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함축적(잠재적) 그리스도론

간단하게 함축적 그리스도론에 대해서 유의해야 하고 이러한 것에 대해서 연구할 때 어떤 테마를 주로 다루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지적하는 면에서 간단하게 말할 것이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선포, 예수님의 여정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잠재적 그리스도론에 대한 의미와 중요성을 반드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초기 그리스도론적 찬미가 안에 나타나는 명시적 그리스도론 또는 교회 형식 안에 나타나는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 사건 안에 표현된 현실에 대한 신앙의 대답이다. 특히 이것은 그리스도의 모든 사건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포함해서 그리스도의 모든 사건에 대답이 주어져야 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면서 함축적 그리스도론에서부터 출발해서 명시적 그리스도론으로 넘어갈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스도론적 모든 확인들은 역사의 나자렛 예수에 항상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십자가나 부활에 대해서 언급할 때 그 나자렛에 살았던 예수가 우리와 똑같은 일반적인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십자가와 부활 사이에 조화가 깨어지고 만다. 일관성을 잃게 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 안에 그분의 말씀과 행위 안에 그리스도론적 확인들이 후대에 명시적인 그리스도론에 대한 확인을 한 것들이 역사적 예수 안에 어떤 기초를 갖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역사적 예수 안에 드러나는 특별한 요소를 간과할 수 없다.
먼저 우리는 역사적 예수 안에 표현된 여러 자료들과 그리스도론적 칭호들이 일치하고 있는가? 이것은 역사의 예수 안에서, 그분의 행위 안에서 혹은 그분의 말하는 여러 방법 안에서 증명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것을 보는 것이다. 메시아적 의식을 살펴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들이라는 칭호를 분명하게 사용하고 있듯이 또는 초기 그리스도 공동체들이 사용하고 있던 여러 칭호들이 있는데 그런 칭호들에 연관시키지 않으면서도 거기에서 확인하고 있는 여러가지 자료들이 구체적으로 역사의 예수 안에 나타나고 있는가 그것에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아들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고서도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의 특별한 관계를 확인할 수는 없는 것인가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예수의 여정을 살펴볼 때 다음과 같은 자료들이 분명한 것으로 나타난다고 역사 비평학에서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다. 첫번째, 예수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명과 권위에 대한 의식을 갖고 있었다. 어떤 특별한 관계를 갖고 있었고 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두번째로 이러한 사명 안에서 다른 이들을 위한 봉사(디아코니아)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세번째로 당신의 기능에 대한 특별한 의식을 갖고 있었다. 특히 이것은 종말적 시간의 기다림과 하느님 아버지의 접근이라는 관계 안에서 특별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어떻게 보면 예수 편에서 미리 어떤 고정된 스케마를 가지고 틀에 박힌 어떤 형식을 통해서 예수에게 어떤 고정된 스케마를 제시하고 특정한 어떤 형식을 제시하는 그것을 통해서는 쉽게 표현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면들에 대해서 앞으로 살펴보면서 다시 이러한 문제들이 언급되거나 또는 그것을 숙고할 자료나 가능성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함축적 그리스도론의 기본적 범주로서 우선 가장 함축적 그리스도론을 잘 나타내는 개념 한가지는 exousia개념이다. 예수의 말씀과 행위 안에 나타나는 잠재적 그리스도론을 표현하기 위한 가장 좋은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예수의 권위, 권능을 말한다. 여기에서 dynamis는 특히 물리적 권능에 관계되고 있고 exousia은 인격적인 권위, 사람의 인격과 더 관련이 있다. 어떠한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명과 권위를 받았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할말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exousia은 개인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사람들을 향해서 움직이고 사람들에게 요청하고 있다. 주로 말씀 안에 자주 표현되고 있다. 어떤 사람이 할 말이 있다는 것이다. exousia의 의미는 자유와의 관계를 고찰할 때 잘 나타날 수 있다. 그 자체로 인간에게 도달되고 인간의 자유에 호소하고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당신이 하는 말씀에 당신 스스로 자유로울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하느님 자신이 인간이 스스로 해방될 수 없는 억압에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오실 때 그리고 그러한 말씀을 하실 때 exousia의 독특한 의미가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을 용서하면서 용서의 사건 안에서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예수님의 exousia를 예로 들어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exousia은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으로 도래하는 구원과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여기에서 함축적인 그리스도론적인 어떤 문제가 제기된다. 누가 그러한 exousia을 가지고 말할 수 있겠는가?
exousia가 드러나는 여러가지 사건들 형태들을 보면

1. 예수와 율법(율법에 대한 해석)
바오로에 의하면 예수님은 율법 하에 태어났다. Gal 4,4에 의하면 율법 하에 태어났다. Gal 3,13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저주 받으신 자가 되어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 십자가의 의미에 대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지만 여기에서 율법 하에 있는 존재와 율법에 대한 자유 사이의 상반관계를 예수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Rom 10,4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끝마침이라고 말한다. 율법의 마지막으로 말한다.
역사적 예수 안에서 이러한 측면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있는가? 율법과의 관계 안에서 exousia의 표징인 당신의 자유를 어떻게 제시하고 있는가? 잠재적 그리스도론을 고찰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러한 면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모세의 율법은 단순한 권위, 권능에 대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예수도 구약성서의 약속 안에서 움직인다. 그러나 그분의 가르침은 구약성서의 전승과 대조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예언자들은 야훼 하느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라고 하는 반면에 예수는 나는 이렇게 말한다 라고 당신의 위격과 exousia의 관계를 분명히 설정한다. 예수 자신의 이름으로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씀하시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하느님 권위에 관계되는 예언적 형식을 사용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예언자들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야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는 대신에 아멘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그때 당시의 사용을 보면 그때까지의 한 말을 끝마치는, 맺는 말이었다. 나는 동의한다. 그렇다. 그렇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나는 거기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예수는 이것을 단어, 어떤 문장이 시작되기 전에, 말씀을 시작하시기 전에 제시한다는 것이다. Amen Amen dico vobis(진실히 진실히 너희에서 이르노니). 성서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이러한 자료는 근원적인 아라메아 형식 그대로 아멘이라고 보존되어 사용되고 있었다. 우리가 아멘이라고 할 때 그것은 어떤 말씀을 듣기 전에 말하는 것을 다 듣고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말하기 전에 나는 당신의 위격과 당신에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 전제되기 때문에 말하기 전에 너에게 동의한다는 것이다. 예수가 이런 말을 할 때 그것을 듣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그분에 대한 정체성을 확인하고 그런 것에 대한 신뢰심이 먼저 당신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동의하고 따르겠다는 그러한 것이 전제된다고 볼 수 있다.
아멘 할 때 일반적으로 히브리어 민이라는 어근에서 기인한다고 보고 있다. 찾아내다, 알다, 끄집어 내다 라는 뜻으로 의미할 수 있었고 혹은 어린아이들을 잘 알고 있는 부모님처럼 내가 알고 있는 전체 과정을 가리키기 위해서 사용되었다고 – 어린아이가 어머니 품안에 있을 때 아주 안전하게 느끼고 두려움이 없어진다. 이러한 안전함과 신빙성, 신뢰심이 아멘이라는 동사에 근본적으로 깔려있는 그러한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나의 뜻대로가 아니라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 예수님이 하느님 아버지께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이러한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와의 구체적인 인격적인 인격적인 관계 그러한 것을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수가 아멘 아멘 하면서 말씀하실 때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여기에 단순히 지성적으로 동의하라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형식은 예수와 하느님 원의 사이의 완전한 일치를 나타내주고 있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어떤 exousia을 드러내는 예수의 특별한 권위가 보인다고 볼 수 있다. 토라에 대한 예수의 입장은 이러한 자료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는 한편 규정된 율법 해석에 반대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율법의 참된 의미를 찾아내는 그것을 근본화시키는 그러한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우리가 잘못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이 세상 안에서 행동으로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마음 안에서 잘못이 이루어질 수 있다라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율법 자체를 근본적으로 거스르는 태도라고도 드러난다.
예수의 태도 안에서 본질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율법의 기본적인 전망이다. 예수의 말씀에 의해서 율법의 계명은 그 법률적 특성을 잃게 된다. 그 중심이 되는 것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관계 안에 제시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한 인간이 자유로운 봉헌을 하느님께 드릴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자유로운 봉헌에서부터 구체적인 결실이 태어나게 된다. 외적인 율법에 따라서 이루어진 결실이 아니라 마음을 봉헌하는 거기에 따른 결실을 나타낸다. 율법 앞에서 자신의 근본적인 자유를 드러내는 그 나자렛 사람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2. 예수와 신앙
신앙에 대해서 볼 때 자신의 삶 안에서 당신 자신을 충만히 드러내면서 우리에게 신앙의 응답을 요구하는 그 사람, 신앙을 자극하는 그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가?
예수 안에 드러나는 그러한 권능은 하느님의 권능이고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믿는 것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예수와 하느님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라는 것이 연구될 필요가 있다.
exousia에 대한 표현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exousia에 대한 표현을 드러내는 기적이다.

3. 예수와 기적
(W. Kasper, 예수 그리스도, pp.148-168)

4. 예수와 죄의 용서
질병으로부터의 치유는 죄의 용서라는 그분의 권위와 연결되어 있다. 어떤 죄의 용서라든지 치유라든지 하는 것에 대한 역사성에 대해서 다루고자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광범위한 맥락 안에서 예수가 죄인들에게 일치하고 그들에게 당신의 권위를 통해서 자유를 제공하여 주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분은 죄인들과 일치하면서 하느님과 일치 안에 이끌어 주었다는 것이다. Mc 2,6에 보면 중풍병자를 낳게 한 다음에 “이 사람이 어쩌자고 이런 말을 하는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구나. 하느님 한분이 아니고서야 감히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죄의 용서를 통해서 죄인과 일치하고 죄의 용서를 통해서 하느님과의 일치 안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예수의 행위 안에서 하느님의 용서가 보여지고 있다. 여기에서도 죄를 용서하여 주는 그 사람은 누구인가? 예수의 exousia의 기원이 되고 원천이 되는 하느님과 예수와의 근본적인 관계를 주시하지 않고서는 설명될 수 없다.

5. 예수와 부르심
일반적으로 어떤 스승을 중심으로 제자들의 그룹이 형성될 수 있다. 그 자체로 평범한 일이다. 아리스토텔레스 학파, 플라톤 학파 등등. 철학자들이나 랍비들, 세례자 요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예수의 부르심은 아주 특별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예수의 exousia은 이러한 부르심과도 연결되어 있다. 그분의 선택 안에도 연결되어 있다. 당신을 따르는데 특별한 관심을 보였기 때문에 부르는 것이 아니다. 따르는데 따라서 거기에 조건을 제시하지 않는다. 이것은 예수가 제자들을 부르면서 함께 있게 하셨고 그리고 여러가지 권한을 주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악신을 내쫓는 권한이라든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선포와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 등이 그것이다. 특징적인 것은 일반적인 사회 안에서의 스승과 제자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그것을 초월해서 예수의 위격적 정체성과 제자들 사이의 관계이다. 이러한 관계가 어떤 개인적인 일이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따르는 사람들의 존재 전체를 규정해 주고 있다. 그분과의 완전한 일치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버릴 정도로 스승의 운명을 자신의 것으로 하고 있다. 그렇게 하면서 새로운 양식으로 전혀 다른 존재로 새로운 삶의 양식을 취하게 된다.
우리 자신들도 예수가 누구이길래 우리가 이 자리에 와 있고 일생을 걸고 그분을 위해서 살고 그분께 대한 그분으로부터 주어지는 모든 사명을 하겠다고 모든 것을 끊어 버리면서 이 자리에 와 있는가? 이러한 근본적인 선택으로서 모든 결과가 근본적으로 바뀐다. 선택함으로써 이어지고 나타나는 여러 가지 결과들을 우리가 이미 수용했다.
한 인간을 이러한 선택을 하도록 자극하는 그 예수는 누구인가? 그분의 독특한 exousia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러한 것을 따른다면 그러한 분이 도대체 누구인가 라고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도 있다. 이러한 모든 것에서부터 함축적 잠재적 그리스도론을 드러내는 특별한 그리스도의 exousia가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이러한 것은 보다 광범위한 전망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잠재적 그리스도론 안에서 다른 여러가지를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특히 exousia개념 면에서 볼 때 exousia 개념에 대해서 간과할 수가 없다.

6. 예수와 죽음
예수의 죽음 안에서 이러한 모든 exousia가 문제시되는 것은 아닌가? 실패로 끝나는 것은 아닌가? 그 권위가 헛된 것은 아닌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의 이러한 exousia가 승리에서부터 승리에로 나아가는 승리자의 exousia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근본적인 무능함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긍정을 내포하고 있다. 그럴 때 비로소 이에 대한 대답이 주어질 수 있다. 이러한 것은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 안에서 이러한 exousia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고 하느님 아버지의 원의 에 긍정적인 대답을 준다는 데 대해서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의 긍정적인 대답을 주는 것은 바로 사람들을 위한 ‘예’ 하는 대답이고 자신의 삶을 내어 주겠다는 그러한 대답이다. 이렇게 볼 때 예수의 삶 안에서 드러난 그러한 것과 십자가의 죽음과도 지속성이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인간 편에서 볼 때 극도의 무능함 처절함에 대한 당신의 긍정적인 대답은 다른 이들에 대한 체념 또는 경멸이 아니라 바로 다른 이들을 위한 원수들을 향한 사랑의 실현이면서 아버지와 완전한 일치 안에 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드러내 주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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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함축적(잠재적) 그리스도론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간단하게 함축적 그리스도론에 대해서 유의해야 하고 이러한 것에 대해서 연구할 때 어떤 테마를 주로 다루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지적하는 면에서 간단하게 말할 것이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선포, 예수님의 여정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잠재적 그리스도론에 대한 의미와 중요성을 반드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초기 그리스도론적 찬미가 안에 나타나는 명시적 그리스도론 또는 교회 형식 안에 나타나는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 사건 안에 표현된 현실에 대한 신앙의 대답이다. 특히 이것은 그리스도의 모든 사건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포함해서 그리스도의 모든 사건에 대답이 주어져야 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면서 함축적 그리스도론에서부터 출발해서 명시적 그리스도론으로 넘어갈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스도론적 모든 확인들은 역사의 나자렛 예수에 항상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십자가나 부활에 대해서 언급할 때 그 나자렛에 살았던 예수가 우리와 똑같은 일반적인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십자가와 부활 사이에 조화가 깨어지고 만다. 일관성을 잃게 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 안에 그분의 말씀과 행위 안에 그리스도론적 확인들이 후대에 명시적인 그리스도론에 대한 확인을 한 것들이 역사적 예수 안에 어떤 기초를 갖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역사적 예수 안에 드러나는 특별한 요소를 간과할 수 없다.
    먼저 우리는 역사적 예수 안에 표현된 여러 자료들과 그리스도론적 칭호들이 일치하고 있는가? 이것은 역사의 예수 안에서, 그분의 행위 안에서 혹은 그분의 말하는 여러 방법 안에서 증명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것을 보는 것이다. 메시아적 의식을 살펴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들이라는 칭호를 분명하게 사용하고 있듯이 또는 초기 그리스도 공동체들이 사용하고 있던 여러 칭호들이 있는데 그런 칭호들에 연관시키지 않으면서도 거기에서 확인하고 있는 여러가지 자료들이 구체적으로 역사의 예수 안에 나타나고 있는가 그것에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아들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고서도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의 특별한 관계를 확인할 수는 없는 것인가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예수의 여정을 살펴볼 때 다음과 같은 자료들이 분명한 것으로 나타난다고 역사 비평학에서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다. 첫번째, 예수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명과 권위에 대한 의식을 갖고 있었다. 어떤 특별한 관계를 갖고 있었고 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두번째로 이러한 사명 안에서 다른 이들을 위한 봉사(디아코니아)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세번째로 당신의 기능에 대한 특별한 의식을 갖고 있었다. 특히 이것은 종말적 시간의 기다림과 하느님 아버지의 접근이라는 관계 안에서 특별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어떻게 보면 예수 편에서 미리 어떤 고정된 스케마를 가지고 틀에 박힌 어떤 형식을 통해서 예수에게 어떤 고정된 스케마를 제시하고 특정한 어떤 형식을 제시하는 그것을 통해서는 쉽게 표현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면들에 대해서 앞으로 살펴보면서 다시 이러한 문제들이 언급되거나 또는 그것을 숙고할 자료나 가능성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함축적 그리스도론의 기본적 범주로서 우선 가장 함축적 그리스도론을 잘 나타내는 개념 한가지는 exousia개념이다. 예수의 말씀과 행위 안에 나타나는 잠재적 그리스도론을 표현하기 위한 가장 좋은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예수의 권위, 권능을 말한다. 여기에서 dynamis는 특히 물리적 권능에 관계되고 있고 exousia은 인격적인 권위, 사람의 인격과 더 관련이 있다. 어떠한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명과 권위를 받았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할말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exousia은 개인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사람들을 향해서 움직이고 사람들에게 요청하고 있다. 주로 말씀 안에 자주 표현되고 있다. 어떤 사람이 할 말이 있다는 것이다. exousia의 의미는 자유와의 관계를 고찰할 때 잘 나타날 수 있다. 그 자체로 인간에게 도달되고 인간의 자유에 호소하고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당신이 하는 말씀에 당신 스스로 자유로울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하느님 자신이 인간이 스스로 해방될 수 없는 억압에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오실 때 그리고 그러한 말씀을 하실 때 exousia의 독특한 의미가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을 용서하면서 용서의 사건 안에서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예수님의 exousia를 예로 들어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exousia은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으로 도래하는 구원과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여기에서 함축적인 그리스도론적인 어떤 문제가 제기된다. 누가 그러한 exousia을 가지고 말할 수 있겠는가?
    exousia가 드러나는 여러가지 사건들 형태들을 보면

    1. 예수와 율법(율법에 대한 해석)
    바오로에 의하면 예수님은 율법 하에 태어났다. Gal 4,4에 의하면 율법 하에 태어났다. Gal 3,13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저주 받으신 자가 되어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 십자가의 의미에 대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지만 여기에서 율법 하에 있는 존재와 율법에 대한 자유 사이의 상반관계를 예수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Rom 10,4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끝마침이라고 말한다. 율법의 마지막으로 말한다.
    역사적 예수 안에서 이러한 측면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있는가? 율법과의 관계 안에서 exousia의 표징인 당신의 자유를 어떻게 제시하고 있는가? 잠재적 그리스도론을 고찰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러한 면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모세의 율법은 단순한 권위, 권능에 대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예수도 구약성서의 약속 안에서 움직인다. 그러나 그분의 가르침은 구약성서의 전승과 대조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예언자들은 야훼 하느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라고 하는 반면에 예수는 나는 이렇게 말한다 라고 당신의 위격과 exousia의 관계를 분명히 설정한다. 예수 자신의 이름으로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씀하시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하느님 권위에 관계되는 예언적 형식을 사용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예언자들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야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는 대신에 아멘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그때 당시의 사용을 보면 그때까지의 한 말을 끝마치는, 맺는 말이었다. 나는 동의한다. 그렇다. 그렇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나는 거기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예수는 이것을 단어, 어떤 문장이 시작되기 전에, 말씀을 시작하시기 전에 제시한다는 것이다. Amen Amen dico vobis(진실히 진실히 너희에서 이르노니). 성서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이러한 자료는 근원적인 아라메아 형식 그대로 아멘이라고 보존되어 사용되고 있었다. 우리가 아멘이라고 할 때 그것은 어떤 말씀을 듣기 전에 말하는 것을 다 듣고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말하기 전에 나는 당신의 위격과 당신에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 전제되기 때문에 말하기 전에 너에게 동의한다는 것이다. 예수가 이런 말을 할 때 그것을 듣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그분에 대한 정체성을 확인하고 그런 것에 대한 신뢰심이 먼저 당신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동의하고 따르겠다는 그러한 것이 전제된다고 볼 수 있다.
    아멘 할 때 일반적으로 히브리어 민이라는 어근에서 기인한다고 보고 있다. 찾아내다, 알다, 끄집어 내다 라는 뜻으로 의미할 수 있었고 혹은 어린아이들을 잘 알고 있는 부모님처럼 내가 알고 있는 전체 과정을 가리키기 위해서 사용되었다고 – 어린아이가 어머니 품안에 있을 때 아주 안전하게 느끼고 두려움이 없어진다. 이러한 안전함과 신빙성, 신뢰심이 아멘이라는 동사에 근본적으로 깔려있는 그러한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나의 뜻대로가 아니라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 예수님이 하느님 아버지께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이러한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와의 구체적인 인격적인 인격적인 관계 그러한 것을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수가 아멘 아멘 하면서 말씀하실 때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여기에 단순히 지성적으로 동의하라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형식은 예수와 하느님 원의 사이의 완전한 일치를 나타내주고 있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어떤 exousia을 드러내는 예수의 특별한 권위가 보인다고 볼 수 있다. 토라에 대한 예수의 입장은 이러한 자료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는 한편 규정된 율법 해석에 반대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율법의 참된 의미를 찾아내는 그것을 근본화시키는 그러한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우리가 잘못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이 세상 안에서 행동으로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마음 안에서 잘못이 이루어질 수 있다라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율법 자체를 근본적으로 거스르는 태도라고도 드러난다.
    예수의 태도 안에서 본질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율법의 기본적인 전망이다. 예수의 말씀에 의해서 율법의 계명은 그 법률적 특성을 잃게 된다. 그 중심이 되는 것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관계 안에 제시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한 인간이 자유로운 봉헌을 하느님께 드릴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자유로운 봉헌에서부터 구체적인 결실이 태어나게 된다. 외적인 율법에 따라서 이루어진 결실이 아니라 마음을 봉헌하는 거기에 따른 결실을 나타낸다. 율법 앞에서 자신의 근본적인 자유를 드러내는 그 나자렛 사람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2. 예수와 신앙
    신앙에 대해서 볼 때 자신의 삶 안에서 당신 자신을 충만히 드러내면서 우리에게 신앙의 응답을 요구하는 그 사람, 신앙을 자극하는 그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가?
    예수 안에 드러나는 그러한 권능은 하느님의 권능이고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믿는 것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예수와 하느님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라는 것이 연구될 필요가 있다.
    exousia에 대한 표현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exousia에 대한 표현을 드러내는 기적이다.

    3. 예수와 기적
    (W. Kasper, 예수 그리스도, pp.148-168)

    4. 예수와 죄의 용서
    질병으로부터의 치유는 죄의 용서라는 그분의 권위와 연결되어 있다. 어떤 죄의 용서라든지 치유라든지 하는 것에 대한 역사성에 대해서 다루고자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광범위한 맥락 안에서 예수가 죄인들에게 일치하고 그들에게 당신의 권위를 통해서 자유를 제공하여 주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분은 죄인들과 일치하면서 하느님과 일치 안에 이끌어 주었다는 것이다. Mc 2,6에 보면 중풍병자를 낳게 한 다음에 “이 사람이 어쩌자고 이런 말을 하는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구나. 하느님 한분이 아니고서야 감히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죄의 용서를 통해서 죄인과 일치하고 죄의 용서를 통해서 하느님과의 일치 안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예수의 행위 안에서 하느님의 용서가 보여지고 있다. 여기에서도 죄를 용서하여 주는 그 사람은 누구인가? 예수의 exousia의 기원이 되고 원천이 되는 하느님과 예수와의 근본적인 관계를 주시하지 않고서는 설명될 수 없다.

    5. 예수와 부르심
    일반적으로 어떤 스승을 중심으로 제자들의 그룹이 형성될 수 있다. 그 자체로 평범한 일이다. 아리스토텔레스 학파, 플라톤 학파 등등. 철학자들이나 랍비들, 세례자 요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예수의 부르심은 아주 특별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예수의 exousia은 이러한 부르심과도 연결되어 있다. 그분의 선택 안에도 연결되어 있다. 당신을 따르는데 특별한 관심을 보였기 때문에 부르는 것이 아니다. 따르는데 따라서 거기에 조건을 제시하지 않는다. 이것은 예수가 제자들을 부르면서 함께 있게 하셨고 그리고 여러가지 권한을 주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악신을 내쫓는 권한이라든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선포와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 등이 그것이다. 특징적인 것은 일반적인 사회 안에서의 스승과 제자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그것을 초월해서 예수의 위격적 정체성과 제자들 사이의 관계이다. 이러한 관계가 어떤 개인적인 일이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따르는 사람들의 존재 전체를 규정해 주고 있다. 그분과의 완전한 일치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버릴 정도로 스승의 운명을 자신의 것으로 하고 있다. 그렇게 하면서 새로운 양식으로 전혀 다른 존재로 새로운 삶의 양식을 취하게 된다.
    우리 자신들도 예수가 누구이길래 우리가 이 자리에 와 있고 일생을 걸고 그분을 위해서 살고 그분께 대한 그분으로부터 주어지는 모든 사명을 하겠다고 모든 것을 끊어 버리면서 이 자리에 와 있는가? 이러한 근본적인 선택으로서 모든 결과가 근본적으로 바뀐다. 선택함으로써 이어지고 나타나는 여러 가지 결과들을 우리가 이미 수용했다.
    한 인간을 이러한 선택을 하도록 자극하는 그 예수는 누구인가? 그분의 독특한 exousia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러한 것을 따른다면 그러한 분이 도대체 누구인가 라고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도 있다. 이러한 모든 것에서부터 함축적 잠재적 그리스도론을 드러내는 특별한 그리스도의 exousia가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이러한 것은 보다 광범위한 전망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잠재적 그리스도론 안에서 다른 여러가지를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특히 exousia개념 면에서 볼 때 exousia 개념에 대해서 간과할 수가 없다.

    6. 예수와 죽음
    예수의 죽음 안에서 이러한 모든 exousia가 문제시되는 것은 아닌가? 실패로 끝나는 것은 아닌가? 그 권위가 헛된 것은 아닌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의 이러한 exousia가 승리에서부터 승리에로 나아가는 승리자의 exousia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근본적인 무능함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긍정을 내포하고 있다. 그럴 때 비로소 이에 대한 대답이 주어질 수 있다. 이러한 것은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 안에서 이러한 exousia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고 하느님 아버지의 원의 에 긍정적인 대답을 준다는 데 대해서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의 긍정적인 대답을 주는 것은 바로 사람들을 위한 ‘예’ 하는 대답이고 자신의 삶을 내어 주겠다는 그러한 대답이다. 이렇게 볼 때 예수의 삶 안에서 드러난 그러한 것과 십자가의 죽음과도 지속성이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인간 편에서 볼 때 극도의 무능함 처절함에 대한 당신의 긍정적인 대답은 다른 이들에 대한 체념 또는 경멸이 아니라 바로 다른 이들을 위한 원수들을 향한 사랑의 실현이면서 아버지와 완전한 일치 안에 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드러내 주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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