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이(루갈다)

 

  이순이(일면 유희․루갈다)는 부친 이윤하와 모친 권씨 사이의 5남매 중 셋째로 178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부친 이윤하는 지봉(芝峰) 이수광의 8대 후손이며 권일신의 매부이기도 하다.


  이윤하가 어떠한 경위로 천주교에 입교했는지 불확실하지만 그는 일찍부터 남인 신진 소장파의 일원으로 서학 운동에 관계했던 인물임에 틀림없다. 이는 ‘정약용 선중시묘지명’에서 ꡒ성호 문하인 이윤하․이승훈․김우너성 등은 정위 석교(正位石交)하고, 이익의 학을 승수하기 위해 녹암 권철신을 중심으로 강학회를 개최했다ꡓ라는 내용을 본다거나, 이승훈․이윤하․정씨 삼형제와 권일신 부자를 비롯한 사대부 및 중인들이 명례동 김범우의 집에 모여 본격적인 설법 교해를 하다가 1785년 봄 추조 관헌들에게 발각되어 그들이 가지고 있던 여러 가지 성물과 서책들을 압수당하고 집주인인 김범우가 체포되자 이윤하․권일신 부자․이총억․정 섭 등과 더불어 형조로 달려가 압수된 성물들을 찾아오게 되었다는 사실들을 통하여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윤하의 활동은 누구의 권유라기보다는 가족 전습의 결과라고 볼 수 있는데, 그 까닭은 태종의 첫 번째 아들이었던 경령군의 6대손이며, 「지봉유설」로 유명한 이수광의 후손인 그가 가보로 전해 내려오던 「천주실의」등 천주교 관계 서책들을 전습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들에게도 전습시켰다는 사실을 이윤하의 장자인 이경도의 문초 기록에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모친 권씨는 권 엄의 딸이며 한국 교회 창설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권철신과 권일신의 누이임을 <벽위편>이 밝혀 주고 있다. 이들 권씨가의 여인들은 그 시대에 있어서 수준 높은 사족가의 여인들로서 교양의 기반위에 서학의 새로운 신앙 생활을 통하여 덕행이나 부덕을 실천하였고, 사회적인 인식이나 안목 또한 높았다.


  이와 같은 가족 관계에서 출생하여 자라난 이순이는 한국 초기 천주교회의 특징인 ꡒ가족적 전습ꡓ에 의해 신앙 생활을 시작하였고, 전형적인 모전여습(母傳女襲)으로 신앙적인 덕행을 실현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인 동시에 윤리적인 도덕이나 신덕이 출중했던 인물이었다. 이러한 모전여습에 대하여 「한국 천주교회사」의 저자인 달레 신부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ꡒ이 루갈다는 강직한 성격과 상냥하고 열정적인 마음과 총명을 타고 났다. 한마디로 그녀는 육체와 정신의 모든 자질을 타고 난데다 그 지위에 알맞는 교육으로 그 자질을 쉽게 발전시킬 수가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보다 더 행복하여 천주교의 교리를 배우고 자녀들을 신심 속에서 양육하는 데에 일생을 바쳤다. 이 루갈다는 덕이 많은 어머니의 보살핌에 충실히 응하여 그녀의 모든 생각은 자기 영혼의 구원에만 집중되었고 그 마음의 모든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하여 바쳐졌으며, 그녀의 높은 가문으로 쉽게 마련할 수 있었을 영화와 향락을 조금도 원하지 않았다.ꡓ


  이러한 모전여습의 교육을 받은 이순이는 1795년 14세가 되었을 때 주문모 신부가 서울에 들어오자 즐거워한 나머지 4일 동안이나 한 방안에서 성체 배령의 준비를 한 후 영성체를 하였다. 처음으로 영성체의 즐거움을 가졌던 그녀는 이후 평생을 동정으로 보냄으로써 하느님의 은혜에 보답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풍습이 이를 허락치 않았으므로 그녀는 남몰래 괴로움에 잠겼다. 때마침 전주 지방에 살던 양반 출신인 교우 유항검(아우구스띠노)의 큰아들 유중철(혹은 종철 : 요한)도 자신과 꼭 같은 결심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주문모 신부의 주선으로 그에게 출가하기로 결심하였다.


  유항검의 가문보다 훨씬 높은 왕손가인 이순이의 집안에서 여러 친족들이 반대하였으나 이순이의 모친은 이를 허락하여 1797년 마침내 가족들의 승낙을 얻어 결혼식을 거행하였다. 그 이듬해 9월 이순이는 시가로 가게 되었다. 이 때부터 이순이와 유중철의 부부 생활은 마치 성 요셉과 성 마리아와의 부부 생활과 같았는데, 달레 신부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ꡒ결혼 전이나 결혼 후나 이순이는 천주교의 덕행을 닦는데 전심하여, 시부모를 공경하고 그들에게 순종하며, 겸손하고 자비심이 있고 모든 본분을 충분히 지켜 나갔다. 감탄할 만큼 온순하고 친절하여 그는 그 많은 가족 중 아무와도 조그마한 불화도 결코 없었다. 조선식 표현을 따르자면 이순이는 자기 집뿐 아니라 온 이웃에 향기를 풍겼다. 그의 남편 요한도 성실하고 솔직한 신심과 굳은 신앙과 열렬한 애덕을 가지고 있었다. 본분에 충실하고 올바른 생활을 하며 세속의 모든 허영을 업신여겨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점잖고 진중한 어른 대접을 받았다.ꡓ  


  1801년 신유 박해령이 전국에 내리자 가족이 전부 체포되고 가정은 풍지박산이 되었다. 이순이의 시아버지이자 남편 유 요한의 아버지 유항검은 전주 부근의 초남에서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었던 양반 계급의 선비였다. 그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 초창기부터 천주교를 믿고 임시 준성직 제도가 행해지던 당시 전주 지방의 포교에 주력하면서 주문모 신부의 전주 왕래도 주선하다가 순교하게 되었다.


  즉, 신유년 박해가 일어난 그 해 3월 전라도의 대표적인 신자 유항검과 유관검이 체포되었고, 관검이 당시 전라감사 김달순의 회유와 고문으로 교회의 모든 사정과 다른 신자들을 고발하게 되어 사건이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그 지방의 유력한 신자들이 거의 체포됨과 아울러 국가 안전에 대한 음모로 기소되어 서울로 보내어진 후 의금부의 판결을 받게 되었다.


  그 결과 피고인들은 외국인들과 내동하여 사교를 믿고 서양배를 불러들일 음모를 꾸민 역적으로 9월 11일 최후의 판결이 내려져 이들 모두는 출신도의 수부 전주로 압송되어 백성들 앞에서 9월 17일 참수와 능지처참의 형을 받았다.


  그리고 이들 가족들도 당시의 국법대로 전부 체포되어 처형이 아니면 유배형을 받게 되었다. 이때 유항검의 자부인 이순이는 평안도 벽동군의 관비로 결안이났다.


  이는 당시의 양반가 부녀자들에게는 최대의 모욕적인 형벌이 되기도 했는데, 혼인 생활에서까지 동정을 지켜 온 이순이에게는 죽음보다도 더 견디기 어려운 모욕적인 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관장 앞에 나아가 끝까지 항의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관장이 들은 체도 아니하므로 결국 유배의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귀양길에 순교하기를 원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더니, 백여리를 겨우 갔다가 다시 잡혀 관비 생활 대신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그녀는 이 기간중 자서전적인 옥중 수기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이 수기는 이순이의 오라버니인 이경도의 서간과 남동생 이경언의 옥중 수기와 함께 한 책으로 묶여져, 이순이의 친모인 권씨 부인과 그들의 가족, 더 나아가 박해의 피난살이로 고생하던 교우들의 손을 거쳐 지금까지 전해진 신심서로서 많은 교우들에게 읽혀졌는데, 이 수기의 내용 속에서 이순이의 뛰어난 신앙심을 함께 느낄 수 있다.


  그녀는 신앙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동정은 물론 일반적인 신앙생활조타 하기 어려웠다. 당시 한국 사회 속에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부부로서 동정을 지키기 위한 인간적인 고뇌와 이에 대비된 출중한 신앙이야말로 수기를 통하여 가장 우선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이순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ꡒ전년 원하던 바 뜻과 같이 이루어지니 심곡[마음의 곡절]을 말하온즉, 저도 또한 어릴 때 원한 바라 우리 모임 양인의 소원을 천주 윤허하사 특별하신 총은이라 피차에 감사함이 죽기로써 보은이라… 유감이 자심하여 마음의 두려움이 여복박빙(얼음장을 밟는 것 같음)이요, 여임심연(깊은 못에 온 것 같음)이라. 우르러 이길 바를 간구간구하옵더니, 총우로 겨우겨우 면하여 아이(동정)를 보전하여 피차에 유신함이 견여금석(堅如金石)이며, 신애지정(信愛之情)은 중여태양(重如太陽)이라.ꡓ


  이와 같이 이순이의 서간을 통해서 우리는 그녀의 신심․애덕․우애, 그리고 천주께 향한 천상덕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를 통하여 그녀의 신앙이 어떠한 광신적인 신앙이 아니라 인격의 기반위에서 덕행을 겸비한 신앙 생활이며, 바로 이러한 기반 위에서 순교할 수 있다는 명확한 인식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순이가 생각하고 있는 죽음, 즉 순교함에 대한 가치관을 옥중 수기에서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 그것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종말론적인 내세관으로서, 이러한 전통적인 가톨릭 사상은 초기 교회의 디오그네스(Diognete)의 편지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 있는데, 절박한 상황속에서 쓴 이순이의 수기 내용을 일부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ꡒ…마음속에 감춘 설음(설움)이 자연 잊히지고(잊어지고) 가지록(갈수록) 총은(寵恩)이라. 신락(神樂)이 도도하니 만사 무심(萬事無心, 아무 일도 마음에 없음)하고 거리킨(마음에 걸리는) 염(念)이 없사오대(없지만) 오히려 권권(惓惓, 잊지 못함)한바 옥중의 일인(一人, 옥에 든 한 사람, 즉 자기 남편)이다. 못 잊자움은 다름이 아니라 집에 있을 때 소회(所懷, 마음에 먹은 생각)를 비치어서(나타내어) 전일편(專一便, 아주 한패가 됨)을 이뤄(되어) 동일 동사(同一同死)하자 하였더니 인편이 마땅찮고 오히려 자저(머뭇거리다)하여 미처(아직) 전치(전하지) 못하였더니 자취(발걸음)를 절금(絶禁, 절대로 금하다) 하니, 통할 길이 없어 잠잠히 구하고 원하고 바라는 바 위주치명하여 동일 동사하자더니 상주의 총은이 저러실 줄(저러할 줄)알았으랴?…중략…신신 부탁하매 동일 동사하자더라. 요한(자기 남편)에게 전하소서. 재삼 부탁하고 손을 나눠 돌아서니 남은바 네 사람이 쳐져(머물러 있어) 의지하여 주우(主佑)만 바라더니 일각이 겨우 부음(訃音)이 들려오니 인정의 참절(慘絶)함은 오히려 둘째 되고 요한의 수복(受福)함은 경희(慶喜)하오나 오호통재(嗚呼痛哉)라. 요한이 어찌 되었는고 생각이 미치매 억만 칼이 흉중(胸中)을 써는 듯 심신이 지향(指向) 없어 반향(半향)이 지난 후에 이도(이것도) 또한 총은인지 마음이 정하이대(진정되기를) 전공(前功)이 없잖으나 혈마(설마) 아주 버리시랴? 마음이 줄어지나 일념(一念)이 권권하여 오히려 염(念, 걱정)이리니 종숙(從叔, 시사촌 동생)께 묻자오니(물으니) 먼저 정지(定志, 마음을 단단히 먹다)하라 하시더라. 집에서 가변하대 신체를 내어다가 입었던 옷을 보니 기매(其妹, 요한이 아내를 누이라고 함)에게 부쳤으대(부치기를) ‘권면하고 위로하니 천국에 가 다시 보자’하고 정지(定志, 서로 동정지킬 뜻을 정한 것)한 4년이라 염려를 부렸아오며(걱정하다) 저의 평생 행위를 살피건대 구태여(공연히) 애린(哀燐)할 일이 없고, 속태(俗態, 세속 태도)에 벗어나 족히 노성(老成)타도 할 만하고 흔근 열애 성실(欣謹熱愛誠實)함은 항복함이 되는지라(그렇다고 인증되다).ꡓ


  이러한 사상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교부들의 사상과 동일한 것으로서 순교의 죽음은 바로 ‘의자(義子)’와 의인(義人)‘과 ’천주 성인‘들의 대열에 참예하는 길로서 세상 임금의 총애를 초월하는 천지 대군의 총애를 입는 영광의 길이며, 절대로 슬퍼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곧 진복으로 가는 길이라고 설명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이순이의 신앙 속에서 어떻게 해서라도 관비 생활을 면하고자 했던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고, 달레 신부 역시 이에 대하여 ꡒ첫번째 판결이 역적의 자식들에 대한 법률 규정에 의하여 내려졌다면, 이 새 재판은 천주교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를 고백하는 데 있어서 꾸준하였다는 것밖에 다른 원인이 있을 수 없으니, 그들의 순교의 영광은 완전히 아무 손상도 받지 않았다ꡓ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녀는 1802년 1월 3일(음력 1801년 12월 28일) 형장에 끌려나갔다. 망나니가 관례대로 옷을 벗기려 하자, 그녀는 정숙하고 품위 있게 몇 마디 물리치고 나서, 스스로 웃옷을 벗고 손을 묶지도 못하게 하고 조용히 머리를 도끼 밑으로 놓고 참수를 당하였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20세에 불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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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이(루갈다)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이순이(일면 유희․루갈다)는 부친 이윤하와 모친 권씨 사이의 5남매 중 셋째로 178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부친 이윤하는 지봉(芝峰) 이수광의 8대 후손이며 권일신의 매부이기도 하다.

      이윤하가 어떠한 경위로 천주교에 입교했는지 불확실하지만 그는 일찍부터 남인 신진 소장파의 일원으로 서학 운동에 관계했던 인물임에 틀림없다. 이는 ‘정약용 선중시묘지명’에서 ꡒ성호 문하인 이윤하․이승훈․김우너성 등은 정위 석교(正位石交)하고, 이익의 학을 승수하기 위해 녹암 권철신을 중심으로 강학회를 개최했다ꡓ라는 내용을 본다거나, 이승훈․이윤하․정씨 삼형제와 권일신 부자를 비롯한 사대부 및 중인들이 명례동 김범우의 집에 모여 본격적인 설법 교해를 하다가 1785년 봄 추조 관헌들에게 발각되어 그들이 가지고 있던 여러 가지 성물과 서책들을 압수당하고 집주인인 김범우가 체포되자 이윤하․권일신 부자․이총억․정 섭 등과 더불어 형조로 달려가 압수된 성물들을 찾아오게 되었다는 사실들을 통하여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윤하의 활동은 누구의 권유라기보다는 가족 전습의 결과라고 볼 수 있는데, 그 까닭은 태종의 첫 번째 아들이었던 경령군의 6대손이며, 「지봉유설」로 유명한 이수광의 후손인 그가 가보로 전해 내려오던 「천주실의」등 천주교 관계 서책들을 전습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들에게도 전습시켰다는 사실을 이윤하의 장자인 이경도의 문초 기록에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모친 권씨는 권 엄의 딸이며 한국 교회 창설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권철신과 권일신의 누이임을 <벽위편>이 밝혀 주고 있다. 이들 권씨가의 여인들은 그 시대에 있어서 수준 높은 사족가의 여인들로서 교양의 기반위에 서학의 새로운 신앙 생활을 통하여 덕행이나 부덕을 실천하였고, 사회적인 인식이나 안목 또한 높았다.

      이와 같은 가족 관계에서 출생하여 자라난 이순이는 한국 초기 천주교회의 특징인 ꡒ가족적 전습ꡓ에 의해 신앙 생활을 시작하였고, 전형적인 모전여습(母傳女襲)으로 신앙적인 덕행을 실현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인 동시에 윤리적인 도덕이나 신덕이 출중했던 인물이었다. 이러한 모전여습에 대하여 「한국 천주교회사」의 저자인 달레 신부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ꡒ이 루갈다는 강직한 성격과 상냥하고 열정적인 마음과 총명을 타고 났다. 한마디로 그녀는 육체와 정신의 모든 자질을 타고 난데다 그 지위에 알맞는 교육으로 그 자질을 쉽게 발전시킬 수가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보다 더 행복하여 천주교의 교리를 배우고 자녀들을 신심 속에서 양육하는 데에 일생을 바쳤다. 이 루갈다는 덕이 많은 어머니의 보살핌에 충실히 응하여 그녀의 모든 생각은 자기 영혼의 구원에만 집중되었고 그 마음의 모든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하여 바쳐졌으며, 그녀의 높은 가문으로 쉽게 마련할 수 있었을 영화와 향락을 조금도 원하지 않았다.ꡓ

      이러한 모전여습의 교육을 받은 이순이는 1795년 14세가 되었을 때 주문모 신부가 서울에 들어오자 즐거워한 나머지 4일 동안이나 한 방안에서 성체 배령의 준비를 한 후 영성체를 하였다. 처음으로 영성체의 즐거움을 가졌던 그녀는 이후 평생을 동정으로 보냄으로써 하느님의 은혜에 보답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풍습이 이를 허락치 않았으므로 그녀는 남몰래 괴로움에 잠겼다. 때마침 전주 지방에 살던 양반 출신인 교우 유항검(아우구스띠노)의 큰아들 유중철(혹은 종철 : 요한)도 자신과 꼭 같은 결심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주문모 신부의 주선으로 그에게 출가하기로 결심하였다.

      유항검의 가문보다 훨씬 높은 왕손가인 이순이의 집안에서 여러 친족들이 반대하였으나 이순이의 모친은 이를 허락하여 1797년 마침내 가족들의 승낙을 얻어 결혼식을 거행하였다. 그 이듬해 9월 이순이는 시가로 가게 되었다. 이 때부터 이순이와 유중철의 부부 생활은 마치 성 요셉과 성 마리아와의 부부 생활과 같았는데, 달레 신부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ꡒ결혼 전이나 결혼 후나 이순이는 천주교의 덕행을 닦는데 전심하여, 시부모를 공경하고 그들에게 순종하며, 겸손하고 자비심이 있고 모든 본분을 충분히 지켜 나갔다. 감탄할 만큼 온순하고 친절하여 그는 그 많은 가족 중 아무와도 조그마한 불화도 결코 없었다. 조선식 표현을 따르자면 이순이는 자기 집뿐 아니라 온 이웃에 향기를 풍겼다. 그의 남편 요한도 성실하고 솔직한 신심과 굳은 신앙과 열렬한 애덕을 가지고 있었다. 본분에 충실하고 올바른 생활을 하며 세속의 모든 허영을 업신여겨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점잖고 진중한 어른 대접을 받았다.ꡓ  

      1801년 신유 박해령이 전국에 내리자 가족이 전부 체포되고 가정은 풍지박산이 되었다. 이순이의 시아버지이자 남편 유 요한의 아버지 유항검은 전주 부근의 초남에서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었던 양반 계급의 선비였다. 그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 초창기부터 천주교를 믿고 임시 준성직 제도가 행해지던 당시 전주 지방의 포교에 주력하면서 주문모 신부의 전주 왕래도 주선하다가 순교하게 되었다.

      즉, 신유년 박해가 일어난 그 해 3월 전라도의 대표적인 신자 유항검과 유관검이 체포되었고, 관검이 당시 전라감사 김달순의 회유와 고문으로 교회의 모든 사정과 다른 신자들을 고발하게 되어 사건이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그 지방의 유력한 신자들이 거의 체포됨과 아울러 국가 안전에 대한 음모로 기소되어 서울로 보내어진 후 의금부의 판결을 받게 되었다.

      그 결과 피고인들은 외국인들과 내동하여 사교를 믿고 서양배를 불러들일 음모를 꾸민 역적으로 9월 11일 최후의 판결이 내려져 이들 모두는 출신도의 수부 전주로 압송되어 백성들 앞에서 9월 17일 참수와 능지처참의 형을 받았다.

      그리고 이들 가족들도 당시의 국법대로 전부 체포되어 처형이 아니면 유배형을 받게 되었다. 이때 유항검의 자부인 이순이는 평안도 벽동군의 관비로 결안이났다.

      이는 당시의 양반가 부녀자들에게는 최대의 모욕적인 형벌이 되기도 했는데, 혼인 생활에서까지 동정을 지켜 온 이순이에게는 죽음보다도 더 견디기 어려운 모욕적인 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관장 앞에 나아가 끝까지 항의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관장이 들은 체도 아니하므로 결국 유배의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귀양길에 순교하기를 원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더니, 백여리를 겨우 갔다가 다시 잡혀 관비 생활 대신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그녀는 이 기간중 자서전적인 옥중 수기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이 수기는 이순이의 오라버니인 이경도의 서간과 남동생 이경언의 옥중 수기와 함께 한 책으로 묶여져, 이순이의 친모인 권씨 부인과 그들의 가족, 더 나아가 박해의 피난살이로 고생하던 교우들의 손을 거쳐 지금까지 전해진 신심서로서 많은 교우들에게 읽혀졌는데, 이 수기의 내용 속에서 이순이의 뛰어난 신앙심을 함께 느낄 수 있다.

      그녀는 신앙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동정은 물론 일반적인 신앙생활조타 하기 어려웠다. 당시 한국 사회 속에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부부로서 동정을 지키기 위한 인간적인 고뇌와 이에 대비된 출중한 신앙이야말로 수기를 통하여 가장 우선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이순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ꡒ전년 원하던 바 뜻과 같이 이루어지니 심곡[마음의 곡절]을 말하온즉, 저도 또한 어릴 때 원한 바라 우리 모임 양인의 소원을 천주 윤허하사 특별하신 총은이라 피차에 감사함이 죽기로써 보은이라… 유감이 자심하여 마음의 두려움이 여복박빙(얼음장을 밟는 것 같음)이요, 여임심연(깊은 못에 온 것 같음)이라. 우르러 이길 바를 간구간구하옵더니, 총우로 겨우겨우 면하여 아이(동정)를 보전하여 피차에 유신함이 견여금석(堅如金石)이며, 신애지정(信愛之情)은 중여태양(重如太陽)이라.ꡓ

      이와 같이 이순이의 서간을 통해서 우리는 그녀의 신심․애덕․우애, 그리고 천주께 향한 천상덕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를 통하여 그녀의 신앙이 어떠한 광신적인 신앙이 아니라 인격의 기반위에서 덕행을 겸비한 신앙 생활이며, 바로 이러한 기반 위에서 순교할 수 있다는 명확한 인식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순이가 생각하고 있는 죽음, 즉 순교함에 대한 가치관을 옥중 수기에서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 그것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종말론적인 내세관으로서, 이러한 전통적인 가톨릭 사상은 초기 교회의 디오그네스(Diognete)의 편지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 있는데, 절박한 상황속에서 쓴 이순이의 수기 내용을 일부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ꡒ…마음속에 감춘 설음(설움)이 자연 잊히지고(잊어지고) 가지록(갈수록) 총은(寵恩)이라. 신락(神樂)이 도도하니 만사 무심(萬事無心, 아무 일도 마음에 없음)하고 거리킨(마음에 걸리는) 염(念)이 없사오대(없지만) 오히려 권권(惓惓, 잊지 못함)한바 옥중의 일인(一人, 옥에 든 한 사람, 즉 자기 남편)이다. 못 잊자움은 다름이 아니라 집에 있을 때 소회(所懷, 마음에 먹은 생각)를 비치어서(나타내어) 전일편(專一便, 아주 한패가 됨)을 이뤄(되어) 동일 동사(同一同死)하자 하였더니 인편이 마땅찮고 오히려 자저(머뭇거리다)하여 미처(아직) 전치(전하지) 못하였더니 자취(발걸음)를 절금(絶禁, 절대로 금하다) 하니, 통할 길이 없어 잠잠히 구하고 원하고 바라는 바 위주치명하여 동일 동사하자더니 상주의 총은이 저러실 줄(저러할 줄)알았으랴?…중략…신신 부탁하매 동일 동사하자더라. 요한(자기 남편)에게 전하소서. 재삼 부탁하고 손을 나눠 돌아서니 남은바 네 사람이 쳐져(머물러 있어) 의지하여 주우(主佑)만 바라더니 일각이 겨우 부음(訃音)이 들려오니 인정의 참절(慘絶)함은 오히려 둘째 되고 요한의 수복(受福)함은 경희(慶喜)하오나 오호통재(嗚呼痛哉)라. 요한이 어찌 되었는고 생각이 미치매 억만 칼이 흉중(胸中)을 써는 듯 심신이 지향(指向) 없어 반향(半향)이 지난 후에 이도(이것도) 또한 총은인지 마음이 정하이대(진정되기를) 전공(前功)이 없잖으나 혈마(설마) 아주 버리시랴? 마음이 줄어지나 일념(一念)이 권권하여 오히려 염(念, 걱정)이리니 종숙(從叔, 시사촌 동생)께 묻자오니(물으니) 먼저 정지(定志, 마음을 단단히 먹다)하라 하시더라. 집에서 가변하대 신체를 내어다가 입었던 옷을 보니 기매(其妹, 요한이 아내를 누이라고 함)에게 부쳤으대(부치기를) ‘권면하고 위로하니 천국에 가 다시 보자’하고 정지(定志, 서로 동정지킬 뜻을 정한 것)한 4년이라 염려를 부렸아오며(걱정하다) 저의 평생 행위를 살피건대 구태여(공연히) 애린(哀燐)할 일이 없고, 속태(俗態, 세속 태도)에 벗어나 족히 노성(老成)타도 할 만하고 흔근 열애 성실(欣謹熱愛誠實)함은 항복함이 되는지라(그렇다고 인증되다).ꡓ

      이러한 사상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교부들의 사상과 동일한 것으로서 순교의 죽음은 바로 ‘의자(義子)’와 의인(義人)‘과 ’천주 성인‘들의 대열에 참예하는 길로서 세상 임금의 총애를 초월하는 천지 대군의 총애를 입는 영광의 길이며, 절대로 슬퍼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곧 진복으로 가는 길이라고 설명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이순이의 신앙 속에서 어떻게 해서라도 관비 생활을 면하고자 했던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고, 달레 신부 역시 이에 대하여 ꡒ첫번째 판결이 역적의 자식들에 대한 법률 규정에 의하여 내려졌다면, 이 새 재판은 천주교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를 고백하는 데 있어서 꾸준하였다는 것밖에 다른 원인이 있을 수 없으니, 그들의 순교의 영광은 완전히 아무 손상도 받지 않았다ꡓ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녀는 1802년 1월 3일(음력 1801년 12월 28일) 형장에 끌려나갔다. 망나니가 관례대로 옷을 벗기려 하자, 그녀는 정숙하고 품위 있게 몇 마디 물리치고 나서, 스스로 웃옷을 벗고 손을 묶지도 못하게 하고 조용히 머리를 도끼 밑으로 놓고 참수를 당하였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20세에 불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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