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아에 대한 신적 모습의 제시

1) 상향적 움직임
(1) 왕 혹은 메시아에게 신적 이름을 적용함
(시편 45,7; 이사야 9,5; 예레 23,6)
지상에 살고 있는 어떤 한 사람에게서 신적인 위대함을 인식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왕이나 어떤 사람이 유일하신 하느님에게 연결되어 있다는 유일신 사상과도 관계가 있다. 특히 인간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에게서 신적인 것을 찾는 것이 이스라엘 안에 보존되어 있었다.


(2) 신적 부자관계의 근거
왕을 하느님과 연결시키려는 노력

① 나단의 예언 (2사무 7,1-16)
야훼는 다윗의 후손에게 당신이 친히 아버지로서 행동할 것을 약속하신다. 2사무 7,14 “내가 친히 그의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느님께서 아버지처럼 행동하실 것을 약속하신다. 하느님은 아들로써 여겨지는 그 사람에게 인간적 차원으로 낮추어 나타내신다. 즉 인간의 모습을 하느님과 연결시키려는 이스라엘의 노력이 보인다. 시편 89,26-27 “그는 나를 불러 ‘당신은 나의 아버지, 나의 하느님, 내 구원의 바위이십니다’하겠고 나는 그를 맏아들로 삼아 세상 임금 중에 가장 높은 임금으로 세우리라.” 다윗 왕에게 부여된 품위와 권능을 강조한다. 즉 하느님께서 가지고 있는 것과 유사한 권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왕들 중에 가장 높다는 것을 나타낸다.

② 시편 2,7
시편 2,7 “나를 왕으로 세우시며 선포하신 야훼의 칙령을 들어라. ‘너는 내 아들, 나 오늘 너를 낳았노라. 나에게 청하여라. 만방을 너에게 유산으로 주리라. 땅 끝에서 땅 끝까지 너의 것이 되리라. 저들을 질그릇 부수듯이 철퇴로 짓부수어라.” 여기서도 일종의 계약의 행위가 보인다. 왕은 야훼와의 계약을 받아들인다. 시편은 역사적인 왕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동시에 이상적인, 메시아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신적 부자관계는 순수한 법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즉 왕의 정당성을 보증하는 야훼의 칙령에 의한 것이고 그것은 양자결혼, 하느님 아버지께서 뽑아 주셨기에 왕을 당신 아들로 여기는 하느님의 행위로부터 기인한다. 그래서 이런 왕이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런 단순한 법적인 가치를 넘어서 ‘나 오늘 너를 낳았노라’한 어떤 실제적인 신적인 통교, 정말로 태어난 부자관계를 하느님 안에서 한 인간이 태어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것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한 인간의 모습에 자신들의 메시아 사상을 적용시켜서 하느님께 연결시키려는 모습이 나타난다.

2) 하향적 길
(1) 사람들 가운데 신적 지혜의 도래
성경에서 하느님의 지혜는 야훼와 구별된 또 하나의 위격으로 나타난다.
잠언 8,22 “야훼께서 만물을 지으시려던 한 처음에 모든 것에 앞서 나를 지으셨다.”
집회 1,1 “모든 지혜는 주님께로부터 오며 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다.”
지혜 7,25 “지혜는 하느님의 떨치시는 힘의 바람이며 전능하신 분께로부터 나오는 영광의 티없는 빛이다. 그러므로 티끌만한 점 하나라도 지혜를 더럽힐 수 없다.” 지혜는 하느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협력자로 활동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초세기에 있어서의 로고스와도 비슷하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지혜를 통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항상 사람 곁에 있었다는 것이다. 잠언 8,31 “나는 사람들과 같이 있는 것이 즐거워 그가 만드신 땅 위에서 뛰놀았다.”
다른 한편으로 지혜의 역할은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하여주기도 한다 (잠언 8,34 “날마다 내 집 문을 쳐다보고 내 집 문 앞에 지켜 서서 내 말을 듣는 사람은 복받으리라.”). 하느님은 야곱과 이스라엘에게 이 지혜를 주셨다. 바로 그 지혜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온 땅을 지배하게 되었다. 포도나무처럼 풍성한 열매를 맺는 시온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모든 세대를 통해서 거룩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가서 그들이 하느님과 벗이 되게 하여 준다. 따라서 지혜에 메시아적 기능이 주어지고 있다. 가르침의 기능인 메시아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지혜가 나타나고 있다. 특히 이 지혜가 사람들과 가까이 있고 사람들과 함께 뛰놀았다. 즉 지혜를 가까이 할 때 하느님께 가까이 가게 되고 번성하게 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선사한다. 그러나 이 지혜의 신비,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기인하는, 인간을 초월하는, 지금까지 인간적 메시아에 대해서 말한 모든 것을 초월하고 있다. 어찌보면 신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메시아를 기다리고 왕에게 신적 사상을 부여하려는 노력과는 달리 외적인 면에서만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삶을 꿰뚫는 지혜를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구약성서에서 지혜(hokma)는 인간의 모든 영역을 감싸고 있다. 하느님께 대한 인식, 사랑, 윤리, 정의, 정치, 사회, 일상적 삶의 모든 행동이 하느님의 지혜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 지혜를 깨닫는 것은 역사적 체험을 통해서이다. 야훼와의 모든 체험에서 참된 지혜는 하느님에게서만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윤리적으로 완전하게 사는 것, 이웃에 대한 정의, 사랑 등은 하느님의 지혜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이 갖고 있는 모든 사고, 지혜의 원천 그 현명함은 바로 하느님에게서만 오고 있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삶의 원천으로써, 하나의 완전한 규범으로써 하느님을 모시고 있고 경외심을 갖고 있다면 그는 하느님의 지혜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잠언 1,7 “야훼를 두려워하며 섬기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지혜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으로써 언명되고 있다. 지혜에 대한 찬미가가 생겨난다 (잠언 1,20). 여기서 지혜의 인격화가 된다는 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바로 그분이 하느님께 속하여 있는 한 위격으로서 제시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2) 사람의 아들의 도래에 대한 선포
① 다니엘 예언서 (7장)
다니 7,13-14 “나는 밤에 또 이상한 광경을 보았는데 사람 모습을 한 이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와서 태고적부터 계신 이 앞으로 인도되어 나아갔다.” 여기서는 지상 위의 사람의 아들의 도래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묵시적 전망 안에서 종말론적 도래에 대한 것이다. 어찌보면 육화의 신비를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분이 도래할 것이라는 것은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사람의 아들은 누구인가 하는 것이 신학적 논쟁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이 표현 자체가 신비적이기 때문이다. 순수한 인간 존재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초월적 존재를 나타내는 것인가, 아니면 천사와 같은 존재를 나타내는 것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늘에 구름을 타고 온다’ 라는 표현, 이런 존재는 하느님 영역에 속하는 존재임을 나타낸다. 구름은 항상 하느님의 현존, 힘, 현시를 나타낸다(구름기둥). 따라서 구름과 함께 오는 인물, 사람의 아들은 신적 특성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인물은 주권과 영화와 나라가 그에게 맡겨진 사람이다. 뭇 백성들의 섬김을 받게 되어 있다.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권한을 받고 있는 인물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 권한은 다니 7,18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섬기는 거룩한 백성”에게도 사실 이런 권한이 주어져 있다. 이는 흔히 천사들로 이해되는데, 문맥상으로 볼 때 천사들과 동시에 선택된 백성, 하느님 나라의 성도들을 함께 지칭하고 있다. 따라서 사람의 아들로 지칭된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의 백성 전체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라는 한 개인에 대한 주장을 완전히 무시하기는 어렵다. 여기서 분명히 나타나는 것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아니라 신적 본성을 지닌 신적 존재이고 그는 선택된 모든 백성과 함께 그들과 나누어 갖게 될 보편적 권능을 소유하고 있는 분으로서 드러나고 있다. 왜 이런 인물이 사람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사람은 하느님의 신적 존재, 하느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가장 훌륭한 상징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② 결론
구약 안에서 사람의 아들에 대해서 나타나고 있는 것은 하느님이 인간과 통교하고, 인간과 접촉하고, 육화를 위한 움직임이 구약 안에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계시 안에서 이런 움직임은 점진적으로 역사 안에서 발전되고 있었다. 구약성서는 기본적으로 하느님의 계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고, 그것은 개방되어진 열려져 있는 계시이며 종말적인 성취를 향하고 있다. 구약성서의 많은 요소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균형을 이루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여러 전망을 하나로 이루어주는 것을 신약성서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구약성서의 하느님은 역사의 하느님이시고 인간 삶에 직접적으로 연결된 하느님, 심오한 관계를 원하고 실제로 맺고 인간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분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근본적으로 타자를 위한, 그래서 내어주는 그런 모습이 불완전하나마 구약성서에서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이런 성취가 신약성서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신약성서는 구약성서를 자주 언급한다. 이런 구약성서의 맥락 안에서 예수님이 당신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정체성에 대한 예수님의 증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리스챤 공동체에서 당신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과 달리 당신 스스로를 표현하였다. 복음적 언어를 통해서 이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구약성서 안에 나타나는 육화의 움직임이 예수 안에서 어떻게 성취되었고 예수가 어떻게 이루려고 노력하는가 하는 것을 보기로 하겠다.

이 글은 카테고리: catholicdictionary3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메시아에 대한 신적 모습의 제시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1) 상향적 움직임
    (1) 왕 혹은 메시아에게 신적 이름을 적용함
    (시편 45,7; 이사야 9,5; 예레 23,6)
    지상에 살고 있는 어떤 한 사람에게서 신적인 위대함을 인식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왕이나 어떤 사람이 유일하신 하느님에게 연결되어 있다는 유일신 사상과도 관계가 있다. 특히 인간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에게서 신적인 것을 찾는 것이 이스라엘 안에 보존되어 있었다.

    (2) 신적 부자관계의 근거
    왕을 하느님과 연결시키려는 노력

    ① 나단의 예언 (2사무 7,1-16)
    야훼는 다윗의 후손에게 당신이 친히 아버지로서 행동할 것을 약속하신다. 2사무 7,14 “내가 친히 그의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느님께서 아버지처럼 행동하실 것을 약속하신다. 하느님은 아들로써 여겨지는 그 사람에게 인간적 차원으로 낮추어 나타내신다. 즉 인간의 모습을 하느님과 연결시키려는 이스라엘의 노력이 보인다. 시편 89,26-27 “그는 나를 불러 ‘당신은 나의 아버지, 나의 하느님, 내 구원의 바위이십니다’하겠고 나는 그를 맏아들로 삼아 세상 임금 중에 가장 높은 임금으로 세우리라.” 다윗 왕에게 부여된 품위와 권능을 강조한다. 즉 하느님께서 가지고 있는 것과 유사한 권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왕들 중에 가장 높다는 것을 나타낸다.

    ② 시편 2,7
    시편 2,7 “나를 왕으로 세우시며 선포하신 야훼의 칙령을 들어라. ‘너는 내 아들, 나 오늘 너를 낳았노라. 나에게 청하여라. 만방을 너에게 유산으로 주리라. 땅 끝에서 땅 끝까지 너의 것이 되리라. 저들을 질그릇 부수듯이 철퇴로 짓부수어라.” 여기서도 일종의 계약의 행위가 보인다. 왕은 야훼와의 계약을 받아들인다. 시편은 역사적인 왕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동시에 이상적인, 메시아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신적 부자관계는 순수한 법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즉 왕의 정당성을 보증하는 야훼의 칙령에 의한 것이고 그것은 양자결혼, 하느님 아버지께서 뽑아 주셨기에 왕을 당신 아들로 여기는 하느님의 행위로부터 기인한다. 그래서 이런 왕이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런 단순한 법적인 가치를 넘어서 ‘나 오늘 너를 낳았노라’한 어떤 실제적인 신적인 통교, 정말로 태어난 부자관계를 하느님 안에서 한 인간이 태어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것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한 인간의 모습에 자신들의 메시아 사상을 적용시켜서 하느님께 연결시키려는 모습이 나타난다.

    2) 하향적 길
    (1) 사람들 가운데 신적 지혜의 도래
    성경에서 하느님의 지혜는 야훼와 구별된 또 하나의 위격으로 나타난다.
    잠언 8,22 “야훼께서 만물을 지으시려던 한 처음에 모든 것에 앞서 나를 지으셨다.”
    집회 1,1 “모든 지혜는 주님께로부터 오며 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다.”
    지혜 7,25 “지혜는 하느님의 떨치시는 힘의 바람이며 전능하신 분께로부터 나오는 영광의 티없는 빛이다. 그러므로 티끌만한 점 하나라도 지혜를 더럽힐 수 없다.” 지혜는 하느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협력자로 활동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초세기에 있어서의 로고스와도 비슷하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지혜를 통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항상 사람 곁에 있었다는 것이다. 잠언 8,31 “나는 사람들과 같이 있는 것이 즐거워 그가 만드신 땅 위에서 뛰놀았다.”
    다른 한편으로 지혜의 역할은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하여주기도 한다 (잠언 8,34 “날마다 내 집 문을 쳐다보고 내 집 문 앞에 지켜 서서 내 말을 듣는 사람은 복받으리라.”). 하느님은 야곱과 이스라엘에게 이 지혜를 주셨다. 바로 그 지혜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온 땅을 지배하게 되었다. 포도나무처럼 풍성한 열매를 맺는 시온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모든 세대를 통해서 거룩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가서 그들이 하느님과 벗이 되게 하여 준다. 따라서 지혜에 메시아적 기능이 주어지고 있다. 가르침의 기능인 메시아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지혜가 나타나고 있다. 특히 이 지혜가 사람들과 가까이 있고 사람들과 함께 뛰놀았다. 즉 지혜를 가까이 할 때 하느님께 가까이 가게 되고 번성하게 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선사한다. 그러나 이 지혜의 신비,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기인하는, 인간을 초월하는, 지금까지 인간적 메시아에 대해서 말한 모든 것을 초월하고 있다. 어찌보면 신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메시아를 기다리고 왕에게 신적 사상을 부여하려는 노력과는 달리 외적인 면에서만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삶을 꿰뚫는 지혜를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구약성서에서 지혜(hokma)는 인간의 모든 영역을 감싸고 있다. 하느님께 대한 인식, 사랑, 윤리, 정의, 정치, 사회, 일상적 삶의 모든 행동이 하느님의 지혜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 지혜를 깨닫는 것은 역사적 체험을 통해서이다. 야훼와의 모든 체험에서 참된 지혜는 하느님에게서만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윤리적으로 완전하게 사는 것, 이웃에 대한 정의, 사랑 등은 하느님의 지혜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이 갖고 있는 모든 사고, 지혜의 원천 그 현명함은 바로 하느님에게서만 오고 있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삶의 원천으로써, 하나의 완전한 규범으로써 하느님을 모시고 있고 경외심을 갖고 있다면 그는 하느님의 지혜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잠언 1,7 “야훼를 두려워하며 섬기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지혜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으로써 언명되고 있다. 지혜에 대한 찬미가가 생겨난다 (잠언 1,20). 여기서 지혜의 인격화가 된다는 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바로 그분이 하느님께 속하여 있는 한 위격으로서 제시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2) 사람의 아들의 도래에 대한 선포
    ① 다니엘 예언서 (7장)
    다니 7,13-14 “나는 밤에 또 이상한 광경을 보았는데 사람 모습을 한 이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와서 태고적부터 계신 이 앞으로 인도되어 나아갔다.” 여기서는 지상 위의 사람의 아들의 도래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묵시적 전망 안에서 종말론적 도래에 대한 것이다. 어찌보면 육화의 신비를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분이 도래할 것이라는 것은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사람의 아들은 누구인가 하는 것이 신학적 논쟁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이 표현 자체가 신비적이기 때문이다. 순수한 인간 존재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초월적 존재를 나타내는 것인가, 아니면 천사와 같은 존재를 나타내는 것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늘에 구름을 타고 온다’ 라는 표현, 이런 존재는 하느님 영역에 속하는 존재임을 나타낸다. 구름은 항상 하느님의 현존, 힘, 현시를 나타낸다(구름기둥). 따라서 구름과 함께 오는 인물, 사람의 아들은 신적 특성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인물은 주권과 영화와 나라가 그에게 맡겨진 사람이다. 뭇 백성들의 섬김을 받게 되어 있다.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권한을 받고 있는 인물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 권한은 다니 7,18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섬기는 거룩한 백성”에게도 사실 이런 권한이 주어져 있다. 이는 흔히 천사들로 이해되는데, 문맥상으로 볼 때 천사들과 동시에 선택된 백성, 하느님 나라의 성도들을 함께 지칭하고 있다. 따라서 사람의 아들로 지칭된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의 백성 전체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라는 한 개인에 대한 주장을 완전히 무시하기는 어렵다. 여기서 분명히 나타나는 것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아니라 신적 본성을 지닌 신적 존재이고 그는 선택된 모든 백성과 함께 그들과 나누어 갖게 될 보편적 권능을 소유하고 있는 분으로서 드러나고 있다. 왜 이런 인물이 사람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사람은 하느님의 신적 존재, 하느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가장 훌륭한 상징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② 결론
    구약 안에서 사람의 아들에 대해서 나타나고 있는 것은 하느님이 인간과 통교하고, 인간과 접촉하고, 육화를 위한 움직임이 구약 안에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계시 안에서 이런 움직임은 점진적으로 역사 안에서 발전되고 있었다. 구약성서는 기본적으로 하느님의 계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고, 그것은 개방되어진 열려져 있는 계시이며 종말적인 성취를 향하고 있다. 구약성서의 많은 요소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균형을 이루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여러 전망을 하나로 이루어주는 것을 신약성서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구약성서의 하느님은 역사의 하느님이시고 인간 삶에 직접적으로 연결된 하느님, 심오한 관계를 원하고 실제로 맺고 인간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분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근본적으로 타자를 위한, 그래서 내어주는 그런 모습이 불완전하나마 구약성서에서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이런 성취가 신약성서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신약성서는 구약성서를 자주 언급한다. 이런 구약성서의 맥락 안에서 예수님이 당신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정체성에 대한 예수님의 증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리스챤 공동체에서 당신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과 달리 당신 스스로를 표현하였다. 복음적 언어를 통해서 이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구약성서 안에 나타나는 육화의 움직임이 예수 안에서 어떻게 성취되었고 예수가 어떻게 이루려고 노력하는가 하는 것을 보기로 하겠다.

guest에 답글 남기기 응답 취소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