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스라엘의 창조신앙-(차)

3.4 골로사이서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시며, 만물에 앞서 태어나신 분이십니다. 그 것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 곧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왕권과 주권과 권세와 세력의 여려 천신들과 같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모두 그분을 통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만물은 그분을 통해서, 그리고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읍니다. 그분은 만물보다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속합니다. 그리스도는 또한 당신의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의 시작이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최초의 분이시며 만물의 으뜸이 되셨읍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완전한 본질을 그리스도에게 기꺼이 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하늘과 땅의 만물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셨읍니다. 곧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로써 평화를 이룩하셨읍니다”(골로 1,15-20).
이것은 골로사이서의 유명한 그리스도 찬미가 이다. 이문헌이 나오게 된 배경으로는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과 생활방식에 대한 그노시스(영지주의)에 대항하여 나온 것이다. 영지주의는 이 세상의 불확실성을 풀이하고 찿기 위하여 빛과 어두움을 원초적인 두개의 세력으로 전제하고, 이들이 서로 혼합되어 있으며 최종적 구원은 이들의 완전한 분리에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그리고 이런한 분리는 한 구속자를 통해서 이루어지며, 이 구속자는 자신이 구원되며 동시에 남들도 함께 구원한다고 한다. 즉, 구원이란 물질적 세계에서 분리되어 나오는데 있다는 것이다. 이를 거슬러 골로새서 1,15-20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명칭이 분명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의 명칭이 신성과 인간성을, 우주론적이면서도 구원론적으로 뒤섞여 애매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찬미가는 그리스도교-헬레니즘적 공동체에서 생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 찬미가는 창조설화(창 1,26)와 유다교의 지혜문학,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Philo의 관념의 영향을 모두 받고 있다. 이 찬미가는 두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부분은 15-17으로서 창조주로서의 그리스도의 기능을 찬미하고 있다. 둘째부분은 18-20로서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의 기능을 찬미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형상’이고 ‘맨 처음 탄생된 분’이시다. 이 사실에서부터 우주를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권세의 위치가 드러난다. 이 두가지 명칭들이 지니는 의미는 논란이 되고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철학자인 Philo는 하느님의 모상, 형상이라는 말을, 인간이 아무리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하지만, 인간이 곧 직접적인 하느님의 형상이 된 것은 아니고 인간은 다만 하느님의 형상자체이신 로고스의 모상이라는 것이다. 또 니콜라우스 켈과같은 학자는 인간이신 그리스도가 우주안에서 현존화하고 있는 하느님의 계시의 상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맨 처음 탄생되신 분”이라는 귀절도 더욱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말은 글자 그대로 ‘처음으로 태어나신 분“, 즉 자연적인 첫 출생(루까 2,7; 마태 1,25; 히브 11,28)을 의미한다.그러나 비유적인 의미, 파생적인 의미도 지니고 있다. 1,18에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최초로 살아나신 분‘, 다시말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처음으로 부활하신 분’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는 죽은 나자로를 살리셨고, 나인의 어떤 과부의 아들도 살려주셨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도 살리셨다. 그러나 그들의 소생과 예수의 부활은 전적으로 다르다. 그들의 소생은 다시 죽음을 맞이하였지만, 예수의 부활은 다시는 죽음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부활은 첫번째가 된다. 세번째로 이 명칭은 그리스도의 선재, 즉 그의 신성을 의미하고 있다. 예컨대 유스티누스는 protokos라는 명칭으로 이해하고 ‘모든 창조가 이루어지기 전에 맨 처음 탄생된 분”으로 이해하고 있다. 다시말해서 1)자연적인 출생으로서 첫번째, 2) 부활의 의미로서 첫번째, 3) 선재의 의미로서 첫번째로 출생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창조론과 관련해서 세번째 입장에 대해서 논해볼 수 있다. 16장 첫부분에서는 이 명칭이 선재하는 로고스와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여기서 그리스도는 명백하게 창조주의 편에 서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에게만 고유한 창조적 능력이 그리스도에게 부여 되어있다.
시제를 유심히 관찰하면 15절은 현재요, 16절은 과거다, 반대로 18절은 과거(aorist)시제요, 19절은 현재시제다. 다시말해 이 찬미가가 불러지는 지금 현양된 분으로 존재하면서도 시작이며 형상이고 또한 맨 처음 태어나신 분으로 나타나 있다. 이러한 그리스도에 대한 찬미는 그분이 창조 역사에 있어서 이미 시초부터 비가시적인 하느님을 가시적이게 하였기 때문이다. 16절의 과거시제가 보여주듯이 여기서 찬미가의 주체는 육화하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선재하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이다.
또 한가지 볼수 있는 것은 창조를 능가하는 그리스도의 우위성과 입장이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가 구원자로 찬미받게 되는 근거를 발견한다. 그리스도가 구원자가 되신다는 것은 로마서 8,29-32의 내용에서도 볼 수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택하신 사람들이 당신의 아들과 같은 모습을 가지도록 미리 정하셨으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형제중에서 맏아들이 되셨읍니다…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느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이든지 다 주시지 않겠읍니까?” 물론 로마서의 이 구절은 순전히 구원론적 측면만을 언급하고 있지만, 골로새서는 구원론적 측면을 도외시하지 않으면서 우주적 차원, 창조적측면도 언급하고 있다. 1,15에의하면 그리스도는 본질과 출신에 있어서 하느님과 똑같다. 여기에서 다른 결론들이 나온다. 그리스도는 ‘안에서(en)’, ‘통해서(dia)’, ‘향해서(eis)’라는 전치사로 삼중적인 창조의 활동을 묘사한다.
philo의 로고스에 관한 이론에서 이와 비슷한 진술을 하고있다. 필로는 일관성있게 다루고 있지 않기때문에 그 의미가 애매모호하다. 필로에게 로고스는 우선 “창조적인 힘”으로서, 어떤 때는 독자적인 존재로, 또 어떤 때는 다만 하나의 능력으로 표현되고 있다. 필로의 로고스 사변에 대한 기본 귀절은 창세기 1,27이다. 여기서 그는 인간의 원형으로서 하느님의 모상을 들고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 모상이 곧 로고스이다. 이 로고스는 순전한 개념적인 것만이 아니라 생산적 능력을 지닌 힘이요, 하느님의 기관(organon)이다. 이 로고스는 하느님처럼 창조되지 않은 것도 아니요, 인간처럼 창조된 것도 아니다. 이 양자사이에서 중보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로고스는 중보자 로고스다. 이것은 ‘하느님이 인간을 당신의 지혜안에서 창조했다고 말하는 지혜서 9,2의 영향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플라톤적 사고체계에 더많이 영향을 받고 있다.
지혜서가 하느님이 전적으로 지혜안에 현존함을 강조하는데 비해, 필로는 로고스를 하급의 하느님, 제 2의 하느님으로 표시하고 있다. 그의 이론으로 보여지는 ꡔ창세기론ꡕ 2,62에서 “죽어야 하는 모든 것은 지존하시며 동시에 만물의 아버지 이신 그분을 따르는 모상이 될 수 없고, 오직 제 2의 하느님이신 그분의 로고스를 따라 이루어진 모상이다. 여기에는 원형과 모상사이에 어떤 간격이 있다.
바오로가 이와같은 로고스의 개념을 알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바오는 이 로고스의 개념을 셜게자와 중보자가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명백한 진술을 함으로써 한 단계 들어 올린다. “안에서”라는 전치사는 바오로가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빈번하게 사용하는 전치사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그리스도인이 참으로 그리스도인 답다는 것을 표현하는 바오로의방식이다. 다시말해 그리스도인 주님과 함께하는 은총의 공동체안에 내포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창조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가 모든 조물의 기반이요, 생명의 원천이라는 말이다.
필로가 순수한 정신인 하느님이 어떻게 물질적이고 순수하지 못한 세계를 존재하게 하셨는가 질문하는데 비해서, 바오로는 하느님이 이세계와 더불어 무엇을 하고자 하시는가 하는 질문에 촛점을 두고 있다. 바오로는 만물이 그분을 통해서, 그분을 향해서 창조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가 선재하는 하느님의 아들로 이해하고 있다.
희랍어 전치사 en이 히브리어에서는 (be) 도구적인 의미를 지닌다고하는데, 희랍어 dia라는 말에서도 우리말에서처럼 도구적인 어조를 띠고 있다손 치더라도 그리스도가 단순히 성부의 도구로써 작용하고있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더 말하자면, 어떤 효능을 지닌 원인으로서도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성부와 성자가 동일시되고 있지는 않다. 성자는 성부의 형상이지, 성부는 분명히 아니다.
그리고 아울러 만물은 그리스도를 향하여서도 창조된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바오로 문헌에서 자주 모든 만물이 성부를 향하여 있다고 언급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골로사이서는 그리스도가 창조의 목표로 언급되고 있다.
결국 골로사이서의 그리스도 찬미가에서 그리스도는 창조의 효능적 원인이요, 또한 목적인이이라는 것을 표현하고있다. 말하자면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창조론적으로, 그리고 구원론적으로 다루고 있다. 또 신약성서의기본입장인 종말론적인 전망에서도 다루고 있다. 종말론적인 입장은 ‘화해시키다“라는 개념에서 찿아볼 수 있다. 더욱 분명한 종말론적 입장을 로마서 8,19-22에서 볼 수있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읍니다. 피조물이 제 구실을 못하게 된 것은 제 본의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희망이 있읍니다. 곧 피조물에게도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읍니다“.
종합하자면, 그리스도의 창조작업은 그의 구원작업 안에서 완성된다. 구원으로서의 창조의 완성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평화의 설정을 통하여 성취된다. 이 평화의 설정은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맨 처음으로 탄생한 분이 되고 인간으로서 만물보다 윗자리에 있게 하는 부활 속에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리스도를 성부와 분리하지 않고 있다. 바오로에게 그리스도 중심성은 바로 하느님 중심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예수 안에 신적 영광과 은총의 충만이 거처하도록 한 것은 바로 하느님의 구원 결정인 것이다. 따라서 이 그리스도 찬미가는 하느님이 등장하고 있지 않지만, 역시 하느님이 이 찬미의 주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찬미가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전반부는 창조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고, 후반부에서는 구원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창조와 구원을 이야기 하는 연결부분으로서 인간의 타락이 빠져있다. 여기에 대한 해명은 첫째로 초기 그리스도교회는 생생하게 체험된 부활한 그리스도 사건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초대교회가 역사를 객관화 해서 전체적으로 조망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며, 이 부활 사건을 중심으로 하느님의 위업을 찬미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두번째 해명은 이 찬미가가 제기하는 결정적인 문제는 누가 또 무엇이 화해되는가 하는 물음이 아니라 누가 화해자인가 하는 물음이었고,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상활을 위해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미 그들은 세상의 세력과 인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느님을 거슬러 행동하고 반항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께는 화해를 필요로하고, 화해될 수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전제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며, 창조의 원초적 토대이다. 유대인은 즉시 여기서 지혜를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시초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근본적인 근원으로서 게시는 분이다. 여기서 잠언 8장의 지혜를 능가한다. 즉,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향하여 창조된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과 한 분이요, 만유의 근본이며, 창조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창조되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창조에 앞서 태어나신 분이다. 에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의 시발점이며, 그를 통해서 만물이 자기의 시발점을 갖게 되는 것이다. 아울러 모든 영지주의를 반대하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이다.
찬미가의 후반부의 내용은 “그분이 누구냐”라는 것이다 그분은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창조를 지탱해 나가는 근본 토대이기 때문에 그분의 구원 사업이 이 세상으로부터 탈피해 나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상처받은 세계를 고쳐 주는 것이며, 화해와 평화를 이 세상에 가져다 주는 데 있다. 이 사업은 십자가을 통해서 일어나며, 십자가는 우주적 차원의 성격을 띠게 되는 것 이다. 이미 주님, kyrios라는 명칭자체가 사람의 아들을 기다리던 당시 사람들의 구원에 대한 갈망을 채워 주시는 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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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uest 님의 말:

    3.4 골로사이서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시며, 만물에 앞서 태어나신 분이십니다. 그 것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 곧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왕권과 주권과 권세와 세력의 여려 천신들과 같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모두 그분을 통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만물은 그분을 통해서, 그리고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읍니다. 그분은 만물보다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속합니다. 그리스도는 또한 당신의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의 시작이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최초의 분이시며 만물의 으뜸이 되셨읍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완전한 본질을 그리스도에게 기꺼이 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하늘과 땅의 만물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셨읍니다. 곧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로써 평화를 이룩하셨읍니다”(골로 1,15-20).
    이것은 골로사이서의 유명한 그리스도 찬미가 이다. 이문헌이 나오게 된 배경으로는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과 생활방식에 대한 그노시스(영지주의)에 대항하여 나온 것이다. 영지주의는 이 세상의 불확실성을 풀이하고 찿기 위하여 빛과 어두움을 원초적인 두개의 세력으로 전제하고, 이들이 서로 혼합되어 있으며 최종적 구원은 이들의 완전한 분리에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그리고 이런한 분리는 한 구속자를 통해서 이루어지며, 이 구속자는 자신이 구원되며 동시에 남들도 함께 구원한다고 한다. 즉, 구원이란 물질적 세계에서 분리되어 나오는데 있다는 것이다. 이를 거슬러 골로새서 1,15-20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명칭이 분명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의 명칭이 신성과 인간성을, 우주론적이면서도 구원론적으로 뒤섞여 애매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찬미가는 그리스도교-헬레니즘적 공동체에서 생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 찬미가는 창조설화(창 1,26)와 유다교의 지혜문학,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Philo의 관념의 영향을 모두 받고 있다. 이 찬미가는 두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부분은 15-17으로서 창조주로서의 그리스도의 기능을 찬미하고 있다. 둘째부분은 18-20로서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의 기능을 찬미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형상’이고 ‘맨 처음 탄생된 분’이시다. 이 사실에서부터 우주를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권세의 위치가 드러난다. 이 두가지 명칭들이 지니는 의미는 논란이 되고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철학자인 Philo는 하느님의 모상, 형상이라는 말을, 인간이 아무리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하지만, 인간이 곧 직접적인 하느님의 형상이 된 것은 아니고 인간은 다만 하느님의 형상자체이신 로고스의 모상이라는 것이다. 또 니콜라우스 켈과같은 학자는 인간이신 그리스도가 우주안에서 현존화하고 있는 하느님의 계시의 상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맨 처음 탄생되신 분”이라는 귀절도 더욱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말은 글자 그대로 ‘처음으로 태어나신 분“, 즉 자연적인 첫 출생(루까 2,7; 마태 1,25; 히브 11,28)을 의미한다.그러나 비유적인 의미, 파생적인 의미도 지니고 있다. 1,18에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최초로 살아나신 분‘, 다시말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처음으로 부활하신 분’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는 죽은 나자로를 살리셨고, 나인의 어떤 과부의 아들도 살려주셨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도 살리셨다. 그러나 그들의 소생과 예수의 부활은 전적으로 다르다. 그들의 소생은 다시 죽음을 맞이하였지만, 예수의 부활은 다시는 죽음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부활은 첫번째가 된다. 세번째로 이 명칭은 그리스도의 선재, 즉 그의 신성을 의미하고 있다. 예컨대 유스티누스는 protokos라는 명칭으로 이해하고 ‘모든 창조가 이루어지기 전에 맨 처음 탄생된 분”으로 이해하고 있다. 다시말해서 1)자연적인 출생으로서 첫번째, 2) 부활의 의미로서 첫번째, 3) 선재의 의미로서 첫번째로 출생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창조론과 관련해서 세번째 입장에 대해서 논해볼 수 있다. 16장 첫부분에서는 이 명칭이 선재하는 로고스와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여기서 그리스도는 명백하게 창조주의 편에 서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에게만 고유한 창조적 능력이 그리스도에게 부여 되어있다.
    시제를 유심히 관찰하면 15절은 현재요, 16절은 과거다, 반대로 18절은 과거(aorist)시제요, 19절은 현재시제다. 다시말해 이 찬미가가 불러지는 지금 현양된 분으로 존재하면서도 시작이며 형상이고 또한 맨 처음 태어나신 분으로 나타나 있다. 이러한 그리스도에 대한 찬미는 그분이 창조 역사에 있어서 이미 시초부터 비가시적인 하느님을 가시적이게 하였기 때문이다. 16절의 과거시제가 보여주듯이 여기서 찬미가의 주체는 육화하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선재하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이다.
    또 한가지 볼수 있는 것은 창조를 능가하는 그리스도의 우위성과 입장이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가 구원자로 찬미받게 되는 근거를 발견한다. 그리스도가 구원자가 되신다는 것은 로마서 8,29-32의 내용에서도 볼 수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택하신 사람들이 당신의 아들과 같은 모습을 가지도록 미리 정하셨으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형제중에서 맏아들이 되셨읍니다…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느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이든지 다 주시지 않겠읍니까?” 물론 로마서의 이 구절은 순전히 구원론적 측면만을 언급하고 있지만, 골로새서는 구원론적 측면을 도외시하지 않으면서 우주적 차원, 창조적측면도 언급하고 있다. 1,15에의하면 그리스도는 본질과 출신에 있어서 하느님과 똑같다. 여기에서 다른 결론들이 나온다. 그리스도는 ‘안에서(en)’, ‘통해서(dia)’, ‘향해서(eis)’라는 전치사로 삼중적인 창조의 활동을 묘사한다.
    philo의 로고스에 관한 이론에서 이와 비슷한 진술을 하고있다. 필로는 일관성있게 다루고 있지 않기때문에 그 의미가 애매모호하다. 필로에게 로고스는 우선 “창조적인 힘”으로서, 어떤 때는 독자적인 존재로, 또 어떤 때는 다만 하나의 능력으로 표현되고 있다. 필로의 로고스 사변에 대한 기본 귀절은 창세기 1,27이다. 여기서 그는 인간의 원형으로서 하느님의 모상을 들고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 모상이 곧 로고스이다. 이 로고스는 순전한 개념적인 것만이 아니라 생산적 능력을 지닌 힘이요, 하느님의 기관(organon)이다. 이 로고스는 하느님처럼 창조되지 않은 것도 아니요, 인간처럼 창조된 것도 아니다. 이 양자사이에서 중보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로고스는 중보자 로고스다. 이것은 ‘하느님이 인간을 당신의 지혜안에서 창조했다고 말하는 지혜서 9,2의 영향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플라톤적 사고체계에 더많이 영향을 받고 있다.
    지혜서가 하느님이 전적으로 지혜안에 현존함을 강조하는데 비해, 필로는 로고스를 하급의 하느님, 제 2의 하느님으로 표시하고 있다. 그의 이론으로 보여지는 ꡔ창세기론ꡕ 2,62에서 “죽어야 하는 모든 것은 지존하시며 동시에 만물의 아버지 이신 그분을 따르는 모상이 될 수 없고, 오직 제 2의 하느님이신 그분의 로고스를 따라 이루어진 모상이다. 여기에는 원형과 모상사이에 어떤 간격이 있다.
    바오로가 이와같은 로고스의 개념을 알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바오는 이 로고스의 개념을 셜게자와 중보자가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명백한 진술을 함으로써 한 단계 들어 올린다. “안에서”라는 전치사는 바오로가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빈번하게 사용하는 전치사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그리스도인이 참으로 그리스도인 답다는 것을 표현하는 바오로의방식이다. 다시말해 그리스도인 주님과 함께하는 은총의 공동체안에 내포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창조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가 모든 조물의 기반이요, 생명의 원천이라는 말이다.
    필로가 순수한 정신인 하느님이 어떻게 물질적이고 순수하지 못한 세계를 존재하게 하셨는가 질문하는데 비해서, 바오로는 하느님이 이세계와 더불어 무엇을 하고자 하시는가 하는 질문에 촛점을 두고 있다. 바오로는 만물이 그분을 통해서, 그분을 향해서 창조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가 선재하는 하느님의 아들로 이해하고 있다.
    희랍어 전치사 en이 히브리어에서는 (be) 도구적인 의미를 지닌다고하는데, 희랍어 dia라는 말에서도 우리말에서처럼 도구적인 어조를 띠고 있다손 치더라도 그리스도가 단순히 성부의 도구로써 작용하고있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더 말하자면, 어떤 효능을 지닌 원인으로서도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성부와 성자가 동일시되고 있지는 않다. 성자는 성부의 형상이지, 성부는 분명히 아니다.
    그리고 아울러 만물은 그리스도를 향하여서도 창조된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바오로 문헌에서 자주 모든 만물이 성부를 향하여 있다고 언급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골로사이서는 그리스도가 창조의 목표로 언급되고 있다.
    결국 골로사이서의 그리스도 찬미가에서 그리스도는 창조의 효능적 원인이요, 또한 목적인이이라는 것을 표현하고있다. 말하자면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창조론적으로, 그리고 구원론적으로 다루고 있다. 또 신약성서의기본입장인 종말론적인 전망에서도 다루고 있다. 종말론적인 입장은 ‘화해시키다“라는 개념에서 찿아볼 수 있다. 더욱 분명한 종말론적 입장을 로마서 8,19-22에서 볼 수있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읍니다. 피조물이 제 구실을 못하게 된 것은 제 본의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희망이 있읍니다. 곧 피조물에게도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읍니다“.
    종합하자면, 그리스도의 창조작업은 그의 구원작업 안에서 완성된다. 구원으로서의 창조의 완성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평화의 설정을 통하여 성취된다. 이 평화의 설정은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맨 처음으로 탄생한 분이 되고 인간으로서 만물보다 윗자리에 있게 하는 부활 속에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리스도를 성부와 분리하지 않고 있다. 바오로에게 그리스도 중심성은 바로 하느님 중심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예수 안에 신적 영광과 은총의 충만이 거처하도록 한 것은 바로 하느님의 구원 결정인 것이다. 따라서 이 그리스도 찬미가는 하느님이 등장하고 있지 않지만, 역시 하느님이 이 찬미의 주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찬미가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전반부는 창조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고, 후반부에서는 구원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창조와 구원을 이야기 하는 연결부분으로서 인간의 타락이 빠져있다. 여기에 대한 해명은 첫째로 초기 그리스도교회는 생생하게 체험된 부활한 그리스도 사건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초대교회가 역사를 객관화 해서 전체적으로 조망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며, 이 부활 사건을 중심으로 하느님의 위업을 찬미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두번째 해명은 이 찬미가가 제기하는 결정적인 문제는 누가 또 무엇이 화해되는가 하는 물음이 아니라 누가 화해자인가 하는 물음이었고,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상활을 위해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미 그들은 세상의 세력과 인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느님을 거슬러 행동하고 반항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께는 화해를 필요로하고, 화해될 수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전제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며, 창조의 원초적 토대이다. 유대인은 즉시 여기서 지혜를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시초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근본적인 근원으로서 게시는 분이다. 여기서 잠언 8장의 지혜를 능가한다. 즉,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향하여 창조된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과 한 분이요, 만유의 근본이며, 창조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창조되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창조에 앞서 태어나신 분이다. 에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의 시발점이며, 그를 통해서 만물이 자기의 시발점을 갖게 되는 것이다. 아울러 모든 영지주의를 반대하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이다.
    찬미가의 후반부의 내용은 “그분이 누구냐”라는 것이다 그분은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창조를 지탱해 나가는 근본 토대이기 때문에 그분의 구원 사업이 이 세상으로부터 탈피해 나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상처받은 세계를 고쳐 주는 것이며, 화해와 평화를 이 세상에 가져다 주는 데 있다. 이 사업은 십자가을 통해서 일어나며, 십자가는 우주적 차원의 성격을 띠게 되는 것 이다. 이미 주님, kyrios라는 명칭자체가 사람의 아들을 기다리던 당시 사람들의 구원에 대한 갈망을 채워 주시는 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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