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관-Communio로서의 교회(Mystical Communion

3. Communio로서의 교회(Mystical Communion)

현대 사회학에서는 사회관계를 두 가지 유형 즉 형식적으로 조직되거나 구성된 사회(社會, Society, Gesellschaft)와 비형식적이거나 상호 인격적인 공동체(共同體, Community, Gemeinschaft)로 나눈다. 사회는 형식적 조직과 구조 그리고 직무 등에 의하여 식별되는 인간 연합체로서 제도화된 합법적 권위에 의하여 유지되며 법에 따라 통치된다(제도주의; 각종조합, 정당, 클럽). 공동체는 자연적으로 생성된 ‘서로 맞대면 할 수 있는 교제’ 이며 ‘교제의 성격이 비전문적’ 이고 ‘상대적인 영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관련된 구성원이 소수’이고 ‘참여자들 사이에 상대적인 친밀성’이 있다는 기본특성을 가지고 있다(가족, 종족, 민족). 공동체 안에서는 관련자들의 긴밀한 연합의 결과로 공동체적인 전체성 안에서 개인들의 독특한 개성이 하나로 용해되어 ‘우리’ 라는 말로서 공동성을 드러낸다. 이 ‘우리’라는 말은 일종의 호감과 상호간의 일체감을 드러내어 누구나 전체의 분위기와 삶 속에서 자신의 주된 목적을 찾게 된다.
Communio로서의 교회관은 그리스도의 몸, 하느님의 백성 같은 성서적 관념과 잘 조화되는 것으로 한동안 등한시되어 오다가 19세기(튜빙겐 학파) 계몽주의 사조와의 논쟁 속에서 교회본질을 새로이 정립하려는 시도에서 나왔으며, 20세기 초 성서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구호 아래 활기를 뛰기 시작했다(A. Rademacher, Y. Congar, J. Hamer등). 이들은 제도주의적 교회관의 약점을 간파하면서 삼위일체의 성자의 육화와 파견 그리고 성령의 활동으로 이어지는 유기체적인 생명원리를 이용하여 가시적인 교회는 교회의 내적 생명의 구현으로 본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관은 바오로에게서 발견된다(로마 12, 1고린12, 에페2 골로1). 아우구스띠노는 모든 성인의 통공(지상, 천상, 단련의 교회)을 언급했고,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교회는 머리인 그리스도로부터 흘러 넘치는 초자연적 은총에 의하여 거룩하게 된 공동체인데, 인간의 지상적이고 육신적이며 역사적인 처지에서 이것은 육화된 말씀인 그리스도와 그가 가져온 신앙과 성사들과 제도를 통하여 구현된다.
이 교회의 원천, 깊은 전통에 뿌리를 둔 Communio교회관이 공의회에서 재 인정되고 재 수용되기까지 역사 안에서 변색되고 퇴조해 있었다(Communio 개념은 단순히 성체성사나 영성체에만 국한해서 사용). 중세에는 교회와 국가가 혼동되고 동일시되었으며 교회는 자신을 교계적이요 법적으로 이해했다(제도적 교회관). 근대(비오 12세, 1939-1958)에 와서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신비체(Corpus Christi Mysticum)’ 즉 유기적이요 신비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려 했다. 그러나 mysticum이란 말을 성서적이고 교부적인 의미의 성사(Sacramentum)란 측면보다 신비적(Mystic) 차원을 더 강조함으로써 교회의 비가시적이요 영적이며 개인주의적인 면만이 크게 부각되었다. 또한 로마 가톨릭 신자들만이 신비체의 지체들로 이루어진다고 규정하고, 교황과 주교들과 성직자들이 주된 지체이고 평신도들은 성직계급을 보좌한다고 규정함으로서 제도주의적 관점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이 교회관은 제도주의적 교회관보다 민주적인 경향을 띤다. 이 교회관은 성령과 모든 신자들이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지체들 상호간의 봉사와 전체 신비체 그 자체에 비중을 두기에 특정한 집단(성직집단)에 따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모두가 동등하고 모두는 서로를 위해서 봉사한다. 믿는 자들의 공동체는 성령에 의하여 모였고 그리스도를 따라 하느님 나라로 순례하는 공동체이다. 믿는 자들의 공동체의 ‘함께함’(togetherness)이 신학의 언어로 Communio이다. 이것은 우리가 받은 그 무엇(그리스도의 성체 안의 몸과 피 혹은 그리스도의 고통 혹은 그리스도와의 우정)과의 조직적인 연대와 참여를 말한다. 이 교회관의 장점은 보다 성서적이란 데 있다. 평신자들의 위치가 드러나게 되고 성직주의는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된다. 그러나 전례에 있어서 전통적인 신성함이 사라진다거나 교회 권위가 추락한다거나 사람들이 불안정감을 느끼거나 허둥대게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 쇄신을 위한 원리로서 이 교회관에 관심을 돌리고 있으며, 교회가 현대세계 안에서 상호이해와 사랑에 입각한 인격적인 관계를 만들 수 있는 장(場)이기를 바라고 있다. 이 상호 인격적인 관계를 강조하는 공동체적인 교회관은 현 시대에 큰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거대한 제도들은 오늘날 거의 필요악으로 느껴지고 있다(소공동체 운동). 현대인들은 삶의 의의를 형식이 없으면서도 인격적이고 공동체적인 개념 속에서 발견하고자 한다. 오늘날 산업사회 안에서 빚어지는 비인간화 과정 속에서 소속감과 친교를 가능케 하는 공동체를 갈구하고 있다.
Communio란 말은 라틴말 cum-munus(공동의 과제 혹은 직무) 혹은 cum-moenus(공동의 방어처 내지는 공동의 보호처)에서 나왔으며 종교적 의미로 사용되기 전에는 공동의 과제나 공동책임, 공동으로 싸움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 말이 불가타 성서(대중 라틴어 성서) 번역시 바오로 서간에서 교회론적 의미로 쓰여진 Koinonia란 말을 Communio로 번역하면서 종교적인 용어로 채색된다. 바오로의 Koinonia가 가지는 의미는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의 신비로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친교 공동체성(하나됨) 과 하느님과 일치된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상호간의 친교 공동체성이다(필리 2, 1; 1고린 1, 9-10; 2고린 13, 13) . 이 하나됨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선사하시는 은총에 부름 받은 이들이, 그 은총에 성사와 말씀과 삶을 통해 참여함으로써 발생되는 어떤 생동적이고 역동적인 과정 속에서 선사 받게 되는 어떤 것이다(성령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과의 친교 공동체). 이것은 하나의 개념이기를 거부하는 살아 있는 삶의 반영이다. 공동의 나눔 과 참여 혹은 나눔과 섬김(통공; 모든 성인의 통공)은 그리스도자의 삶을 특성 지우고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전제 조건이 된다. 초세기의 교인들은 어둡고 낯선 세상의 한가운데서 자신들이 이루는 작은 무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서 형성되고 또 그 사랑으로부터 생명력을 취하는 사랑의 친교 공동체라고 생각했다. 초기 신자들과 교부들은 이 공동체를 교회(Ekklesia)라 이름하였다.
공의회는 주체에 따라 Communio를 신적 친교 공동체(Communio Divini), 형제적 친교 공동체(Communio fraterna), 교계적 친교 공동체(Communio hierarchica)로 나눈다. 신적 친교 공동체는 삼위일체의 내재적인 Koinonia로서 교회의 출발점이요 예형이며 모형으로서, 삼위일체의 하느님은 자기 안의 Communio(자신을 선사하는 사랑, 서로를 위함)를 통해서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고 수여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세 위격의 신적 Communio에 참여토록 한다(수직적 ). 인간의 이 참여(分有)는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지며, 교회 안에서 신의 수여(分與)와 인간의 나눔(分有)을 통해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이 만나고 일치를 이룬다(수평적). 형제적 그리고 교계적 친교 공동체는 인간 사이의 친교를 나타내는 것으로 본질적으로 하느님의 백성의 동등 성을 나타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주어진 직무(일)를 규정해 주면서 상이 성을 말하려 한다(다양성 안에 일치). 형제적 친교는 성체성사의 의미와 믿는 이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교우)를 말하며, 본당과 본당, 본당과 교구, 교구와 교구, 지역교회와 세계교회 사이의 형제적인 삶을 말한다.
하느님과의 친교 그리고 믿는 이들 상호간의 친교는 사실상 하나로서 언제나 하느님의 선물이요 동시에 교회를 통해서 얻게 되는 구원의 열매이다. 하느님과의 그리고 믿는 이들 상호간의 가시적 친교로서의 교회는 삼위일체인 하느님의 친교 안에 참여하는 한에서 그 신적 친교를 세상 안에 성사적으로 나타내 보여 주는 것이다.
공의회 이후 이 교회관을 심화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교회는 자신을 획일적이요 일방적인 제도가 아니라 역동적이요 상호작용을 통한 생동적인 교류(통공)와 나눔의 장으로서 파악하고 실현하려 한다. 하느님 스스로 세 위격의 다양성을 지니기에 교회도 다양성이 인정된다. 하나를 가능케 하는 이 세 위격의 친교를 통해서, 그들을 하나로 만드는 삼위일체적 사랑 안에서, 세 위격은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일치를 보존하게 된다. 삼위일체적 친교는 교회적 삶과 구조의 원천이요 근본 원리이다. 삼위일체적 친교는 본질상 구원경륜적이고 인간을 자신의 친교에 참여토록 한두 가지 파견(성자, 성령)을 가능케 했고 교회는 이 파견으로 세워졌고 근거 지워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위일체는 교회의 삶에 좌표를 제시해 주고, 교회가 자신의 목적에 타당하게 살 수 있도록 길과 방법을 제시해 준다.

H.U.Balthasar는 삼위일체적 Communio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아버지는 다름 아니라 자신에 의해 지음을 받은 아들에 대한 자신의 자기 헌신 안에서만 이해되어질 수 있고, 아들은 다름 아니라 자신이 지니고 있는 ‘아버지를 위한 존재’ 안에서만 이해되어질 수 있다. 이 두 가지의 자기 헌신은 다시금 하나의 ‘서로를 위함’이란 말과 동일시될 수 있다. 이 ‘서로를 위함은’ 신약의 성서들 안에서 ‘거룩한 영’으로서 아들에 의해서와 마찬가지로 아버지에 의해서도 분명하게 강조되는 인격화된 ‘서로를 위함’이요, 또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기 수여이다.”

B. Welte의 제자요 Aachen의 주교인 K.Hemmerle는 이렇게 해석한다.
“첫째는 ‘침잠’이다. 이 침잠은 자신의 가장 내적인 것까지 관조하여 자신이 스스로 분명하여지고 개방되는 완전한 자의식을 표현하는 말이다. 둘째는 ‘관계’이다. 바로 이 관계 안에서 세 위격을 지닌 하느님은 서로를 수여(선사)하고 또 서로를 사랑한다. 셋째는 ‘개방성’이다. 이 개방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신적 ‘Communio-삶’ 혹은 하느님 사랑에의 참여를 통한 분유를 가능토록 한다.”

Max Muller
位格(persona); 하나 속에서 서로 다른 셋을 개별화하는 개념. 그리스도론에서는 한정된 인간의 본성과 무한한 신의 본성을 하나로 통합해 내는 개념. 그래서 위격은 개별존재를 하나로 묶어 놓는 공동성을 지닌다. 독자성+공동성=다양성 안의 일치(Commun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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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관-Communio로서의 교회(Mystical Communion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3. Communio로서의 교회(Mystical Communion)

    현대 사회학에서는 사회관계를 두 가지 유형 즉 형식적으로 조직되거나 구성된 사회(社會, Society, Gesellschaft)와 비형식적이거나 상호 인격적인 공동체(共同體, Community, Gemeinschaft)로 나눈다. 사회는 형식적 조직과 구조 그리고 직무 등에 의하여 식별되는 인간 연합체로서 제도화된 합법적 권위에 의하여 유지되며 법에 따라 통치된다(제도주의; 각종조합, 정당, 클럽). 공동체는 자연적으로 생성된 ‘서로 맞대면 할 수 있는 교제’ 이며 ‘교제의 성격이 비전문적’ 이고 ‘상대적인 영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관련된 구성원이 소수’이고 ‘참여자들 사이에 상대적인 친밀성’이 있다는 기본특성을 가지고 있다(가족, 종족, 민족). 공동체 안에서는 관련자들의 긴밀한 연합의 결과로 공동체적인 전체성 안에서 개인들의 독특한 개성이 하나로 용해되어 ‘우리’ 라는 말로서 공동성을 드러낸다. 이 ‘우리’라는 말은 일종의 호감과 상호간의 일체감을 드러내어 누구나 전체의 분위기와 삶 속에서 자신의 주된 목적을 찾게 된다.
    Communio로서의 교회관은 그리스도의 몸, 하느님의 백성 같은 성서적 관념과 잘 조화되는 것으로 한동안 등한시되어 오다가 19세기(튜빙겐 학파) 계몽주의 사조와의 논쟁 속에서 교회본질을 새로이 정립하려는 시도에서 나왔으며, 20세기 초 성서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구호 아래 활기를 뛰기 시작했다(A. Rademacher, Y. Congar, J. Hamer등). 이들은 제도주의적 교회관의 약점을 간파하면서 삼위일체의 성자의 육화와 파견 그리고 성령의 활동으로 이어지는 유기체적인 생명원리를 이용하여 가시적인 교회는 교회의 내적 생명의 구현으로 본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관은 바오로에게서 발견된다(로마 12, 1고린12, 에페2 골로1). 아우구스띠노는 모든 성인의 통공(지상, 천상, 단련의 교회)을 언급했고,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교회는 머리인 그리스도로부터 흘러 넘치는 초자연적 은총에 의하여 거룩하게 된 공동체인데, 인간의 지상적이고 육신적이며 역사적인 처지에서 이것은 육화된 말씀인 그리스도와 그가 가져온 신앙과 성사들과 제도를 통하여 구현된다.
    이 교회의 원천, 깊은 전통에 뿌리를 둔 Communio교회관이 공의회에서 재 인정되고 재 수용되기까지 역사 안에서 변색되고 퇴조해 있었다(Communio 개념은 단순히 성체성사나 영성체에만 국한해서 사용). 중세에는 교회와 국가가 혼동되고 동일시되었으며 교회는 자신을 교계적이요 법적으로 이해했다(제도적 교회관). 근대(비오 12세, 1939-1958)에 와서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신비체(Corpus Christi Mysticum)’ 즉 유기적이요 신비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려 했다. 그러나 mysticum이란 말을 성서적이고 교부적인 의미의 성사(Sacramentum)란 측면보다 신비적(Mystic) 차원을 더 강조함으로써 교회의 비가시적이요 영적이며 개인주의적인 면만이 크게 부각되었다. 또한 로마 가톨릭 신자들만이 신비체의 지체들로 이루어진다고 규정하고, 교황과 주교들과 성직자들이 주된 지체이고 평신도들은 성직계급을 보좌한다고 규정함으로서 제도주의적 관점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이 교회관은 제도주의적 교회관보다 민주적인 경향을 띤다. 이 교회관은 성령과 모든 신자들이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지체들 상호간의 봉사와 전체 신비체 그 자체에 비중을 두기에 특정한 집단(성직집단)에 따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모두가 동등하고 모두는 서로를 위해서 봉사한다. 믿는 자들의 공동체는 성령에 의하여 모였고 그리스도를 따라 하느님 나라로 순례하는 공동체이다. 믿는 자들의 공동체의 ‘함께함’(togetherness)이 신학의 언어로 Communio이다. 이것은 우리가 받은 그 무엇(그리스도의 성체 안의 몸과 피 혹은 그리스도의 고통 혹은 그리스도와의 우정)과의 조직적인 연대와 참여를 말한다. 이 교회관의 장점은 보다 성서적이란 데 있다. 평신자들의 위치가 드러나게 되고 성직주의는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된다. 그러나 전례에 있어서 전통적인 신성함이 사라진다거나 교회 권위가 추락한다거나 사람들이 불안정감을 느끼거나 허둥대게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 쇄신을 위한 원리로서 이 교회관에 관심을 돌리고 있으며, 교회가 현대세계 안에서 상호이해와 사랑에 입각한 인격적인 관계를 만들 수 있는 장(場)이기를 바라고 있다. 이 상호 인격적인 관계를 강조하는 공동체적인 교회관은 현 시대에 큰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거대한 제도들은 오늘날 거의 필요악으로 느껴지고 있다(소공동체 운동). 현대인들은 삶의 의의를 형식이 없으면서도 인격적이고 공동체적인 개념 속에서 발견하고자 한다. 오늘날 산업사회 안에서 빚어지는 비인간화 과정 속에서 소속감과 친교를 가능케 하는 공동체를 갈구하고 있다.
    Communio란 말은 라틴말 cum-munus(공동의 과제 혹은 직무) 혹은 cum-moenus(공동의 방어처 내지는 공동의 보호처)에서 나왔으며 종교적 의미로 사용되기 전에는 공동의 과제나 공동책임, 공동으로 싸움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 말이 불가타 성서(대중 라틴어 성서) 번역시 바오로 서간에서 교회론적 의미로 쓰여진 Koinonia란 말을 Communio로 번역하면서 종교적인 용어로 채색된다. 바오로의 Koinonia가 가지는 의미는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의 신비로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친교 공동체성(하나됨) 과 하느님과 일치된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상호간의 친교 공동체성이다(필리 2, 1; 1고린 1, 9-10; 2고린 13, 13) . 이 하나됨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선사하시는 은총에 부름 받은 이들이, 그 은총에 성사와 말씀과 삶을 통해 참여함으로써 발생되는 어떤 생동적이고 역동적인 과정 속에서 선사 받게 되는 어떤 것이다(성령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과의 친교 공동체). 이것은 하나의 개념이기를 거부하는 살아 있는 삶의 반영이다. 공동의 나눔 과 참여 혹은 나눔과 섬김(통공; 모든 성인의 통공)은 그리스도자의 삶을 특성 지우고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전제 조건이 된다. 초세기의 교인들은 어둡고 낯선 세상의 한가운데서 자신들이 이루는 작은 무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서 형성되고 또 그 사랑으로부터 생명력을 취하는 사랑의 친교 공동체라고 생각했다. 초기 신자들과 교부들은 이 공동체를 교회(Ekklesia)라 이름하였다.
    공의회는 주체에 따라 Communio를 신적 친교 공동체(Communio Divini), 형제적 친교 공동체(Communio fraterna), 교계적 친교 공동체(Communio hierarchica)로 나눈다. 신적 친교 공동체는 삼위일체의 내재적인 Koinonia로서 교회의 출발점이요 예형이며 모형으로서, 삼위일체의 하느님은 자기 안의 Communio(자신을 선사하는 사랑, 서로를 위함)를 통해서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고 수여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세 위격의 신적 Communio에 참여토록 한다(수직적 ). 인간의 이 참여(分有)는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지며, 교회 안에서 신의 수여(分與)와 인간의 나눔(分有)을 통해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이 만나고 일치를 이룬다(수평적). 형제적 그리고 교계적 친교 공동체는 인간 사이의 친교를 나타내는 것으로 본질적으로 하느님의 백성의 동등 성을 나타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주어진 직무(일)를 규정해 주면서 상이 성을 말하려 한다(다양성 안에 일치). 형제적 친교는 성체성사의 의미와 믿는 이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교우)를 말하며, 본당과 본당, 본당과 교구, 교구와 교구, 지역교회와 세계교회 사이의 형제적인 삶을 말한다.
    하느님과의 친교 그리고 믿는 이들 상호간의 친교는 사실상 하나로서 언제나 하느님의 선물이요 동시에 교회를 통해서 얻게 되는 구원의 열매이다. 하느님과의 그리고 믿는 이들 상호간의 가시적 친교로서의 교회는 삼위일체인 하느님의 친교 안에 참여하는 한에서 그 신적 친교를 세상 안에 성사적으로 나타내 보여 주는 것이다.
    공의회 이후 이 교회관을 심화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교회는 자신을 획일적이요 일방적인 제도가 아니라 역동적이요 상호작용을 통한 생동적인 교류(통공)와 나눔의 장으로서 파악하고 실현하려 한다. 하느님 스스로 세 위격의 다양성을 지니기에 교회도 다양성이 인정된다. 하나를 가능케 하는 이 세 위격의 친교를 통해서, 그들을 하나로 만드는 삼위일체적 사랑 안에서, 세 위격은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일치를 보존하게 된다. 삼위일체적 친교는 교회적 삶과 구조의 원천이요 근본 원리이다. 삼위일체적 친교는 본질상 구원경륜적이고 인간을 자신의 친교에 참여토록 한두 가지 파견(성자, 성령)을 가능케 했고 교회는 이 파견으로 세워졌고 근거 지워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위일체는 교회의 삶에 좌표를 제시해 주고, 교회가 자신의 목적에 타당하게 살 수 있도록 길과 방법을 제시해 준다.

    H.U.Balthasar는 삼위일체적 Communio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아버지는 다름 아니라 자신에 의해 지음을 받은 아들에 대한 자신의 자기 헌신 안에서만 이해되어질 수 있고, 아들은 다름 아니라 자신이 지니고 있는 ‘아버지를 위한 존재’ 안에서만 이해되어질 수 있다. 이 두 가지의 자기 헌신은 다시금 하나의 ‘서로를 위함’이란 말과 동일시될 수 있다. 이 ‘서로를 위함은’ 신약의 성서들 안에서 ‘거룩한 영’으로서 아들에 의해서와 마찬가지로 아버지에 의해서도 분명하게 강조되는 인격화된 ‘서로를 위함’이요, 또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기 수여이다.”

    B. Welte의 제자요 Aachen의 주교인 K.Hemmerle는 이렇게 해석한다.
    “첫째는 ‘침잠’이다. 이 침잠은 자신의 가장 내적인 것까지 관조하여 자신이 스스로 분명하여지고 개방되는 완전한 자의식을 표현하는 말이다. 둘째는 ‘관계’이다. 바로 이 관계 안에서 세 위격을 지닌 하느님은 서로를 수여(선사)하고 또 서로를 사랑한다. 셋째는 ‘개방성’이다. 이 개방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신적 ‘Communio-삶’ 혹은 하느님 사랑에의 참여를 통한 분유를 가능토록 한다.”

    Max Muller
    位格(persona); 하나 속에서 서로 다른 셋을 개별화하는 개념. 그리스도론에서는 한정된 인간의 본성과 무한한 신의 본성을 하나로 통합해 내는 개념. 그래서 위격은 개별존재를 하나로 묶어 놓는 공동성을 지닌다. 독자성+공동성=다양성 안의 일치(Commun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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