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서의 은총 이해-바울로: 은총과 죄(예정의 문제)

 

4.3.6. 예정의 문제




        어떻든 선택된 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부성적 섭리는 하나의 장애물로 간주하게 되는 특별한 예정에 적용된다(로마 9, 1). 이러한 생각은 바울로가 유다이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구약성서 전체는 이러한 섭리를 그 마지막의 성취를 위한 인간들과 사건들을 제시하는 통치적 섭리의 개념으로 구체적으로 표명한다. 즉 구원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예를 들면 이사 45, 1). 아무도 구원될 수 없다는 생각과는 달리 그리스도 자신은 하느님 선택의 개념을 강조하셨다(요한 6,44; 15, 16; 사도 13, 48). 그러나 하느님의 약속이 그대로 실현되는 것은 새로운 문제를 일으켰다. 왜 오랜 세기동안 감추어진 이러한 복음, 이러한 신비의 계시(로마 16, 25)가 있어야 하는가? 또 누구에게는 알려지고 또 누구에게는 설교되지 않는가?(로마 10, 14-16). 그리고 누구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또 누구는 그것을 반대하는가?


        요한 복음사가의 신학에서 예정의 문제는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에 신경을 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인간의 자유 의지와 그의 은총으로 내적으로 부르시고 조명하시는 하느님 사이에 협력은 신비로 남는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 가운데 사랑받는 제자는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는 어떤 점을 지적해주고 있다. 하느님의 의지는 때로 유다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신다는 것이다(요한 12, 40). 사도 바울로는 더욱 대담하다. 성실한 사람들은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로마 8, 33: 참조: 1 테살 2, 12; 1 코린 1, 27; 에페 1, 4). 왜 그들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가? 하느님은 다스림에 있어서 자유롭고 그분의 자유로운 의지를 따라 선택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선택을 받고 안 받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로마 9, 16).


        바울로의 대답은 그후 여러 세기동안 수많은 주석과 논쟁을 야기시켰다. 오늘날까지도 그러한 메아리의 울림이 있다. 바울로는 여기서 세례를 생각하며 선택을 강조한 것이지 영원한 영광에 대한 예정으로 말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여기서 각 개별인간의 예정의 신비를 해결하려 한다면 그 전체적인 그림이 망쳐진다는 점을 강조해야할 것이다. 바울로는 한 그룹을 다루고 있다. 이방인들의 회개와 이스라엘 백성의 고집 사이의 반대점을 다루고 있다. 에사오와 야곱은 저주와 선택의 전형이 아니라 이방인과 유다인들 사이의 예형이다.


        사도 바울로가 우리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거부와 세상의 구원을 확신하도록 하는 섭리의 신비적인 방법이다. 그러한 형태를 오랜 세기 동안 보내야했던 그 도구를 산산히 흩어버리는 듯이 보이고 있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종국입니다”(로마 10, 4). 여기서 우리는 유다인들이 그리스도를 거절하였다는 것을 본다. 그들의 희망의 모든 용어인 그리스도를. 한편 이방인들은 그분을 열렬히 환영하였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그의 백성을 거부하였는가? 아니다. 바울로는 말한다. 그것은 일시적인 스캔들일 뿐이다. 어느날 모든 민족들이 교회로 들어간 다음 이스라엘은 회개하게 될 것이다(로마 11, 25-26: 모든 이방인들이 하느님께 돌아 오는 날에는 그 완고한 마음을 버릴 것이고 따라서 온 이스라엘도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올리브 나무에서 잘려나간 그 가지들은 그 자리에 우리를 접붙이기 위한 것이다. 믿지 않았던 탓으로 잘려 나갔던 가지들이 믿게 되면 하느님께서는 그 가지들들 접붙여 주실 것이다. 하느님은 전에 잘라 내셨던 가지들이라고 다시 접붙이실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로마 11, 17-24). 이러한 역사 신학, 고민만이 아이나 악과 죄 자체 안에 한가지 요소를 들어 있는 인류의 이러한 변증법은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불 순종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로마 11, 32). 오리게네스는 이 마지막 문헌에서 apocatastasis라는 이론을 정당화하려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각 개별 인간의 그러한 구원을 문제삼고 있지는 않다. 바울로는 불충한 시기 이후 이스라엘 역시 구원될 것을 생각하고 있다. “오 하느님의 풍요한 지혜와 지식은 심오합니다.”(로마 11, 33)라는 바울로의 감탄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개별 인간의 구원에 대해서 바울로는 유다인이나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혼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아니라(로마 2, 16; 2 테살 1, 9), 그리스도인들도 간음자들이나 도둑들은 하늘 나라를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갈라 5, 19-21; 1 코린 6, 9-10; 에페 5, 5-11). 우리는 쉽게 바울로 자신이 인간의 자유와 하느님의 다스림의 행위 사이의 관계의 어려운 문제를 명확하게 하려는 시도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랜 세기동안 신학자들은 로마 9장과 11장을 통해서 집요하게 상반된 주제를 위한 의화를 그 안에서 찾으려는 시도를 보여왔다. 우리는 이러한 논쟁을 여기서 다루지 않는다. 다른 많은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예정의 문제 안에서 “그리스도교적 교의의 사회적 성격”에 시선을 놓치지 말아야한다는 사실 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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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uest 님의 말:

     

    4.3.6. 예정의 문제


            어떻든 선택된 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부성적 섭리는 하나의 장애물로 간주하게 되는 특별한 예정에 적용된다(로마 9, 1). 이러한 생각은 바울로가 유다이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구약성서 전체는 이러한 섭리를 그 마지막의 성취를 위한 인간들과 사건들을 제시하는 통치적 섭리의 개념으로 구체적으로 표명한다. 즉 구원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예를 들면 이사 45, 1). 아무도 구원될 수 없다는 생각과는 달리 그리스도 자신은 하느님 선택의 개념을 강조하셨다(요한 6,44; 15, 16; 사도 13, 48). 그러나 하느님의 약속이 그대로 실현되는 것은 새로운 문제를 일으켰다. 왜 오랜 세기동안 감추어진 이러한 복음, 이러한 신비의 계시(로마 16, 25)가 있어야 하는가? 또 누구에게는 알려지고 또 누구에게는 설교되지 않는가?(로마 10, 14-16). 그리고 누구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또 누구는 그것을 반대하는가?

            요한 복음사가의 신학에서 예정의 문제는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에 신경을 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인간의 자유 의지와 그의 은총으로 내적으로 부르시고 조명하시는 하느님 사이에 협력은 신비로 남는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 가운데 사랑받는 제자는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는 어떤 점을 지적해주고 있다. 하느님의 의지는 때로 유다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신다는 것이다(요한 12, 40). 사도 바울로는 더욱 대담하다. 성실한 사람들은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로마 8, 33: 참조: 1 테살 2, 12; 1 코린 1, 27; 에페 1, 4). 왜 그들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가? 하느님은 다스림에 있어서 자유롭고 그분의 자유로운 의지를 따라 선택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선택을 받고 안 받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로마 9, 16).

            바울로의 대답은 그후 여러 세기동안 수많은 주석과 논쟁을 야기시켰다. 오늘날까지도 그러한 메아리의 울림이 있다. 바울로는 여기서 세례를 생각하며 선택을 강조한 것이지 영원한 영광에 대한 예정으로 말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여기서 각 개별인간의 예정의 신비를 해결하려 한다면 그 전체적인 그림이 망쳐진다는 점을 강조해야할 것이다. 바울로는 한 그룹을 다루고 있다. 이방인들의 회개와 이스라엘 백성의 고집 사이의 반대점을 다루고 있다. 에사오와 야곱은 저주와 선택의 전형이 아니라 이방인과 유다인들 사이의 예형이다.

            사도 바울로가 우리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거부와 세상의 구원을 확신하도록 하는 섭리의 신비적인 방법이다. 그러한 형태를 오랜 세기 동안 보내야했던 그 도구를 산산히 흩어버리는 듯이 보이고 있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종국입니다”(로마 10, 4). 여기서 우리는 유다인들이 그리스도를 거절하였다는 것을 본다. 그들의 희망의 모든 용어인 그리스도를. 한편 이방인들은 그분을 열렬히 환영하였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그의 백성을 거부하였는가? 아니다. 바울로는 말한다. 그것은 일시적인 스캔들일 뿐이다. 어느날 모든 민족들이 교회로 들어간 다음 이스라엘은 회개하게 될 것이다(로마 11, 25-26: 모든 이방인들이 하느님께 돌아 오는 날에는 그 완고한 마음을 버릴 것이고 따라서 온 이스라엘도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올리브 나무에서 잘려나간 그 가지들은 그 자리에 우리를 접붙이기 위한 것이다. 믿지 않았던 탓으로 잘려 나갔던 가지들이 믿게 되면 하느님께서는 그 가지들들 접붙여 주실 것이다. 하느님은 전에 잘라 내셨던 가지들이라고 다시 접붙이실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로마 11, 17-24). 이러한 역사 신학, 고민만이 아이나 악과 죄 자체 안에 한가지 요소를 들어 있는 인류의 이러한 변증법은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불 순종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로마 11, 32). 오리게네스는 이 마지막 문헌에서 apocatastasis라는 이론을 정당화하려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각 개별 인간의 그러한 구원을 문제삼고 있지는 않다. 바울로는 불충한 시기 이후 이스라엘 역시 구원될 것을 생각하고 있다. “오 하느님의 풍요한 지혜와 지식은 심오합니다.”(로마 11, 33)라는 바울로의 감탄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개별 인간의 구원에 대해서 바울로는 유다인이나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혼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아니라(로마 2, 16; 2 테살 1, 9), 그리스도인들도 간음자들이나 도둑들은 하늘 나라를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갈라 5, 19-21; 1 코린 6, 9-10; 에페 5, 5-11). 우리는 쉽게 바울로 자신이 인간의 자유와 하느님의 다스림의 행위 사이의 관계의 어려운 문제를 명확하게 하려는 시도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랜 세기동안 신학자들은 로마 9장과 11장을 통해서 집요하게 상반된 주제를 위한 의화를 그 안에서 찾으려는 시도를 보여왔다. 우리는 이러한 논쟁을 여기서 다루지 않는다. 다른 많은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예정의 문제 안에서 “그리스도교적 교의의 사회적 성격”에 시선을 놓치지 말아야한다는 사실 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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