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3 章 교회의 현재와 미래- 교회의 위기(신앙의 위기)

 

3.1.2. 신앙의 위기


오늘날 신앙의 위기가 폭넓게 확산되어 있다. 가톨릭 신앙 전체의 안전성을 위협하는 파멸과 균열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1차적원인은 교회이해의 위기, 교회론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된다. 교회라는 실재가 가지는 본래의 가톨릭적 의의는 노골적으로 배처되지 않으면서 암암리에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의미에서 초대교회처럼 소수의 무리가 되었다.


오늘날 특히 두가지가 문제되고 있다.


첫째, 신앙이란 순수하게 정신적인 소산으로 파악된다는 사상이다. 신앙이란 모든 인간적인 것을 배제한, 그리하여 다만 거룩하고, 정신적인 어떤 것으로 한정시켜 버린다. 그 결과 눈에 보이는 교회는 단순히 인간이 만든 구조물이기 때문에 인간의 필요에 따라 바꿔놓을 수 있는 도구로여긴다. 신앙인들은 교회를 필요로 하지만(친목단체처럼) 그러나 이것은 싱앙을 토대로 한 교회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교회는 하나의 만들어진 조직으로 이해되고 신앙이 교회와 함께 일치, 결합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리하여 : “신앙은 인정하되 교회는 거부한다. 그리스도는 인정하되 교회는 거부한다”는 구호가 유행이 되었다. 이렇게해서 신앙과 교회가 서로 단절되게 되었다. -교회를 다만 인간의 구조물로 여기면 신앙의 내용은 임의적, 자의적이 될 수 밖에 없다. 신앙을 다마 거룩한 무엇, 정신적인 어떤 것으로만 여기면 모든 예배나 전례 교회의 가시적인 제도적, 조직적 측면이 무시된다. 신앙은 결초 순전히 인간의 내적 확신이 아니며 땅으로부터 동떨어진 하늘나라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 사상은 마침내 하느님도 개인주의의 총화로 나타날 수 밖에 없는데에 이 사상의 한계가 있다.


둘째는, 교회내에 전반적으로 널리 만연된 행동의 이데올로기라는 풍조이다. 오늘날 정말로 중요한 것은 정행(orthopraxie), 다시말해 올바른 행동 이웃사랑의 실천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의 살아있는 전통 안에서 읽혀지고 있는 성서의 진정한 의미에 따른 정론(orthodoxie), 곧 올바른 믿음의 내용은 두번째 자리로 밀려나게 되었다.


이러한 교회 전반에 퍼져있는 행동의 이데올로기는 경솔하고도 피상적인 슬로건일 수 밖에 없다. 올바른 행동, 곧 이웃사랑의 내용은 믿음 곧 신앙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또 개인적인 이해의 성향이나 방식에 따라 근본적으로 달라지기 때문에 그렇다. 올바른 행위를 위한 결정은 올바른 사고를 전제로 하고 있고 바로 이 사실 자체가 우선적으로 정론을 추구해야 하는 필연성을 내포하고 있다. 당연히 이론과 실천이 병행되어야 함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다른 원인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교회 이해에 대한 왜곡에서 비롯된 것이 오늘날 신앙의 위기다 :




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를


첫째, 하느님 백성으로 이해함으로써 이스라엘과 교회의 관련차원, 즉 교회의 구약적 요소와


둘째,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해함으로써 교회의 신약적 요소를 훌륭하게 종합하고 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교회가 무엇인가를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교회, 하느님께서 세상에 실제로 현존하는 곳으로서의 교회의 진정한 의미를 재발견하기 위해 참으로 가톨릭적 풍토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 신비를 놀랄만큼 도전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교회는 신비에 싸여 이미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왕국이다.”(교회헌장 3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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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3 章 교회의 현재와 미래- 교회의 위기(신앙의 위기)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3.1.2. 신앙의 위기

    오늘날 신앙의 위기가 폭넓게 확산되어 있다. 가톨릭 신앙 전체의 안전성을 위협하는 파멸과 균열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1차적원인은 교회이해의 위기, 교회론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된다. 교회라는 실재가 가지는 본래의 가톨릭적 의의는 노골적으로 배처되지 않으면서 암암리에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의미에서 초대교회처럼 소수의 무리가 되었다.

    오늘날 특히 두가지가 문제되고 있다.

    첫째, 신앙이란 순수하게 정신적인 소산으로 파악된다는 사상이다. 신앙이란 모든 인간적인 것을 배제한, 그리하여 다만 거룩하고, 정신적인 어떤 것으로 한정시켜 버린다. 그 결과 눈에 보이는 교회는 단순히 인간이 만든 구조물이기 때문에 인간의 필요에 따라 바꿔놓을 수 있는 도구로여긴다. 신앙인들은 교회를 필요로 하지만(친목단체처럼) 그러나 이것은 싱앙을 토대로 한 교회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교회는 하나의 만들어진 조직으로 이해되고 신앙이 교회와 함께 일치, 결합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리하여 : “신앙은 인정하되 교회는 거부한다. 그리스도는 인정하되 교회는 거부한다”는 구호가 유행이 되었다. 이렇게해서 신앙과 교회가 서로 단절되게 되었다. -교회를 다만 인간의 구조물로 여기면 신앙의 내용은 임의적, 자의적이 될 수 밖에 없다. 신앙을 다마 거룩한 무엇, 정신적인 어떤 것으로만 여기면 모든 예배나 전례 교회의 가시적인 제도적, 조직적 측면이 무시된다. 신앙은 결초 순전히 인간의 내적 확신이 아니며 땅으로부터 동떨어진 하늘나라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 사상은 마침내 하느님도 개인주의의 총화로 나타날 수 밖에 없는데에 이 사상의 한계가 있다.

    둘째는, 교회내에 전반적으로 널리 만연된 행동의 이데올로기라는 풍조이다. 오늘날 정말로 중요한 것은 정행(orthopraxie), 다시말해 올바른 행동 이웃사랑의 실천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의 살아있는 전통 안에서 읽혀지고 있는 성서의 진정한 의미에 따른 정론(orthodoxie), 곧 올바른 믿음의 내용은 두번째 자리로 밀려나게 되었다.

    이러한 교회 전반에 퍼져있는 행동의 이데올로기는 경솔하고도 피상적인 슬로건일 수 밖에 없다. 올바른 행동, 곧 이웃사랑의 내용은 믿음 곧 신앙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또 개인적인 이해의 성향이나 방식에 따라 근본적으로 달라지기 때문에 그렇다. 올바른 행위를 위한 결정은 올바른 사고를 전제로 하고 있고 바로 이 사실 자체가 우선적으로 정론을 추구해야 하는 필연성을 내포하고 있다. 당연히 이론과 실천이 병행되어야 함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다른 원인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교회 이해에 대한 왜곡에서 비롯된 것이 오늘날 신앙의 위기다 :


    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를

    첫째, 하느님 백성으로 이해함으로써 이스라엘과 교회의 관련차원, 즉 교회의 구약적 요소와

    둘째,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해함으로써 교회의 신약적 요소를 훌륭하게 종합하고 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교회가 무엇인가를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교회, 하느님께서 세상에 실제로 현존하는 곳으로서의 교회의 진정한 의미를 재발견하기 위해 참으로 가톨릭적 풍토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 신비를 놀랄만큼 도전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교회는 신비에 싸여 이미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왕국이다.”(교회헌장 3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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