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해성사-성서적 근거(신약성서 공동체에서의 죄사함의 실천)

 



2.3.   신약성서 공동체에서의 죄사함의 실천




2.3.1.  회개를 위한 상호 협조의 장소인 교회 공동체


신약성서의 서간문에서는 교회 공동체의 개개 구성원이 잘못을 범한다는 것을 어느 정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잘못한 이들에 대한 대처(對處)는 교회 공동체의 삶의 일부를 형성한다. 이는 바오로 사도가 다음과 같이 권고하는 데에서 드러난다.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법을 채우시오.”: 영으로 가득한 사람은 조용히 “온유의 정신으로” 잘못한 형제 자매들을 다시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한다 (갈라 6,1-2). 이들에 대한 도움은 각자의 상황에 필요한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무질서하게 지내는 이들은 훈계하고, 소심한 이들은 격려하며 약한 이들을 돌보아 줌” (1테살 5,14)으로써 전체적으로는 현실성있게 구별을 두는 공동체의 실천이 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서로”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되는데, 이는 훈계, 고백, 용서가 일방적이 아니라 상호간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여러분은…서로 타일러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로마 15,14). “누가 누구를 탓할 것이 있다 해도 서로 참고 서로 은혜로이 용서하시오” (골로 3,13).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여 치유를 받게 하시오” (야고 5,16).




2.3.2.  마태 18,15-20에 나타난 공동체의 규칙


이미 일정한 법규를 통해서 규정된 공동체 생활을 반영해주는 마태오 복음은 18,15-18에서 여러 단계의 참회 규칙을 보여 준다: 둘 사이에 이루어지는 훈계가 모든 공개적인 훈계보다는 우선한다. 그 다음 단계, 즉 작은 그룹 안에서의 대화, 경우에 따라서는 그 다음에 전체 공동체와의 대화는 그 전단계가 소용이 없을 경우에만 해당된다. 이 모든 노력이 허사로 끝나는 극단적인 경우에는 죄인을 성찬의 공동체에서 제외시켜야 한다. 공동체가 행한 조치는 하느님 앞에서도 중요성을 갖는다: “여러분이 땅에서 매는 것은 하늘에서도 매여 있을 것이요, 여러분이 땅에서 푸는 것은 하늘에서도 풀려 있을 것입니다”(마태 18,18). 공동체에서 멀어지는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는 것이고, 공동체와의 화해는 하느님과의 화해를 의미한다.


마태오 복음에서 “그를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시오”라는 말의 뜻은 공동체에서의 추방을 의미하였다. 유다교에서는 이방인과 세리들과는 함께 식사하지 않았던 것이다. “매다” 그리고 “풀다”는 유다교의 징벌 관습에 대한 전문 용어이다. 유다교에서 “매다”와 “풀다”란 말은 무엇이 금지되어 있고 허락되어 있는지, 죄인을 공동체에서 파문하거나 다시 받아들이는 것을 선언하는 랍비의 권한을 의미하였다. 이런 배경에서 “매다”는 공동체에서의 추방을 의미하고, “풀다”는 이를 철회하고 다시 받아 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공동체가 구원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20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둘이나 셋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거기 그들 가운데 나도 있습니다”. 공동체가 구원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그리스도 자신이 공동체에 현존하신다는 데에 있다.


이 공동체의 규칙, 그 중에서도 특히 공동체에서의 추방에 대한 규칙에 어떤 비중을 두어야 하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문맥을 살펴 보아야 한다. 마태 18,15-20 바로 앞에는 잃었던 양을 다시 찾은 것에 대한 기쁨에 대한 비유(마태 18,12-14)가 나오는데, 이 비유는 “이와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여러분 아버지의 뜻이 아닙니다”라는 말로 끝맺고 있다. 그리고 바로 뒤에는 용서의 한계에 대한 베드로의 물음과 무한대로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대답이 나온다 (마태 18, 21-22). 그 다음에는 용서하는 자세가 스스로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든다는 내용의 무자비한 종의 비유가 나온다 (마태 18,23-35). 마태오는 공동체의 규칙을 이런 텍스트의 맥락에 둠으로써 “매다”와 “풀다”가 동등한 가능성에 속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한다. 공동체에서 배척하는 것은 부득이한 경우 훈계의 최종 단계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의 바람직한 해결은 아니다. 공동체는 배척된 이들을 다시 받아 들이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요한 20,23은 마태오 공동체 규칙의 마지막 단계와 유사함을 드러낸다. “여러분이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들은 용서받을 것이요, 여러분이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죄를 용서하고 그대로 두는 권한을 부여한다. 그러나 “용서한다”, “그대로 둔다”가 마태 18,18의 “매다”, “풀다”와 같은 의미인지에 대해는 논란이 있다.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두 텍스트가 같은 의미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다른 주석가들은 요한 20,21-23은 공동체 안의 죄가 아니라, 전교의 상황, 즉 교회 공동체에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않는냐에 관한 결정에 관한 것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첫번째 해석에 의하면 요한 20,21-23은 교회 내적인 참회 조처에 관한 증언이고, 두번째의 해석에 따르면 세례에 관계된 얘기이다.




2.3.3.  파문의 구체적인 사례


고린토 전서에서 바오로는 특정 신자를 교회 공동체에서 파문하도록 지시한다 (1고린 5,1-13). 거기에서는 두가지 관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나는 교회 공동체의 그리스도교적 모습이다: 나쁜 “누룩”은 공동체 전체를 망치므로 내버려야 한다 (1고린 5,6-8). 다른 하나는 죄인의 구원이다: 엄격한 조처를 통해서 그에게 회개하고 구원될 기회를 주어야 한다 (1고린 5,5). 두번째의 관점이 2고린 2,5-10에서는 강하게 부각된다. 여기서 바울로는 이전에 책망받은 신자에게 다시 성찬례를 허락해서 (8절의 “그에게 사랑을 다짐하시오”라는 표현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그가 지나친 슬픔에 잠기지” 않도록 조처하라고 권고한다. 비슷한 경고가 2테살 3,6과 14-15에서도 나타난다: 교회 공동체는 무질서한 생활을 하는 사람을 멀리해야 하지만, 그를 원수처럼 대하지 말고 형제처럼 타일러야 한다. 교회 공동체를 염려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 파문된 사람에 대한 관심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2.3.4.  교회 직무자들의 역할


“매고”, “푸는” 권한은 누구에게 주어졌는가? 공동체 전체에게, 아니면 특정한 교회 직무자에게 주어졌는가? 과거에 가톨릭 신학자들은 마태 18,18 (요한 20,23도 마찬가지로)을 사제의 사죄권을 증명해주는 분명한 성서적 구절로 보았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마태 18,18은 가톨릭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여러가지로 해석된다.


한편으로 마태 18장 전체는 교회 공동체를 대상으로 얘기하고, 특별히 위탁을 받은 사람들을 목표로 하지는 않는다. 고린토 서간의 대목도 이와 부합한다: 바오로는 파문시키거나 다시 받아들이는 것을 특정한 역할을 맡은 이들에게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에 요구하였다 (참조: 1고린 5,4-5; 2 고린 2,8).


다른 한편으로는 마태 18,18과 마태 16,19의 베드로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대목은 형태상 서로 비슷한 점이 있다. 이는 마태 18,18도 특정한 교회 직무자를 생각한 것이라는 결론을 유도하지 않을까? 그리고 1고린 5,1-13과 2고린 2,5-10의 대목도 뒤에는 바오로의 권위가 자리하고 있는 않는가?


오늘날 성서 주석학의 관점에 따르면 요한 20,23-24의 “용서하다”와 “그대로 두다”란 말은 특별한 권한을 가진 직무를 고려한 해석은 아니다: “전권을 그 자리에 있는 제자들이나 나중의 교회 직무자들에게 제한할 생각은 복음 저자에게 없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제자들은 공동체를 대표하며, 요한 1서에는 직무자들이 교회 생활에 언급되어 있지도 않다”.1)


이런 것을 종합해서 다음과 같이 얘기할 수 있다: 매고 푸는 것은 분명히 전체 공동체의 사명이다. 그렇지만 공동체에서 권한이 나뉘어지고 직무 구조가 형성되는 즉시 파문과 교회에 다시 받아들이는 것은 교회 직무자의 특별한 권한과 연관된다. 그러나 직무를 맡은 이들이 이 권한을 공동체와는 관계없이, 혹은 공동체에 반대해서 보유하는 것이 아니다. 이 권한은 전체 공동체가 그들 안에 있는 죄를 극복할 권한에서 자라난 것이다.




2.3.5.   죄의 사함에 대한 성사적 표지


신약성서에서 회개와 죄 사함에 대한 고유한 성사적 표지는 세례이다. 또한 세례를 바탕으로 세례자의 “새로운 삶”이 형태를 갖춘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부활한다 (로마 6, 4.8). 여기에서부터 교회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회개와 죄의 용서가 가능하다고 본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부활하신 분이 교회 공동체 가운데에 계시기 때문에 용서가 가능하다. 그리고 교회가 거행하던 주님의 성찬도 죄의 용서를 실현하는 표지이다. 이를 특별히 명확하게 지적하는 것은 마태오 복음에 나타난 잔에 대한 언사이다: “이는 내 계약의 피로서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쏟는 것입니다” (마태 26,28). 이것은 통상적으로 식사를 계약과 화해의 표시라고 보는 성서적 이해에 근거를 둔다. 마지막으로 병자의 도유도 죄의 사함과 관련을 이루고 있다 (야고 5,15-16). 그러나 마태 18,18에서 언급되고 1고린 5,1-13에 따라 실천된 파문이나 죄인을 다시 받아들이는 예식은 신약성서 내에서 찾아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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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신약성서 공동체에서의 죄사함의 실천


    2.3.1.  회개를 위한 상호 협조의 장소인 교회 공동체

    신약성서의 서간문에서는 교회 공동체의 개개 구성원이 잘못을 범한다는 것을 어느 정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잘못한 이들에 대한 대처(對處)는 교회 공동체의 삶의 일부를 형성한다. 이는 바오로 사도가 다음과 같이 권고하는 데에서 드러난다.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법을 채우시오.”: 영으로 가득한 사람은 조용히 “온유의 정신으로” 잘못한 형제 자매들을 다시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한다 (갈라 6,1-2). 이들에 대한 도움은 각자의 상황에 필요한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무질서하게 지내는 이들은 훈계하고, 소심한 이들은 격려하며 약한 이들을 돌보아 줌” (1테살 5,14)으로써 전체적으로는 현실성있게 구별을 두는 공동체의 실천이 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서로”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되는데, 이는 훈계, 고백, 용서가 일방적이 아니라 상호간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여러분은…서로 타일러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로마 15,14). “누가 누구를 탓할 것이 있다 해도 서로 참고 서로 은혜로이 용서하시오” (골로 3,13).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여 치유를 받게 하시오” (야고 5,16).


    2.3.2.  마태 18,15-20에 나타난 공동체의 규칙

    이미 일정한 법규를 통해서 규정된 공동체 생활을 반영해주는 마태오 복음은 18,15-18에서 여러 단계의 참회 규칙을 보여 준다: 둘 사이에 이루어지는 훈계가 모든 공개적인 훈계보다는 우선한다. 그 다음 단계, 즉 작은 그룹 안에서의 대화, 경우에 따라서는 그 다음에 전체 공동체와의 대화는 그 전단계가 소용이 없을 경우에만 해당된다. 이 모든 노력이 허사로 끝나는 극단적인 경우에는 죄인을 성찬의 공동체에서 제외시켜야 한다. 공동체가 행한 조치는 하느님 앞에서도 중요성을 갖는다: “여러분이 땅에서 매는 것은 하늘에서도 매여 있을 것이요, 여러분이 땅에서 푸는 것은 하늘에서도 풀려 있을 것입니다”(마태 18,18). 공동체에서 멀어지는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는 것이고, 공동체와의 화해는 하느님과의 화해를 의미한다.

    마태오 복음에서 “그를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시오”라는 말의 뜻은 공동체에서의 추방을 의미하였다. 유다교에서는 이방인과 세리들과는 함께 식사하지 않았던 것이다. “매다” 그리고 “풀다”는 유다교의 징벌 관습에 대한 전문 용어이다. 유다교에서 “매다”와 “풀다”란 말은 무엇이 금지되어 있고 허락되어 있는지, 죄인을 공동체에서 파문하거나 다시 받아들이는 것을 선언하는 랍비의 권한을 의미하였다. 이런 배경에서 “매다”는 공동체에서의 추방을 의미하고, “풀다”는 이를 철회하고 다시 받아 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공동체가 구원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20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둘이나 셋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거기 그들 가운데 나도 있습니다”. 공동체가 구원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그리스도 자신이 공동체에 현존하신다는 데에 있다.

    이 공동체의 규칙, 그 중에서도 특히 공동체에서의 추방에 대한 규칙에 어떤 비중을 두어야 하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문맥을 살펴 보아야 한다. 마태 18,15-20 바로 앞에는 잃었던 양을 다시 찾은 것에 대한 기쁨에 대한 비유(마태 18,12-14)가 나오는데, 이 비유는 “이와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여러분 아버지의 뜻이 아닙니다”라는 말로 끝맺고 있다. 그리고 바로 뒤에는 용서의 한계에 대한 베드로의 물음과 무한대로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대답이 나온다 (마태 18, 21-22). 그 다음에는 용서하는 자세가 스스로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든다는 내용의 무자비한 종의 비유가 나온다 (마태 18,23-35). 마태오는 공동체의 규칙을 이런 텍스트의 맥락에 둠으로써 “매다”와 “풀다”가 동등한 가능성에 속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한다. 공동체에서 배척하는 것은 부득이한 경우 훈계의 최종 단계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의 바람직한 해결은 아니다. 공동체는 배척된 이들을 다시 받아 들이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요한 20,23은 마태오 공동체 규칙의 마지막 단계와 유사함을 드러낸다. “여러분이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들은 용서받을 것이요, 여러분이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죄를 용서하고 그대로 두는 권한을 부여한다. 그러나 “용서한다”, “그대로 둔다”가 마태 18,18의 “매다”, “풀다”와 같은 의미인지에 대해는 논란이 있다.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두 텍스트가 같은 의미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다른 주석가들은 요한 20,21-23은 공동체 안의 죄가 아니라, 전교의 상황, 즉 교회 공동체에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않는냐에 관한 결정에 관한 것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첫번째 해석에 의하면 요한 20,21-23은 교회 내적인 참회 조처에 관한 증언이고, 두번째의 해석에 따르면 세례에 관계된 얘기이다.


    2.3.3.  파문의 구체적인 사례

    고린토 전서에서 바오로는 특정 신자를 교회 공동체에서 파문하도록 지시한다 (1고린 5,1-13). 거기에서는 두가지 관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나는 교회 공동체의 그리스도교적 모습이다: 나쁜 “누룩”은 공동체 전체를 망치므로 내버려야 한다 (1고린 5,6-8). 다른 하나는 죄인의 구원이다: 엄격한 조처를 통해서 그에게 회개하고 구원될 기회를 주어야 한다 (1고린 5,5). 두번째의 관점이 2고린 2,5-10에서는 강하게 부각된다. 여기서 바울로는 이전에 책망받은 신자에게 다시 성찬례를 허락해서 (8절의 “그에게 사랑을 다짐하시오”라는 표현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그가 지나친 슬픔에 잠기지” 않도록 조처하라고 권고한다. 비슷한 경고가 2테살 3,6과 14-15에서도 나타난다: 교회 공동체는 무질서한 생활을 하는 사람을 멀리해야 하지만, 그를 원수처럼 대하지 말고 형제처럼 타일러야 한다. 교회 공동체를 염려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 파문된 사람에 대한 관심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2.3.4.  교회 직무자들의 역할

    “매고”, “푸는” 권한은 누구에게 주어졌는가? 공동체 전체에게, 아니면 특정한 교회 직무자에게 주어졌는가? 과거에 가톨릭 신학자들은 마태 18,18 (요한 20,23도 마찬가지로)을 사제의 사죄권을 증명해주는 분명한 성서적 구절로 보았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마태 18,18은 가톨릭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여러가지로 해석된다.

    한편으로 마태 18장 전체는 교회 공동체를 대상으로 얘기하고, 특별히 위탁을 받은 사람들을 목표로 하지는 않는다. 고린토 서간의 대목도 이와 부합한다: 바오로는 파문시키거나 다시 받아들이는 것을 특정한 역할을 맡은 이들에게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에 요구하였다 (참조: 1고린 5,4-5; 2 고린 2,8).

    다른 한편으로는 마태 18,18과 마태 16,19의 베드로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대목은 형태상 서로 비슷한 점이 있다. 이는 마태 18,18도 특정한 교회 직무자를 생각한 것이라는 결론을 유도하지 않을까? 그리고 1고린 5,1-13과 2고린 2,5-10의 대목도 뒤에는 바오로의 권위가 자리하고 있는 않는가?

    오늘날 성서 주석학의 관점에 따르면 요한 20,23-24의 “용서하다”와 “그대로 두다”란 말은 특별한 권한을 가진 직무를 고려한 해석은 아니다: “전권을 그 자리에 있는 제자들이나 나중의 교회 직무자들에게 제한할 생각은 복음 저자에게 없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제자들은 공동체를 대표하며, 요한 1서에는 직무자들이 교회 생활에 언급되어 있지도 않다”.1)

    이런 것을 종합해서 다음과 같이 얘기할 수 있다: 매고 푸는 것은 분명히 전체 공동체의 사명이다. 그렇지만 공동체에서 권한이 나뉘어지고 직무 구조가 형성되는 즉시 파문과 교회에 다시 받아들이는 것은 교회 직무자의 특별한 권한과 연관된다. 그러나 직무를 맡은 이들이 이 권한을 공동체와는 관계없이, 혹은 공동체에 반대해서 보유하는 것이 아니다. 이 권한은 전체 공동체가 그들 안에 있는 죄를 극복할 권한에서 자라난 것이다.


    2.3.5.   죄의 사함에 대한 성사적 표지

    신약성서에서 회개와 죄 사함에 대한 고유한 성사적 표지는 세례이다. 또한 세례를 바탕으로 세례자의 “새로운 삶”이 형태를 갖춘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부활한다 (로마 6, 4.8). 여기에서부터 교회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회개와 죄의 용서가 가능하다고 본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부활하신 분이 교회 공동체 가운데에 계시기 때문에 용서가 가능하다. 그리고 교회가 거행하던 주님의 성찬도 죄의 용서를 실현하는 표지이다. 이를 특별히 명확하게 지적하는 것은 마태오 복음에 나타난 잔에 대한 언사이다: “이는 내 계약의 피로서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쏟는 것입니다” (마태 26,28). 이것은 통상적으로 식사를 계약과 화해의 표시라고 보는 성서적 이해에 근거를 둔다. 마지막으로 병자의 도유도 죄의 사함과 관련을 이루고 있다 (야고 5,15-16). 그러나 마태 18,18에서 언급되고 1고린 5,1-13에 따라 실천된 파문이나 죄인을 다시 받아들이는 예식은 신약성서 내에서 찾아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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