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은총 이해: 구약 성서-하느님의 선택

 

3.1. 하느님의 선택.


“너희는 뭇 민족 가운데서 내 것이 되리라”(출애 19, 5). 하느님의 선택이란 타민족들이 경험하지 못한 이스라엘만의 역사적 체험이고, 인간적 노력과 성과와는 관계없이 하느님의 뜻에 의하여 결정되는 특별한 행위이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선택은 자유롭다. 하느님이 주도권을 쥐고 계신다.(너희가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선택하였다- 예수님의 말씀). 선택을 뜻하는 bahar는 후대에 가서 규정된 것이지만, 사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러한 하느님의 행위를 자신들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설정되는 순간에 의식하고 있었다. 즉 하느님께 선택되었다는 자각은 계약의 체결과 직결된다. 이스라엘이 다른 많은 민족 중에서 특별히 선택되었으니 그 계약은 비길 데 없는 계약인 셈이다. 선택된 만큼 그 계약은 하느님의 신비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한다. 바로 선택 사상이 계약에 깊은 종교적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하느님의 선택에 관한 최초의 고백은 이스라엘의 가장 오래된 신앙 고백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신명 26, 1-11이다. “‘나는 야훼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우리의 선조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이 땅에 들어오게 된 것을 오늘 나의 하느님 야훼께 아룁니다…. 제 선조는 떠돌며 사는 아람인이었습니다. 그는 얼마 안되는 사람을 거느리고 에집트로 내려 가서 거기에 몸붙여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불어나 크고 강대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에집트인들은 우리를 억누르고 괴롭혔습니다. 우리를 사정없이 부렸습니다. 우리가 우리 선조들의 하느님 야훼께 부르짖었더니 야훼께서는 우리의 아우성을 들으시고 우리가 억눌려 고생하며 착취당하는 것을 굽어 살피셨습니다. 그리고 야훼께서는 억센 손으로 치시며 팔을 뻗으시어 온갖 표적과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모두 두려워 떨게 하시고는 우리를 에집트에서 구출해 내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 오시어 젖과 꿀이 흐르는 이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여호 24 장(2-13)에는 여호수에 의해서 소집된 세켐 대 집회에서도 이 신앙은 반복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 기원이 하느님의 선택에 있음을 보여준다. 24, 15에 나타나는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 “누구를 섬길 것인지 여러분이 오늘 선택하십시오. … 백성들이 대답하였다. ‘우리가 야훼를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다니 될 법이나 한 말입니까? 우리르, 아니 우리 조상들을 에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신 분이 우리 하느님 야훼이신데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바로 우리 눈앞에서 그렇듯이 큰 기적을 보여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이리로 오는 도중에 시종 지켜 주셨고 우리가 여러 민족들 사이를 둟고 지나 오는 동안 줄곧 지켜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모든 민족을, 이 땅에 사는 아모리인들까지도 우리 앞에서 몰아 내신 분은 야훼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야훼를 섬기겠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25, 15-18).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은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한 것에 대한 응답이다.


        이러한 신앙 고백들은 하나의 역사를 말하고 있으며, 계속되는 하느님의 계획을 드러내고 있다. 이스라엘이 선민으로 결정되기 전에도 여러 가지 선택으로 준비되었으며 그 후에도 새로운 선택에 의하여 발전되고 있다.


        한 백성으로 선택되는 깃점 아브라함 이전 인류 역사의 도식에도 아벨에 대한 하느님의 총애(창세 4,4), 에녹에 대한 특별한 취급(창세 5, 24), 노아(창세 7, 1), 셈에 대한 축복(창세 9, 26)이 나타난다. 이러한 사례들이 기록되는 배경에는 항상 하느님의 선택이 그 배경으로 깔려있다. 아브라함과 그의 백성을 선택함으로써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계획이 준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느님의 선택의 계획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명백하게 나타나고 그 후 선조들을 통하여 계승되고 있다. 하느님은 한 민족을 선택하시고 이 선택을 계속 유지하신다. 이 선택의 유지는 예수의 족보에 나타나듯이 장자들로 계승되는 것이 아니다. 야곱, 유다, 다윗 등 하느님께서 별도로 선택하신다. 인간의 논리나 생각과 다르다. 여기서 하느님의 선택의 특징을 볼 수 있다.  하느님의 선택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자유로윤 의지에 기반을 두고 있다. 선택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인간이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신명 7,7). 하느님의 은총으로 베풀어지는 선택은 인간의 어떤 공적이나 가치를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성서는 하느님이 구체적인 인물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작은 자’ ‘보잘 것없는 형제’를 선택하고 있음에 주의하고 있다. 하느님은 아벨의 제물을 받아들이셨다(창세 4, 5). 형 에사우보다 동생 야곱을 선호하셨다(창세 25,29 이하; 27장; 28,10-22). 요셉은 야곱의 12 아들들 가운데 막내 벤자민의 형이다. 하느님은 요셉을 축복하셨다. 하느님은 ‘입이 둔하고 혀가 굳은’ ‘말재간이 없는’ 모세를 선택하셨다(출애 3, 1-12: 4, 10-11). ‘입술이 더러운 사람’으로 자처하는 이사야를 예언자로 선택하셨다(이사 6,1-10). 이러한 선택에서 하느님의 주도권, 하느님의 선택의 자유로움을 말해준다. 이스라엘 민족도 예외가 아니다. 이스라엘은 여러 민족 중에서도 작은 민족이었다. 그럼에도 선택된 것은 하느님의 선택의 자유로움을 말해준다(신명 7,7-8). 예수께서 12명의 제자들을 선택한 일도 이러한 문맥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우선 12명의 제자들은 각양각색의 혼성팀이었다. 세관원 출신 마태오, 열혈당원 시몬,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아, 어부 출신의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버… 어떤 일관된 선발 기준이 없었다. 이것은 예수가 주도권을 쥐고 선택하였음을 드러낸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요한 16, 15). 하느님이 베푸시는 은총으로서의 선택은 선택된 자의 특전을 의미한다. 아울러 선택되지 않은 자의 실각을 의미한다. 하지만 하느님의 선택은 선택된 자의 특전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선택된 자는 항상 소명을 아울러 받게 된다. 이 소명은 항상 다른 이를 위한 것이다. 우선 하느님의 위엄과 사랑을 드러내야 한다. 다른 이들의 구원을 목표로 한다.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선택도 예외가 아니다. 세상의 모든 백성들이 축복을 받기 위한 것이요, 세상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제로, 수도자로, 선택하시는 것은 단지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일까? 모세, 이사야를 예언자로, 다윗을 왕으로 선택하신 것이 단지 모세만을, 이사야만을 다윗만을 위한 것일까? 아니다. 요나를 선택한 것은 니니웨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한 사람을 주교로 선택하는 것은 그 교구를 위한 것이다. 한 사제를 선택한 것은 그리스도교 백성을 위한 것이다. 한 사람을 그리스도교인으로 선택한 것은 그 주변의 비그리스도교 인을 위한 것이다. 교회의 선택은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선택이다. 하느님께서는 그 후에도 계속해서 선민 중에서 특정인을 선택하시어 특수 사명을 부여하신다.


        요약하면, 선택은 오로지 하느님의 자유로우신 의지에서 출발한다. 사랑과 선택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인간이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선택의 은총은 하느님의 사랑만이 그것을 설명할 수 있다. 인간의 어떤 공적이나 가치도 그것을 얻어낼 수 없다. 이스라엘은 여러 민족 중에서도 작은 민족이었으나 야훼께 사랑을 받았던 것이다(신명 7, 7-8). 이스라엘이 하느님과 부자 관계는 하느님의 선택에 근거한다.


        이런 선택은 이교 백성들 가운데서 야훼의 위엄과 사랑을 현양하기 위하여, 야훼께서 선별하시고 모든 민족보다 우월한 존엄성과 명성과 영광을 갖춘 거룩한 백성을 만드는데 그 목적이 있다(신명 26, 19).


        그 결과 이스라엘은 선택에 의하여 이방인들과는 구별된다. 그러나 그 선택을 제대로 받아들일 때 하느님께 영광이 되고 자신에게 특전이 되지만, 그렇지 못할 때 더 좋지 않은 처지에 놓이게 된다. “세상 많은 민족들 가운데서 내가 너희만을 골라내었건만 너희는 온갖 못할 짓을 다하니 어찌 벌하지 않으랴”(아모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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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은총 이해: 구약 성서-하느님의 선택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3.1. 하느님의 선택.

    “너희는 뭇 민족 가운데서 내 것이 되리라”(출애 19, 5). 하느님의 선택이란 타민족들이 경험하지 못한 이스라엘만의 역사적 체험이고, 인간적 노력과 성과와는 관계없이 하느님의 뜻에 의하여 결정되는 특별한 행위이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선택은 자유롭다. 하느님이 주도권을 쥐고 계신다.(너희가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선택하였다- 예수님의 말씀). 선택을 뜻하는 bahar는 후대에 가서 규정된 것이지만, 사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러한 하느님의 행위를 자신들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설정되는 순간에 의식하고 있었다. 즉 하느님께 선택되었다는 자각은 계약의 체결과 직결된다. 이스라엘이 다른 많은 민족 중에서 특별히 선택되었으니 그 계약은 비길 데 없는 계약인 셈이다. 선택된 만큼 그 계약은 하느님의 신비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한다. 바로 선택 사상이 계약에 깊은 종교적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하느님의 선택에 관한 최초의 고백은 이스라엘의 가장 오래된 신앙 고백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신명 26, 1-11이다. “‘나는 야훼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우리의 선조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이 땅에 들어오게 된 것을 오늘 나의 하느님 야훼께 아룁니다…. 제 선조는 떠돌며 사는 아람인이었습니다. 그는 얼마 안되는 사람을 거느리고 에집트로 내려 가서 거기에 몸붙여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불어나 크고 강대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에집트인들은 우리를 억누르고 괴롭혔습니다. 우리를 사정없이 부렸습니다. 우리가 우리 선조들의 하느님 야훼께 부르짖었더니 야훼께서는 우리의 아우성을 들으시고 우리가 억눌려 고생하며 착취당하는 것을 굽어 살피셨습니다. 그리고 야훼께서는 억센 손으로 치시며 팔을 뻗으시어 온갖 표적과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모두 두려워 떨게 하시고는 우리를 에집트에서 구출해 내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 오시어 젖과 꿀이 흐르는 이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여호 24 장(2-13)에는 여호수에 의해서 소집된 세켐 대 집회에서도 이 신앙은 반복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 기원이 하느님의 선택에 있음을 보여준다. 24, 15에 나타나는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 “누구를 섬길 것인지 여러분이 오늘 선택하십시오. … 백성들이 대답하였다. ‘우리가 야훼를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다니 될 법이나 한 말입니까? 우리르, 아니 우리 조상들을 에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신 분이 우리 하느님 야훼이신데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바로 우리 눈앞에서 그렇듯이 큰 기적을 보여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이리로 오는 도중에 시종 지켜 주셨고 우리가 여러 민족들 사이를 둟고 지나 오는 동안 줄곧 지켜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모든 민족을, 이 땅에 사는 아모리인들까지도 우리 앞에서 몰아 내신 분은 야훼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야훼를 섬기겠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25, 15-18).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은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한 것에 대한 응답이다.

            이러한 신앙 고백들은 하나의 역사를 말하고 있으며, 계속되는 하느님의 계획을 드러내고 있다. 이스라엘이 선민으로 결정되기 전에도 여러 가지 선택으로 준비되었으며 그 후에도 새로운 선택에 의하여 발전되고 있다.

            한 백성으로 선택되는 깃점 아브라함 이전 인류 역사의 도식에도 아벨에 대한 하느님의 총애(창세 4,4), 에녹에 대한 특별한 취급(창세 5, 24), 노아(창세 7, 1), 셈에 대한 축복(창세 9, 26)이 나타난다. 이러한 사례들이 기록되는 배경에는 항상 하느님의 선택이 그 배경으로 깔려있다. 아브라함과 그의 백성을 선택함으로써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계획이 준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느님의 선택의 계획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명백하게 나타나고 그 후 선조들을 통하여 계승되고 있다. 하느님은 한 민족을 선택하시고 이 선택을 계속 유지하신다. 이 선택의 유지는 예수의 족보에 나타나듯이 장자들로 계승되는 것이 아니다. 야곱, 유다, 다윗 등 하느님께서 별도로 선택하신다. 인간의 논리나 생각과 다르다. 여기서 하느님의 선택의 특징을 볼 수 있다.  하느님의 선택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자유로윤 의지에 기반을 두고 있다. 선택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인간이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신명 7,7). 하느님의 은총으로 베풀어지는 선택은 인간의 어떤 공적이나 가치를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성서는 하느님이 구체적인 인물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작은 자’ ‘보잘 것없는 형제’를 선택하고 있음에 주의하고 있다. 하느님은 아벨의 제물을 받아들이셨다(창세 4, 5). 형 에사우보다 동생 야곱을 선호하셨다(창세 25,29 이하; 27장; 28,10-22). 요셉은 야곱의 12 아들들 가운데 막내 벤자민의 형이다. 하느님은 요셉을 축복하셨다. 하느님은 ‘입이 둔하고 혀가 굳은’ ‘말재간이 없는’ 모세를 선택하셨다(출애 3, 1-12: 4, 10-11). ‘입술이 더러운 사람’으로 자처하는 이사야를 예언자로 선택하셨다(이사 6,1-10). 이러한 선택에서 하느님의 주도권, 하느님의 선택의 자유로움을 말해준다. 이스라엘 민족도 예외가 아니다. 이스라엘은 여러 민족 중에서도 작은 민족이었다. 그럼에도 선택된 것은 하느님의 선택의 자유로움을 말해준다(신명 7,7-8). 예수께서 12명의 제자들을 선택한 일도 이러한 문맥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우선 12명의 제자들은 각양각색의 혼성팀이었다. 세관원 출신 마태오, 열혈당원 시몬,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아, 어부 출신의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버… 어떤 일관된 선발 기준이 없었다. 이것은 예수가 주도권을 쥐고 선택하였음을 드러낸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요한 16, 15). 하느님이 베푸시는 은총으로서의 선택은 선택된 자의 특전을 의미한다. 아울러 선택되지 않은 자의 실각을 의미한다. 하지만 하느님의 선택은 선택된 자의 특전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선택된 자는 항상 소명을 아울러 받게 된다. 이 소명은 항상 다른 이를 위한 것이다. 우선 하느님의 위엄과 사랑을 드러내야 한다. 다른 이들의 구원을 목표로 한다.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선택도 예외가 아니다. 세상의 모든 백성들이 축복을 받기 위한 것이요, 세상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제로, 수도자로, 선택하시는 것은 단지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일까? 모세, 이사야를 예언자로, 다윗을 왕으로 선택하신 것이 단지 모세만을, 이사야만을 다윗만을 위한 것일까? 아니다. 요나를 선택한 것은 니니웨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한 사람을 주교로 선택하는 것은 그 교구를 위한 것이다. 한 사제를 선택한 것은 그리스도교 백성을 위한 것이다. 한 사람을 그리스도교인으로 선택한 것은 그 주변의 비그리스도교 인을 위한 것이다. 교회의 선택은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선택이다. 하느님께서는 그 후에도 계속해서 선민 중에서 특정인을 선택하시어 특수 사명을 부여하신다.

            요약하면, 선택은 오로지 하느님의 자유로우신 의지에서 출발한다. 사랑과 선택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인간이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선택의 은총은 하느님의 사랑만이 그것을 설명할 수 있다. 인간의 어떤 공적이나 가치도 그것을 얻어낼 수 없다. 이스라엘은 여러 민족 중에서도 작은 민족이었으나 야훼께 사랑을 받았던 것이다(신명 7, 7-8). 이스라엘이 하느님과 부자 관계는 하느님의 선택에 근거한다.

            이런 선택은 이교 백성들 가운데서 야훼의 위엄과 사랑을 현양하기 위하여, 야훼께서 선별하시고 모든 민족보다 우월한 존엄성과 명성과 영광을 갖춘 거룩한 백성을 만드는데 그 목적이 있다(신명 26, 19).

            그 결과 이스라엘은 선택에 의하여 이방인들과는 구별된다. 그러나 그 선택을 제대로 받아들일 때 하느님께 영광이 되고 자신에게 특전이 되지만, 그렇지 못할 때 더 좋지 않은 처지에 놓이게 된다. “세상 많은 민족들 가운데서 내가 너희만을 골라내었건만 너희는 온갖 못할 짓을 다하니 어찌 벌하지 않으랴”(아모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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