어를 하느님 나라로 표현했다. 제자 파견에 있어서도 하느님 나라가 중심이다.

1) 하느님 나라에 대해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을 지적해야 한다.
많은 이에게 하느님 나라는 천국의 개념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하늘은 분명 우주공간적 개념이 아니다. 그 밖의 스콜라 등 전통적 개념에서의 천당의 개념도 아니다. 예수에서의 하느님 나라는 이 지상의 실재이다.

2) 용어의 의미에 있어 하느님 나라 (Βασιλε α)
기능적 차원에서 다스림.왕권.통치권. 영토적 의미에서의 국가를 의미한다. 신학에서의 βασιλε α το  θεο  는 이 두 의미를 모두 담는다. 첫째로 하느님이 다스리고, 그 백성을 지칭한다.

3) 예수 시대의 하느님 나라의 기다림의 형태를 볼 수 있다
첫째로 정치적이고 메시아적 의미로서의 하느님 나라,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이방민족의 정치에 대응하는 정치세력으로 이해된다. 즉 하느님 나라는 피지배에서의 해방, 다윗의 후손에 의한 해방이었다. 이 새로운 통치자는 이민족을 축출하고 새로운 왕이 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방인 역시 이스라엘을 우러러 보는 것이다. 그처럼 하느님은 지상에 도유받은 왕에 의해 왕국을 건설하리라는 것이다 (젤롯당 등).
둘째로 랍비는 하느님 나라를 윤리적 차원에서 이해한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잘못을 저지른 댓가로 현실을 이해한다. 따라서 하느님의 법을 지키면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진다. 여기서 랍비들은 인간에게 율법준수를 상당히 강조한다. 예수 시대에도 역시 그들은 백성들의 죄에 관심을 갖는다.
세째로 이 세대가 전복되어 사라진 후의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이야기한다. 이 세대의 전복은 하느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하느님에 대한 맹종을 강조한다.

4) 공관에 나타나는 하느님 나라의 내용
하느님 나라의 표현은 주로 공관복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수는 이 표현으로 새로운 형태의 희망을 제시한다. 예수는 전혀 다른 형태를 희망으로 제시한다.
첫째로 하느님 나라를 자신의 행위와 연결시킨다. Lk 11,20; 나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좇아내고 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또한 자신을 정치적 메시아로 이해하지 않으며, 또한 자신의 메시아성을 포기하지도 않는다 (빌라도의 심문). 특별히 예루살렘을 나귀타고 입성하는 장면을 정치적 메시아는 아닐지라도 자신이 메시아임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즉 예수는 메시아임에도 불구하고 소박하고 겸손한 봉사는 메시아이다.
둘째로 예수의 하느님 나라는 랍비들의 기대와도 다르다. 1차적으로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 백성에게 주는 선물이다. 마르코 1,15에는 명령형과 서술형이 복합되어 있다.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서술형에 이어 멸령형이 나타난다. 하느님 나라가 선물임은 여러가지 비유(밭에 묻힌 보물 등)에서 보여진다. 바로 이런 기쁨에서 출발하여 새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도 이런 선물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윤리가 아니라).
세째로 묵시주의자의 개념과도 다르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다.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는 무엇인가? 예수의 말에는 어떤 정의도 나타나 있지 않고, 주로 비유로만 나타난다. 이는 하느님 나라의 실재와 세상의 실재와 다르기 때문이고, 따라서 하느님 나라는 「-과 비슷하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하느님 나라의 개념은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역동적이다. 하느님 나라는 분명 체험할 수 있는 실재임을 암시한다. 그래서 구체적 내용보다는 「나를 따르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를 알기 위해서는 예수의 말과 행동을 알아야 한다. 예수는 벙어리에게 악의 세력이 있고 그것을 쫓아낼 때 하느님 나라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 예수는 누구인가? 요한의 제자가 예수에게 물었을 때 예수는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전하라」고 하신다. 이 설명(병자의 치유.죽음의 극복 등)속에서 하느님 나라의 내용을 볼 수 있다. 루가도 나자렛에서의 설교를 요약하는 부분에서 같은 설명을 한다 (갇힌자들의 해방.은총의 해;구약의 희년.성년; 레위 8,1-13). 다시 말해서 비인간화 된 인간이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을 보여준다. 구신약 모두 이 희망의 이미지를 이사야서에서 찾는다. 바로 예수로 말미암아 이사야가 말한 예언이 실현됨을 보여준다. 여기서 강조점이 변환된 것도 사실이다. 즉 이사야는 이방인에 대한 처벌이 함께 언급되지만, 예수의 하느님 나라에서는 이방인에 대한 보복이 나타나지 않는다. 공관에 나타난 예수의 설교는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병자의 치유로 집약될 수 있다. 병자의 치유 역시 하느님 나라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주의기도에서 청원의 핵심은 하느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다. 다른 것은 하느님 나라의 구체적 내용으로 소개된다. 그래서 그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다. 하느님을 아빠.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만큼 하느님을 우리에게 친밀하다. 이런 애정과 신뢰의 아버지이며 동시에 위대한 하느님이시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은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땅에 펼쳐지는 것이다. 즉 하느님과 인간의 상통과 인간과 인간, 인간과 하느님의 화해가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악에서 해방될 때 완전한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진다. 하느님의 가까움은 죄를 용서하는 가까움으로 나타난다. 병의 치유, 구마는 인간의 해방을 방해하는 모든 것에서의 해방이다. 예수의 활동 속에서 모든 불의가 종말을 고하고, 다시 말해 역사를 변화시키는 것은 사랑의 길임을 말한다. 하느님 나라의 전형적 상징 중 대표적인 것은 잔치의 비유이다. 이는 하느님 나라가 하느님과 함께 하는 친교.일치임을 나타낸다.

5) 「이미」와 「아직 아니」
신약성서에 의하면 하느님 나라는 단순히 미래의 것만이 아니다. 즉 그 분 안에서 전적으로 신뢰하는 인간의 그 분 안에서 하느님 나라가 발생한다. 신약성서를 자세히 보면 두가지를 볼 수 있다. “이미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Lk 11,20). 그러나 언제나 현재형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주의기도에서는 미래의 것으로 이야기된다. 예수에게서는 이 두가지가 모두 발견된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는 「이미」와 「아직」의 긴장관계를 지닌다. 사실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는 스콜라 신학에서 규정한 것처럼 마지막 사건은 아니다. 이에 대해 ‘그레사케’는 “많은 그리스도교적 희망은 현대에 맞는 것인데 이들의 공통점은 피안적이 아니고, 천국에 대한 진술이 이 세상의 역사를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즉 정의와 평화가 가득한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보편적 지배가 실현될 때 그 약속이 실현될 수 있다. 즉 보장된 미래가 현실속에서 난관을 이겨나가는 용기를 주는 것이다.
하느님은 그 백성이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계속 행동하도록 격려하고 작용한다. 즉 피안에서 주어질 영원한 삶 만이 희망이 아니라, 바로 이곳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도 희망으로 나타난다. 하느님 나라는 그 완성이 미래에 있지만 지금에도 희망과 용기를 주는, 이미 시작된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하느님 나라라는 그리스도교적 희망이 단순히 선물이기에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이 아직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세상의 부분적인 개선이, 희망이 우리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소극적인 것으로 축소될 수 없고, 오직 하느님에의 희망에 달려 있는 것이다.

6) 이세상(차안)과 저세상(피안)
하느님 나라는 젤롯당에서 처럼 이세상 안에서의 구원의 기다림으로 축소할 수 없고 랍비들처럼 율법준수에 의한 이세상의 희망으로 축소할 수도 없다. 하느님의 용서와 그리스도의 부활에 따른 죽은 자들의 부활은 이세상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또한 하느님의 다스림은 전적으로 피안의 것만은 아니다. 성서에 의하면 하느님 나라는 예수의 행동(질병치유.소외된 자의 해방.많은 벽들의 해소 등)에서 보여지는 것 같이 차안의 신화적 조건과 무관하지도 않다.

7)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선물
예수는 하느님 나라로 청중들이 완성을 이룰 수 있는 것으로 소개하지 않는다. 동시에 다가올 하느님 나라에 맞갖는 준비를 요구한다 (용서.화해.사랑.도움.복음선포.회개의 촉구 등). 이처럼 하느님 나라는 인간에게 수동적이지만은 않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하느님 나라가 하느님의 선물임을 좌시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주도권은 항상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8) 계약 사상과 하느님 나라의 대조
하느님 나라에서 옛 계약이 모두 포괄되어 있고, 확장.수정되어 있다. 옛 계약에서는 땅.나라에 대한 희망이 계약의 궤, 성전등에 나타난다. 이제 이런 희망은 예수안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즉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인격화, 다른 인간들에 대한 약속이 된다. 구약에서 처럼 하느님 나라로 표현되는 종말론적 신앙은 역사를 근거로 한다. 마찬가지로 신약의 근거는 예수의 부활체험이다. 또 구약에서 처럼 신약성서에서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선물이면서 백성을 행동에로 초대한다. 구약의 약속은 후손의 번성인 반면 신약의 희망은 죽음을 넘어서 죽은 자들의 부활이다. 다른 점은 구약의 계약은 국수적 성격을 띤다. 그러나 신약의 하느님 나라는 모든 이의 구원을 다룬다. 결코 예수의 설교에서 이방인에 대한 심판과 보복을 찾아볼 수 없다 (보편적 구원의 메시지).

9) 묵시적 희망과 하느님 나라의 희망의 대조점
묵시적 희망은 하느님의 활동과 승리가 끝난 다음에 비로소 도래하는 것인 반면에, 하느님 나라는 현재와 미래의 긴장관계 안에 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묵시적 희망의 이원론이 거부되고, 낙관적이고 개방적이다.
복음 안에서의 하느님 나라는 바오로에서 「그리스도의 나라」로서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넘어간다.

이 글은 카테고리: catholicdictionary3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3. 하느님 나라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3. 하느님 나라

    하느님 나라는 인간의 모든 희망을 집약시킨 그리스도교적 희망이다. 마르코 1,15에서 시작부터 하느님 나라를 외친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의 일생 전반에 걸쳐 이룬 공생활을 요약시킨다. 마태오는 하늘나라로 표현한다. 루가의 진복팔단과 마태오의 진복팔단에서 서로 다른 표현을 볼 수 있다 (하느님 나라, 하늘나라). 하느님 나라를 보다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다스림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이는 영토적 개념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묵시작품에서 하느님 나라는 하나의 흐름이다. 그러나 예수는 하느님 나라가 미래의 도래할 것이 아니라 지금 도래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 하느님 나라는 예수의 희망이었고, 우리의 모든 희망적 단어를 하느님 나라로 표현했다. 제자 파견에 있어서도 하느님 나라가 중심이다.

    1) 하느님 나라에 대해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을 지적해야 한다.
    많은 이에게 하느님 나라는 천국의 개념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하늘은 분명 우주공간적 개념이 아니다. 그 밖의 스콜라 등 전통적 개념에서의 천당의 개념도 아니다. 예수에서의 하느님 나라는 이 지상의 실재이다.

    2) 용어의 의미에 있어 하느님 나라 (Βασιλε α)
    기능적 차원에서 다스림.왕권.통치권. 영토적 의미에서의 국가를 의미한다. 신학에서의 βασιλε α το  θεο  는 이 두 의미를 모두 담는다. 첫째로 하느님이 다스리고, 그 백성을 지칭한다.

    3) 예수 시대의 하느님 나라의 기다림의 형태를 볼 수 있다
    첫째로 정치적이고 메시아적 의미로서의 하느님 나라,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이방민족의 정치에 대응하는 정치세력으로 이해된다. 즉 하느님 나라는 피지배에서의 해방, 다윗의 후손에 의한 해방이었다. 이 새로운 통치자는 이민족을 축출하고 새로운 왕이 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방인 역시 이스라엘을 우러러 보는 것이다. 그처럼 하느님은 지상에 도유받은 왕에 의해 왕국을 건설하리라는 것이다 (젤롯당 등).
    둘째로 랍비는 하느님 나라를 윤리적 차원에서 이해한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잘못을 저지른 댓가로 현실을 이해한다. 따라서 하느님의 법을 지키면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진다. 여기서 랍비들은 인간에게 율법준수를 상당히 강조한다. 예수 시대에도 역시 그들은 백성들의 죄에 관심을 갖는다.
    세째로 이 세대가 전복되어 사라진 후의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이야기한다. 이 세대의 전복은 하느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하느님에 대한 맹종을 강조한다.

    4) 공관에 나타나는 하느님 나라의 내용
    하느님 나라의 표현은 주로 공관복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수는 이 표현으로 새로운 형태의 희망을 제시한다. 예수는 전혀 다른 형태를 희망으로 제시한다.
    첫째로 하느님 나라를 자신의 행위와 연결시킨다. Lk 11,20; 나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좇아내고 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또한 자신을 정치적 메시아로 이해하지 않으며, 또한 자신의 메시아성을 포기하지도 않는다 (빌라도의 심문). 특별히 예루살렘을 나귀타고 입성하는 장면을 정치적 메시아는 아닐지라도 자신이 메시아임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즉 예수는 메시아임에도 불구하고 소박하고 겸손한 봉사는 메시아이다.
    둘째로 예수의 하느님 나라는 랍비들의 기대와도 다르다. 1차적으로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 백성에게 주는 선물이다. 마르코 1,15에는 명령형과 서술형이 복합되어 있다.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서술형에 이어 멸령형이 나타난다. 하느님 나라가 선물임은 여러가지 비유(밭에 묻힌 보물 등)에서 보여진다. 바로 이런 기쁨에서 출발하여 새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도 이런 선물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윤리가 아니라).
    세째로 묵시주의자의 개념과도 다르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다.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는 무엇인가? 예수의 말에는 어떤 정의도 나타나 있지 않고, 주로 비유로만 나타난다. 이는 하느님 나라의 실재와 세상의 실재와 다르기 때문이고, 따라서 하느님 나라는 「-과 비슷하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하느님 나라의 개념은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역동적이다. 하느님 나라는 분명 체험할 수 있는 실재임을 암시한다. 그래서 구체적 내용보다는 「나를 따르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를 알기 위해서는 예수의 말과 행동을 알아야 한다. 예수는 벙어리에게 악의 세력이 있고 그것을 쫓아낼 때 하느님 나라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 예수는 누구인가? 요한의 제자가 예수에게 물었을 때 예수는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전하라」고 하신다. 이 설명(병자의 치유.죽음의 극복 등)속에서 하느님 나라의 내용을 볼 수 있다. 루가도 나자렛에서의 설교를 요약하는 부분에서 같은 설명을 한다 (갇힌자들의 해방.은총의 해;구약의 희년.성년; 레위 8,1-13). 다시 말해서 비인간화 된 인간이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을 보여준다. 구신약 모두 이 희망의 이미지를 이사야서에서 찾는다. 바로 예수로 말미암아 이사야가 말한 예언이 실현됨을 보여준다. 여기서 강조점이 변환된 것도 사실이다. 즉 이사야는 이방인에 대한 처벌이 함께 언급되지만, 예수의 하느님 나라에서는 이방인에 대한 보복이 나타나지 않는다. 공관에 나타난 예수의 설교는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병자의 치유로 집약될 수 있다. 병자의 치유 역시 하느님 나라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주의기도에서 청원의 핵심은 하느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다. 다른 것은 하느님 나라의 구체적 내용으로 소개된다. 그래서 그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다. 하느님을 아빠.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만큼 하느님을 우리에게 친밀하다. 이런 애정과 신뢰의 아버지이며 동시에 위대한 하느님이시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은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땅에 펼쳐지는 것이다. 즉 하느님과 인간의 상통과 인간과 인간, 인간과 하느님의 화해가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악에서 해방될 때 완전한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진다. 하느님의 가까움은 죄를 용서하는 가까움으로 나타난다. 병의 치유, 구마는 인간의 해방을 방해하는 모든 것에서의 해방이다. 예수의 활동 속에서 모든 불의가 종말을 고하고, 다시 말해 역사를 변화시키는 것은 사랑의 길임을 말한다. 하느님 나라의 전형적 상징 중 대표적인 것은 잔치의 비유이다. 이는 하느님 나라가 하느님과 함께 하는 친교.일치임을 나타낸다.

    5) 「이미」와 「아직 아니」
    신약성서에 의하면 하느님 나라는 단순히 미래의 것만이 아니다. 즉 그 분 안에서 전적으로 신뢰하는 인간의 그 분 안에서 하느님 나라가 발생한다. 신약성서를 자세히 보면 두가지를 볼 수 있다. “이미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Lk 11,20). 그러나 언제나 현재형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주의기도에서는 미래의 것으로 이야기된다. 예수에게서는 이 두가지가 모두 발견된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는 「이미」와 「아직」의 긴장관계를 지닌다. 사실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는 스콜라 신학에서 규정한 것처럼 마지막 사건은 아니다. 이에 대해 ‘그레사케’는 “많은 그리스도교적 희망은 현대에 맞는 것인데 이들의 공통점은 피안적이 아니고, 천국에 대한 진술이 이 세상의 역사를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즉 정의와 평화가 가득한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보편적 지배가 실현될 때 그 약속이 실현될 수 있다. 즉 보장된 미래가 현실속에서 난관을 이겨나가는 용기를 주는 것이다.
    하느님은 그 백성이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계속 행동하도록 격려하고 작용한다. 즉 피안에서 주어질 영원한 삶 만이 희망이 아니라, 바로 이곳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도 희망으로 나타난다. 하느님 나라는 그 완성이 미래에 있지만 지금에도 희망과 용기를 주는, 이미 시작된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하느님 나라라는 그리스도교적 희망이 단순히 선물이기에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이 아직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세상의 부분적인 개선이, 희망이 우리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소극적인 것으로 축소될 수 없고, 오직 하느님에의 희망에 달려 있는 것이다.

    6) 이세상(차안)과 저세상(피안)
    하느님 나라는 젤롯당에서 처럼 이세상 안에서의 구원의 기다림으로 축소할 수 없고 랍비들처럼 율법준수에 의한 이세상의 희망으로 축소할 수도 없다. 하느님의 용서와 그리스도의 부활에 따른 죽은 자들의 부활은 이세상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또한 하느님의 다스림은 전적으로 피안의 것만은 아니다. 성서에 의하면 하느님 나라는 예수의 행동(질병치유.소외된 자의 해방.많은 벽들의 해소 등)에서 보여지는 것 같이 차안의 신화적 조건과 무관하지도 않다.

    7)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선물
    예수는 하느님 나라로 청중들이 완성을 이룰 수 있는 것으로 소개하지 않는다. 동시에 다가올 하느님 나라에 맞갖는 준비를 요구한다 (용서.화해.사랑.도움.복음선포.회개의 촉구 등). 이처럼 하느님 나라는 인간에게 수동적이지만은 않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하느님 나라가 하느님의 선물임을 좌시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주도권은 항상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8) 계약 사상과 하느님 나라의 대조
    하느님 나라에서 옛 계약이 모두 포괄되어 있고, 확장.수정되어 있다. 옛 계약에서는 땅.나라에 대한 희망이 계약의 궤, 성전등에 나타난다. 이제 이런 희망은 예수안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즉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인격화, 다른 인간들에 대한 약속이 된다. 구약에서 처럼 하느님 나라로 표현되는 종말론적 신앙은 역사를 근거로 한다. 마찬가지로 신약의 근거는 예수의 부활체험이다. 또 구약에서 처럼 신약성서에서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선물이면서 백성을 행동에로 초대한다. 구약의 약속은 후손의 번성인 반면 신약의 희망은 죽음을 넘어서 죽은 자들의 부활이다. 다른 점은 구약의 계약은 국수적 성격을 띤다. 그러나 신약의 하느님 나라는 모든 이의 구원을 다룬다. 결코 예수의 설교에서 이방인에 대한 심판과 보복을 찾아볼 수 없다 (보편적 구원의 메시지).

    9) 묵시적 희망과 하느님 나라의 희망의 대조점
    묵시적 희망은 하느님의 활동과 승리가 끝난 다음에 비로소 도래하는 것인 반면에, 하느님 나라는 현재와 미래의 긴장관계 안에 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묵시적 희망의 이원론이 거부되고, 낙관적이고 개방적이다.
    복음 안에서의 하느님 나라는 바오로에서 「그리스도의 나라」로서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넘어간다.

guest에 답글 남기기 응답 취소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