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사총론-성사일반론 형성의 역사적 과정(중세 스콜라 신학1)

 

4.2.     중세 스콜라 신학




4.2.1.   성사에 대한 定義를 찾아서


교회사적 배경: 중세는 대략 500-1500년 사이의 시기를 일컫는다. 중세 초기 (500-1050)는 476년 서로마의 멸망으로 정치적 패권이 로마 제국에서 게르만 족에게로 넘어가면서, 야만족이었던 게르만족이 가톨릭 교회를 통해서 로마의 문명을 받아들이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도교의 교부학의 정신에서 성서신학을 傳承하고 보호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새로운 신학을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전래된 것을 충실히 지키고, 전례 면에서는 (베드로의 권위 때문에) 로마의 전례를 답습하면서 정확하게 모방하는 데에 주력하였다. 그러기에 중세 초기를 ‘신학이 없던 시대’라고 까지 표현한다.


11세기에는 클루니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개혁운동과 그레고리오 개혁이 이루어져서 교회 생활이 심화되는데, 이는 12, 13세기에 있어서 신학적 사고의 체계화와 세분화를 초래하였다. 그리스도교적 서구가 교황의 지도하에서 통일체로 성장할수록 그만큼 제 민족 사이의 정신적 교류가 활발하여졌다. 이 과정에서 아랍을 통해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서구에 유입되었다. 사상의 교류는 전래된 것을 다방면으로 연구하도록 자극하였다. 학문활동의 중심은 수도회로부터 1200년 경부터 새로 탄생한 대학으로 옮겨갔다 1200년 경에 파리에서 여런 학교의 교사들이 ‘교사단’ universitas magistrorum을 형성, 이 무렵 볼로냐에서는 학생들의 연합인 학생단 = universitas scholarium이 구성되었다. 그 후 이런 단체들이 많은 곳에서 발생하였고, 그것들이 간단히 ‘대학’으로 불리게 되었다.




빠리의 아우그스티노 수사회 소속 신학자로써 영향력이 컸던 빅토르의 후고(Hugo von St. Viktor, +1141)는 협의의 의미로서의 성사에 대한 정의을 찾는다. 그는 “표지”란 개념은 너무 광범위하다고 여겼는데, 왜냐하면 그에게 표지란 무엇인가를 표현하지만, 표현된 바를 주지는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서 성사 안에는 표징성 (Zeichenhaftigkeit)만이 아니라 효과성 (Wirksamkeit)도 있다”.1) 즉 성사는 그것이 표현하는 은총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성사는 표지일 뿐 아니라 은총을 담는 그릇이다. 그릇이란 비유와 함께 스콜라 신학 성사론의 치유적인 이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대체로 성사 은총은 죄와 그 결과에 대한 약으로 널리 이해되었고, 성사 자체는 약을 담는 그릇으로 여겼다.


고대 교회에서는 성사가 은총을 전하는 표지라고 이해하였지만, 이제 중세 초기 스콜라 신학에서는 성사를 축성된 물질로서 보는 경향으로 흐르게 된다. 이와 함께 동방교회에서는 성사의 수여자와 수취자 사이에 대화 형식으로 이루어지던 전례가 물질적 요소 (빵, 포도주, 기름)를 축성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후고의 主著書 “De sacramentis christianae fidei”는 용어 변천에 대한 전형적인 예이다. 제목에서 “sacramentum”은 아직 신비, 신앙 내용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다: “그리스도 신앙의 신비들에 대해서”. 후고는 자신의 저서 전반부에서 창조, 신앙, 옛 계약의 성사에 대해 다루고나서, 후반부에서는 협의의 의미로서의 성사에 대해 조직적으로 다룬다. 그가 내린 정의에 따르면, “성사는 감각적으로 지각될 수 있는 육체적 또는 물질적인 외적 요소로서, 그것은 보이지 않는 영신적인 은총을 비슷함을 근거로 표현하며, 설정을 근거로 의미하고, 거룩한 축성을 근거로 포함한다.”2) 후고의 성사 정의는 세 가지 요소로 요약된다: 1) 비물질적인 것을 표현하는 물질적 표지, 2) 은총을 부여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로부터 제정, 3) 표지는 사제를 통해 축성됨으로써  은총을 실제로 포함(마치 그릇처럼). 이렇게 성사 개념에 있어 가시적 표징, 그리스도에 의한 제정, 은총의 포함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필수 요소로 규정됨으로써 현재까지 이르는 협의의 성사 개념에 이른다.




이러한 성사 개념의 규정, 무엇보다도 후고가 성사의 필수적 요소로 꼽은 그리스도에 의한 제정과 연관해서 성사의 숫자가 고정된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고대교회의 성사 개념은 광범위하고 아직 정확하게 규정 지워지지 않았는데, 이는 12세기까지 계속된다. 스콜라 신학의 전단계에서는 성사의 수에 대해서 아직 여러 가지 의견이 지배하고 있었다. 샤르뜨르(Chartres)의 주교 풀베르트(Fulbert, +1028), 뷰르쯔부르크(Würzburg)의 주교 브르노(Bruno, + 1045)는 단지 두 가지 성사, 즉 세례와 성찬례만을 인정한다. 클레르보(Clairvaux)의 베르나르도(Bernhard, +1153)는 10가지 성사 (그중에 세족례도 포함), 베드로 다미아니(Petrus Damiani, +1072) 추기경은 12 가지 성사 (왕의 도유도 포함) 언급하였고, 다른 이들도 이 사이에 머무르고 있다. 비로소 초기 스콜라 신학에 이르러서 그 신학의 조직화에 대한 관심과 함께 최초로 성사론이란 과목과 성사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자 하는 시도가 나타나고 일곱 가지 성사로 고정 되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성사를 7가지로 제한한 베드로 롬바르두스(Petrus Lombardus, +1160)의 견해가 관철되었다.


베드로 롬바르두스는 성사가 은총을 담는 그릇과 같은 것이 아니라 은총의 원인이라고 규정한다. “본래적인 의미의 성사는 무엇인가 하면, 하느님 은총의 표지로서, 그 은총의 모습(imago)을 지니고, 그 은총의 원인(causa)으로 존재하는 것이다”.3) “imago”란 용어는 아직도 고대 교회의 전통을 회상하게 하며, “causa”란 어휘는 스콜라 신학의 새로운 관점을 드러난다고 하겠다.




4.2.2.  은총의 원인인 성사


스콜라 신학에서는 처음에 “원인”(causa)이란 용어가 주저 속에서 수용되었고 변형된 형태로 사용되었다. 그 용어 사용을 꺼려하였던 이유는 크게 나누어서 두 가지였다. 성사가 하느님 은총을 전하는 데에 원인으로 작용한다고 할 때 하느님의 주권이 침해되지 않느냐는 신학적인 의구심과, 어떻게 물질적인 것(예식의 요소)이 정신적인 것 (인간의 영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하는 인간학적 문제가 그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성사가 은총의 원인이라는 것에 대해서 3가지 서로 다른 설명이 형성되었다.




1) 설비적(設備的) 효과:  초기 프란치스꼬회 신학자들의 공동 저서인 “Summa Halensis”(1235 이후)는 성사가 설비적 효과를 지닌다고 가르친다. 즉 성사는 영혼에 어떤 설비를 이룩하는데, 이는 아직 은총 자체는 아니지만 은총을 준비하는 역할을 한다. 도식으로 표현하면, 성사 → 인간 → 하느님의 은총


2) 계약설(조건설):  보나벤뚜라(Bonaventura, +1274)는 자신의 저서 “Breviloquium”에서 성사가 은총을 인과적으로 야기(惹起)한다는 생각을 분명하게 배척하였다. 왜냐하면 오직 하느님만이 은총을 주시며, 하느님 자신은 성사에 묶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릇”이나 “원인”이라는 말은 하느님이 정하신 규정을 근거로 은총을 성사 안에서, 그를 통해서 받게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실제로 은총이 전해지는 것은 성사 자체에 속한 능력에 起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정하신 규정에 기인한다. 보나벤뚜라가 명제 주석서에서 언급한 바에 따르면, 성사가 은총을 전할 수 있는 이유는 마치 계약과 같은 것을 통해서(ex quadam pactione) 주어진 하느님의 약속 때문이다. 즉 성사를 받을 때마다 매번 그 성사에 상응하는 은총이 부여되도록 하느님께서 약속(계약)하셨다는 것이다: 성사 → 하느님 → 인간




보나벤뚜라는 자신의 “명제주석서”에서 설비적 인과성의 이론과 계약설 두 가지를 다 전하면서, 두번째의 것을 선호한다. 그러나 그는 두 가지 설 중에서 어느 하나를 단정적으로 선택할 입장에 있다고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맥락에서 이성적으로 정확히 얘기하는 것은 오히려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비로운 사물에 대해 언급할 때 철저히 이성에만 매달려서는 안된다”.4)




3) 도구적 원인: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74)는 보나벤뚜라가 선호했던 계약설에 만족하지 못한다. 계약설에 의하면 성사는 단지 은총의 조건에 불과한데, 이는 성사의 효과를 내용적으로가 아니라 단지 겉으로만 밑받침할 뿐이다. 이런 방식의 성사적 효력은 왕이 내린 훈령에 의해 백 파운드의 가치를 갖는 납전에 비길 수 있다. 그러나 이 납전은 진짜 금에 비하면 그 자체로는 아무 가치도 없다.


이에 비해 토마스는 도구적 인과성의 이론을 내세우며 성사가 그 자체로서 하느님 은총을 전달하는 도구(causa instrumentalis)라고 보았다. 그의 이론에서도 하느님 자신은 은총 행위의 원래적인 주체로 머무르신다. 그러나 성사는 단지 하느님의 명령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은총 전달에 필요하다. 예를 들어 성사는 목수가 책상을 만들 때 도구로서 사용하는 톱에 비교할 수 있다. 책상 (은총)이 생기게 된 주 원인은 목수 (하느님)이다. 여기에서 톱은 그 자체로 널판지를 자르는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 책상이 만들어지는 데에 도구적 역할을 한다. 이 의견에는 은총의 근원으로서의 하느님과 은총 전달의 매체로서의 성사의 적극적인 역할 모두를 살리려는 노력이 반영되어 있다: 하느님 → 성사 → 인간


토마스는 하느님이 은총 전달에 있어서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표지를 사용하는 것이 육신적인 인간에게 적합하다고 보았다. 물질과 육신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시각은 그 당시의 프란치스꼬회의 신학과는 분명히 차이가 나는데, 그 신학에서는 정신적인 인간이 물질적인 표지와 관계를 갖아야만하는 사실을 인간 정신을 겸손하게 하기 위한 순종의 시험으로 보았다.




4.2.3.  事效的 效力 (ex opere operato)


스콜라 신학은 성사는 단지 “人效的으로” (ex opere operantis) 즉 성사를 집전하는 이의 힘으로 효력을 내는 것이 아니라,  “事效的으로” (ex opere operato) 즉 예식의 수행에 의해서 효력을 낸다고 가르친다: 유효한 성사는 성사 집전자의 의로움이 아니라 하느님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데, 왜냐하면 성사의 본래 접전자는 하느님 혹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가르침은 그것이 형성된 배경을 알 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내용적으로 보아서는 성사의 사효적 효력에 관한 문제는 이미 3세기의 이단자 세례논쟁과 4세기의 도나뚜스파와의 대결에서 나타났다.5) 이 당시에 성행하던 여러 이단파의 추종자들이 다시 모교회인 가톨릭 교회로 돌아오기를 원하는 경우 다시 세례를 주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논쟁이 벌어졌다. 아프리카와 소아시아 교회에서는 이단에서 돌아온 신자들에게 다시 세례를 주었다. 카르타고의 치뿌리아노 주교는 이단자가 베푼 세례는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재 세례를 베풀었다. 그에 따르면, 진정한 교회는 하나요, 성령은 이 교회 안에만 머물고 계신다, 그러므로 참 교회 밖에서 이루어진 세례는 성령을 전해주지 못하므로 무효이다. 그러나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의 교회에서는 세례는 한번 밖에 받을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로마의 주교 스테파노 1세는 세례성사 때 부르는 이름으로 세례의 유효성을 근거지웠다. 즉 어디서든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성사가 베풀어지면 그 세례는 유효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래서 로마에서는 이단자 교회에서 세례 받은 이가 다시 가톨릭 교회로 들어 올 때 다시 세례를 주지 않고, 단지 안수만 하였다. 스테파노 1세는 로마교회의 관습만이 전교회에 구속력을 갖는다고 선포함으로써(DS 110) 일시적으로 교회가 분열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로마의 입장이 관철되었다. 이 문제는 4세기에 도나투스파와의 논쟁을 통해서 다시 한번 대두되는데, 이 과정에서 인호 교리가 형성된다.


성사의 사효성 문제는 교회 역사를 통해서 여러번 도전을 받고 그때마다 재확인 되었다. ‘암흑의 세기’라고 일컫는 8세기부터 12세기 사이에 교회 상황은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특히 문제시 되었던 것은 성직자들의 생활이었다. 그들은 독신생활에 충실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많은 면에서 신자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부패한 교회를 정화하기 위해서 많은 평신도 운동이 일어났다. 대표적으로 발두스파(Waldenser)와 카타리파(Katharer, 불란서에서는 Albi 지방을 중심으로 확산되어서 알비파라고도 불리운다)들인데, 이들은 엄격한 생활과 도덕생활을 내세우면서 타락한 성직자가 베푼 성사는 은총을 전달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대해서 교황 이노첸시오 3세(1198-1216)는 성사 집행자의 성덕과 성사의 유효성과는 무관하다는 교회의 가르침을 재 확인 하였다.6) 15세기 초에 위클리프는 누구든지 죄중에 있는 자는 모든 권리를 상실하고 그래서 죄중에 있는 주교나 사제가 집행한 성사는 무효라고 주장했다.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에서는 위클리프에 반대해서 성사의 사효성을 재 확인하였다: “만일 대죄중에 있는 주교나 사제가 서품하지도 축성하지도 성체를 이루지도 세례를 주지도 못한다면 […] 이는 마귀에서 온 것이다”(DS 1154).


이렇게 교회는 엄격주의자들의 저항을 받으면서 성사가 사효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거듭 확인해왔다. 이 가르침이 의도하는 바를 요약하면: 성사의 유효성은 성사 집전자의 올바른 신앙이나 윤리적인 완전성에 달려있지 않다. 왜냐하면 교회 공동체의 예식인 성사를 통해 본래적으로 행동하는 이는 하느님, 또는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서 성사의 효력은 확실한 객관성을 얻는다: 주관적인 동인(動因) – 성사를 집전하는 이들의 신앙과 개방성 – 에 앞서 이미 하느님의 은총이 신뢰할 수 있게 먼저 와 있다.


성사 효력의 객관성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ex opere operato”란 말은 원래 구원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초기 스콜라 신학에서 예수의 구원의 죽음에 관계해서 얘기할 때, 구원을 이루는 예수의 자기 봉헌의 (좋은) 업적을 “opus operatum”이라 하고, 예수를 죽음에로 이끈 인간의 (나쁜) 업적을 “opus operans”라고 하여 서로 구분지었다. 그러다가 중기 스콜라 신학에 와서 “ex opere operato” – “ex opere operantis”의 두 개념은 성사와 관련해서 객관적, 신적 동인과 주관적, 인간적 동인을 구분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또한 중기 스콜라 신학에서 이 용어는 신약의 성사와 구약의 성사, 준성사와 구분하는 데에 사용되기도 하였다. 후자는 오직 opus operantis(표지로 표현되는 성사 참가자의 신앙)에 근거해서, 전자는 opus operaum(성사 안에 내포된 하느님의 업적)에 의해 효과를 발생한다는 것이다.


종교 개혁 시대의 논쟁에서 “ex opere operato”의 정식이 신콜라 신학의 성사신학은 마술적 의식주의 물들고 인간의 예식 행위에 더 비중을 두기에 하느님 은총의 가치를 소홀히 한다는 의혹을 더해주었다. 그러기에 이 정식의 발전 과정에서 드러난 스콜라 신학자들의 의향은 이런 의혹과는 오히려 반대된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이미 고대 교회에서 하느님의 행동을 성사 집전자의 개인적, 내적 자세보다 우위에 두었듯이, 스콜라 신학에서도 “ex opere operato”란 정식을 통해서 성사에서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 혹은 그리스도가 행동의 주체임을 확고히 하였던 것이다. 스콜라 신학자들이 이 개념들의 기원이 그리스도론 – 구원론에 있음(opus operatum은 구원을 가져다 주는 그리스도의 자기 희생이다)을 알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들이 성사는 그리스도의 업적 상관없다고 이해하였다고 할 수는 없다: 예식 그 자체로부터 효력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느님이 행동하시기에 효력이 발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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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사총론-성사일반론 형성의 역사적 과정(중세 스콜라 신학1)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4.2.     중세 스콜라 신학


    4.2.1.   성사에 대한 定義를 찾아서

    교회사적 배경: 중세는 대략 500-1500년 사이의 시기를 일컫는다. 중세 초기 (500-1050)는 476년 서로마의 멸망으로 정치적 패권이 로마 제국에서 게르만 족에게로 넘어가면서, 야만족이었던 게르만족이 가톨릭 교회를 통해서 로마의 문명을 받아들이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도교의 교부학의 정신에서 성서신학을 傳承하고 보호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새로운 신학을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전래된 것을 충실히 지키고, 전례 면에서는 (베드로의 권위 때문에) 로마의 전례를 답습하면서 정확하게 모방하는 데에 주력하였다. 그러기에 중세 초기를 ‘신학이 없던 시대’라고 까지 표현한다.

    11세기에는 클루니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개혁운동과 그레고리오 개혁이 이루어져서 교회 생활이 심화되는데, 이는 12, 13세기에 있어서 신학적 사고의 체계화와 세분화를 초래하였다. 그리스도교적 서구가 교황의 지도하에서 통일체로 성장할수록 그만큼 제 민족 사이의 정신적 교류가 활발하여졌다. 이 과정에서 아랍을 통해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서구에 유입되었다. 사상의 교류는 전래된 것을 다방면으로 연구하도록 자극하였다. 학문활동의 중심은 수도회로부터 1200년 경부터 새로 탄생한 대학으로 옮겨갔다 1200년 경에 파리에서 여런 학교의 교사들이 ‘교사단’ universitas magistrorum을 형성, 이 무렵 볼로냐에서는 학생들의 연합인 학생단 = universitas scholarium이 구성되었다. 그 후 이런 단체들이 많은 곳에서 발생하였고, 그것들이 간단히 ‘대학’으로 불리게 되었다.


    빠리의 아우그스티노 수사회 소속 신학자로써 영향력이 컸던 빅토르의 후고(Hugo von St. Viktor, +1141)는 협의의 의미로서의 성사에 대한 정의을 찾는다. 그는 “표지”란 개념은 너무 광범위하다고 여겼는데, 왜냐하면 그에게 표지란 무엇인가를 표현하지만, 표현된 바를 주지는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서 성사 안에는 표징성 (Zeichenhaftigkeit)만이 아니라 효과성 (Wirksamkeit)도 있다”.1) 즉 성사는 그것이 표현하는 은총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성사는 표지일 뿐 아니라 은총을 담는 그릇이다. 그릇이란 비유와 함께 스콜라 신학 성사론의 치유적인 이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대체로 성사 은총은 죄와 그 결과에 대한 약으로 널리 이해되었고, 성사 자체는 약을 담는 그릇으로 여겼다.

    고대 교회에서는 성사가 은총을 전하는 표지라고 이해하였지만, 이제 중세 초기 스콜라 신학에서는 성사를 축성된 물질로서 보는 경향으로 흐르게 된다. 이와 함께 동방교회에서는 성사의 수여자와 수취자 사이에 대화 형식으로 이루어지던 전례가 물질적 요소 (빵, 포도주, 기름)를 축성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후고의 主著書 “De sacramentis christianae fidei”는 용어 변천에 대한 전형적인 예이다. 제목에서 “sacramentum”은 아직 신비, 신앙 내용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다: “그리스도 신앙의 신비들에 대해서”. 후고는 자신의 저서 전반부에서 창조, 신앙, 옛 계약의 성사에 대해 다루고나서, 후반부에서는 협의의 의미로서의 성사에 대해 조직적으로 다룬다. 그가 내린 정의에 따르면, “성사는 감각적으로 지각될 수 있는 육체적 또는 물질적인 외적 요소로서, 그것은 보이지 않는 영신적인 은총을 비슷함을 근거로 표현하며, 설정을 근거로 의미하고, 거룩한 축성을 근거로 포함한다.”2) 후고의 성사 정의는 세 가지 요소로 요약된다: 1) 비물질적인 것을 표현하는 물질적 표지, 2) 은총을 부여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로부터 제정, 3) 표지는 사제를 통해 축성됨으로써  은총을 실제로 포함(마치 그릇처럼). 이렇게 성사 개념에 있어 가시적 표징, 그리스도에 의한 제정, 은총의 포함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필수 요소로 규정됨으로써 현재까지 이르는 협의의 성사 개념에 이른다.


    이러한 성사 개념의 규정, 무엇보다도 후고가 성사의 필수적 요소로 꼽은 그리스도에 의한 제정과 연관해서 성사의 숫자가 고정된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고대교회의 성사 개념은 광범위하고 아직 정확하게 규정 지워지지 않았는데, 이는 12세기까지 계속된다. 스콜라 신학의 전단계에서는 성사의 수에 대해서 아직 여러 가지 의견이 지배하고 있었다. 샤르뜨르(Chartres)의 주교 풀베르트(Fulbert, +1028), 뷰르쯔부르크(Würzburg)의 주교 브르노(Bruno, + 1045)는 단지 두 가지 성사, 즉 세례와 성찬례만을 인정한다. 클레르보(Clairvaux)의 베르나르도(Bernhard, +1153)는 10가지 성사 (그중에 세족례도 포함), 베드로 다미아니(Petrus Damiani, +1072) 추기경은 12 가지 성사 (왕의 도유도 포함) 언급하였고, 다른 이들도 이 사이에 머무르고 있다. 비로소 초기 스콜라 신학에 이르러서 그 신학의 조직화에 대한 관심과 함께 최초로 성사론이란 과목과 성사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자 하는 시도가 나타나고 일곱 가지 성사로 고정 되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성사를 7가지로 제한한 베드로 롬바르두스(Petrus Lombardus, +1160)의 견해가 관철되었다.

    베드로 롬바르두스는 성사가 은총을 담는 그릇과 같은 것이 아니라 은총의 원인이라고 규정한다. “본래적인 의미의 성사는 무엇인가 하면, 하느님 은총의 표지로서, 그 은총의 모습(imago)을 지니고, 그 은총의 원인(causa)으로 존재하는 것이다”.3) “imago”란 용어는 아직도 고대 교회의 전통을 회상하게 하며, “causa”란 어휘는 스콜라 신학의 새로운 관점을 드러난다고 하겠다.


    4.2.2.  은총의 원인인 성사

    스콜라 신학에서는 처음에 “원인”(causa)이란 용어가 주저 속에서 수용되었고 변형된 형태로 사용되었다. 그 용어 사용을 꺼려하였던 이유는 크게 나누어서 두 가지였다. 성사가 하느님 은총을 전하는 데에 원인으로 작용한다고 할 때 하느님의 주권이 침해되지 않느냐는 신학적인 의구심과, 어떻게 물질적인 것(예식의 요소)이 정신적인 것 (인간의 영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하는 인간학적 문제가 그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성사가 은총의 원인이라는 것에 대해서 3가지 서로 다른 설명이 형성되었다.


    1) 설비적(設備的) 효과:  초기 프란치스꼬회 신학자들의 공동 저서인 “Summa Halensis”(1235 이후)는 성사가 설비적 효과를 지닌다고 가르친다. 즉 성사는 영혼에 어떤 설비를 이룩하는데, 이는 아직 은총 자체는 아니지만 은총을 준비하는 역할을 한다. 도식으로 표현하면, 성사 → 인간 → 하느님의 은총

    2) 계약설(조건설):  보나벤뚜라(Bonaventura, +1274)는 자신의 저서 “Breviloquium”에서 성사가 은총을 인과적으로 야기(惹起)한다는 생각을 분명하게 배척하였다. 왜냐하면 오직 하느님만이 은총을 주시며, 하느님 자신은 성사에 묶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릇”이나 “원인”이라는 말은 하느님이 정하신 규정을 근거로 은총을 성사 안에서, 그를 통해서 받게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실제로 은총이 전해지는 것은 성사 자체에 속한 능력에 起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정하신 규정에 기인한다. 보나벤뚜라가 명제 주석서에서 언급한 바에 따르면, 성사가 은총을 전할 수 있는 이유는 마치 계약과 같은 것을 통해서(ex quadam pactione) 주어진 하느님의 약속 때문이다. 즉 성사를 받을 때마다 매번 그 성사에 상응하는 은총이 부여되도록 하느님께서 약속(계약)하셨다는 것이다: 성사 → 하느님 → 인간


    보나벤뚜라는 자신의 “명제주석서”에서 설비적 인과성의 이론과 계약설 두 가지를 다 전하면서, 두번째의 것을 선호한다. 그러나 그는 두 가지 설 중에서 어느 하나를 단정적으로 선택할 입장에 있다고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맥락에서 이성적으로 정확히 얘기하는 것은 오히려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비로운 사물에 대해 언급할 때 철저히 이성에만 매달려서는 안된다”.4)


    3) 도구적 원인: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74)는 보나벤뚜라가 선호했던 계약설에 만족하지 못한다. 계약설에 의하면 성사는 단지 은총의 조건에 불과한데, 이는 성사의 효과를 내용적으로가 아니라 단지 겉으로만 밑받침할 뿐이다. 이런 방식의 성사적 효력은 왕이 내린 훈령에 의해 백 파운드의 가치를 갖는 납전에 비길 수 있다. 그러나 이 납전은 진짜 금에 비하면 그 자체로는 아무 가치도 없다.

    이에 비해 토마스는 도구적 인과성의 이론을 내세우며 성사가 그 자체로서 하느님 은총을 전달하는 도구(causa instrumentalis)라고 보았다. 그의 이론에서도 하느님 자신은 은총 행위의 원래적인 주체로 머무르신다. 그러나 성사는 단지 하느님의 명령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은총 전달에 필요하다. 예를 들어 성사는 목수가 책상을 만들 때 도구로서 사용하는 톱에 비교할 수 있다. 책상 (은총)이 생기게 된 주 원인은 목수 (하느님)이다. 여기에서 톱은 그 자체로 널판지를 자르는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 책상이 만들어지는 데에 도구적 역할을 한다. 이 의견에는 은총의 근원으로서의 하느님과 은총 전달의 매체로서의 성사의 적극적인 역할 모두를 살리려는 노력이 반영되어 있다: 하느님 → 성사 → 인간

    토마스는 하느님이 은총 전달에 있어서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표지를 사용하는 것이 육신적인 인간에게 적합하다고 보았다. 물질과 육신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시각은 그 당시의 프란치스꼬회의 신학과는 분명히 차이가 나는데, 그 신학에서는 정신적인 인간이 물질적인 표지와 관계를 갖아야만하는 사실을 인간 정신을 겸손하게 하기 위한 순종의 시험으로 보았다.


    4.2.3.  事效的 效力 (ex opere operato)

    스콜라 신학은 성사는 단지 “人效的으로” (ex opere operantis) 즉 성사를 집전하는 이의 힘으로 효력을 내는 것이 아니라,  “事效的으로” (ex opere operato) 즉 예식의 수행에 의해서 효력을 낸다고 가르친다: 유효한 성사는 성사 집전자의 의로움이 아니라 하느님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데, 왜냐하면 성사의 본래 접전자는 하느님 혹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가르침은 그것이 형성된 배경을 알 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내용적으로 보아서는 성사의 사효적 효력에 관한 문제는 이미 3세기의 이단자 세례논쟁과 4세기의 도나뚜스파와의 대결에서 나타났다.5) 이 당시에 성행하던 여러 이단파의 추종자들이 다시 모교회인 가톨릭 교회로 돌아오기를 원하는 경우 다시 세례를 주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논쟁이 벌어졌다. 아프리카와 소아시아 교회에서는 이단에서 돌아온 신자들에게 다시 세례를 주었다. 카르타고의 치뿌리아노 주교는 이단자가 베푼 세례는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재 세례를 베풀었다. 그에 따르면, 진정한 교회는 하나요, 성령은 이 교회 안에만 머물고 계신다, 그러므로 참 교회 밖에서 이루어진 세례는 성령을 전해주지 못하므로 무효이다. 그러나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의 교회에서는 세례는 한번 밖에 받을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로마의 주교 스테파노 1세는 세례성사 때 부르는 이름으로 세례의 유효성을 근거지웠다. 즉 어디서든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성사가 베풀어지면 그 세례는 유효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래서 로마에서는 이단자 교회에서 세례 받은 이가 다시 가톨릭 교회로 들어 올 때 다시 세례를 주지 않고, 단지 안수만 하였다. 스테파노 1세는 로마교회의 관습만이 전교회에 구속력을 갖는다고 선포함으로써(DS 110) 일시적으로 교회가 분열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로마의 입장이 관철되었다. 이 문제는 4세기에 도나투스파와의 논쟁을 통해서 다시 한번 대두되는데, 이 과정에서 인호 교리가 형성된다.

    성사의 사효성 문제는 교회 역사를 통해서 여러번 도전을 받고 그때마다 재확인 되었다. ‘암흑의 세기’라고 일컫는 8세기부터 12세기 사이에 교회 상황은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특히 문제시 되었던 것은 성직자들의 생활이었다. 그들은 독신생활에 충실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많은 면에서 신자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부패한 교회를 정화하기 위해서 많은 평신도 운동이 일어났다. 대표적으로 발두스파(Waldenser)와 카타리파(Katharer, 불란서에서는 Albi 지방을 중심으로 확산되어서 알비파라고도 불리운다)들인데, 이들은 엄격한 생활과 도덕생활을 내세우면서 타락한 성직자가 베푼 성사는 은총을 전달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대해서 교황 이노첸시오 3세(1198-1216)는 성사 집행자의 성덕과 성사의 유효성과는 무관하다는 교회의 가르침을 재 확인 하였다.6) 15세기 초에 위클리프는 누구든지 죄중에 있는 자는 모든 권리를 상실하고 그래서 죄중에 있는 주교나 사제가 집행한 성사는 무효라고 주장했다.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에서는 위클리프에 반대해서 성사의 사효성을 재 확인하였다: “만일 대죄중에 있는 주교나 사제가 서품하지도 축성하지도 성체를 이루지도 세례를 주지도 못한다면 […] 이는 마귀에서 온 것이다”(DS 1154).

    이렇게 교회는 엄격주의자들의 저항을 받으면서 성사가 사효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거듭 확인해왔다. 이 가르침이 의도하는 바를 요약하면: 성사의 유효성은 성사 집전자의 올바른 신앙이나 윤리적인 완전성에 달려있지 않다. 왜냐하면 교회 공동체의 예식인 성사를 통해 본래적으로 행동하는 이는 하느님, 또는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서 성사의 효력은 확실한 객관성을 얻는다: 주관적인 동인(動因) – 성사를 집전하는 이들의 신앙과 개방성 – 에 앞서 이미 하느님의 은총이 신뢰할 수 있게 먼저 와 있다.

    성사 효력의 객관성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ex opere operato”란 말은 원래 구원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초기 스콜라 신학에서 예수의 구원의 죽음에 관계해서 얘기할 때, 구원을 이루는 예수의 자기 봉헌의 (좋은) 업적을 “opus operatum”이라 하고, 예수를 죽음에로 이끈 인간의 (나쁜) 업적을 “opus operans”라고 하여 서로 구분지었다. 그러다가 중기 스콜라 신학에 와서 “ex opere operato” – “ex opere operantis”의 두 개념은 성사와 관련해서 객관적, 신적 동인과 주관적, 인간적 동인을 구분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또한 중기 스콜라 신학에서 이 용어는 신약의 성사와 구약의 성사, 준성사와 구분하는 데에 사용되기도 하였다. 후자는 오직 opus operantis(표지로 표현되는 성사 참가자의 신앙)에 근거해서, 전자는 opus operaum(성사 안에 내포된 하느님의 업적)에 의해 효과를 발생한다는 것이다.

    종교 개혁 시대의 논쟁에서 “ex opere operato”의 정식이 신콜라 신학의 성사신학은 마술적 의식주의 물들고 인간의 예식 행위에 더 비중을 두기에 하느님 은총의 가치를 소홀히 한다는 의혹을 더해주었다. 그러기에 이 정식의 발전 과정에서 드러난 스콜라 신학자들의 의향은 이런 의혹과는 오히려 반대된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이미 고대 교회에서 하느님의 행동을 성사 집전자의 개인적, 내적 자세보다 우위에 두었듯이, 스콜라 신학에서도 “ex opere operato”란 정식을 통해서 성사에서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 혹은 그리스도가 행동의 주체임을 확고히 하였던 것이다. 스콜라 신학자들이 이 개념들의 기원이 그리스도론 – 구원론에 있음(opus operatum은 구원을 가져다 주는 그리스도의 자기 희생이다)을 알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들이 성사는 그리스도의 업적 상관없다고 이해하였다고 할 수는 없다: 예식 그 자체로부터 효력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느님이 행동하시기에 효력이 발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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