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성서안에서의 종말론적 근거-(다)

5. 죽은 자들의 부활

많은 이들이 죽음 이후의 삶을 받아들인다. 그리스도교 역시 사후의 삶이 그리스도적 희망의 내용이다. 그런데 단순히 사후의 삶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는 다른 차원이다. 유대인 역시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해서는 당황스러워한다. 구약성서 안에서 부활 사상은 거의 찾아보지 못한다. 그러나 구약에도 역시 이런 사상은 있다. 예수의 설교에서도 죽은 이의 부활이 설교의 중심은 아니다.
이스라엘 신앙의 역사는 희망의 역사였고, 오랫동안 죽은 이의 부활을 겨냥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죽음 안에서 하느님의 능력을? 이스라엘 안에서 죽음 이후의 실존에 대해서는 미약했고, 일종의 無로 보았다 (셰올).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죽음 건너편의 희망을 가진다. 이는 하느님과의 약속으로 땅을 차지하고, 자손을 번성하고, 하느님의 보호를 받는 등등에 의해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 48장의 야곱의 축복에는 죽음을 넘어서의 희망을 보여준다. 즉 야곱은 신앙을 지닌 채 죽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던 것은 선조의 약속이 후손에게서 이루어 짐을 보았다. 즉 점점 더 확장되는 것이다. 결국 야곱은 충만한 희망을 느끼면서 죽었다. 그의 희망은 부족에 대한 희망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사후 문제는 생각하지 않는다. 즉 아곱의 운명은 그 후손들이었다. 그러므로 죽은 후에도 후손 안에서 계속 살아가는 것이다 (형이 대를 못 잇고 죽었을 경우 그 아내를 동생이 차지하는 것). 그러므로 자손 없이 죽는 것은 희망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상당히 후대에야 정치적 희망이 생긴다. 그것은 불의.절망의 체험을 통해 일어난다. 이제 의인이 장수하는 것도 아니고 더 복을 받는 것도 아니다. 즉 각자의 행복은 각자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 붕괴된다. 특히 2c경 이방인의 지배를 받으면서 그것은 더욱 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믿으려는 노력이 보인다. 이런 신앙은 어디에서 나오고 그 보상은 무엇인가? 여기에서 죽음도 넘어서는 희망이 나타난다. 이 같은 고통스런 체험을 통해 부활에 대한 신앙이 싹튼다.

1) 마카베오 下권
죽은 이의 부활, 죽은 이의 기도의 의미등이 나타난다.
7장 어머니와 일곱아들의 순교 ; 율법을 어기기 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 이는 하느님의 성실성을 믿는 것에, 부활에 대한 희망에 근거한다. 무엇보다 하느님의 성실성, 초월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부활에 대한 희망은 단지 의인들만의 부활을 이야기한다.
12장 전쟁이후 죽은 자를 묻은 이야기 ; 죽은 자의 몸에서 부적이 나오는데, 마카베오는 이를 속죄하기 위해 돈을 예루살렘으로 보내 속죄 제사를 드린다. “그가 이와 같이 숭고한 일을 한 것은 부활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가 전사자들이 부활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죽은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허사이고 무의미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는 유다 마카베오는 부활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은 그 희망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2) 다니엘서
12장 ; “티끌로 돌아갔던 대중이 잠에서 깨어나 영원히 사는 이가 있는가 하면 영원한 모욕과 수치를 받을 사람도 있으리라”(2절). 선한 이나 악한 이나 모두 부활한다. 그리고 묵시적 문학에서 부활에 대한 희망이 발달되어 나타난다. 그 배경은 재난이다. 그러면서 죽은 자들의 부활을 이야기한다. 이 마지막 시기에도 죽은 자의 삶을 인식한다. 즉 모두가 심판받기 위하여 모여야 한다는 사상을 지닌다. 육신도 변화하여 착한 자와 악한 자의 모습이 다르게 나타난다. 묵시문학은 두가지로 나뉘는데, ①의인.악인 모두 부활한다. ②의인만이 부활한다

3) 예수 시대
죽은 이의 부활을 믿는 이와 믿지 않는 이들의 대결이 나타난다 (Mk 12,18-27). 바오로도 사도행전에서 바리사이와 사두가이의 논쟁을 이용한다 (Acts 23장). 그러므로 이미 예수 이전에도 부활사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 공관 복음
Mk 12,18-27 ; 예수는 부활을 이야기했고, 모든 이의 부활을 이야기한다. 사두가이파는 자신들의 근거를 구약에 두면서 주장을 편다. 즉 모세 율법을 받아들이면 부활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의 논리는 죽은 이의 부활을 이 세상 삶의 연속으로 이해한다. 예수는 이를 꼬집어 새로운 방식으로서의 삶을 이야기한다. 이는 당시 묵시문학의 이야기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예수가 천사의 예를 든 것은 영생을 이야기하기 위함이다.
한편 예수는 사두가이가 성서를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이사악의 하느님이요, 야곱의 하느님이다’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이라는 뜻이다”(Mk 12,26). 여기에서 신앙의 새로운 측면이 나타난다. 하느님은 선조들을 죽음의 상태로 버려 두시지는 않는다. 이로써 그 대목이 새로운 해석을 얻게 된다.
결론적으로 예수에게 죽은 이들의 부활의 근거는 하느님의 권능과 하느님에 대한 성실성의 신앙에 근거하고, 부활은 지상의 삶의 단순한 연속이 아니다.
신뢰와 사랑안에서의 삶은 새 삶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공관안에서 흔히 죽은 이들의 치유와 결부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열 두 제자의 파견에도 죽은이를 살리라는 명령과 함께 병든이의 치유가 포함된다. 이 모든 것은 복음서 저자에게 하느님 나라로 요약된다.즉 죽음에서의 해방은 하느님 나라의 한 가지 내용이다.

5)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바오로의 입장
바오로는 부활에 대해 상당히 친숙해 있다. 그의 초기 설교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재림이고 점차오 예수의 부활로 그 중심이 넘어간다. 이의계기는 데살로니카 공동체에서의 많은 이의 죽음을 경험하고, 고린토 공동체에서 부활을 비역사적인 것으로 보고, 영지사상이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1데살 ; 많은 이들이 죽음을 당했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희망과 달리 재림에 앞서 많은 이들의 죽음을 먼저 체험한다. 여기서 바오로는 죽은 이들의 그리스도의 재림에 있어 더 불리한 여건에 있지 않음을 말한다. 즉 죽은 이들 역시 재림하신 주님을 만나게 된다. 이런 면에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점점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바오로에 있어 부활에 대한 증거는 예수의 삶과 죽음, 부활에 있다. 따라서 우리 역시 예수의 부활에 동참하는 것이다.
고린토서 ; 고린토 공동체는 예수의 부활을 고백하면서도 죽은 이들의 부활을 인정치 않는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구원을 현재적인 것에 강조점을 두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비역사적인 것으로 본다. 즉 예수의 부활 자체보다는 그것이 자신들에게 어떻게 나타나는가가 더 중요했다. 물론 바오로 역시 이 차원을 경시하지 않으면서 모든 인간의 전인적 구원을 본질 부분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그는 예수의 부활을 강조하고, 죽은 자들의 부활을 거부할 수 없음을 가르친다. 바오로는 예수의 부활이 죽은 자들의 부활의 증명이 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의 역사를 열어주는 것이다. “먼저 그리스도가 살아나고….”(1고 15,24-26). 죽음으로부터 부활한 육체는 도일성을 지니면서도다르게, 불변적으로 나타난다 (1고 15,53-54).
2고린 4,3-4 ; “지금 육신의 ….”
죽음의 구체적 체험을 맞은 바오로는 죽은 이의 부활을 성찰한다.그는 구원의 역사성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하느님 다스림의 완성은 예수의 재림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하느님의 다스림은 죽은 이의 부활을 믿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6. 심 판

심판 신앙 역시 그리스도의 재림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1) 이스라엘이 어려울 때 찾은 것은 언제나 하느님이었다.
하느님 앞에는 모든 것이 노출되어 있고 하느님만이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 구약에서는 율법을 지킬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상선벌악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2) 「야훼의 날」에 대한 희망
그러나 하느님의 정의에 대해 색다른 체험(이방인의 지배, 의인의 고통,죽음 등)을 하면서 이제 상선벌악은 현재가 아니라 ‘야훼의 날’에 대한 희망속에서 나타난다. 물론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원수 뿐 아니라 이스라엘 자체도 심판하신다. 그 목적은 파멸이나 영원한 고통은 아니다. 야훼의 날에 대한 희망은 구원에 대한 희망이고,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에 대한 희망이다. 즉 야훼의 날에는 단죄보다는 정화가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 이는 역사에서 이루어질 사건(전쟁, 지배…)으로 간주되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이 새로와 질 것을 선호하신 까닭에 역사가 다시 올바른 길로 가도록 경고하는 것이다.

3) 신약에서는 하느님 나라가 묵시적 기다림을 배경으로 선포된다.
예수에 있어서도 묵시적 상징이 주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이런 위협의 근본적 동기는 외경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는 초대가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해 완벽하게 느끼라는 초대이다. 이런 초대, 부르심은 결단의 상황에로 이끈다. 이를 거부하는 이는 하느님 나라에서 배제된다. 하느님의 심판이 가져왔다는 자각은 해방적 성격을 지니고, 이 세상에서의 자유를 보장해 주는 것이다.

4)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관이다.
이는 모든 사도들의 강론의 핵심이다. 모든 종말론적 선언들은 마지막의 사건에 대한 단순한 정보제공이다. 이는 역사안에서 우리가 취해야 하는 결단의 기준으로, 희망으로 다루어진다. 예수가 심판관이란 의미는 ①마지막이 예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고, 예수가 의도하고 예수가 설계했던 나리이다. ②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을 성공으로, 혹은 실패로 이끄느냐의 결정적 기준이 된다. 그 분을 수락, 거부하는 거슨 구체적 행동에서이다. 여기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람이 하나가 됨을 의미한다. ③희망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행위 자체를 의미한다. 즉 우리에게 상을 주는 분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역사 안에서의 체험을 통해 얻어 낸 결실이라는 것이다. 최후 심판관으로서의 예수의 모습도 역사안에서의 예수에 대한 체험을 통한 희망이다.

5) 현재와 미래의 긴장관계
심판은 이미 현재의 결단적 행위 안에서 발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적 전망을 그대로 보존한다 (Jn 12,48).

6) 전통 신학의 심판 이해
꠆ꠏꠏ 공심판 ; 모두가, 영혼 육신 모두가 심판 받는다.
ꠌꠏꠏ 사심판 ; 죽은 후에 영혼만이 심판 받는다.
그러나 성서에는 이러한 이해가 나타나지 않는다. 신약성서는 공심판과 동시에 개인에 대한 상벌이 이루어질 것을 보여준다 (Rom 6,6). 그러나 전통신학에서 말하는 개념과 같은 것은 아니다. 공사심판의 개념은 교부들에 의해서 발전되어 왔다.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개별적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고, 그렇다면 사심판과 공심판 사이의 공백이 문제가 된다. 그래서 교부들은 죽음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사심판과 공심파의 차이를 말한다. 이제 초기의 공심판에 대한 신앙은 사심판으로 이어지고 이는 순교자에 대한 공경으로 나타난다. 중세기에 이르러는 오히려 사심판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진다. K.라너나 그레사키 같은 학자는 사공심판이 시대의 조루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본다. 사심판과 공심판을 인정하면 ①인간의 영육의 결합을 인정하고 ②죽음을 통해 영육이 분리됨을 인정해야 한다. ③그러나 인간이 두번 심판받는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즉 공심판 자체나 사심판이 될 수 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공심판은 한 가지의 두 가지 측면이다.

7) 하느님의 다스림이 모든 인간의 구원의 대상인가?
역사가 환경조건에서 구별되고, 하느님의 다스림이 드러날 것인가?
하느님의 다스림은 실패할 수 도 있는가?
하느님의 다스림은 화해인가? 아니면 심판인가?
그리스도교 희망이 영원히 단죄된 인간이 있다는 것을 고수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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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성서안에서의 종말론적 근거-(다)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5. 죽은 자들의 부활

    많은 이들이 죽음 이후의 삶을 받아들인다. 그리스도교 역시 사후의 삶이 그리스도적 희망의 내용이다. 그런데 단순히 사후의 삶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는 다른 차원이다. 유대인 역시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해서는 당황스러워한다. 구약성서 안에서 부활 사상은 거의 찾아보지 못한다. 그러나 구약에도 역시 이런 사상은 있다. 예수의 설교에서도 죽은 이의 부활이 설교의 중심은 아니다.
    이스라엘 신앙의 역사는 희망의 역사였고, 오랫동안 죽은 이의 부활을 겨냥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죽음 안에서 하느님의 능력을? 이스라엘 안에서 죽음 이후의 실존에 대해서는 미약했고, 일종의 無로 보았다 (셰올).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죽음 건너편의 희망을 가진다. 이는 하느님과의 약속으로 땅을 차지하고, 자손을 번성하고, 하느님의 보호를 받는 등등에 의해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 48장의 야곱의 축복에는 죽음을 넘어서의 희망을 보여준다. 즉 야곱은 신앙을 지닌 채 죽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던 것은 선조의 약속이 후손에게서 이루어 짐을 보았다. 즉 점점 더 확장되는 것이다. 결국 야곱은 충만한 희망을 느끼면서 죽었다. 그의 희망은 부족에 대한 희망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사후 문제는 생각하지 않는다. 즉 아곱의 운명은 그 후손들이었다. 그러므로 죽은 후에도 후손 안에서 계속 살아가는 것이다 (형이 대를 못 잇고 죽었을 경우 그 아내를 동생이 차지하는 것). 그러므로 자손 없이 죽는 것은 희망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상당히 후대에야 정치적 희망이 생긴다. 그것은 불의.절망의 체험을 통해 일어난다. 이제 의인이 장수하는 것도 아니고 더 복을 받는 것도 아니다. 즉 각자의 행복은 각자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 붕괴된다. 특히 2c경 이방인의 지배를 받으면서 그것은 더욱 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믿으려는 노력이 보인다. 이런 신앙은 어디에서 나오고 그 보상은 무엇인가? 여기에서 죽음도 넘어서는 희망이 나타난다. 이 같은 고통스런 체험을 통해 부활에 대한 신앙이 싹튼다.

    1) 마카베오 下권
    죽은 이의 부활, 죽은 이의 기도의 의미등이 나타난다.
    7장 어머니와 일곱아들의 순교 ; 율법을 어기기 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 이는 하느님의 성실성을 믿는 것에, 부활에 대한 희망에 근거한다. 무엇보다 하느님의 성실성, 초월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부활에 대한 희망은 단지 의인들만의 부활을 이야기한다.
    12장 전쟁이후 죽은 자를 묻은 이야기 ; 죽은 자의 몸에서 부적이 나오는데, 마카베오는 이를 속죄하기 위해 돈을 예루살렘으로 보내 속죄 제사를 드린다. “그가 이와 같이 숭고한 일을 한 것은 부활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가 전사자들이 부활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죽은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허사이고 무의미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는 유다 마카베오는 부활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은 그 희망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2) 다니엘서
    12장 ; “티끌로 돌아갔던 대중이 잠에서 깨어나 영원히 사는 이가 있는가 하면 영원한 모욕과 수치를 받을 사람도 있으리라”(2절). 선한 이나 악한 이나 모두 부활한다. 그리고 묵시적 문학에서 부활에 대한 희망이 발달되어 나타난다. 그 배경은 재난이다. 그러면서 죽은 자들의 부활을 이야기한다. 이 마지막 시기에도 죽은 자의 삶을 인식한다. 즉 모두가 심판받기 위하여 모여야 한다는 사상을 지닌다. 육신도 변화하여 착한 자와 악한 자의 모습이 다르게 나타난다. 묵시문학은 두가지로 나뉘는데, ①의인.악인 모두 부활한다. ②의인만이 부활한다

    3) 예수 시대
    죽은 이의 부활을 믿는 이와 믿지 않는 이들의 대결이 나타난다 (Mk 12,18-27). 바오로도 사도행전에서 바리사이와 사두가이의 논쟁을 이용한다 (Acts 23장). 그러므로 이미 예수 이전에도 부활사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 공관 복음
    Mk 12,18-27 ; 예수는 부활을 이야기했고, 모든 이의 부활을 이야기한다. 사두가이파는 자신들의 근거를 구약에 두면서 주장을 편다. 즉 모세 율법을 받아들이면 부활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의 논리는 죽은 이의 부활을 이 세상 삶의 연속으로 이해한다. 예수는 이를 꼬집어 새로운 방식으로서의 삶을 이야기한다. 이는 당시 묵시문학의 이야기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예수가 천사의 예를 든 것은 영생을 이야기하기 위함이다.
    한편 예수는 사두가이가 성서를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이사악의 하느님이요, 야곱의 하느님이다’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이라는 뜻이다”(Mk 12,26). 여기에서 신앙의 새로운 측면이 나타난다. 하느님은 선조들을 죽음의 상태로 버려 두시지는 않는다. 이로써 그 대목이 새로운 해석을 얻게 된다.
    결론적으로 예수에게 죽은 이들의 부활의 근거는 하느님의 권능과 하느님에 대한 성실성의 신앙에 근거하고, 부활은 지상의 삶의 단순한 연속이 아니다.
    신뢰와 사랑안에서의 삶은 새 삶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공관안에서 흔히 죽은 이들의 치유와 결부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열 두 제자의 파견에도 죽은이를 살리라는 명령과 함께 병든이의 치유가 포함된다. 이 모든 것은 복음서 저자에게 하느님 나라로 요약된다.즉 죽음에서의 해방은 하느님 나라의 한 가지 내용이다.

    5)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바오로의 입장
    바오로는 부활에 대해 상당히 친숙해 있다. 그의 초기 설교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재림이고 점차오 예수의 부활로 그 중심이 넘어간다. 이의계기는 데살로니카 공동체에서의 많은 이의 죽음을 경험하고, 고린토 공동체에서 부활을 비역사적인 것으로 보고, 영지사상이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1데살 ; 많은 이들이 죽음을 당했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희망과 달리 재림에 앞서 많은 이들의 죽음을 먼저 체험한다. 여기서 바오로는 죽은 이들의 그리스도의 재림에 있어 더 불리한 여건에 있지 않음을 말한다. 즉 죽은 이들 역시 재림하신 주님을 만나게 된다. 이런 면에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점점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바오로에 있어 부활에 대한 증거는 예수의 삶과 죽음, 부활에 있다. 따라서 우리 역시 예수의 부활에 동참하는 것이다.
    고린토서 ; 고린토 공동체는 예수의 부활을 고백하면서도 죽은 이들의 부활을 인정치 않는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구원을 현재적인 것에 강조점을 두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비역사적인 것으로 본다. 즉 예수의 부활 자체보다는 그것이 자신들에게 어떻게 나타나는가가 더 중요했다. 물론 바오로 역시 이 차원을 경시하지 않으면서 모든 인간의 전인적 구원을 본질 부분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그는 예수의 부활을 강조하고, 죽은 자들의 부활을 거부할 수 없음을 가르친다. 바오로는 예수의 부활이 죽은 자들의 부활의 증명이 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의 역사를 열어주는 것이다. “먼저 그리스도가 살아나고….”(1고 15,24-26). 죽음으로부터 부활한 육체는 도일성을 지니면서도다르게, 불변적으로 나타난다 (1고 15,53-54).
    2고린 4,3-4 ; “지금 육신의 ….”
    죽음의 구체적 체험을 맞은 바오로는 죽은 이의 부활을 성찰한다.그는 구원의 역사성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하느님 다스림의 완성은 예수의 재림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하느님의 다스림은 죽은 이의 부활을 믿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6. 심 판

    심판 신앙 역시 그리스도의 재림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1) 이스라엘이 어려울 때 찾은 것은 언제나 하느님이었다.
    하느님 앞에는 모든 것이 노출되어 있고 하느님만이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 구약에서는 율법을 지킬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상선벌악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2) 「야훼의 날」에 대한 희망
    그러나 하느님의 정의에 대해 색다른 체험(이방인의 지배, 의인의 고통,죽음 등)을 하면서 이제 상선벌악은 현재가 아니라 ‘야훼의 날’에 대한 희망속에서 나타난다. 물론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원수 뿐 아니라 이스라엘 자체도 심판하신다. 그 목적은 파멸이나 영원한 고통은 아니다. 야훼의 날에 대한 희망은 구원에 대한 희망이고,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에 대한 희망이다. 즉 야훼의 날에는 단죄보다는 정화가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 이는 역사에서 이루어질 사건(전쟁, 지배…)으로 간주되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이 새로와 질 것을 선호하신 까닭에 역사가 다시 올바른 길로 가도록 경고하는 것이다.

    3) 신약에서는 하느님 나라가 묵시적 기다림을 배경으로 선포된다.
    예수에 있어서도 묵시적 상징이 주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이런 위협의 근본적 동기는 외경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는 초대가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해 완벽하게 느끼라는 초대이다. 이런 초대, 부르심은 결단의 상황에로 이끈다. 이를 거부하는 이는 하느님 나라에서 배제된다. 하느님의 심판이 가져왔다는 자각은 해방적 성격을 지니고, 이 세상에서의 자유를 보장해 주는 것이다.

    4)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관이다.
    이는 모든 사도들의 강론의 핵심이다. 모든 종말론적 선언들은 마지막의 사건에 대한 단순한 정보제공이다. 이는 역사안에서 우리가 취해야 하는 결단의 기준으로, 희망으로 다루어진다. 예수가 심판관이란 의미는 ①마지막이 예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고, 예수가 의도하고 예수가 설계했던 나리이다. ②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을 성공으로, 혹은 실패로 이끄느냐의 결정적 기준이 된다. 그 분을 수락, 거부하는 거슨 구체적 행동에서이다. 여기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람이 하나가 됨을 의미한다. ③희망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행위 자체를 의미한다. 즉 우리에게 상을 주는 분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역사 안에서의 체험을 통해 얻어 낸 결실이라는 것이다. 최후 심판관으로서의 예수의 모습도 역사안에서의 예수에 대한 체험을 통한 희망이다.

    5) 현재와 미래의 긴장관계
    심판은 이미 현재의 결단적 행위 안에서 발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적 전망을 그대로 보존한다 (Jn 12,48).

    6) 전통 신학의 심판 이해
    ꠆ꠏꠏ 공심판 ; 모두가, 영혼 육신 모두가 심판 받는다.
    ꠌꠏꠏ 사심판 ; 죽은 후에 영혼만이 심판 받는다.
    그러나 성서에는 이러한 이해가 나타나지 않는다. 신약성서는 공심판과 동시에 개인에 대한 상벌이 이루어질 것을 보여준다 (Rom 6,6). 그러나 전통신학에서 말하는 개념과 같은 것은 아니다. 공사심판의 개념은 교부들에 의해서 발전되어 왔다.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개별적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고, 그렇다면 사심판과 공심판 사이의 공백이 문제가 된다. 그래서 교부들은 죽음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사심판과 공심파의 차이를 말한다. 이제 초기의 공심판에 대한 신앙은 사심판으로 이어지고 이는 순교자에 대한 공경으로 나타난다. 중세기에 이르러는 오히려 사심판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진다. K.라너나 그레사키 같은 학자는 사공심판이 시대의 조루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본다. 사심판과 공심판을 인정하면 ①인간의 영육의 결합을 인정하고 ②죽음을 통해 영육이 분리됨을 인정해야 한다. ③그러나 인간이 두번 심판받는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즉 공심판 자체나 사심판이 될 수 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공심판은 한 가지의 두 가지 측면이다.

    7) 하느님의 다스림이 모든 인간의 구원의 대상인가?
    역사가 환경조건에서 구별되고, 하느님의 다스림이 드러날 것인가?
    하느님의 다스림은 실패할 수 도 있는가?
    하느님의 다스림은 화해인가? 아니면 심판인가?
    그리스도교 희망이 영원히 단죄된 인간이 있다는 것을 고수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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