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장점
‧이 헌장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가톨릭의 태도에 있어서 중요한 변화를 보여준다. 계시는 단순히 정보를 전달해 주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만남(personal emcounter)으로 제시된다. ‘이 헌장은 틀림없이 이 인격적인 요소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하느님은 단순히 사람의 사변적인 지식의 창고를 채우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친구인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버틀러,C, Butler,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학, DLT, 1981)
계시는 하느님의 위격(位格)에서 나와서 인간의 마음이 아니라 인간 인격(人格)의 중심에 닿는다. 계시의 최초의 행위는 천지창조와 이스라엘의 역사 그리고 그리스도의 생애와 초대교회이다. 이 모든 것들은 성경에 기술된 하느님과 백성과의 만남이다. 이 계시가 완전하다는 사실이 지속되고 있는 계시 사건을 중단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전례 안에서 성서를 읽거나 들을 때, 우리는 기도나 삶, 성경 안에서 더 충만히 하느님을 만나도록 인도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교회의 표상을 사용하는 것을, 계시헌장은 ‘전에 말씀하신 하느님은 사랑하시는 당신 아들의 정배(淨配)와 끊임없는 대화를 유지하신다’(8) 고 단언한다.
‧이 ‘끊임없는 대화’는 믿는 이들의 공동체로 하여금 하느님의 계시를 새롭게 표현하는 교의를 만들게 한다. 이렇게 교의는 새로운 세대와 문화를 위해 계시와의 첫 만남을 다시 표현하기 위해 발전된다.
공의회는 이 그리스도교의 교의의 발전을 확실히 했다. ‘믿는 이들의 관상과 연구에 의해서, 혹은 그들이 체험하는 영적 사실들에 대한 깊은 이해에 의해서, 또는 주교의 직위를 계승하여 진리의 확실한 은사를 받은 이들의 설교에 의해서 그 이해가 깊어진다’(8). 그러므로 계시의 발전은 교회 교도권과 마찬가지로 믿는 이들의 살아 있는 체험에서 오는 것이다. 이 발전과 성전의 요소로서의 체험에 대한 확인은 그런 종류의 이야기는 현대주의라고 생각하는 두려움을 극복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현대 가톨릭 신학은 번영하게 되었다.
‧교회는 발전에 대한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계시라는 한 사건의 부분으로서 성경과 성전(聖傳)을 설명하고 접근한다. ‘성전과 성경은 교회에 위탁된 하느님 말씀의 거룩한 단일 위탁물이다’(10). 성경은 계시의 어떤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성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성전은 세기를 통하여 전해져 내려온 성경을 설명하는 것이다. ‘성경은 결함이 있기 때문에 성경의 완전한 의미와 내용을 찾아내기 위해 성전이 필요하다고 가톨릭은 말하지 않는다’.(버틀러, 위의 책)
한가지 예로서 삼위일체의 교의를 들 수 있겠다. 이 교의는 예수님의 말씀과 바오로의 편지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지만 한 분이신 하느님 안에 세 위격이시라는 명확한 진술은 그 후의 성전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성경과 성전을 하나로 묶어 이렇게 제시하는 것은 개신교와 대화를 강력히 촉진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계시에 대한 인격적이고 역동적인 견해는 성서의 해석에 있어서 역사 비평적 방법에 크게 힘입은 것이다 .이런 방법은 원서의 숨어 있는 깊은 뜻을 밝히고, 믿는 이들이 성서를 보다 깊이 있게 묵상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 헌장은 성서의 모든 말씀을 거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두 극단적인 사람들을 조종한다. 이 조종의 열쇠는 성서 저자의 의도를 이해하는 것이다. ‘진리는 역사체, 예언체, 시체(詩體), 그리고 그 외의 다른 문체에 있어서 달리 표현되기’(12) 때문이다.
헌장은 복음을 역사와 신학적 해석이 하나로 혼합된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물려받은 이야기를 직접적인 대화체로서가 아니라, ‘보다 깊이 숙고하고, 성령의 영감과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사건들을 체험함으로써 체득한’사실을 전해주었다. 이렇게 공의회는 이런 균형 있고 현대적인 접근을 통하여 성서를 연구하도록 장려해 왔다.
‧‘사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성 예로니모, 계시 25)라는 주장은 가톨릭 신자들이 성서를 가까이해야 한다는 공의회의 심각한 걱정을 반영하고 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성서를 기도하며 읽는 것은 모든 교회의 활동을 뒷받침하고, ‘영적 생활에 새로운 충격을 기대할 수 있기’(26) 때문이다.

4. 장점
‧이 헌장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가톨릭의 태도에 있어서 중요한 변화를 보여준다. 계시는 단순히 정보를 전달해 주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만남(personal emcounter)으로 제시된다. ‘이 헌장은 틀림없이 이 인격적인 요소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하느님은 단순히 사람의 사변적인 지식의 창고를 채우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친구인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버틀러,C, Butler,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학, DLT, 1981)
계시는 하느님의 위격(位格)에서 나와서 인간의 마음이 아니라 인간 인격(人格)의 중심에 닿는다. 계시의 최초의 행위는 천지창조와 이스라엘의 역사 그리고 그리스도의 생애와 초대교회이다. 이 모든 것들은 성경에 기술된 하느님과 백성과의 만남이다. 이 계시가 완전하다는 사실이 지속되고 있는 계시 사건을 중단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전례 안에서 성서를 읽거나 들을 때, 우리는 기도나 삶, 성경 안에서 더 충만히 하느님을 만나도록 인도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교회의 표상을 사용하는 것을, 계시헌장은 ‘전에 말씀하신 하느님은 사랑하시는 당신 아들의 정배(淨配)와 끊임없는 대화를 유지하신다’(8) 고 단언한다.
‧이 ‘끊임없는 대화’는 믿는 이들의 공동체로 하여금 하느님의 계시를 새롭게 표현하는 교의를 만들게 한다. 이렇게 교의는 새로운 세대와 문화를 위해 계시와의 첫 만남을 다시 표현하기 위해 발전된다.
공의회는 이 그리스도교의 교의의 발전을 확실히 했다. ‘믿는 이들의 관상과 연구에 의해서, 혹은 그들이 체험하는 영적 사실들에 대한 깊은 이해에 의해서, 또는 주교의 직위를 계승하여 진리의 확실한 은사를 받은 이들의 설교에 의해서 그 이해가 깊어진다’(8). 그러므로 계시의 발전은 교회 교도권과 마찬가지로 믿는 이들의 살아 있는 체험에서 오는 것이다. 이 발전과 성전의 요소로서의 체험에 대한 확인은 그런 종류의 이야기는 현대주의라고 생각하는 두려움을 극복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현대 가톨릭 신학은 번영하게 되었다.
‧교회는 발전에 대한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계시라는 한 사건의 부분으로서 성경과 성전(聖傳)을 설명하고 접근한다. ‘성전과 성경은 교회에 위탁된 하느님 말씀의 거룩한 단일 위탁물이다’(10). 성경은 계시의 어떤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성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성전은 세기를 통하여 전해져 내려온 성경을 설명하는 것이다. ‘성경은 결함이 있기 때문에 성경의 완전한 의미와 내용을 찾아내기 위해 성전이 필요하다고 가톨릭은 말하지 않는다’.(버틀러, 위의 책)
한가지 예로서 삼위일체의 교의를 들 수 있겠다. 이 교의는 예수님의 말씀과 바오로의 편지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지만 한 분이신 하느님 안에 세 위격이시라는 명확한 진술은 그 후의 성전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성경과 성전을 하나로 묶어 이렇게 제시하는 것은 개신교와 대화를 강력히 촉진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계시에 대한 인격적이고 역동적인 견해는 성서의 해석에 있어서 역사 비평적 방법에 크게 힘입은 것이다 .이런 방법은 원서의 숨어 있는 깊은 뜻을 밝히고, 믿는 이들이 성서를 보다 깊이 있게 묵상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 헌장은 성서의 모든 말씀을 거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두 극단적인 사람들을 조종한다. 이 조종의 열쇠는 성서 저자의 의도를 이해하는 것이다. ‘진리는 역사체, 예언체, 시체(詩體), 그리고 그 외의 다른 문체에 있어서 달리 표현되기’(12) 때문이다.
헌장은 복음을 역사와 신학적 해석이 하나로 혼합된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물려받은 이야기를 직접적인 대화체로서가 아니라, ‘보다 깊이 숙고하고, 성령의 영감과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사건들을 체험함으로써 체득한’사실을 전해주었다. 이렇게 공의회는 이런 균형 있고 현대적인 접근을 통하여 성서를 연구하도록 장려해 왔다.
‧‘사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성 예로니모, 계시 25)라는 주장은 가톨릭 신자들이 성서를 가까이해야 한다는 공의회의 심각한 걱정을 반영하고 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성서를 기도하며 읽는 것은 모든 교회의 활동을 뒷받침하고, ‘영적 생활에 새로운 충격을 기대할 수 있기’(26)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