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초대교회 신자들의 평신도 사도직이 가지는 한계성
1) 외적 한계성
초기 한국 평신도 사도직의 외적 한계성이라하면 이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대항하던 사회상황으로부터 온 것들로 볼 수 있다.
(1) 정부의 쇄국정책
조선 후기 사회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사회 변동의 폭이 컸다. 그것은 조선 왕조의 봉건적 지배체제가 안고 있는 모순의 확대 속에서 움트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변천에 있어 외래적 계기, 즉 서양 문물의 전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5세기 이래 지리상의 새로운 발견으로 근대 국가로 발돋움 한 서양 여러 나라의 물결이 동양으로 밀려오면서 그들이 가하는 충격으로 말미암아 동양 여러나라는 크나큰 진통을 겪게 된다. 그러나 조선을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서구의 충격에서 잠시 외면되어 있었다. 그것은 지리적 위치가 서양인의 해상 교통로에서 빗나가 있는 지리적 편재성에만 기인되는 것이 아니라, 서양 열강들을 유인할 매력적인 특정 상품의 산출이 없었다는 경제적 이유와 더불어 성리학적 세계관에 집착하고 외부 세계에 대한 쇄국 정책을 고집하여 민족의 진취적인 해외 활동을 제약하였던 조선 사회의 정치적 조건이 가로놓여 있었다. 이에 서학(西學)이라 일컬어지던 천주교는 전통 사회의 질서와 가치 규범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새로운 가치체계를 창출해 나갔기에 정부와는 마찰이 빚어질 수밖에 없었다.1)
(2) 문화의 전통주의
조선의 지식인들은 부연사행2)을 통해 조선에 들어온 한문 서학서를 통해 서양의 과학 문명과 종교 윤리에 대해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17세기 초부터 꾸준히 재야 지식인들의 학문적 연구가 있었다. 이런 연구가 진행되는 가운데 생겨난 반응은 크게 서학 배격과 서학 수용의 대조적인 흐름을 낳았다. 특히 서학 배격의 태도는 문화적 편견에서 무조건 배격으로, 마침내 서학 탄압으로 귀결되었다. 서학은 조선 사회의 전통적 가치 체계와 쉽게 부합될 수 없었고, 특히 종교적 측면과 윤리적 측면에서는 경계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렇게 위기 의식이 고조되면서 종교활동뿐만 아니라 서학 그 자체에 대해서도 탄압이 이루어져서, 모든 서학서가 수거되어 소각되는 등 이후 격화되는 천주교 박해 정책으로 이어지게 된다. 즉 서학 실천 운동은 서학의 과학적 측면은 정착되지 못하였으나 윤리, 종교적 측면은 조선사회에 접착되어 당시 조선사회의 유교적 가치관, 사회예속, 신분의식, 가족제도를 흔들어 놓았다.3)
(3) 끊임없는 박해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리스도 신앙의 수용과 실천은 그때까지 우리 민족이 경험하지 못했고 새로운 종교 신앙의 수용이었고, 그리스도교적 가치 체계의 수용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전통적인 유교적 예속을 존중하는 전통 세력의 반발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이질적 종교 신앙이었고, 전통적 성리학 질서에서 배격받을 수밖에 없는 이질적 가치 체계였다. 이러한 반발과 배격이 곧 천주교 억압과 박해 정책으로 현실화되면서 한국 천주교회는 탄생하면서부터 박해 받기 시작하였다. 박해 1세기 동안 한국 천주교는 1만명 내외의 순교자를 내었다. 특히 엄격한 유교사회인 조선은 효를 중히 여기고 죽은 사람을 산 사람 섬기듯이 하였기에 조상 제사의 거부는 그리스도교 사상과 유교 사상의 기본적 갈등으로 박해의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다.4)
(4) 교황청과 중국교회의 상황
교회의 2000년 간의 역사에는 시련이 많았고 특히 근대 교회사의 처참한 역사는 그 빛나는 일면에도 불구하고 침울함을 면할 수 없다. 한마디로 반항과 혁명의 연속이고 수난의 세기였다. 특히 이 시기에는 교회사의 일대 수난기인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기도 하였다.
근세에 들어오면서 국가주의의 발달로 그리스도교적 보편주의는 사라지고 이른바 전제 군주의 절대주의 시대를 맞았고, 특히 루이 14세는 “짐은 국가이다”(L’etat, c’est moi)란 말로 왕과 제후가 교회를 지배하려 하였고, 세속 군주는 교회를 국가의 종으로 삼고자 하였다. 이런 억압에 가장 큰 장벽이 된 것은 물론 교황이었다. 따라서 국가는 교황청을 극도로 괴롭혔다. 이는 프랑스에서 이탈리아, 독일, 오스트리아에 까지 이어진다. 교황은 악전고투를 거듭했고 이런 고난은 클레멘스 9세(1667-1669)에서 비오 6세(1775-1799)에 이르기까지 무려 2세기간 계속되었고, 프랑스 혁명으로 잠시 절대 군주의 세력에 벗어났으나 이후 곧 공포정치와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교회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특히 18세기 중엽부터 교회는 내부 학설의 대립으로도 큰 고통을 받는다. 즉 ‘얀세니즘’과 ‘갈리아주의’5)와 반종교의 온상이 된 프랑스의 백과 사전파와 자유주의 학설과 ‘유리주의’(Rationalismus)에 대항해 예수회가 분발하기도 했으나 오히려 예수회는 해산을 강요당했다. 프랑스 혁명으로 교회는 일대 전환기를 맞았고 1789년 국민의회는 교회재산 몰수령을 내렸고 수도원도 거의 해산되었으며 1790년 7월 12일에는 카뮈가 기초한 ‘성직자 공민헌장’을 통해 성직 계급이 국가에 종속되는 등 파리의 혁명정부는 1792년 9월 죄없는 성직자 3백여명과 남녀노소 9백여 명을 학살하였다. 이후 공포정치 하에 성직자들의 순교와 프랑스 정교 조약등에서 나폴레옹은 교회의 권리를 유린하는 등 교회에 대한 탄압으로 교황청의 상황은 세계 저편 동방에서 싹튼 신앙을 보호하고 키워줄 여건이 못되었다.6)
당시 중국도 1628년 경부터 본격적으로 문제시된 의례논쟁과 이것이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못해 1704년 11월 20일 예수회 설교 정책을 반대하는 교서가 내려지고 이에 중국황제는 1706년 교황 특사와 매그로 주교에 대한 추방령을 내리고 마태오 릿치의 ‘적응주의’선교 방식을 공포해 1704년 금령을 확인하였고, 이어 1742년 교황 베네딕투스 14세(1740-1721)가 교서 ‘Ex quosigulari’를 통해 1715년의 금령을 재확인하였다. 이러한 금령은 1939년 해제될 때 까지 중국과 조선의 교회 박해의 원인이 된 것이다.7)
2) 내적 한계성
이점 역시 외적 상황으로부터 조건 지워진 것이지만 공동체 내의 문제점에서 직접온 것들이다.
(1) 사제, 성사의 부재.
1784년에서 1801년 신유박해의 대타격을 받게 되기가지 15년간의 초창기의 천주교회는 성직자 없이 창설되고 평신도에 의해 주도되었다. 따라서 미사 성제도 없었고 천주를 흠숭하는 공적 장소인 교회건물 조차 가지지 못했다. 특히 평신도 사도직에 참여한다는 것은 주예수에 의해 ‘세례와 견진을 통해서’(perbaptismum et confirmafionem) 가능한데(교회헌장 33항), 앞서도 밝힌 것처럼 견진 성사가 집전된 것은 후에 프랑스 선교사들이 들어옴으로써 이루어졌다. 물론 초기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은총과 성령의 활동안에서 평신도 사도직에 온전히 참여했다고 볼 수 있으나 성찬을 통해 또 여러 성사를 통해 성장하여 힘을 얻을 기회가 제한된 것이 사실이다.
(2) 출중한 평신도 지도자들을 잃음
초대교회 신앙 공동체적 삶은 처음 교회 창설기에서 신유박해 전까지는 주로 지식층의 출중한 지도자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나 박해로 교회는 이러한 지도자들 잃게 되고 성직자 없는 교회 안에서 교리를 가르치고, 교회서적을 번역하며 신부 영입을 위해 노력하며 진실로 모범을 보이던 지도자를 잃은 교회의 손실은 커다란 시련이 아닐 수 없었다.
(3) 배교
천주교는 현실적인 고난과 불안에 허덕이던 민중들에게 현세 구복적인 신앙의 차원에서 민중에게 전파되기도 하였다. 이들 중에 진실로 주님의 말씀을 진리의 빛으로 받아들였던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박해라는 커다란 시련에 견디지 못하고 배교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이는 바위에 떨어진 씨앗처럼 한때는 말씀을 들으며 기뻐하고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뿌리가 없어 시련과 유혹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로(루가 8,11), 이들은 회개로 다시 순교의 영광을 받기도 했으나 현세적 유혹에 이끌려 신자들을 밀고하는 경우까지도 있었다. 즉 현세 구복을 찾아 천주교에 나온 이들에게 박해란 결코 쉬운 장애물이 아니었다.
결 론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다. 이는 성서를 통해 분명히 드러나는 사실이다. 물론 하느님의 백성 안에는 각자가 받은 카리스마에 따라 직분상 구별이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으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기본적인 동등성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활동과 직무를 사도들을 통해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 까지 계속하려 하였고 이러한 사도직은 평신도에게 주어졌다.
그런데 초대교회 이래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전까지 평신도가 ‘하느님의 백성’이란 사실이 시대적 상황과 교회 구조속에서 도외시 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서도 성직자에 대한 의존도는 무척 높다. 물론 이러한 문제에 대해, 도한 평신도의 교회 참여의 확대라는 점에서 각계에서 노력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평신도의 사도직 수행에 관한 신자들의 자각 정도에 대한 것이다.
이 논문에서 제시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이점에 대한 것이다. 한국 교회의 자랑할 만한 특수성이란 바로 평신도의 손으로 세워진 교회이며, 그들의 피의 씨앗을 통해 자라 온 교회라는 점이다. 바로 이 점을 현재의 평신도는 깊이 자각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목적에서 1장에서는 평신도에 대한 어원적 고찰과 성서적 고찰을 통해 평신도란 ‘하느님의 백성’을 가리키고 있음을 지적하였고, 나아가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나타난 평신도의 본질과 속성, 즉 성세와 견진으로 하느님 백성에 들고 교회와 세례안에서 예언직, 사제직, 왕직을 수행해야 할 임무를 받은 평신도의 위치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초대 교회에서 평신도들의 모습을 전례와 영성면으로 나누어 살펴 보았다. 이들은 이미 공동체 전례 안에서,또 개인 신심기도를 통해 자신들이 굳게 신앙하고 있던 하느님과 교회에 대해 참으로 사도시대 이후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삶을 이루어 나갔다. 이러한 삶 속에서 여러가지 어려움, 즉, 국내외의 상황과 전통 문화와의 마찰 이로 인한 박해 안에서도 성령의 활동하심에 힘입어 분명히 그 시대 사회안에서 평신도 사도직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세속의 생활안에서 전례로 힘을 얻고, 각자의 위치 안에서 자신들이 속한 세상을 성화시켜 나간 것이다. 이러한 초대교회 평신도들의 실례는 극히 일부분밖에 제시하지 못했으나, 그러한 몇가지 대표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도 박해 중에도 신앙을 수호했던, 그리고 믿는 신앙을 목숨으로 증거했던 수많은 신자들의 삶 모두가 훌륭한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선조들의 사도직 참여에 대해 되짚어 보는 것으로 많은 것을 시사받을 수 있다. 평신도는 하찮은 존재가 아니다. 평신도는 성직자의 사목 대상물도 아니다. 성직자와 평신도는 모두 세례를 통해 평등한 존재로, 같은 목적을 가진 협력자라는 의식하에서 각자 주어진 조건에 따라 사명 수행에 힘써야 할 것이다. 이때 이 땅에는 진정 하느님의 나라가 건설 될 것이다.

2. 초대교회 신자들의 평신도 사도직이 가지는 한계성
1) 외적 한계성
초기 한국 평신도 사도직의 외적 한계성이라하면 이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대항하던 사회상황으로부터 온 것들로 볼 수 있다.
(1) 정부의 쇄국정책
조선 후기 사회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사회 변동의 폭이 컸다. 그것은 조선 왕조의 봉건적 지배체제가 안고 있는 모순의 확대 속에서 움트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변천에 있어 외래적 계기, 즉 서양 문물의 전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5세기 이래 지리상의 새로운 발견으로 근대 국가로 발돋움 한 서양 여러 나라의 물결이 동양으로 밀려오면서 그들이 가하는 충격으로 말미암아 동양 여러나라는 크나큰 진통을 겪게 된다. 그러나 조선을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서구의 충격에서 잠시 외면되어 있었다. 그것은 지리적 위치가 서양인의 해상 교통로에서 빗나가 있는 지리적 편재성에만 기인되는 것이 아니라, 서양 열강들을 유인할 매력적인 특정 상품의 산출이 없었다는 경제적 이유와 더불어 성리학적 세계관에 집착하고 외부 세계에 대한 쇄국 정책을 고집하여 민족의 진취적인 해외 활동을 제약하였던 조선 사회의 정치적 조건이 가로놓여 있었다. 이에 서학(西學)이라 일컬어지던 천주교는 전통 사회의 질서와 가치 규범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새로운 가치체계를 창출해 나갔기에 정부와는 마찰이 빚어질 수밖에 없었다.1)
(2) 문화의 전통주의
조선의 지식인들은 부연사행2)을 통해 조선에 들어온 한문 서학서를 통해 서양의 과학 문명과 종교 윤리에 대해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17세기 초부터 꾸준히 재야 지식인들의 학문적 연구가 있었다. 이런 연구가 진행되는 가운데 생겨난 반응은 크게 서학 배격과 서학 수용의 대조적인 흐름을 낳았다. 특히 서학 배격의 태도는 문화적 편견에서 무조건 배격으로, 마침내 서학 탄압으로 귀결되었다. 서학은 조선 사회의 전통적 가치 체계와 쉽게 부합될 수 없었고, 특히 종교적 측면과 윤리적 측면에서는 경계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렇게 위기 의식이 고조되면서 종교활동뿐만 아니라 서학 그 자체에 대해서도 탄압이 이루어져서, 모든 서학서가 수거되어 소각되는 등 이후 격화되는 천주교 박해 정책으로 이어지게 된다. 즉 서학 실천 운동은 서학의 과학적 측면은 정착되지 못하였으나 윤리, 종교적 측면은 조선사회에 접착되어 당시 조선사회의 유교적 가치관, 사회예속, 신분의식, 가족제도를 흔들어 놓았다.3)
(3) 끊임없는 박해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리스도 신앙의 수용과 실천은 그때까지 우리 민족이 경험하지 못했고 새로운 종교 신앙의 수용이었고, 그리스도교적 가치 체계의 수용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전통적인 유교적 예속을 존중하는 전통 세력의 반발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이질적 종교 신앙이었고, 전통적 성리학 질서에서 배격받을 수밖에 없는 이질적 가치 체계였다. 이러한 반발과 배격이 곧 천주교 억압과 박해 정책으로 현실화되면서 한국 천주교회는 탄생하면서부터 박해 받기 시작하였다. 박해 1세기 동안 한국 천주교는 1만명 내외의 순교자를 내었다. 특히 엄격한 유교사회인 조선은 효를 중히 여기고 죽은 사람을 산 사람 섬기듯이 하였기에 조상 제사의 거부는 그리스도교 사상과 유교 사상의 기본적 갈등으로 박해의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다.4)
(4) 교황청과 중국교회의 상황
교회의 2000년 간의 역사에는 시련이 많았고 특히 근대 교회사의 처참한 역사는 그 빛나는 일면에도 불구하고 침울함을 면할 수 없다. 한마디로 반항과 혁명의 연속이고 수난의 세기였다. 특히 이 시기에는 교회사의 일대 수난기인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기도 하였다.
근세에 들어오면서 국가주의의 발달로 그리스도교적 보편주의는 사라지고 이른바 전제 군주의 절대주의 시대를 맞았고, 특히 루이 14세는 “짐은 국가이다”(L’etat, c’est moi)란 말로 왕과 제후가 교회를 지배하려 하였고, 세속 군주는 교회를 국가의 종으로 삼고자 하였다. 이런 억압에 가장 큰 장벽이 된 것은 물론 교황이었다. 따라서 국가는 교황청을 극도로 괴롭혔다. 이는 프랑스에서 이탈리아, 독일, 오스트리아에 까지 이어진다. 교황은 악전고투를 거듭했고 이런 고난은 클레멘스 9세(1667-1669)에서 비오 6세(1775-1799)에 이르기까지 무려 2세기간 계속되었고, 프랑스 혁명으로 잠시 절대 군주의 세력에 벗어났으나 이후 곧 공포정치와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교회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특히 18세기 중엽부터 교회는 내부 학설의 대립으로도 큰 고통을 받는다. 즉 ‘얀세니즘’과 ‘갈리아주의’5)와 반종교의 온상이 된 프랑스의 백과 사전파와 자유주의 학설과 ‘유리주의’(Rationalismus)에 대항해 예수회가 분발하기도 했으나 오히려 예수회는 해산을 강요당했다. 프랑스 혁명으로 교회는 일대 전환기를 맞았고 1789년 국민의회는 교회재산 몰수령을 내렸고 수도원도 거의 해산되었으며 1790년 7월 12일에는 카뮈가 기초한 ‘성직자 공민헌장’을 통해 성직 계급이 국가에 종속되는 등 파리의 혁명정부는 1792년 9월 죄없는 성직자 3백여명과 남녀노소 9백여 명을 학살하였다. 이후 공포정치 하에 성직자들의 순교와 프랑스 정교 조약등에서 나폴레옹은 교회의 권리를 유린하는 등 교회에 대한 탄압으로 교황청의 상황은 세계 저편 동방에서 싹튼 신앙을 보호하고 키워줄 여건이 못되었다.6)
당시 중국도 1628년 경부터 본격적으로 문제시된 의례논쟁과 이것이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못해 1704년 11월 20일 예수회 설교 정책을 반대하는 교서가 내려지고 이에 중국황제는 1706년 교황 특사와 매그로 주교에 대한 추방령을 내리고 마태오 릿치의 ‘적응주의’선교 방식을 공포해 1704년 금령을 확인하였고, 이어 1742년 교황 베네딕투스 14세(1740-1721)가 교서 ‘Ex quosigulari’를 통해 1715년의 금령을 재확인하였다. 이러한 금령은 1939년 해제될 때 까지 중국과 조선의 교회 박해의 원인이 된 것이다.7)
2) 내적 한계성
이점 역시 외적 상황으로부터 조건 지워진 것이지만 공동체 내의 문제점에서 직접온 것들이다.
(1) 사제, 성사의 부재.
1784년에서 1801년 신유박해의 대타격을 받게 되기가지 15년간의 초창기의 천주교회는 성직자 없이 창설되고 평신도에 의해 주도되었다. 따라서 미사 성제도 없었고 천주를 흠숭하는 공적 장소인 교회건물 조차 가지지 못했다. 특히 평신도 사도직에 참여한다는 것은 주예수에 의해 ‘세례와 견진을 통해서’(perbaptismum et confirmafionem) 가능한데(교회헌장 33항), 앞서도 밝힌 것처럼 견진 성사가 집전된 것은 후에 프랑스 선교사들이 들어옴으로써 이루어졌다. 물론 초기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은총과 성령의 활동안에서 평신도 사도직에 온전히 참여했다고 볼 수 있으나 성찬을 통해 또 여러 성사를 통해 성장하여 힘을 얻을 기회가 제한된 것이 사실이다.
(2) 출중한 평신도 지도자들을 잃음
초대교회 신앙 공동체적 삶은 처음 교회 창설기에서 신유박해 전까지는 주로 지식층의 출중한 지도자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나 박해로 교회는 이러한 지도자들 잃게 되고 성직자 없는 교회 안에서 교리를 가르치고, 교회서적을 번역하며 신부 영입을 위해 노력하며 진실로 모범을 보이던 지도자를 잃은 교회의 손실은 커다란 시련이 아닐 수 없었다.
(3) 배교
천주교는 현실적인 고난과 불안에 허덕이던 민중들에게 현세 구복적인 신앙의 차원에서 민중에게 전파되기도 하였다. 이들 중에 진실로 주님의 말씀을 진리의 빛으로 받아들였던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박해라는 커다란 시련에 견디지 못하고 배교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이는 바위에 떨어진 씨앗처럼 한때는 말씀을 들으며 기뻐하고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뿌리가 없어 시련과 유혹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로(루가 8,11), 이들은 회개로 다시 순교의 영광을 받기도 했으나 현세적 유혹에 이끌려 신자들을 밀고하는 경우까지도 있었다. 즉 현세 구복을 찾아 천주교에 나온 이들에게 박해란 결코 쉬운 장애물이 아니었다.
결 론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다. 이는 성서를 통해 분명히 드러나는 사실이다. 물론 하느님의 백성 안에는 각자가 받은 카리스마에 따라 직분상 구별이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으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기본적인 동등성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활동과 직무를 사도들을 통해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 까지 계속하려 하였고 이러한 사도직은 평신도에게 주어졌다.
그런데 초대교회 이래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전까지 평신도가 ‘하느님의 백성’이란 사실이 시대적 상황과 교회 구조속에서 도외시 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서도 성직자에 대한 의존도는 무척 높다. 물론 이러한 문제에 대해, 도한 평신도의 교회 참여의 확대라는 점에서 각계에서 노력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평신도의 사도직 수행에 관한 신자들의 자각 정도에 대한 것이다.
이 논문에서 제시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이점에 대한 것이다. 한국 교회의 자랑할 만한 특수성이란 바로 평신도의 손으로 세워진 교회이며, 그들의 피의 씨앗을 통해 자라 온 교회라는 점이다. 바로 이 점을 현재의 평신도는 깊이 자각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목적에서 1장에서는 평신도에 대한 어원적 고찰과 성서적 고찰을 통해 평신도란 ‘하느님의 백성’을 가리키고 있음을 지적하였고, 나아가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나타난 평신도의 본질과 속성, 즉 성세와 견진으로 하느님 백성에 들고 교회와 세례안에서 예언직, 사제직, 왕직을 수행해야 할 임무를 받은 평신도의 위치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초대 교회에서 평신도들의 모습을 전례와 영성면으로 나누어 살펴 보았다. 이들은 이미 공동체 전례 안에서,또 개인 신심기도를 통해 자신들이 굳게 신앙하고 있던 하느님과 교회에 대해 참으로 사도시대 이후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삶을 이루어 나갔다. 이러한 삶 속에서 여러가지 어려움, 즉, 국내외의 상황과 전통 문화와의 마찰 이로 인한 박해 안에서도 성령의 활동하심에 힘입어 분명히 그 시대 사회안에서 평신도 사도직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세속의 생활안에서 전례로 힘을 얻고, 각자의 위치 안에서 자신들이 속한 세상을 성화시켜 나간 것이다. 이러한 초대교회 평신도들의 실례는 극히 일부분밖에 제시하지 못했으나, 그러한 몇가지 대표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도 박해 중에도 신앙을 수호했던, 그리고 믿는 신앙을 목숨으로 증거했던 수많은 신자들의 삶 모두가 훌륭한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선조들의 사도직 참여에 대해 되짚어 보는 것으로 많은 것을 시사받을 수 있다. 평신도는 하찮은 존재가 아니다. 평신도는 성직자의 사목 대상물도 아니다. 성직자와 평신도는 모두 세례를 통해 평등한 존재로, 같은 목적을 가진 협력자라는 의식하에서 각자 주어진 조건에 따라 사명 수행에 힘써야 할 것이다. 이때 이 땅에는 진정 하느님의 나라가 건설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