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원천
1) 20세기의 시대적 상황
본격적인 근대는 17세기부터이다. 이전까지의 과도기는 르네상스 시대라고 할 수 있다.
R. 과르디니는 ‘근대’를 다음의 세 가지로 정의하고 있다.
① 자연 : 세계를 자연으로 파악한다. 하느님은 배제되며, 자연이 기준이 된다. 즉, 자연이 하느님의 자리를 대신해서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② 주체 : 주체는 ‘인간’이다. 모든 것에 있어서 인간이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③ 문화 : 곧, 인간의 업적이다. 이것은 인간이 자율성을 가지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며, 스스로 서 있고, 자율적․주체적인 것이다. 여기에서, 하느님은 인간과 자연에 밀려 그 자리를 잃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근대에 이르러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면서, 그리스도교로부터의 이탈이 가속화되었으며, 그 전환점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프랑스 대혁명(1789)이다.
과르디니는 이러한 현상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세상은 창조되었다. 그럼에도 인간이 어디서 왔는지를 무시하고 있다.”
① 역사(↔자연) :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되었다.
② 부르심(↔주체) : 부르심을 받는 존재
③ 업적, 과업(↔문화) : 하느님으로부터 과업을 받아 수행해야 한다.
현대에는 신비와 초월을 바라보고, 객관적인 것과 공동의 것을 중요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까지 이어짐으로써 그 결실을 맺게 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직전까지의 사상의 흐름을 살펴본다면 다음의 것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현대 그리스도론 논쟁 : “인간 예수”냐 “신(神) 그리스도냐”의 문제 ① ‘인간 예수’(A.V.Harnack) : 아버지를 선포하고 사람들을 모으고자 한 예수를 그리스도로 볼 것이 아니라, 선교하는 사람으로 본다. ② ‘신(神) 그리스도’(R. Bultmann) : ‘인간으로서의 예수’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신앙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선포된 케리그마)이 중요하다. ③ 접목된 사상(K. Barth) : 예수의 말씀과 그의 존재와 사명을 함께 보아야 한다. |
① 자유주의 : 근대의 마지막 사조(18세기 말~20세기 초)이며, “인간 예수”에 주목하고 있다. 이성적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으며, 예수를 하느님으로서가 아니라 ‘선포하는 사람’으로 보는 경향이다.
ex) A.V.Harnack(1851-1930)1) : “하느님나라는 개개인의 마음 안에 온다.” “종교적 개인주의”
가톨릭은 이에 대해 ‘공동체적인 생명력을 지닌 복음’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공동체’와 ‘역사의식’을 강조하여 이 사조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② 청년운동(Jugendbewegung) : 젊은 운동가 중심의 정신개혁운동이다. “삶의 순수성을 되찾자”는 구호 아래 자유주의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다. 따라서, 개인주의와 주관주의를 배격하고 있다. 이 운동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 정신을 강조함으로써 교회와 전례의 쇄신운동으로 발전해나갔으며, “생명에로의 전환”과 “원천에로의 복귀”를 주장하여 신비적인 측면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또한 교회론에 대한 반성을 불러일으켰으며, 신비에 주목한 것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개념을 불러일으켰고 선교와 교회일치, 전례쇄신과 평신도 사도직 등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다시 등장하게 된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몸” 개념은 1943년 “그리스도의 신비체” 회칙으로 결실을 맺게 된다. 자유주의 신학은 오히려 이러한 청년 운동에 촉매 역할을 하였다.
③ 종말론적 문제
․Alfred Loisy(1857-1890) 신부는 ‘예수는 ‘하느님나라’를 선포했지만, 도래한 것은 교회였다.’고 말했다. 이 말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일까? ‘교회는 아직도 생성되고, 역사 안에서 살아있는 것이다’는 것이 아닐까?
‘하느님 나라’와 ‘교회’ 사이의 상관관계라는 종말론적 문제 안에서 우리는 다음의 문제들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 ‘하느님나라’와 ‘교회’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 ‘하느님나라’는 내재적․정신적 실재가 아니라, 역사적이고 우리 삶 안에서 살아있는 실재이다. ‘하느님나라’는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실재이다. 희랍어 ‘βασιλεια’는 ‘하느님의 통치, 권능’을 의미한다.
ⓑ 세상에 하느님나라가 어디 있는가?
성서는 ‘주님의 재림’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에 만연해 있던 ‘임박한 재림’ 사상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하느님나라가 어디 있으며, 예수의 재림은 언제 이루어지는가’ 등의 물음이 제기되었다. 이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이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나라’는 종말론적이다(종말론적 : 역사 안에 있으면서 역사를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느님나라’는 “이미” 도래했으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고, 완성을 향해 나아가며, 구체적 역사 안에서 ‘완성’에로 나아가는 “현실”이다. 성녀 소화데레사가 “순애보의 일순간은 선업을 모두 합쳐놓은 것보다 교회와 하느님을 위해 더 유익하다”고 말한 것은 하느님나라가 우리의 일상 속에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말로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정신’보다는 물질과 개인 혹은 집단의 이기주의가 중요시, 당연시되고 있다. 환경오염, 지역감정, 분단된 우리나라 등의 어려운 상황에서 교회가 세상에 희망을 주어야 한다. 하느님나라를 실현시키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재림’은 임박한 시기에 신속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원역사는 전 인류에게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나라’와 ‘교회’ 사이의 긴장은 그리스도교 신학의 바탕이 된다. 예수님의 인격 안에 하느님나라가 있으며,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그 재림을 엿볼 수 있다. 하느님나라는 우리 안에 있으며, 종말론적 희망을 던져주는 것이다. 이러한 종말적 Thema들이 교회의 모습을 변화시킨다. 우리도 현세에서 살면서 동시에 현실을 초월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

제2장 원천
1) 20세기의 시대적 상황
본격적인 근대는 17세기부터이다. 이전까지의 과도기는 르네상스 시대라고 할 수 있다.
R. 과르디니는 ‘근대’를 다음의 세 가지로 정의하고 있다.
① 자연 : 세계를 자연으로 파악한다. 하느님은 배제되며, 자연이 기준이 된다. 즉, 자연이 하느님의 자리를 대신해서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② 주체 : 주체는 ‘인간’이다. 모든 것에 있어서 인간이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③ 문화 : 곧, 인간의 업적이다. 이것은 인간이 자율성을 가지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며, 스스로 서 있고, 자율적․주체적인 것이다. 여기에서, 하느님은 인간과 자연에 밀려 그 자리를 잃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근대에 이르러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면서, 그리스도교로부터의 이탈이 가속화되었으며, 그 전환점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프랑스 대혁명(1789)이다.
과르디니는 이러한 현상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세상은 창조되었다. 그럼에도 인간이 어디서 왔는지를 무시하고 있다.”
① 역사(↔자연) :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되었다.
② 부르심(↔주체) : 부르심을 받는 존재
③ 업적, 과업(↔문화) : 하느님으로부터 과업을 받아 수행해야 한다.
현대에는 신비와 초월을 바라보고, 객관적인 것과 공동의 것을 중요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까지 이어짐으로써 그 결실을 맺게 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직전까지의 사상의 흐름을 살펴본다면 다음의 것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현대 그리스도론 논쟁 : “인간 예수”냐 “신(神) 그리스도냐”의 문제
① ‘인간 예수’(A.V.Harnack) : 아버지를 선포하고 사람들을 모으고자 한 예수를 그리스도로 볼 것이 아니라, 선교하는 사람으로 본다.
② ‘신(神) 그리스도’(R. Bultmann) : ‘인간으로서의 예수’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신앙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선포된 케리그마)이 중요하다.
③ 접목된 사상(K. Barth) : 예수의 말씀과 그의 존재와 사명을 함께 보아야 한다.
① 자유주의 : 근대의 마지막 사조(18세기 말~20세기 초)이며, “인간 예수”에 주목하고 있다. 이성적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으며, 예수를 하느님으로서가 아니라 ‘선포하는 사람’으로 보는 경향이다.
ex) A.V.Harnack(1851-1930)1) : “하느님나라는 개개인의 마음 안에 온다.” “종교적 개인주의”
가톨릭은 이에 대해 ‘공동체적인 생명력을 지닌 복음’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공동체’와 ‘역사의식’을 강조하여 이 사조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② 청년운동(Jugendbewegung) : 젊은 운동가 중심의 정신개혁운동이다. “삶의 순수성을 되찾자”는 구호 아래 자유주의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다. 따라서, 개인주의와 주관주의를 배격하고 있다. 이 운동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 정신을 강조함으로써 교회와 전례의 쇄신운동으로 발전해나갔으며, “생명에로의 전환”과 “원천에로의 복귀”를 주장하여 신비적인 측면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또한 교회론에 대한 반성을 불러일으켰으며, 신비에 주목한 것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개념을 불러일으켰고 선교와 교회일치, 전례쇄신과 평신도 사도직 등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다시 등장하게 된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몸” 개념은 1943년 “그리스도의 신비체” 회칙으로 결실을 맺게 된다. 자유주의 신학은 오히려 이러한 청년 운동에 촉매 역할을 하였다.
③ 종말론적 문제
․Alfred Loisy(1857-1890) 신부는 ‘예수는 ‘하느님나라’를 선포했지만, 도래한 것은 교회였다.’고 말했다. 이 말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일까? ‘교회는 아직도 생성되고, 역사 안에서 살아있는 것이다’는 것이 아닐까?
‘하느님 나라’와 ‘교회’ 사이의 상관관계라는 종말론적 문제 안에서 우리는 다음의 문제들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 ‘하느님나라’와 ‘교회’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 ‘하느님나라’는 내재적․정신적 실재가 아니라, 역사적이고 우리 삶 안에서 살아있는 실재이다. ‘하느님나라’는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실재이다. 희랍어 ‘βασιλεια’는 ‘하느님의 통치, 권능’을 의미한다.
ⓑ 세상에 하느님나라가 어디 있는가?
성서는 ‘주님의 재림’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에 만연해 있던 ‘임박한 재림’ 사상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하느님나라가 어디 있으며, 예수의 재림은 언제 이루어지는가’ 등의 물음이 제기되었다. 이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이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나라’는 종말론적이다(종말론적 : 역사 안에 있으면서 역사를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느님나라’는 “이미” 도래했으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고, 완성을 향해 나아가며, 구체적 역사 안에서 ‘완성’에로 나아가는 “현실”이다. 성녀 소화데레사가 “순애보의 일순간은 선업을 모두 합쳐놓은 것보다 교회와 하느님을 위해 더 유익하다”고 말한 것은 하느님나라가 우리의 일상 속에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말로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정신’보다는 물질과 개인 혹은 집단의 이기주의가 중요시, 당연시되고 있다. 환경오염, 지역감정, 분단된 우리나라 등의 어려운 상황에서 교회가 세상에 희망을 주어야 한다. 하느님나라를 실현시키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재림’은 임박한 시기에 신속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원역사는 전 인류에게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나라’와 ‘교회’ 사이의 긴장은 그리스도교 신학의 바탕이 된다. 예수님의 인격 안에 하느님나라가 있으며,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그 재림을 엿볼 수 있다. 하느님나라는 우리 안에 있으며, 종말론적 희망을 던져주는 것이다. 이러한 종말적 Thema들이 교회의 모습을 변화시킨다. 우리도 현세에서 살면서 동시에 현실을 초월하는 자세가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