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미

 



  내포 지방으로 불리우는 예산, 아산, 당진, 면천, 해미, 덕산, 서산, 태안 등 8개 고을이 예산사람 이존장에 의해 한국 가톨릭의 못자리로 되어 지금까지 드높은 신앙의 꽃을 피우고 있으나, 또한 내포 지방의 중심지며 당시로서는 유일하게 진영(鎭營)이 있고 큰 감옥이 마련되어 있던 해미는 수많은 순교자를 내게 한 신앙의 묘자리로 우리의 가슴을 메이게 한다.


   해미는 조선시대에 호서지방의 군사 요충지였습니다. 이곳의 지휘관은 내포지방을 군사력으로 통치하는 지방 수령의 직책을 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지휘관은 국가사범을 처형할 수 있는 지방통치자의 권한으로 1790년대로부터 백년동안 천주교 신자들을 무려 3천여명이나 처형 하였습니다. 해미의 무관수령은 체포된 신자들 가운데 사후 문제가 있을 듯한 중요 인물은 상급기관(홍주, 공주, 서울)으로 이송하였고 문제가 없을 듯한 낮은 계층의 신자들은 해미군졸들에 의해 사법적 절차도 없이 이름석자도 남기지 못한 체 처형 되었습니다.


   해미 시내 입구를 흐르고 있는 해미천을 따라 서남쪽으로 1km쯤 내려가면 냇가에 순교탑이 서 있다. 1975년 10월 건립된 이 탑이 서 있는 자리는 순교자들이 생매장되어 있는 자리이다.  병인년 박해 때 형리들은 너무 많은 증거자들을 일일이 처형하기가 힘들자 이 자리에 큰 구덩이 셋을 파고 생매장하는 방법을 썼다. 이때 죽음앞에서 배교할까 두려워했던 신자들은 차례를 기다리지 않고 앞을 다투어 구덩이로 뛰어들었다. 이 날 해미 일대는 느닷없는 폭우가 쏟아지고 뇌성 벽력이 울렸으며 사흘동안 짙은 안개가 끼어 앞이 안보였다고 증언은 전하고 있다. 이때 묻힌 순교자들의 유해는 1935년 范신부에 의해 발굴되어 서산군 음암면 산흥리 공소 뒷산으로 이장되었는데 이때 많은 고상과 묵주 등이 함께 발굴되었고, 이곳에 1975년 해미순교탑이 건립되었다. 


   해미 성안에서도 많은 신자들이 순교했다. 성안 옥사문 앞에서 3백년생으로 추정되는 호야나무가 지금도 서 있는데 이 나무가 형구(形具)로 이용되었다. 형리들은 이 나무가지에 순교자들을 매달아 놓고 돌로 치거나 활로 쏘아 숨지게 했는데 반 정도가 썩어 들어간 이 나무에는 지금도 철사를 감았던 자욱이 그대로 남아있다.


   해미에서 처형된 신자들의 신원에 대한 기록이 매우 희막하여 해미의 땅은 보잘것없는 신분의 사람들이 순교한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790년대에 순교한 박취득(로렌죠)을 비롯한 순교자 순교자 명록은 1870년대까지 수십명의 이름을 남겨 놓고 있지만 그외의 수천명은 이름마저 하느님께 봉헌하며 순교의 길을 걸어 가셨다. 해미땅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순교자들의 몸이 스러져 간 곳으로 그 특성을 지니고 있기에 이 땅은 더욱 우리의 고개를 숙이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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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uest 님의 말:

     


      내포 지방으로 불리우는 예산, 아산, 당진, 면천, 해미, 덕산, 서산, 태안 등 8개 고을이 예산사람 이존장에 의해 한국 가톨릭의 못자리로 되어 지금까지 드높은 신앙의 꽃을 피우고 있으나, 또한 내포 지방의 중심지며 당시로서는 유일하게 진영(鎭營)이 있고 큰 감옥이 마련되어 있던 해미는 수많은 순교자를 내게 한 신앙의 묘자리로 우리의 가슴을 메이게 한다.

       해미는 조선시대에 호서지방의 군사 요충지였습니다. 이곳의 지휘관은 내포지방을 군사력으로 통치하는 지방 수령의 직책을 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지휘관은 국가사범을 처형할 수 있는 지방통치자의 권한으로 1790년대로부터 백년동안 천주교 신자들을 무려 3천여명이나 처형 하였습니다. 해미의 무관수령은 체포된 신자들 가운데 사후 문제가 있을 듯한 중요 인물은 상급기관(홍주, 공주, 서울)으로 이송하였고 문제가 없을 듯한 낮은 계층의 신자들은 해미군졸들에 의해 사법적 절차도 없이 이름석자도 남기지 못한 체 처형 되었습니다.

       해미 시내 입구를 흐르고 있는 해미천을 따라 서남쪽으로 1km쯤 내려가면 냇가에 순교탑이 서 있다. 1975년 10월 건립된 이 탑이 서 있는 자리는 순교자들이 생매장되어 있는 자리이다.  병인년 박해 때 형리들은 너무 많은 증거자들을 일일이 처형하기가 힘들자 이 자리에 큰 구덩이 셋을 파고 생매장하는 방법을 썼다. 이때 죽음앞에서 배교할까 두려워했던 신자들은 차례를 기다리지 않고 앞을 다투어 구덩이로 뛰어들었다. 이 날 해미 일대는 느닷없는 폭우가 쏟아지고 뇌성 벽력이 울렸으며 사흘동안 짙은 안개가 끼어 앞이 안보였다고 증언은 전하고 있다. 이때 묻힌 순교자들의 유해는 1935년 范신부에 의해 발굴되어 서산군 음암면 산흥리 공소 뒷산으로 이장되었는데 이때 많은 고상과 묵주 등이 함께 발굴되었고, 이곳에 1975년 해미순교탑이 건립되었다. 

       해미 성안에서도 많은 신자들이 순교했다. 성안 옥사문 앞에서 3백년생으로 추정되는 호야나무가 지금도 서 있는데 이 나무가 형구(形具)로 이용되었다. 형리들은 이 나무가지에 순교자들을 매달아 놓고 돌로 치거나 활로 쏘아 숨지게 했는데 반 정도가 썩어 들어간 이 나무에는 지금도 철사를 감았던 자욱이 그대로 남아있다.

       해미에서 처형된 신자들의 신원에 대한 기록이 매우 희막하여 해미의 땅은 보잘것없는 신분의 사람들이 순교한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790년대에 순교한 박취득(로렌죠)을 비롯한 순교자 순교자 명록은 1870년대까지 수십명의 이름을 남겨 놓고 있지만 그외의 수천명은 이름마저 하느님께 봉헌하며 순교의 길을 걸어 가셨다. 해미땅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순교자들의 몸이 스러져 간 곳으로 그 특성을 지니고 있기에 이 땅은 더욱 우리의 고개를 숙이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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