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논쟁의 재개: Faustus 와 Fulgentius
잠시동안 논쟁은 가라앉았다. 그러나 40년 후 사제 Lucidus가 가르치던 예정론이 단죄되었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을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다. 일부는 영원한 삶을 위하여 처음부터 예정되었고, 또 다른 사람들은 영원한 죽음을 위하여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의 주교 Faustus를 통하여 Lucidus는 아르스 공의회(437), 리용공의회(475)에서 단죄되었다. 거기서 그는 신앙 고백에 동의해야 했다. 진정한 아우구스티니안들은 이러한 문헌의 정신을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을 지니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Faustus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리용 공의회의 Lucidus의 단죄를 부풀리기 위하여 세미펠라지아니즘적 이론이 분명한 은총과 자유 의지 문제에 관한 책을 저술하였다. 그는 타당하게 예정과 선지식에 관한 문제를 다루면서 거부하였다. 그리고 이스라엘 성조들은 그리스도의 은총없이 구원되었음을 가르쳤다. 이 저술은 그가 위대한 박사라는 명성이 떨쳐지고 있던 Gaul 지방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다만 Gennadius of Marseille 의 De scriptoribus ecclesiasticis에서 펠라지안 논쟁과 관계되지 않는 아우구스티노의 작품들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Cassian을 찬양하고 Prosper of Aquitaine를 비판하면서 Faustus의 저술을 매우 칭찬하였다.
아프리카에서 다른 한편으로 아우구스티니즘은 승리를 구가하였다. 하지만 항상 그 최상의 형태를 유지한 것은 아니다. 그처럼 Faustus를 거슬러서 반대 움직임이 아프리카로부터 비롯되었다. 특히 Augustinus abbreviatus라고 불리는 Ruspe의 성 Fulgentius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519년 은총에 관한 논쟁과 신앙의 시작에 관한 논쟁이 우연하게 그리스도론적 논쟁과 연결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콘스탄티노플에서 그리고 로마에서, Scythian 수도자들은 Unus de trinitatae passus est라는 형식을 인정받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육화에 관한 Riez의 Faustus의 저술들은 그들의 이론과 반대되는 방향을 보였다. 그 수도자들은 Faustus의 저술들을 통하여 그를 반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작가는 은총과 예정에 관한 이단자 상태라는 것을 주장하였다. 그 사건은 교황 Hormisdas에게까지 전달되었다. 그는 Faustus가 권위 없다고 답변하였다. 은총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교황은 Hilary와 Prosper of Aquitaine의 요구에 의해 쓰여진 아우구스티노의 책들을 언급하였다. 그 역시 “교회 문헌 안에” 발견되는 Capitula를 인용하였다. 로마 교회는 점차적으로 이러한 서한들을 보급하였다. 로마에서 지지되는 그 이론은 Indiculus였다. 거기에 De predestinatione sanctorum으로부터 인용된 해설이 첨가되었다. 그리고 De dono perseverantiae, Sententiae ex Augustino delivatae 등의 글이 쓰여졌다.
Scythian 수도자들은 반달족의 지배 하에서 유배를 당했던 아프리카 주교들에게 되돌아 갔다. 이 그룹 중에서 Ruspe의 Fulgentius는 가장 유명한 주교였다. 그 수도자들은 육화와 은총에 관한 그들의 신앙 고백을 보냈다. 그들은 교묘하게 아우구스티노를 Riez의 Faustus와 반대되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Fulgentius는 De incarnatione et gratia Domini Jesu Christi, 그리고 Contra Faustum이라는 책을 썼다. 나중에 둘 모두 유배되었고, 후에 아프리카로 돌아와서 은총과 예정에 관한 책을 썼다. 그러나 어떤 작품도 그 문제에 대해서 공헌하지 못했다. 비록 훌젠씨오는 세미펠라지아니즘의 오류를 반대하였다 하더라도 그는 구원 의지에 관한한 스승의 애매모호한 입장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파우스토에게 매우 엄격하였다하더라도 훌젠씨오는 예정주의를 단죄하고 있었다.

9.3 논쟁의 재개: Faustus 와 Fulgentius
잠시동안 논쟁은 가라앉았다. 그러나 40년 후 사제 Lucidus가 가르치던 예정론이 단죄되었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을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다. 일부는 영원한 삶을 위하여 처음부터 예정되었고, 또 다른 사람들은 영원한 죽음을 위하여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의 주교 Faustus를 통하여 Lucidus는 아르스 공의회(437), 리용공의회(475)에서 단죄되었다. 거기서 그는 신앙 고백에 동의해야 했다. 진정한 아우구스티니안들은 이러한 문헌의 정신을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을 지니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Faustus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리용 공의회의 Lucidus의 단죄를 부풀리기 위하여 세미펠라지아니즘적 이론이 분명한 은총과 자유 의지 문제에 관한 책을 저술하였다. 그는 타당하게 예정과 선지식에 관한 문제를 다루면서 거부하였다. 그리고 이스라엘 성조들은 그리스도의 은총없이 구원되었음을 가르쳤다. 이 저술은 그가 위대한 박사라는 명성이 떨쳐지고 있던 Gaul 지방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다만 Gennadius of Marseille 의 De scriptoribus ecclesiasticis에서 펠라지안 논쟁과 관계되지 않는 아우구스티노의 작품들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Cassian을 찬양하고 Prosper of Aquitaine를 비판하면서 Faustus의 저술을 매우 칭찬하였다.
아프리카에서 다른 한편으로 아우구스티니즘은 승리를 구가하였다. 하지만 항상 그 최상의 형태를 유지한 것은 아니다. 그처럼 Faustus를 거슬러서 반대 움직임이 아프리카로부터 비롯되었다. 특히 Augustinus abbreviatus라고 불리는 Ruspe의 성 Fulgentius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519년 은총에 관한 논쟁과 신앙의 시작에 관한 논쟁이 우연하게 그리스도론적 논쟁과 연결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콘스탄티노플에서 그리고 로마에서, Scythian 수도자들은 Unus de trinitatae passus est라는 형식을 인정받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육화에 관한 Riez의 Faustus의 저술들은 그들의 이론과 반대되는 방향을 보였다. 그 수도자들은 Faustus의 저술들을 통하여 그를 반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작가는 은총과 예정에 관한 이단자 상태라는 것을 주장하였다. 그 사건은 교황 Hormisdas에게까지 전달되었다. 그는 Faustus가 권위 없다고 답변하였다. 은총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교황은 Hilary와 Prosper of Aquitaine의 요구에 의해 쓰여진 아우구스티노의 책들을 언급하였다. 그 역시 “교회 문헌 안에” 발견되는 Capitula를 인용하였다. 로마 교회는 점차적으로 이러한 서한들을 보급하였다. 로마에서 지지되는 그 이론은 Indiculus였다. 거기에 De predestinatione sanctorum으로부터 인용된 해설이 첨가되었다. 그리고 De dono perseverantiae, Sententiae ex Augustino delivatae 등의 글이 쓰여졌다.
Scythian 수도자들은 반달족의 지배 하에서 유배를 당했던 아프리카 주교들에게 되돌아 갔다. 이 그룹 중에서 Ruspe의 Fulgentius는 가장 유명한 주교였다. 그 수도자들은 육화와 은총에 관한 그들의 신앙 고백을 보냈다. 그들은 교묘하게 아우구스티노를 Riez의 Faustus와 반대되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Fulgentius는 De incarnatione et gratia Domini Jesu Christi, 그리고 Contra Faustum이라는 책을 썼다. 나중에 둘 모두 유배되었고, 후에 아프리카로 돌아와서 은총과 예정에 관한 책을 썼다. 그러나 어떤 작품도 그 문제에 대해서 공헌하지 못했다. 비록 훌젠씨오는 세미펠라지아니즘의 오류를 반대하였다 하더라도 그는 구원 의지에 관한한 스승의 애매모호한 입장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파우스토에게 매우 엄격하였다하더라도 훌젠씨오는 예정주의를 단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