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시파

 

남인시파


南人


1) 조선시대 사색당파(四色黨派)의 하나. 남인은 2가지 뜻을 갖고 있다. 하나는 선조 때의 남인, 다른 하나는 숙종 때의 남인이다. 선조 때의 남인은 주로 동인 중에 영남인 또는 남산 밑에 살던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며, 때로는 동인 중에서 서인에 대한 온건파가 남인이고, 강경파가 북인이라고 알려져 있다. 선조 때 남인은 서로 통혼(通婚)할 정도로, 서인에 대해 전투적이지는 않았다. 이러한 뜻에서 당쟁사상의 남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때의 남인 중에는 유성룡(柳成龍)․이양원(李陽院)․이원익(李元翼)․정경세(鄭經世)․이준․이성구(李聖求)․이광정(李光庭)․한준겸(韓浚謙)․이덕형(李德馨)․김성일(金誠一)․우성전(禹性傳) 등이 있다. 그러나 숙종 때의 남인은 예송(禮訟)을 중심으로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과 이론투쟁을 전개하였으며 당쟁사상의 남인은 여기서 시작되는 것이다. 이 당시 남인은 허목(許穆)․.윤휴를 중심으로 윤선도(尹善道)․홍우원(洪宇遠)․유세철(柳世哲) 등이며, 이들의 뒤를 이은 사람은 이현일(李玄逸)․이서우(李瑞雨)․이익(李瀷)․강박(姜樸)․오광운(吳光運)․채제공(蔡濟恭)․홍만조(洪萬造)․정약용(丁若鏞)․정범조(丁範祖)․채동술(蔡東述) 등이다. 숙종 때 복제문제로 송시열의 처벌문제를 다룰 때 온건파를 탁남(濁南), 강경파를 청남(淸南)이라고 하였다. 청남은 허목(許穆)일파를, 탁남은 허적(許積)일파를 가리킨다.


2) 중국 동북과 북방에서 일어난 금(金)․원(元) 두 왕조의 지배 아래 있던 남방 송(宋)나라 사람들의 호칭. 금나라 때는 구(舊)북송인을, 원나라 때는 구남송인을 가리켰다. 원나라 사회에서는 몽골정권에 복속된 차례에 따라 사회적 서열이 결정되어, 마지막으로 복속된 남인은 몽골인․색목인(色目人)․한인(漢人)의 아래 계급으로 냉대를 받았다.






時派


조선 후기 정조의 청류(淸流)를 앞세우는 준론탕평정책(峻論蕩平政策)을 지지한 정파(政派). 청류 가운데서도 정조의 정책을 지지하는 부류가 다시 시류(時流)에 편승하는 무리라는 뜻으로 시파로 지칭되었다. 영조대의 탕평책은 붕당 간의 극단적 대립을 없애고 각기의 명절(名節)보다 타협을 종용하는 것이었으나, 정책기반 확보과정에서 노론의 우위가 불가피했으므로 노․소론간에 청류를 자처하는 부류의 반대에 부닥쳤다. 이 문제를 혼인관계로 극복하려고 한 결과 척신의 비중을 높였고, 이들은 영조대에 이미 남당(南黨)을 이루어 청류인 동당(東黨)과 맞섰다. 정조는 즉위 후, 조제(調制)․보합(保合)의 인재등용을 내용으로 하는 탕평책을 계승하면서도 청류들을 대폭 기용하여 준론탕평 또는 청류탕평을 폈다. 청류의 청명당(淸名黨)은 척신에 비판적인 노론계 인사가 주축이었으나 정조는 다른 당색을 배제하지 않고 규장각․초계문신제도(抄啓文臣制度)를 통하여 비노론계 진출을 활성화시켰고, 1788년(정조12)에 채제공(蔡濟恭)을 비롯한 남인을 등용하여 노론과 남인의 보합을 도모하였다. 영남 남인들은 92년에 노론 우위 상황에서 금기되어 온 임오의리(壬午義理)의 문제를 제기하여 결국 노론 내부에서 시파․벽파(僻派)의 분열을 일으키게 되었다. 시․벽파의 대치가 표면화된 뒤 사색(四色)은 이름만 남고 정국은 거의 두파에 의하여 재편된 것으로 보일 정도로 그 분립은 공공연해졌다. 순조가 즉위하자 반정조적 입장의 세력이 벽파와 결탁하여 시파에 대한 탄압을 가했으며 1803년(순조 3)에는 다시 시파의 벽파에 대한 반격이 가해졌다. 순조대 이후의 시․벽파 대립은 현저하게 극단화, 감정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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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uest 님의 말:

     

    남인시파

    南人

    1) 조선시대 사색당파(四色黨派)의 하나. 남인은 2가지 뜻을 갖고 있다. 하나는 선조 때의 남인, 다른 하나는 숙종 때의 남인이다. 선조 때의 남인은 주로 동인 중에 영남인 또는 남산 밑에 살던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며, 때로는 동인 중에서 서인에 대한 온건파가 남인이고, 강경파가 북인이라고 알려져 있다. 선조 때 남인은 서로 통혼(通婚)할 정도로, 서인에 대해 전투적이지는 않았다. 이러한 뜻에서 당쟁사상의 남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때의 남인 중에는 유성룡(柳成龍)․이양원(李陽院)․이원익(李元翼)․정경세(鄭經世)․이준․이성구(李聖求)․이광정(李光庭)․한준겸(韓浚謙)․이덕형(李德馨)․김성일(金誠一)․우성전(禹性傳) 등이 있다. 그러나 숙종 때의 남인은 예송(禮訟)을 중심으로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과 이론투쟁을 전개하였으며 당쟁사상의 남인은 여기서 시작되는 것이다. 이 당시 남인은 허목(許穆)․.윤휴를 중심으로 윤선도(尹善道)․홍우원(洪宇遠)․유세철(柳世哲) 등이며, 이들의 뒤를 이은 사람은 이현일(李玄逸)․이서우(李瑞雨)․이익(李瀷)․강박(姜樸)․오광운(吳光運)․채제공(蔡濟恭)․홍만조(洪萬造)․정약용(丁若鏞)․정범조(丁範祖)․채동술(蔡東述) 등이다. 숙종 때 복제문제로 송시열의 처벌문제를 다룰 때 온건파를 탁남(濁南), 강경파를 청남(淸南)이라고 하였다. 청남은 허목(許穆)일파를, 탁남은 허적(許積)일파를 가리킨다.

    2) 중국 동북과 북방에서 일어난 금(金)․원(元) 두 왕조의 지배 아래 있던 남방 송(宋)나라 사람들의 호칭. 금나라 때는 구(舊)북송인을, 원나라 때는 구남송인을 가리켰다. 원나라 사회에서는 몽골정권에 복속된 차례에 따라 사회적 서열이 결정되어, 마지막으로 복속된 남인은 몽골인․색목인(色目人)․한인(漢人)의 아래 계급으로 냉대를 받았다.



    時派

    조선 후기 정조의 청류(淸流)를 앞세우는 준론탕평정책(峻論蕩平政策)을 지지한 정파(政派). 청류 가운데서도 정조의 정책을 지지하는 부류가 다시 시류(時流)에 편승하는 무리라는 뜻으로 시파로 지칭되었다. 영조대의 탕평책은 붕당 간의 극단적 대립을 없애고 각기의 명절(名節)보다 타협을 종용하는 것이었으나, 정책기반 확보과정에서 노론의 우위가 불가피했으므로 노․소론간에 청류를 자처하는 부류의 반대에 부닥쳤다. 이 문제를 혼인관계로 극복하려고 한 결과 척신의 비중을 높였고, 이들은 영조대에 이미 남당(南黨)을 이루어 청류인 동당(東黨)과 맞섰다. 정조는 즉위 후, 조제(調制)․보합(保合)의 인재등용을 내용으로 하는 탕평책을 계승하면서도 청류들을 대폭 기용하여 준론탕평 또는 청류탕평을 폈다. 청류의 청명당(淸名黨)은 척신에 비판적인 노론계 인사가 주축이었으나 정조는 다른 당색을 배제하지 않고 규장각․초계문신제도(抄啓文臣制度)를 통하여 비노론계 진출을 활성화시켰고, 1788년(정조12)에 채제공(蔡濟恭)을 비롯한 남인을 등용하여 노론과 남인의 보합을 도모하였다. 영남 남인들은 92년에 노론 우위 상황에서 금기되어 온 임오의리(壬午義理)의 문제를 제기하여 결국 노론 내부에서 시파․벽파(僻派)의 분열을 일으키게 되었다. 시․벽파의 대치가 표면화된 뒤 사색(四色)은 이름만 남고 정국은 거의 두파에 의하여 재편된 것으로 보일 정도로 그 분립은 공공연해졌다. 순조가 즉위하자 반정조적 입장의 세력이 벽파와 결탁하여 시파에 대한 탄압을 가했으며 1803년(순조 3)에는 다시 시파의 벽파에 대한 반격이 가해졌다. 순조대 이후의 시․벽파 대립은 현저하게 극단화, 감정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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