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한국 교회의 선교역사
한국 교회는 선교사에 의한 직접적인 복음선포가 아닌 간접적인 경로를 통해서 시작되었다는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17세기 초엽부터 북경을 드나드는 사신들을 통해 『천주실의』를 비롯한 한자로 저술된 천주교 서적들이 조선에 도입되었다. 선조 이후 갈수록 수량이 늘어난 이 한역서학서는 지식인층에게 자주 읽혀지는데, 이때는 신앙의 차원이 아니라 지식의 차원에서 탐구되어졌다. 당시 조선 사회는 성리학적 사상이 지배하고 있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거치면서 근본적인 개혁이 요구되었고, ‘허(虛)’의 학문인 성리학으로는 사회의 모순을 해결할 수가 없었다. 또한 성리학을 신봉하는 봉건관료, 양반지배층은 그러한 개혁의지도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식인들은 사회를 다시 정립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 체계를 갈망하고 모색하였다. ‘허’의 학문인 성리학이 아니라 ‘실(實)’의 학문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때마침 조선 사행원들을 통해서 많은 한역서학서들이 들어오고 그 안에 담겨진 신문명, 과학기술은 그것이 조선사회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받아들여졌다. 지식인들, 곧 실학 사상가들, 그 중에서도 남인의 소장 학자들은 가톨릭이 서양의 과학기술을 만들어내는 사상적 원천이라고 생각하고 ‘서학’이라는 새로운 학풍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이에 따라 천주교 교리에 대한 연구가 활기를 띠고 학문적인 논쟁점으로까지 등장하였다. 1770년경 홍유한이라는 지식인이 처음으로 교리서를 스스로 공부하여 주일의 의무를 혼자서 지키고 묵상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그 이후 권철신, 정약전, 이벽 등이 기도와 재계 등으로 천주교 계명의 일부를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가 열렸다. 강학자 권철신이 정약전과 수명의 학자들과 함께 학문을 연구하기 위하여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를 갖었다. 여기에 이벽이 참여하여 10여일 간 성현들의 윤리서, 서양 선교사들의 철학, 수학, 종교에 관한 책들을 검토하고 강학하였다. 이 강학회는 천주교 교리를 학문적으로 연구하였고, 후에 이벽이 이승훈으로 하여금 동지사 편에 수행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도록 권유한 것과 결부하여 교회창립의 전주로 여겨진다.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한국인 최초의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이벽, 권일신 등이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했다. 진산의 윤지충, 김범우, 정약진, 정약용 형제, 홍락민, 지홍, 샤반 등이 성세입교하고 포교에 노력했다. 이들이 바로 자치적 한국교회 설립의 역군들인 것이다. 이들이 1784년부터 명래동(지금 명동성당 자리) 김범우의 집에서 정기 집회를 갖고 기도하며 신앙 실천생활을 시작한 것이 한국교회의 역사적인 시작이 된다.1)
이렇게 우리 민족은 자발적으로 올바르고 참된 인생의 목적을 찾아 천주교의 신앙운동을 일으켰다. 1784년 서울에 천주교회를 세워 불쌍한 이 민족의 구제 운동을 일으켰으나, 곧 관리들에게 발각되어 해산되고, 이 후 1백여 년간에 걸친 박해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박해 시기 동안 네 차례의 큰 박해가 있었으니, 1800년부터 1801년에 걸쳤던 신유교난(辛酉敎難)과, 1839년부터 1841년에 걸쳤던 기해(己亥) 교난과, 1846년에 있었던 병오(丙午) 교난과, 1866년부터 1871년에 걸쳤던 병인(丙寅) 교난이 그것이었다. 이들 박해의 표면상 이유는, 천주교 신자들이 조상의 신주(神主)를 모시지 않고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는데 있었지만, 사실상 이유는, 정권을 탐내던 무리들이 그 반대파를 내모는 방법의 하나로 천주교 신자들을 먼저 탄압한 데 있었다. 1795년 중국인 신부 주 문모(周 文謨)가 들어와 전교하게 되고, 그 결과 1만여 명의 신자가 생겨났다. 하지만 신유 교난으로 말미암아 주 신부와 3백여 명의 신자가 순교하게 되고, 이후 33년 동안 목자 없는 시절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중에서도 신자들은 교회 재건 운동을 힘차게 일으켜, 1827년에는 성직자를 보내줄 것을 간청하는 편지를 로마 교황에게 보냈다. 이에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조선에 독립된 교구를 두기로 결정하는 한편, 파리 외방 전교회로 하여금 조선 교구를 맡게 하였다. 1833년 중국인 신부 유방제와 1836년 불란서 신부 모방(Maubant), 그리고 1837년 앵베르(Imbert) 주교가 입국함으로써 비로소 조선 교회는 완전한 제도를 갖추게 되었고, 신자의 수도 날로 늘어나서 9천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기해 교난이 일어났다. 3명의 성직자와 2백여 명의 교우가 순교하였다. 이어 병오 교난으로 신부가 되어 귀국한 김 대건과 20여 명의 교우가 순교하였다. 강화 도령 철종이 왕위에 올랐다. 철종이 왕위에 있던 10년 동안에는 교회에 대하여 너그러운 정책을 썼으므로, 신자의 수는 2만 3천명을 헤아리게 되었고 성직자의 수도 12명이나 되었다. 철종이 죽고 고종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아버지 흥선 대원군은 정권을 잡고 병인 교난을 일으켰다. 9명의 성직자와 9천여 명의 교우가 순교하였다. 그러던 중 1873년 민비(閔妃) 일파가 대원군에게서 정권을 빼앗고, 일본과 조약을 맺음으로써 나라의 문을 열었다. 불란서 성직자들이 그해부터 다시 숨어들어와서 신교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온갖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1886년에 불란서와 조약을 맺게 되고, 다음해부터 불란서 사람들도 자유롭게 입국할 수 있게 되어, 조선 교회도 비로소 햇빛을 보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조선 천주교회는 1백여 년 동안에 걸쳐 모진 박해를 받아왔지만, 그래도 한 번 뿌려진 복음의 씨는 순교자의 피를 거름으로 하여 다시 움트고 자라서 훌륭한 열매를 맺고 마지막의 승리를 가져오게 되었다. 성인 떼르뚤리아노의 말이 있다. “너희(관리)들은 우리(교우)들을 십자가에 매달고 고문하고 때리고 죽이라. 너희들이 하는 짓이 격심할수록 우리들은 더욱 큰 효과를 거둔다. 참으로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교인들의 씨이니라”2)
조선의 천주교 수용과정에 있어서 그 역사적 의미를 세 가지로 들 수 있다. 첫째, 선교사 없이 학문적 연구를 통해서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수용했다는 것이다. 둘째, 자치적으로 교회가 설립되었고 나아가 순교를 통해서 하느님의 진리를 증거했다는 점이다. 셋째, 성직자가 아닌 평신도가 주동이 된 평신도의 교회라는 것이다.

4.2 한국 교회의 선교역사
한국 교회는 선교사에 의한 직접적인 복음선포가 아닌 간접적인 경로를 통해서 시작되었다는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17세기 초엽부터 북경을 드나드는 사신들을 통해 『천주실의』를 비롯한 한자로 저술된 천주교 서적들이 조선에 도입되었다. 선조 이후 갈수록 수량이 늘어난 이 한역서학서는 지식인층에게 자주 읽혀지는데, 이때는 신앙의 차원이 아니라 지식의 차원에서 탐구되어졌다. 당시 조선 사회는 성리학적 사상이 지배하고 있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거치면서 근본적인 개혁이 요구되었고, ‘허(虛)’의 학문인 성리학으로는 사회의 모순을 해결할 수가 없었다. 또한 성리학을 신봉하는 봉건관료, 양반지배층은 그러한 개혁의지도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식인들은 사회를 다시 정립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 체계를 갈망하고 모색하였다. ‘허’의 학문인 성리학이 아니라 ‘실(實)’의 학문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때마침 조선 사행원들을 통해서 많은 한역서학서들이 들어오고 그 안에 담겨진 신문명, 과학기술은 그것이 조선사회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받아들여졌다. 지식인들, 곧 실학 사상가들, 그 중에서도 남인의 소장 학자들은 가톨릭이 서양의 과학기술을 만들어내는 사상적 원천이라고 생각하고 ‘서학’이라는 새로운 학풍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이에 따라 천주교 교리에 대한 연구가 활기를 띠고 학문적인 논쟁점으로까지 등장하였다. 1770년경 홍유한이라는 지식인이 처음으로 교리서를 스스로 공부하여 주일의 의무를 혼자서 지키고 묵상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그 이후 권철신, 정약전, 이벽 등이 기도와 재계 등으로 천주교 계명의 일부를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가 열렸다. 강학자 권철신이 정약전과 수명의 학자들과 함께 학문을 연구하기 위하여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를 갖었다. 여기에 이벽이 참여하여 10여일 간 성현들의 윤리서, 서양 선교사들의 철학, 수학, 종교에 관한 책들을 검토하고 강학하였다. 이 강학회는 천주교 교리를 학문적으로 연구하였고, 후에 이벽이 이승훈으로 하여금 동지사 편에 수행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도록 권유한 것과 결부하여 교회창립의 전주로 여겨진다.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한국인 최초의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이벽, 권일신 등이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했다. 진산의 윤지충, 김범우, 정약진, 정약용 형제, 홍락민, 지홍, 샤반 등이 성세입교하고 포교에 노력했다. 이들이 바로 자치적 한국교회 설립의 역군들인 것이다. 이들이 1784년부터 명래동(지금 명동성당 자리) 김범우의 집에서 정기 집회를 갖고 기도하며 신앙 실천생활을 시작한 것이 한국교회의 역사적인 시작이 된다.1)
이렇게 우리 민족은 자발적으로 올바르고 참된 인생의 목적을 찾아 천주교의 신앙운동을 일으켰다. 1784년 서울에 천주교회를 세워 불쌍한 이 민족의 구제 운동을 일으켰으나, 곧 관리들에게 발각되어 해산되고, 이 후 1백여 년간에 걸친 박해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박해 시기 동안 네 차례의 큰 박해가 있었으니, 1800년부터 1801년에 걸쳤던 신유교난(辛酉敎難)과, 1839년부터 1841년에 걸쳤던 기해(己亥) 교난과, 1846년에 있었던 병오(丙午) 교난과, 1866년부터 1871년에 걸쳤던 병인(丙寅) 교난이 그것이었다. 이들 박해의 표면상 이유는, 천주교 신자들이 조상의 신주(神主)를 모시지 않고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는데 있었지만, 사실상 이유는, 정권을 탐내던 무리들이 그 반대파를 내모는 방법의 하나로 천주교 신자들을 먼저 탄압한 데 있었다. 1795년 중국인 신부 주 문모(周 文謨)가 들어와 전교하게 되고, 그 결과 1만여 명의 신자가 생겨났다. 하지만 신유 교난으로 말미암아 주 신부와 3백여 명의 신자가 순교하게 되고, 이후 33년 동안 목자 없는 시절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중에서도 신자들은 교회 재건 운동을 힘차게 일으켜, 1827년에는 성직자를 보내줄 것을 간청하는 편지를 로마 교황에게 보냈다. 이에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조선에 독립된 교구를 두기로 결정하는 한편, 파리 외방 전교회로 하여금 조선 교구를 맡게 하였다. 1833년 중국인 신부 유방제와 1836년 불란서 신부 모방(Maubant), 그리고 1837년 앵베르(Imbert) 주교가 입국함으로써 비로소 조선 교회는 완전한 제도를 갖추게 되었고, 신자의 수도 날로 늘어나서 9천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기해 교난이 일어났다. 3명의 성직자와 2백여 명의 교우가 순교하였다. 이어 병오 교난으로 신부가 되어 귀국한 김 대건과 20여 명의 교우가 순교하였다. 강화 도령 철종이 왕위에 올랐다. 철종이 왕위에 있던 10년 동안에는 교회에 대하여 너그러운 정책을 썼으므로, 신자의 수는 2만 3천명을 헤아리게 되었고 성직자의 수도 12명이나 되었다. 철종이 죽고 고종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아버지 흥선 대원군은 정권을 잡고 병인 교난을 일으켰다. 9명의 성직자와 9천여 명의 교우가 순교하였다. 그러던 중 1873년 민비(閔妃) 일파가 대원군에게서 정권을 빼앗고, 일본과 조약을 맺음으로써 나라의 문을 열었다. 불란서 성직자들이 그해부터 다시 숨어들어와서 신교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온갖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1886년에 불란서와 조약을 맺게 되고, 다음해부터 불란서 사람들도 자유롭게 입국할 수 있게 되어, 조선 교회도 비로소 햇빛을 보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조선 천주교회는 1백여 년 동안에 걸쳐 모진 박해를 받아왔지만, 그래도 한 번 뿌려진 복음의 씨는 순교자의 피를 거름으로 하여 다시 움트고 자라서 훌륭한 열매를 맺고 마지막의 승리를 가져오게 되었다. 성인 떼르뚤리아노의 말이 있다. “너희(관리)들은 우리(교우)들을 십자가에 매달고 고문하고 때리고 죽이라. 너희들이 하는 짓이 격심할수록 우리들은 더욱 큰 효과를 거둔다. 참으로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교인들의 씨이니라”2)
조선의 천주교 수용과정에 있어서 그 역사적 의미를 세 가지로 들 수 있다. 첫째, 선교사 없이 학문적 연구를 통해서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수용했다는 것이다. 둘째, 자치적으로 교회가 설립되었고 나아가 순교를 통해서 하느님의 진리를 증거했다는 점이다. 셋째, 성직자가 아닌 평신도가 주동이 된 평신도의 교회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