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결론
하느님 나라의 정의는 항상 곤경에 처한 사람들, 약자들, 불행한 자들, 피해자들 편에 서 있다. 또한 역사안에서의 하느님의 활동은 부자들과 강자들의 불의를 제거하는 데 초점을 맟추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 나라-이것은 “수탈과 가난의 제거”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제거의 과정은 예수의 활동과 함께 이미 시작되었으며, 아직 미래에 놓여 있는 무엇이다. W. Schweitzer,“가난한 자들의 신학.” 비판과 전망,제 52 호, pp.176-186 참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같은 사고를 근거로 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자기것으로 삼고자 했으며, 교회의 모습을 가난한 교회로서 제시하고자 했다. 이러한 공의회의 목적과 의도는 “교회는 모든 하느님 백성이며, 우리가 교회이다!”라는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
또한 공의회의 이런 염원은 한국교회안에서 특히 민중신학을 통하여 구체화되고 있다. 민중신학에서는 더 이상 민중을 자선과 동정의 대상으로 보지는 않는다. 민중은 억눌리고 소외당하는 사람들로서 교회와 역사의 주체이다. 비록 현실적으로는 주체의 자리에서 밀려나 탈주체화 되었으나, 본래의 주체성을 회복해야 하는 역사의 주체이다.
그리고 민중신학에서는 민중의 눈으로 하느님을 바라보고, 예수를 선포하며, 성서를 해석하고, 세상과 교회를 바라본다. 이처럼 ‘민중’을 그 신학의 자리로 설정했다는 것은 민중신학이 이룩한 큰 성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민중신학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창조적으로 구체화시키며 한국 현실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하겠다. 즉, 세상과 교회안에서 민중의 위치와 그 의미를 부각시킨 점은 민중신학의 커다란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제시하는 ‘하느님 백성’은 민중신학의 ‘민중’이 걸어가야 할 목적지이며, 동시에 그 길은 결국 민중이 걸어가야 할 길인 것이다. 그러므로 민중신학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창조적 심화이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민중신학의 보증이 되는 것이다.
또한 민중이라는 관점은 대립적이고 배타적 성격이 약점으로 등장할 수 있으나, 이에 대한 대안은 당파성을 충분히 지니면서도 배타성을 가지지 않는 공동체, 즉 로핑크(G.Lohfink)가 말하는 ‘대조사회’를 제시함으로써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고 하겠다. 즉 민중신학의 ‘민중’은 하느님 백성의 대조사회이며, 결국 그 대조사회는 하느님 백성이 온전한 민중공동체를 형성하는 그 순간까지 하느님 백성안에서 성장해 가는 공동체인 것이다. 이렇게 할 때 민중신학은 민중을 하느님 백성 안에서 ‘벽을 허무는 주체’로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며, 민중해방운동도 그리스도교적 방향성을 가지게 될 것이다.
또한 이 대조사회는 기존사회와 기존교회를 향해서는 하나의 도전이 될 것이며, 예언자적 목소리가 될 것이다. 민중신학이 말하는 민중교회는 하느님 백성이라는 말이 무색한 성직주의적 경향이 득세하고 있으며, 가난을 이야기하면서도 결코 가난하지 않고, 민중의 아픔을 대변하기보다는 민중을 소외시키며, 소위 집단이기주의화 되어가고 있는 한국교회에 하느님 백성의 표징이 될 것이다.
또한 현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가 아직 교회안에 있다.”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III. 결론
하느님 나라의 정의는 항상 곤경에 처한 사람들, 약자들, 불행한 자들, 피해자들 편에 서 있다. 또한 역사안에서의 하느님의 활동은 부자들과 강자들의 불의를 제거하는 데 초점을 맟추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 나라-이것은 “수탈과 가난의 제거”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제거의 과정은 예수의 활동과 함께 이미 시작되었으며, 아직 미래에 놓여 있는 무엇이다. W. Schweitzer,“가난한 자들의 신학.” 비판과 전망,제 52 호, pp.176-186 참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같은 사고를 근거로 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자기것으로 삼고자 했으며, 교회의 모습을 가난한 교회로서 제시하고자 했다. 이러한 공의회의 목적과 의도는 “교회는 모든 하느님 백성이며, 우리가 교회이다!”라는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
또한 공의회의 이런 염원은 한국교회안에서 특히 민중신학을 통하여 구체화되고 있다. 민중신학에서는 더 이상 민중을 자선과 동정의 대상으로 보지는 않는다. 민중은 억눌리고 소외당하는 사람들로서 교회와 역사의 주체이다. 비록 현실적으로는 주체의 자리에서 밀려나 탈주체화 되었으나, 본래의 주체성을 회복해야 하는 역사의 주체이다.
그리고 민중신학에서는 민중의 눈으로 하느님을 바라보고, 예수를 선포하며, 성서를 해석하고, 세상과 교회를 바라본다. 이처럼 ‘민중’을 그 신학의 자리로 설정했다는 것은 민중신학이 이룩한 큰 성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민중신학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창조적으로 구체화시키며 한국 현실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하겠다. 즉, 세상과 교회안에서 민중의 위치와 그 의미를 부각시킨 점은 민중신학의 커다란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제시하는 ‘하느님 백성’은 민중신학의 ‘민중’이 걸어가야 할 목적지이며, 동시에 그 길은 결국 민중이 걸어가야 할 길인 것이다. 그러므로 민중신학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창조적 심화이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민중신학의 보증이 되는 것이다.
또한 민중이라는 관점은 대립적이고 배타적 성격이 약점으로 등장할 수 있으나, 이에 대한 대안은 당파성을 충분히 지니면서도 배타성을 가지지 않는 공동체, 즉 로핑크(G.Lohfink)가 말하는 ‘대조사회’를 제시함으로써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고 하겠다. 즉 민중신학의 ‘민중’은 하느님 백성의 대조사회이며, 결국 그 대조사회는 하느님 백성이 온전한 민중공동체를 형성하는 그 순간까지 하느님 백성안에서 성장해 가는 공동체인 것이다. 이렇게 할 때 민중신학은 민중을 하느님 백성 안에서 ‘벽을 허무는 주체’로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며, 민중해방운동도 그리스도교적 방향성을 가지게 될 것이다.
또한 이 대조사회는 기존사회와 기존교회를 향해서는 하나의 도전이 될 것이며, 예언자적 목소리가 될 것이다. 민중신학이 말하는 민중교회는 하느님 백성이라는 말이 무색한 성직주의적 경향이 득세하고 있으며, 가난을 이야기하면서도 결코 가난하지 않고, 민중의 아픔을 대변하기보다는 민중을 소외시키며, 소위 집단이기주의화 되어가고 있는 한국교회에 하느님 백성의 표징이 될 것이다.
또한 현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가 아직 교회안에 있다.”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