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초기교회 교부들의 하느님-(바)

1. 그러므로 첫째에 대해서는 다음과같이 말해야 한다. 첨가될 수 없는 어떤 것은 두가지 모양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 한 경우은 어떤 것에 첨가되지 않은 것은 그 것의 이유에 의해서이다. 예컨대 비이성적 동물의 개념은 이성이 없다는 개념이 내포된다. 다른 경우는 첨가가 되지 않는 어떤 것이라고 하지만 첨가가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사물의 이유안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 아닌 경우이다. 예컨대 동물 일반이 이성이 없다는 것은, 동물일반의 개념에는 이성을 갖는다는 것이 내포되어 있진 않다는 데 불과한 것이고 이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 그 개념에 내포되어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첫째 양태로서의 첨가가 없는 존재는 신적 존재이고 둘째 양태로서의 첨가가 없는 존재는 공통적 존재이다.
2. 둘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존재는 두가지로 말해진다. 그 하나는 존재의 현실태를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명제의 결합을 의미한다. 이런 결합은 지성이 술어를 주어에 결부시키는데 이루어진다. 따라서 우리가 존재를 첫째 양태로 받아들임으로써는 하느님의존재를 알 수 없으며, 또한 그의본질도 알 수 없다. 다만 우리는 둘째 양태로써만 알 수 있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이 존재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 형성하는 이 명제가 참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이 것을 우리 앞서 제시한 바와 같이 결과에서 아는 것이다(I, q.2, a.2).
I, q.2, a.2에서는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논증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논증에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원인을 통하여 논증하는 것이다. 이런 논증은 먼저 있는 것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논증이다. 다른 하나는 결과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논증이다. 전자는 ‘무엇때문에’라는 논증이고(연역법), 후자는 ‘그러니까’라는 논증이다(귀납법). 이 논증은 우리에게 있어서 먼저 있는 것을 통한 논증이다. 사실 어떤 결과는 그 원인보다도 우리에게 더 명백하기 때문에 우리는 결과를 통해 원인의 인식에로 전진한다. 그 결과가 우리에게 더 명백하게 알려진 것이라면 어떠한 결과에서든 그 결과의 고유한 원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논증할 수 있다. 그것은 결과는 원인에 속하는 것이니 결과가 주어지는 한 원인이 선재해야 하는 것은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에게있어서 자명한 것이 아니지만 우리에게 알려진 결과를 통해 논증될 수 있다.
결과를 통해 원인이 논증될 때 원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원인의 정의 대신 결과를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에 대해 그렇다. 즉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보충어는 그 주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지, 그것이 무엇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엇인가의 물음은 있는가의 물음에 따라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언급되겠지만 하느님의 명칭은 결과들에서 부과된다. 따라서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결과에서 증명할 때 우리는 보충어로서 하느님이라는 이 명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또 원인에 비례하지 않는 결과를 통해서는 원인에 대한 완전한 인식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어떠한 결과에서도 원인이 있다는 것이 명백하게 우리에게 논증될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의 결과들에서 하느님이 존재하는 것을 논증할 수 있다. 우리가 그런 결과들을 통하여 하느님을 그 본질을 따라 완전하게 인식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 결과들에서 논증할 수 있는 것이다.

두번째로,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이 그로부터 유래하게 되는 첫원인이요, 모든 피조물이 그분의 존재에 참여하게 되어 있는 목적이라는 점이다. 이런 피조물과의 관계를 신학대전 I, q.44, a. 1- a.2에서 찿아 볼 수 있다.
1항에서. 하느님에게 있어서 존재와 본질이 동일하다는 점을 전제하고, 따라서 하느님은 존재이고, 스스로 존재하는 자존적 존재로서 하나일 수 밖에 없다는 점을 다시 확인한다. 그리고 다른 사물들은 존재를 ‘소유’할 수 밖에 없다. 즉 참 존재에 참여함으로써 존재하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존재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2항에서는 제일질료가 사물의 구성요소로 들어오고 사물들의 일부가 된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유래한다. 따라서 제일질료도 하느님으로부터 유래한다.
4항 하느님은 창조할 때, 어떤 목적에 따라 작업했다. 이 목적이란 오직 선일 뿐이다. 그러나 무한한 하느님에게 있어서 그것은 어떤 취득해야 할 선이 아니라 나누어 줄 선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선성이 바로 우주의 목적이다.

이러한 토마스의 논증은 자명한 것이다. 왜냐하면 토마스가 하느님으로 이해하는 분이란 이미 신의 존재 증명에 있어서의 다섯가지 방법에서, (I, q.2, a,3) 제 일 운동자를, 제 일 능동인을, 제 1 필연유를, 제일 완전성을, 제 1 목적인을 하느님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 같은 사물계에 발견되는 단계에서 선성과 진실성과 고상함에 있어서 더하고 덜한 사물들이 발견된다. 단지 선성이나 진실성이나 고상함만이 아니라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사물들이 더하고 덜하다고 하는 것은 최고도로 있는 선성, 진실성, 고상함, 아름다움의 여러가지 모양으로 접근하는 데 따라 말해 지는 것이다. 예컨대 최고도로 더운 것에더 가까운 것이 더 더운 것이다. 따라서 존재 있어서도 가장 진실하고 가장 선하고 가장 고귀하고 가장 아름다운 것, 최고로 존재인 것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의하면 최고의 진실은 최고의 유인 것이다. 어떤 영역에서도 최고도로 불리우는 것은 그 영역에 속하는 모든 것의 원인이다. 예컨대 최고도로 더운 불은 모든 더운 것들의 원인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물계에 있어서 존재와 선성과 모든 완전성의 원인인 어떤 것이 있다. 우리는 이런 존재를 하느님이라고 부른다.
다른 한편 사물의 통치의 관점에서 우리는 인식을 갖지 못하는 사물들, 즉 자연적 물체들이 목적 때문에 작용하는 것을 본다. 이런 것은 자연물들이 가장 좋은 것을 얻기 위해 앟상 혹은 자주 같은 모양으로 작용하는 데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우연에서가 아니라 어떤 의도에서부터 목적에 도달하는 것이 명백하다. 그런데 인식을 갖지 않는 것들은 인식하며 깨닫는 어떤 존재에 의해 지휘되지 않으면 목적을 지향할 수 없다. 이것은 마치 화살이 사수에 의해 지휘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모든 자연적 사물들을 목적에로 질서지어주는 어떤 지성적 존재가 있다 이런 존재를 우리는 하느님이라고 부른다.
이 다섯번째 논증에서 우리는 비록 인식을 지닌 인간에게도 적용시킬 수 있다. 새가 날아가는 의미도 모르면서 날아 가듯이, 그러나 거기에 어떤 목적이 있다. 우리 인간 역시 왜 사는지 모르면서 사는데도 역시 거기에 어떤 목적이 있다. 토마스는 그것을 하느님의 선성이라고 했다. 그리고 하느님은 바로 최고유인 까닭에 최고 진리일 뿐만 아니라 최고 선이다.
이런 이유로 토마스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출애급기 3,14에서 찿아 볼수 있는 ‘야훼’(Iam He Who Is)라는 명칭이 가장 적절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I, q.13. a.11). 하느님이야 말로 존재와 본질이 동일한 존재이고, 그밖의 사물들은 그 자체가 존재인 하느님에 참여함으로써 존재하게 되며, 하느님에게 참여함 없이 존재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존재하기 위하여 어떤 것에 참여함으로써 존재하게 되는 것은 그 이전의 어떤 존재가 선행됨을 의미하기 때문에 첫번째 존재일 수 없다. 따라서 하느님은 첫번째 존재이며. 그분에 선행되는 어떤 존재도 없다. 그러므로 그의 본질은 그의 존재다‘라고 논증하고 있다 (Summa Contra Gentiles I, 22).
이처럼 토마스는 하느님이 계신가 하는 질문으로 시작하지만, 단순히 겉으로만 의문이었지 토마스에게는 하느님의 존재가 확실한 것으로 나타 난다. 토마스의 하느님 이해는 하느님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 존재의 자명성이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물음에 결코 대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인간은 하느님에 대해 어떠한 체험을 가질 수 있는가?
신학대전 I, q.12,에서 하느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인식되는가를 묻고 있다. a. 1: 어떤 창조된 지성이 하느님을 그 본질에 있어서 볼 수 있는가? 창조된 어떠한 지성도 하느님의 본질을 그 본질에 있어서 볼수 없는 것이라는 주장들이 있다.
1.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요한 복음서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라는 말을 주석하면서. 예언자들뿐만 아니라 천사들과 대천사들도, 하느님인 바, 그 자체를 보지 못했다. 그 본성상 창조적인 것이 어떻게 비창조적인 것을 볼 수 있겠는가?
디오니시우스는 ’감각도 표상도 의견도 지식도 하느님에게 도달할 수 없다.
2. 그밖에도 무한한 것은 그런 것인 한, 알려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이미 말한 바와같이 무한하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그 자체로서 알려지지 않는다.
3. 그밖에도 창조된 지성은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가 아니면 알 수없는 것이다. 그런데 지성이 파악하는 첫 것은 유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존재자가 아니고, 존재자들을 초월하여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가지적인 것이 아니고 오히려 모든 지성을 초월한다.
4. 그뿐만 아니라 인식하는 자에게는 인식되는 것에 대해 어떤 대비도 없다. 그것은 인식된 것은 인식하는 자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창조된 지성에는 하느님에 대한 어떠한 대비도 없다 그것은 양자는 무한히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창조된 지성은 하느님의 본질을 볼 수 없다.
여기에대한 반론으로 요한 1서가 있다 (3,2): “우리는 그를 있는 바와 같이 보겠읍니다.(우리는 그때 그리스도의 참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토마스의 의견.
사물은 어떤 것이든 다 그 현실태에 의해 가지적인 것이기 때문에 가능태의 어떠한 혼합도 용인하지 않는 순수 현실유인 하느님이 그 차제로 있는 대로는 가장 가지적이다. 그러나그 자체에 있어서 가장 가지적인 것은 지성을 초월하는 가지성의 초과 때문에 어떤 지성에게는 가지적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가장 가시적인 태양이 박쥐에게는 빛의 초과 때문에 보여질 수 없는 것과 같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이점에 유의하면서 창조된 어떤 지성도 하느님의 본질을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적절하지 못하다. 사실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은 지성의 작용이라는 인간의 가장 고차적인 작용에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에 만일 창조죈 지성이 결코 하느님의 본질을 볼 수 없는 것이라면 인간은 결코 행복을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혹은 하느님 안에 보다는 다른 것 안에 그의 행복이 있게 될 것이다. 이런 것은 신앙과는 전혀 다르다. 이성적 피조물의 궁극적 완성은 그 존재의 근원인 것 안에 있다. 사실 어떤 것이든 그 근원에 도달할 때 완성되기 때문이다. 또한 마찬가지로 그것은 이성때문에도 그렇다. 사실 사람들에게는 결과를 볼 때, 원인을 알려는 욕망이 내재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안에는 경이가 생겨난다. 그러므로 만일 이성적 피조물의 지성이 사물의 제 1 원인에 도달할 수 없다면 자연의 욕망은 공허한 것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따라서 행복한 자들은 하느님의 본질을 본다는 것을 단적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성인들, 진복자들은 하느님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보는 것에는 그것이 감성적인 것이건 지성적인 것이건 간에 두가지 조건이 요구된다. 즉 보는 능력과 보여지는 것의 시각과의 합일이다. 사실 보여지는 사물이 어떤 모양으로 보는 것안에 있지 않고서는 본다는 것은 현실적인 것으로 되지 않는다. 물체적 사물에있어서 보여지는 것이 보는 것 안에 있는 것은 그 본질에 의해 그럴 수는 없고, 다만 그 사물의 유사에 의해 그런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명백하다. 예컨대 돌의 유사가 눈안에 있으며 이런 유사로 말미암아 돌을 현실적으로 보게 된다. 돌의 실체 자체가 운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하나이며 같은 사물이 보는 능력의 그원이며, 동시에 보여지는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보는 것은 보는 능력도 또 그것으로 말미암아 보는 형상도 다 그 사물에서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지성능력의 작자이며 또 지성에 의해 보여질 수 있는 것도 명백하다. 그리고 피조물의 지성능력은 그 자체가 하느님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근원적 지성인 하느님 자신의 어떤 부여된 유사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피조물의 지성적 능력도 말하자면 근원적 지성으로부터 유래된 것으로서 어떤 지성적 빛이라고 불리운다. 이것은 지성적 피조물의 자연적 능력에 대해 이해 되든지 혹은 은총이나 영과의 첨가된 어떤 완전성에 대해 이해되든지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보기 위해서는 보는 능력을 갖는 편에 하느님의 어떤 유사가 요구된다. 즉 그런 유사로 말미암아 지성은 하느님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어떤 모양으로 보는 것과 합일될 필요가 있는 보여지는 것의 편에서 고찰할 때 하느님의 본질은 결코 창조된 유사를 통하여 보여질 수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물체의 형상으로써는 비물체적인 것의 본질이 인식될 수 없다. 그러므로 더욱 더 하느님의 본질은 창조된 어떠한 사물의 형상으로도 보여질 수 없는 것이다. 둘째로, 하느님의 본질은 그이 존재 자체이기 때문에 이런 것은 창조된 어떠한 형상에도 적합한 것일 수 없다. 그러므로 창조된 어떤 형상이 보는 자에게 하느님의 본질을 표현한는 유사일 수 없다. 셋째로, 신적 본질은 한계를 갖지 않은 어떤 것이며 또한 그것은 창조된 지성에 의해 의미되거나 이해 되는 것은 어떤 것이든 다 자체 안에 초월적으로 탁월하게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런 것은 창조된 어떠한 형상으로도 표현될 수 없다. 창조된 모든 형상은 지혜의 혹은 능력의 혹은 존재의 어떤 이유를 따라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느님이 유사를 통하여 보여진다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본질은 보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라고 결론 짓는다면, 그 것은 오류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하느님의 본질을 보기 위해서는 능력의 편에서 어떤 유사가 요구된다. 즉 하느님을 보기 위해 지성을 강화하는 신적 광영의 빛이 요구된다.
이처럼 토마스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체험은 인간이 특수하게 지니고 있는 능력으로서 지성적 영역안에서만 다루어 지고 있다. 따라서 하느님 체험은 토마스에 따르면 본질 인식이라는 것을 거쳐야만 했다. 따라서 하느님이 무엇인가에 대한 직접적 인식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가령 책상하나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 우선 책상이 무엇인가를 인식해야만 한다. 우리가 하느님을 하나의 무엇으로서, 어떤 것으로서 이 현세에서 만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의 존재는 우리에게 불가항력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며 우리 지성에 자명한 것도 아니다. 이것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자체로 명백하지 않음을 뜻한다. 토마스는 우리의 체험 영역의 한계를 반복하여 강조한다. ”하느님의 본질이 자체 안에서 어떠한지를 우리는 이 현세 속에서 인식 할 수가 없다“(신학대전, I, q. 13, a.2, ad14). 이를테면 하느님은 포착되지 않는 분, 원천적으로 인식되지 않는 분이다. 결국 하느님은 인식으로 체험될 수 없고, 신앙으로만 접근이 가능하다. 그러나 단지 신앙안에서만 도달이 가능한 신은 하느님이 아니며 체험될 수 없는 하나의 가설이다. 하느님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은 인간이 진정한 하느님의 인식을 가질 때에만 의미를 지닌다. 신앙은 인간의 이해에 상응하여야 한다.
토마스에게 하느님은 직접적으로 인식될 수 없다. 인간은 단지 우연적인 것만을 만나고 있을 뿐이고, 하느님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느님은 단지 신앙속에서만 인식된다는 것 역시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의 이해가 한번 건드릴 수도 없는 하느님은 실질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우리 이해의 영역안에서 체험 될 때에만 실제적인 하느님일 뿐이다. 결국 이렇게 되면 간접적 하느님 인식의 길만이 남는다. 소여된 것 안에서 하느님의 체험이 가능하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우연적인 존재들안에서 그 실존의 근거가 다른 것으로부터 유래된다는 것을 인식한다. 체험되는 모든 것은 결과로 파악되며, 이러한 사물의 상태가 하느님을 중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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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초기교회 교부들의 하느님-(바)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1. 그러므로 첫째에 대해서는 다음과같이 말해야 한다. 첨가될 수 없는 어떤 것은 두가지 모양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 한 경우은 어떤 것에 첨가되지 않은 것은 그 것의 이유에 의해서이다. 예컨대 비이성적 동물의 개념은 이성이 없다는 개념이 내포된다. 다른 경우는 첨가가 되지 않는 어떤 것이라고 하지만 첨가가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사물의 이유안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 아닌 경우이다. 예컨대 동물 일반이 이성이 없다는 것은, 동물일반의 개념에는 이성을 갖는다는 것이 내포되어 있진 않다는 데 불과한 것이고 이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 그 개념에 내포되어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첫째 양태로서의 첨가가 없는 존재는 신적 존재이고 둘째 양태로서의 첨가가 없는 존재는 공통적 존재이다.
    2. 둘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존재는 두가지로 말해진다. 그 하나는 존재의 현실태를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명제의 결합을 의미한다. 이런 결합은 지성이 술어를 주어에 결부시키는데 이루어진다. 따라서 우리가 존재를 첫째 양태로 받아들임으로써는 하느님의존재를 알 수 없으며, 또한 그의본질도 알 수 없다. 다만 우리는 둘째 양태로써만 알 수 있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이 존재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 형성하는 이 명제가 참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이 것을 우리 앞서 제시한 바와 같이 결과에서 아는 것이다(I, q.2, a.2).
    I, q.2, a.2에서는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논증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논증에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원인을 통하여 논증하는 것이다. 이런 논증은 먼저 있는 것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논증이다. 다른 하나는 결과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논증이다. 전자는 ‘무엇때문에’라는 논증이고(연역법), 후자는 ‘그러니까’라는 논증이다(귀납법). 이 논증은 우리에게 있어서 먼저 있는 것을 통한 논증이다. 사실 어떤 결과는 그 원인보다도 우리에게 더 명백하기 때문에 우리는 결과를 통해 원인의 인식에로 전진한다. 그 결과가 우리에게 더 명백하게 알려진 것이라면 어떠한 결과에서든 그 결과의 고유한 원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논증할 수 있다. 그것은 결과는 원인에 속하는 것이니 결과가 주어지는 한 원인이 선재해야 하는 것은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에게있어서 자명한 것이 아니지만 우리에게 알려진 결과를 통해 논증될 수 있다.
    결과를 통해 원인이 논증될 때 원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원인의 정의 대신 결과를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에 대해 그렇다. 즉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보충어는 그 주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지, 그것이 무엇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엇인가의 물음은 있는가의 물음에 따라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언급되겠지만 하느님의 명칭은 결과들에서 부과된다. 따라서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결과에서 증명할 때 우리는 보충어로서 하느님이라는 이 명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또 원인에 비례하지 않는 결과를 통해서는 원인에 대한 완전한 인식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어떠한 결과에서도 원인이 있다는 것이 명백하게 우리에게 논증될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의 결과들에서 하느님이 존재하는 것을 논증할 수 있다. 우리가 그런 결과들을 통하여 하느님을 그 본질을 따라 완전하게 인식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 결과들에서 논증할 수 있는 것이다.

    두번째로,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이 그로부터 유래하게 되는 첫원인이요, 모든 피조물이 그분의 존재에 참여하게 되어 있는 목적이라는 점이다. 이런 피조물과의 관계를 신학대전 I, q.44, a. 1- a.2에서 찿아 볼 수 있다.
    1항에서. 하느님에게 있어서 존재와 본질이 동일하다는 점을 전제하고, 따라서 하느님은 존재이고, 스스로 존재하는 자존적 존재로서 하나일 수 밖에 없다는 점을 다시 확인한다. 그리고 다른 사물들은 존재를 ‘소유’할 수 밖에 없다. 즉 참 존재에 참여함으로써 존재하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존재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2항에서는 제일질료가 사물의 구성요소로 들어오고 사물들의 일부가 된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유래한다. 따라서 제일질료도 하느님으로부터 유래한다.
    4항 하느님은 창조할 때, 어떤 목적에 따라 작업했다. 이 목적이란 오직 선일 뿐이다. 그러나 무한한 하느님에게 있어서 그것은 어떤 취득해야 할 선이 아니라 나누어 줄 선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선성이 바로 우주의 목적이다.

    이러한 토마스의 논증은 자명한 것이다. 왜냐하면 토마스가 하느님으로 이해하는 분이란 이미 신의 존재 증명에 있어서의 다섯가지 방법에서, (I, q.2, a,3) 제 일 운동자를, 제 일 능동인을, 제 1 필연유를, 제일 완전성을, 제 1 목적인을 하느님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 같은 사물계에 발견되는 단계에서 선성과 진실성과 고상함에 있어서 더하고 덜한 사물들이 발견된다. 단지 선성이나 진실성이나 고상함만이 아니라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사물들이 더하고 덜하다고 하는 것은 최고도로 있는 선성, 진실성, 고상함, 아름다움의 여러가지 모양으로 접근하는 데 따라 말해 지는 것이다. 예컨대 최고도로 더운 것에더 가까운 것이 더 더운 것이다. 따라서 존재 있어서도 가장 진실하고 가장 선하고 가장 고귀하고 가장 아름다운 것, 최고로 존재인 것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의하면 최고의 진실은 최고의 유인 것이다. 어떤 영역에서도 최고도로 불리우는 것은 그 영역에 속하는 모든 것의 원인이다. 예컨대 최고도로 더운 불은 모든 더운 것들의 원인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물계에 있어서 존재와 선성과 모든 완전성의 원인인 어떤 것이 있다. 우리는 이런 존재를 하느님이라고 부른다.
    다른 한편 사물의 통치의 관점에서 우리는 인식을 갖지 못하는 사물들, 즉 자연적 물체들이 목적 때문에 작용하는 것을 본다. 이런 것은 자연물들이 가장 좋은 것을 얻기 위해 앟상 혹은 자주 같은 모양으로 작용하는 데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우연에서가 아니라 어떤 의도에서부터 목적에 도달하는 것이 명백하다. 그런데 인식을 갖지 않는 것들은 인식하며 깨닫는 어떤 존재에 의해 지휘되지 않으면 목적을 지향할 수 없다. 이것은 마치 화살이 사수에 의해 지휘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모든 자연적 사물들을 목적에로 질서지어주는 어떤 지성적 존재가 있다 이런 존재를 우리는 하느님이라고 부른다.
    이 다섯번째 논증에서 우리는 비록 인식을 지닌 인간에게도 적용시킬 수 있다. 새가 날아가는 의미도 모르면서 날아 가듯이, 그러나 거기에 어떤 목적이 있다. 우리 인간 역시 왜 사는지 모르면서 사는데도 역시 거기에 어떤 목적이 있다. 토마스는 그것을 하느님의 선성이라고 했다. 그리고 하느님은 바로 최고유인 까닭에 최고 진리일 뿐만 아니라 최고 선이다.
    이런 이유로 토마스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출애급기 3,14에서 찿아 볼수 있는 ‘야훼’(Iam He Who Is)라는 명칭이 가장 적절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I, q.13. a.11). 하느님이야 말로 존재와 본질이 동일한 존재이고, 그밖의 사물들은 그 자체가 존재인 하느님에 참여함으로써 존재하게 되며, 하느님에게 참여함 없이 존재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존재하기 위하여 어떤 것에 참여함으로써 존재하게 되는 것은 그 이전의 어떤 존재가 선행됨을 의미하기 때문에 첫번째 존재일 수 없다. 따라서 하느님은 첫번째 존재이며. 그분에 선행되는 어떤 존재도 없다. 그러므로 그의 본질은 그의 존재다‘라고 논증하고 있다 (Summa Contra Gentiles I, 22).
    이처럼 토마스는 하느님이 계신가 하는 질문으로 시작하지만, 단순히 겉으로만 의문이었지 토마스에게는 하느님의 존재가 확실한 것으로 나타 난다. 토마스의 하느님 이해는 하느님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 존재의 자명성이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물음에 결코 대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인간은 하느님에 대해 어떠한 체험을 가질 수 있는가?
    신학대전 I, q.12,에서 하느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인식되는가를 묻고 있다. a. 1: 어떤 창조된 지성이 하느님을 그 본질에 있어서 볼 수 있는가? 창조된 어떠한 지성도 하느님의 본질을 그 본질에 있어서 볼수 없는 것이라는 주장들이 있다.
    1.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요한 복음서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라는 말을 주석하면서. 예언자들뿐만 아니라 천사들과 대천사들도, 하느님인 바, 그 자체를 보지 못했다. 그 본성상 창조적인 것이 어떻게 비창조적인 것을 볼 수 있겠는가?
    디오니시우스는 ’감각도 표상도 의견도 지식도 하느님에게 도달할 수 없다.
    2. 그밖에도 무한한 것은 그런 것인 한, 알려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이미 말한 바와같이 무한하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그 자체로서 알려지지 않는다.
    3. 그밖에도 창조된 지성은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가 아니면 알 수없는 것이다. 그런데 지성이 파악하는 첫 것은 유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존재자가 아니고, 존재자들을 초월하여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가지적인 것이 아니고 오히려 모든 지성을 초월한다.
    4. 그뿐만 아니라 인식하는 자에게는 인식되는 것에 대해 어떤 대비도 없다. 그것은 인식된 것은 인식하는 자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창조된 지성에는 하느님에 대한 어떠한 대비도 없다 그것은 양자는 무한히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창조된 지성은 하느님의 본질을 볼 수 없다.
    여기에대한 반론으로 요한 1서가 있다 (3,2): “우리는 그를 있는 바와 같이 보겠읍니다.(우리는 그때 그리스도의 참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토마스의 의견.
    사물은 어떤 것이든 다 그 현실태에 의해 가지적인 것이기 때문에 가능태의 어떠한 혼합도 용인하지 않는 순수 현실유인 하느님이 그 차제로 있는 대로는 가장 가지적이다. 그러나그 자체에 있어서 가장 가지적인 것은 지성을 초월하는 가지성의 초과 때문에 어떤 지성에게는 가지적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가장 가시적인 태양이 박쥐에게는 빛의 초과 때문에 보여질 수 없는 것과 같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이점에 유의하면서 창조된 어떤 지성도 하느님의 본질을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적절하지 못하다. 사실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은 지성의 작용이라는 인간의 가장 고차적인 작용에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에 만일 창조죈 지성이 결코 하느님의 본질을 볼 수 없는 것이라면 인간은 결코 행복을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혹은 하느님 안에 보다는 다른 것 안에 그의 행복이 있게 될 것이다. 이런 것은 신앙과는 전혀 다르다. 이성적 피조물의 궁극적 완성은 그 존재의 근원인 것 안에 있다. 사실 어떤 것이든 그 근원에 도달할 때 완성되기 때문이다. 또한 마찬가지로 그것은 이성때문에도 그렇다. 사실 사람들에게는 결과를 볼 때, 원인을 알려는 욕망이 내재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안에는 경이가 생겨난다. 그러므로 만일 이성적 피조물의 지성이 사물의 제 1 원인에 도달할 수 없다면 자연의 욕망은 공허한 것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따라서 행복한 자들은 하느님의 본질을 본다는 것을 단적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성인들, 진복자들은 하느님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보는 것에는 그것이 감성적인 것이건 지성적인 것이건 간에 두가지 조건이 요구된다. 즉 보는 능력과 보여지는 것의 시각과의 합일이다. 사실 보여지는 사물이 어떤 모양으로 보는 것안에 있지 않고서는 본다는 것은 현실적인 것으로 되지 않는다. 물체적 사물에있어서 보여지는 것이 보는 것 안에 있는 것은 그 본질에 의해 그럴 수는 없고, 다만 그 사물의 유사에 의해 그런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명백하다. 예컨대 돌의 유사가 눈안에 있으며 이런 유사로 말미암아 돌을 현실적으로 보게 된다. 돌의 실체 자체가 운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하나이며 같은 사물이 보는 능력의 그원이며, 동시에 보여지는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보는 것은 보는 능력도 또 그것으로 말미암아 보는 형상도 다 그 사물에서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지성능력의 작자이며 또 지성에 의해 보여질 수 있는 것도 명백하다. 그리고 피조물의 지성능력은 그 자체가 하느님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근원적 지성인 하느님 자신의 어떤 부여된 유사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피조물의 지성적 능력도 말하자면 근원적 지성으로부터 유래된 것으로서 어떤 지성적 빛이라고 불리운다. 이것은 지성적 피조물의 자연적 능력에 대해 이해 되든지 혹은 은총이나 영과의 첨가된 어떤 완전성에 대해 이해되든지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보기 위해서는 보는 능력을 갖는 편에 하느님의 어떤 유사가 요구된다. 즉 그런 유사로 말미암아 지성은 하느님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어떤 모양으로 보는 것과 합일될 필요가 있는 보여지는 것의 편에서 고찰할 때 하느님의 본질은 결코 창조된 유사를 통하여 보여질 수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물체의 형상으로써는 비물체적인 것의 본질이 인식될 수 없다. 그러므로 더욱 더 하느님의 본질은 창조된 어떠한 사물의 형상으로도 보여질 수 없는 것이다. 둘째로, 하느님의 본질은 그이 존재 자체이기 때문에 이런 것은 창조된 어떠한 형상에도 적합한 것일 수 없다. 그러므로 창조된 어떤 형상이 보는 자에게 하느님의 본질을 표현한는 유사일 수 없다. 셋째로, 신적 본질은 한계를 갖지 않은 어떤 것이며 또한 그것은 창조된 지성에 의해 의미되거나 이해 되는 것은 어떤 것이든 다 자체 안에 초월적으로 탁월하게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런 것은 창조된 어떠한 형상으로도 표현될 수 없다. 창조된 모든 형상은 지혜의 혹은 능력의 혹은 존재의 어떤 이유를 따라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느님이 유사를 통하여 보여진다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본질은 보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라고 결론 짓는다면, 그 것은 오류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하느님의 본질을 보기 위해서는 능력의 편에서 어떤 유사가 요구된다. 즉 하느님을 보기 위해 지성을 강화하는 신적 광영의 빛이 요구된다.
    이처럼 토마스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체험은 인간이 특수하게 지니고 있는 능력으로서 지성적 영역안에서만 다루어 지고 있다. 따라서 하느님 체험은 토마스에 따르면 본질 인식이라는 것을 거쳐야만 했다. 따라서 하느님이 무엇인가에 대한 직접적 인식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가령 책상하나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 우선 책상이 무엇인가를 인식해야만 한다. 우리가 하느님을 하나의 무엇으로서, 어떤 것으로서 이 현세에서 만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의 존재는 우리에게 불가항력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며 우리 지성에 자명한 것도 아니다. 이것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자체로 명백하지 않음을 뜻한다. 토마스는 우리의 체험 영역의 한계를 반복하여 강조한다. ”하느님의 본질이 자체 안에서 어떠한지를 우리는 이 현세 속에서 인식 할 수가 없다“(신학대전, I, q. 13, a.2, ad14). 이를테면 하느님은 포착되지 않는 분, 원천적으로 인식되지 않는 분이다. 결국 하느님은 인식으로 체험될 수 없고, 신앙으로만 접근이 가능하다. 그러나 단지 신앙안에서만 도달이 가능한 신은 하느님이 아니며 체험될 수 없는 하나의 가설이다. 하느님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은 인간이 진정한 하느님의 인식을 가질 때에만 의미를 지닌다. 신앙은 인간의 이해에 상응하여야 한다.
    토마스에게 하느님은 직접적으로 인식될 수 없다. 인간은 단지 우연적인 것만을 만나고 있을 뿐이고, 하느님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느님은 단지 신앙속에서만 인식된다는 것 역시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의 이해가 한번 건드릴 수도 없는 하느님은 실질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우리 이해의 영역안에서 체험 될 때에만 실제적인 하느님일 뿐이다. 결국 이렇게 되면 간접적 하느님 인식의 길만이 남는다. 소여된 것 안에서 하느님의 체험이 가능하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우연적인 존재들안에서 그 실존의 근거가 다른 것으로부터 유래된다는 것을 인식한다. 체험되는 모든 것은 결과로 파악되며, 이러한 사물의 상태가 하느님을 중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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