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

(1) 역사적 사건의 객관적 우위성
과거에는 (20c초까지) 예수론과 그리스도론을 구분했다. 이는 위로부터의 그리스도론,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을 강조한데서 생긴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라고 할 때 그리스도는 우리가 신앙을 통해서 만나고 제시되는 분을 나타내고 있고, 예수라고 할 때 예수는 역사적으로 팔레스틴에서 생활했던 분을 가리킨다. 그러면 신앙의 인식과 역사적 인식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그 관계는 이야기할 수 있는가? 어떤 인식이 그리스도론을 하는데 더 유익한가 쉽게 이야기할 수 없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이다.
먼저 역사적 사건의 객관적 우위성을 확인할 수 있다. 객관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론은 역사의 예수를 인식하고자 노력한다. 실제로 그리스도교 자체가 역사에서 출발했다.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을 지지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교는 역사적 종교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스도교는 한 개인, 한 공동체의 정신에서 태어나거나 어떤 사상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분명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나중에 구체적 인간적 존재를 취하고 구원업적을 성취한 한 완전한 인간에서부터 태어나게 된다. 역사 안에서 하느님이 이 세상에 태어난 사실 그 역사적 사건을 무시할 수 없다. 이러한 역사적 기원에서부터 그리스도교 선포를 분리시킬 수 없다. 그리스도교가 선포하는 모든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Bultmann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리스도교는 교의적이다 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신앙은 모두 이 교의 안에 근거하고 있다고도 말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이 먼저 있었고 이를 정립시키고 보다 올바로 보존하고 전달시키고 확인시키기 위해서 찾은 것이 종교적 교의형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교의에 대한 신앙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요구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신앙이고 예수도 당신 위격에 대한 신앙을 당시 사람들에게 요구한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질문하면서 그 대답, 즉 당신께 대한 신앙을 요구한다. 신앙의 본질적 방향은 현재적인 신앙,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이다. 따라서 참된 신앙은 그리스도의 메시지에 대한 믿음 뿐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다. 구체적으로 팔레스틴에서 태어나고 죽으시고 부활한 구세주에 대한 신앙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론은 역사적 예수의 삶에 따라서 그분의 신비를 이해하려는 방향을 취해야 한다. 역사의 예수께 대한 충실성, 이러한 신앙은 예수론과 그리스도론을 구분하지 않게 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신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믿는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선포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교 선포도 처음부터 역사의 예수를 선포하기 시작했다. 복음들은 실제로 일어난 사실에 기초한다. 그것을 기초로 신앙의 증거로 복음이 씌어졌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신앙인식의 주체적 우위성을 볼 수 있다. 주체적으로 볼 때, 즉 객관적으로 볼 때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이 타당하다고 본다면 주관적으로 볼 때는 위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이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주관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론을 시작하는 사람의 마음과 정신 안에서 그리스도론은 신앙 안에 출발점을 갖고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 그리스도에 대한 연구를 하게 하는 것은 바로 신앙이다. 신앙이 없을 때 그리스도에 대한 탐구를 열렬히 할 수 없고 하더라도 인간적인 방법으로 할 수밖에 없고 실제로 그리스도에 참된 이해, 삶의 목표를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니다.

(2) 신앙인식의 주체적 우위성
주관적으로 볼 때 신학에 대해서 탐구하는 사람은 자신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론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서 시작한다. Fides quaerens Intellectum(안셀모). 신앙은 지성을 추구하는 신앙, 즉 모든 신학은 신앙을 전제로 한다. 신자와 비신자는 그 출발점 자체가 다르다. 이러한 연구를 자극하는 것은 신앙이다. 복음 안에 내포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모든 역사적 진리를 연구하는 사람은 역사가가 아니라 신학자들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역사의 여러 인물들처럼 역사적 탐구의 대상만이 아니다. 왜냐하면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 관심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가 신앙의 의미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신앙은 역사적 탐구의 단순한 변론으로 볼 수 없다. 오히려 역사적 탐구의 원칙이 신앙이 되고 있다. 이렇게 자신의 탐구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신앙 안에서 하고 그럼으로써 신앙이 더욱 풍요롭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따라서 탐구하는 자의 주관적 관점에서 볼 때 단순히 역사적 탐구의 우위성을 전제로 할 수 없다. 신앙이 역사의 법칙에 따라서 인도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의 교회적 모습이 먼저 역사적 탐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론의 탐구를 인도해주는 것은 신앙의 역동성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사도 베드로가 사도단의 이름으로 예수께 대답한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로 개인적인 신앙뿐 아니라 그 자체가 교회의 신앙이다. 단순히 교회에 속해있다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내용 그들의 삶이 그리스챤 공동체에 개입되어 있고 공동체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를 통해서 자신을 풍요롭게 하면서 역사 안에서 발전된 신앙을 말한다.
이렇게 그리스도론을 자극하는 신앙의 역동성이 공동체적이라고 볼 때 개인신학자가 공동체의 신앙 전체를 대변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론에 관계되는 모든 방향과 모든 노선을 그려낼 수는 없다. 어떤 개인이 표현하는 그리스도론적 의견은 항상 부분적 특성을 갖게 마련이므로 다른 신학자들로부터 보완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론이나 신학안에서 많은 투쟁과 논쟁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위험스러운 것은 그 과정에서 내가 원하지도 않는 상황에서 더 극단적으로 치닫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확하지 않을 수가 있다.
이런 다양한 의견들 중에서 오늘날 교회가 신앙으로 믿고 있고 예수가 우리에게 계시하여 준 그리스도론적인 본질적인 내용을 찾아야 한다. 그럴때 우리는 여러 가지 다양한 신학적 이론에도 불구하고 일치점을 찾게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론의 다양한 이론은 바람직한 것이고 그 자체가 일치를 깨뜨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지침에서부터 격리되어 있어서는 안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신경, 교의적 형식 같은 정통적인 표현이나 학설이 탐구의 노력을 완화시켜서는 안된다. 비록 하나의 형식이 참되다 하더라도 신앙의 역동성을 모두 정화시킬 수는 없다. 신앙은 항상 최종적인 숙고를 요구한다. 새로운 탐구의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신비 자체가 그리스도의 신비를 표현하는 모든 인간적 표현을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형식들이 그리스도론을 고정시키거나 노력을 방해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론은 교의 안에 담겨져 있는 풍요함을 더 올바른 말로 이해해서 표현하고 교회를 초월하는 구원의 신비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명확하게 드러낼 목적도 있다.

(3) 신앙과 역사적 탐구
신앙과 역사적 탐구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객관적으로 볼 때는 역사적 탐구, 주관적으로 볼 때는 신앙의 우월성이 확인되고 있다. Pannenberg는 그리스도론의 과제를 이렇게 정의한다. “하느님께서 예수안에 당신 자신을 계시하셨다라는 말로 종합될 수 있는 그 의미를 연구하고 탐구하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초세기 그리스도교의 모든 확인은 역사에서 태어났다. 교회안에 형식화된 그리스도론적 여러 주장들 역시 마찬가지다. 따라서 그리스도론에 관계되는 모든 것은 역사안에 사신 예수의 빛에 의해서 밝혀져야만 한다. 따라서 역사의 종말인 부활을 기초로 해서 하느님과 예수의 일치, 아버지와 아들의 위격적 일치를 규정하고자 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역사가 예수의 신적 부자관계에 관한 증거를 역사가 제공해 주고 있다 라고 확인한다. 그는 역사에서 출발하여 모든 것을 분명하게 규정하고 증거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신앙에 의해서 고백된 하느님의 아들과 역사의 예수를 함께 반증할 수 있었다. 그처럼 역사의 탐구가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역사를 통한 신앙 확인에 대한 입증을 그러한 의미에서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다. 이러한 역사적 입증은 신앙에 의해서 확인된 모든 것이 역사적 탐구로 접근 가능하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역사적 탐구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는 역사적 탐구가 신앙의 목적에 대해서 결정하고 신앙에 대해서 역사적 탐구의 결론이 제공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신앙은 역사적 학문의 확실성보다도 더 커다란 확실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역사적 증거를 통해서 가장 커다란 보다 분명한 증거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지만 신앙은 역사적 탐구가 제공하는 확실성보다도 더 큰 확실성을 갖고 있다고 신앙인들은 알고 있다. 역사적 탐구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좌우될 수 있다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신앙은 역사 안에서 실현되고 있지만 역사를 초월한 하느님 계시의 일치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구체적으로 역사의 예수안에 드러났다. 따라서 하느님의 아들의 육화는 역사안의 개입을 통해서 이루어졌고 역사 안에 살으신 그분의 삶을 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예수의 삶은 모든 역사적 확인을 초월하는 하나의 현실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이 역사의 법칙 위에 유일하게 기반을 두고서 혹은 입증을 통해서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러나 신앙은 내가 믿는 하느님, 그리스도를 항상 탐구하고 밝히고자 노력한다. 따라서 구체적인 역사적 탐구를 요구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은 역사의 예수에 대한 신앙이다.
R.Wultmann의 경우 신앙의 그리스도 선포된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를 분리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처럼 신앙에서 모든 역사적 내용을 그 자체로 완전히 분리시킨다면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제거하는 것과 같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다른 신화적 존재처럼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신화에 기초하는 다른 종교와는 다르다. 역사 안에 성취된 구원적 사건 위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육화 그 자체가 하느님께서 인간 역사 안에 개입하셨음이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인간 자신의 존재론적인 분석 안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만을 보존하려 했다. 그래서 인간적인 체험에로 모든 그리스도교의 사건을 환원시킨다. 따라서 구원적 사건은 각자의 주관적 체험 안에서만 실현된다. 어찌보면 예수가 태어나고 선포하고 죽으시고 부활한 것의 사실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선포를 했고 그 선포된 메시지가 지금까지 지속되었고 인간을 구원에로 이끈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이 선포되었지만 객관적으로 실현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선포된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주관적인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따라서 K. Barth는 Bultmann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이러한 모습에 대해서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자신의 주관적인 믿음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고독한 자의 신학이다 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주관주의에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신다. 하느님이 되신 말씀은 객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신앙은 하느님과의 순수한 주관적인 내적인 관계만이 아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세상에 들어오시면서 참된 탈 신화화를 이룬다. 하느님의 사람들과 갖고 있는 구체적인 관계에 대한 표현이 될 수 없다. 모든 역사적 계시에 대한 외적 표현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신화는 인간적인 상상과 환상, 지적인 이론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신화는 하느님과 구체적인 구원역사안에서 일어난 구원업적에 대한 것을 묘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신화자체는 역사밖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역사 안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진 하느님의 개입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역사를 고찰할 때 구체적으로 하느님의 계시가 이루어졌고 육화를 통해서 충만하게 드러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는 신화의 포로가 된 인간을 해방시킨다. 역사안의 하느님의 아들의 개입은 지금까지의 모든 거짓 역사를 단죄한다. 어떤 것이 정말로 신화인지 그것을 드러낸다. 따라서 그리스도교가 다른 이교종교를 흡수한 것이 아니라 제거한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는 신화를 이용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르트는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거부하는 Bultmann은 오히려 더 정교한 신화에로 돌아갔다고 말한다 -철학적인 영지, 인간적 이론에 기인한-.
만일 신학이 그리스도로부터 성취된 업적을 보다 올바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예수가 존재했던 그대로 규명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러한 신앙은 역사적인 객관성에 도달하려는 노력을 자극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내가 믿는 그리스도와 객관적인 모습을 발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앙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스도론을 연구하는 사람의 사전의 준비로써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준비는 연구와 결과를 받아들이겠다는 특별한 관심을 내포한다. 신앙은 항상 지성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우리 존재의 하느님께 대한 대답이다. 그리스도를 이해했다면 반드시 행동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삶의 양식을 구성해야 한다. 그 연구와 결과를 받아들이겠다는 것은 그렇게 살고 생활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연구하는 결과와 삶이 일치하지 않을 때 갈등을 느낀다. 그리스도론적 탐구에 있어서 이런 신앙의 역동성은 신학을 하면서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위해서 중립지대로 되돌아가서 판단하고 싶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객관성을 더 잘 보존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신앙을 떠나서 중립지대에서 바라볼 수는 없다. 그것은 하나의 환상이고 착각이다. 인간의 지성이 어린 아이처럼 모든 것을 완전히 새롭게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다. 신앙의 확신에서부터 뒷걸음질쳐서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은 또 다른 영향을 받겠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연히 거기에서부터 출발해야만 하는 그리스도론 탐구의 기초를 스스로 제거하는 것과도 같다.
객관성에 대한 가장 올바른 보증은 신앙에 대한 마음의 준비이다. 신앙은 그 자체가 여러 진리중의 하나의 선택으로 될 때 문제가 된다. 우리가 택한 신앙은 그것을 위해서 일생을 바친 것이다. 이 신앙은 모든 진리에 대해서 개방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신앙은 역사적인 학문의 방법론에 따라서 객관적인 방법론을 항상 시도한다. 이 신앙은 성실성, 정직함을 존중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앙 안에서 객관적으로 연구하고 판단할 수 있다. 신앙은 우리가 절대적 진리라고 부르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다. 이 신앙은 역사적 탐구를 존중한다. 그래서 주관적으로 볼 때 위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이 대두된다. 이것이 신앙이 역사적 탐구의 결론을 규정하고 제한한다는 것은 아니다. 신앙이 역사를 대치하거나 규정할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역사의 교의화 안에도 그리스도론적 방법론이 존재할 수 없다. 항상 두 가지를 염두에 두고 존중하면서 하느님의 진리를 추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신앙의 역사적 탐구에서부터 무엇을 원하고 있는 것인가? 신앙은 내가 믿고 있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 그리스도가 역사적 탐구에 의해서 더 크게 분명하게 정확하게 나의 지성과 신앙을 비추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런 탐구는 자신이 믿는 동기를 더 잘 깨닫게 해준다. 신앙의 대상뿐 아니라 그 동기.. – 테이프 넘긴 부분이므로 강의 노트 참조해서 보충하시기 바랍니다 –
역사적 탐구덕분에 신앙은 예수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더 깊이 하게 된다. 특히 교회가 자신의 신앙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의 존재와 업적, 그분이 어떤 분이고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고 왜 그분께 신앙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이 바뀌어진다.
(4) 역사적 탐구와 교회의 조직화
신앙의 역동성이 이런 역사적 탐구를 요구한다. 이 말은 다른 말로 이러한 신앙의 역동성은 교의적 형식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단순히 성서적 분석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그 분석으로부터 나온 결론이 종합되고 그것이 어떻게 지금까지 이해되어왔는가 라는 최근의 종합이 필요하다. 따라서 성서 주석과 그리스도론과의 관계가 대두된다. 주석가들의 연구가 많이 있고 그 결론들을 종합하기조차도 어렵고 끊임없이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여러 주석가들이 제공하는 여러 해석들을 그냥 버려둘 수는 없다. 성서의 자료에 대해서 이론을 제시하고자 하는 사람은 항상 비판적으로 그것을 평가할 수밖에 없다. 이런 하느님, 그리스도에 대한 사변, 주석가들의 여러 이론에서 그리스도론은 어떤 위치를 취하게 되는 가가 복잡한 문제이다.
여기서 K. Rahner는 초월적 방법론을 제기한다. 초월적 그리스도론이다. 이것은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을 의미한다. 항상 존재하고 회피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인간적인 체험들, 그런 존재론적인 상황하에서 초월적 필연성을 강조한다. 즉 인간을 출발점으로 한다. 때문에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절대자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다. 하느님의 자유로운 통교를 받아들이고 그분을 찾고 있다. 이러한 인간의 공통된 희망으로부터 라너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연역한다. 하느님의 자기 계시, 통교 역사 안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죽음을 통해서 현 세상의 모든 미래를 포기했다는 것이다. 현세상의 모든 미래를 포기했지만 바로 그분 안에 하느님의 계시가 이루어졌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러한 하느님의 계시의 성취는 부활로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다. 초월적 그리스도론은 예수의 삶 안에서 이루어진 하느님의 계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이미 찾아진 것을 우리가 찾도록 인도한다. 이런 초월적 그리스도론은 절대자 구세주에 대한 신앙의 묘사에서부터 시작해서 신앙안에서 보존되어야 하는 것을 복음 Text에서 찾는데 가장 역사적인 면을 규정한다.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이지만 한편으로 신적 행위의 자유에 연결되어 있다. 물론 이런 것이 장점을 갖고 있지만 보는 시각에 따라서 단점도 지니고 있다. 이런 방법론을 받아들일 수가 있겠는가? 설득력을 갖고 있는가? 성서 Text에 대한 숙고 이전에 찾아지는 것 그것이 인간인가 하는 것이다. 신적 계획을 이해하기 위해서 성서 안에 담겨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인간의 공통된 초월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여기서 출발하여 하느님의 계시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거꾸로 인간존재 안에서 먼저 찾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참된 계시를 복음 안에서 찾고 다음에 인간존재의 의미를 비추기 위해서 복음 안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인간의 초월성을 강조하다 보니 인간 안에서 신적 구원계획의 초월성을 발견하려고 시도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 마음 안에서 그런 것을 갖고 있다 할지라고 모든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잘못하면 인간학을 신학으로 변형시킬 위험이 따른다. 그리스도론의 본질적 노선은 성서적 증거에서 결론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론의 과제는 우리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가톨릭 신앙이라고 받아들이는 확인에서부터 그 원천에까지 다시 소급되어야 한다. 거꾸로 말하면 역사 안에 살아 계신 예수에서부터 지금 교의적 형식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발전의 지속성을 고찰하게 된다. 그 뿐 아니라 그 가운데 여러 교부들의 신학적 전승의 발전을 고찰하고 특히 성서적 자료에 비추어 숙고하고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 특히 최근의 철학, 신학자들의 사상을 토대로 해서 현대 언어로써 그리스도론을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론과 주석학을 혼돈해서는 안된다. 신학자들은 교의적인 시도를 하면서 숙고와 추론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성서를 통해서 연역적인 과정을 거치지만 거기에 대한 숙고와 여러 추론을 하게 된다. 한편 이런 종합이 성서연구와의 지속성을 항상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성서와의 본질적인 관계를 보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론은 특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것, 그분의 존재양식과 의식, 현대철학이나 심리학을 빌려서 그리스도가 어떤 분으로 나타나는지 당신이 의도한 것은 무엇인지 규명하여야 할 과제를 갖고 있다. 물론 육화의 의미와 동기, 인류를 위한 그 의미를 규정하게 된다. 즉 구원업적의 전망 안에서 탐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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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1) 역사적 사건의 객관적 우위성
    과거에는 (20c초까지) 예수론과 그리스도론을 구분했다. 이는 위로부터의 그리스도론,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을 강조한데서 생긴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라고 할 때 그리스도는 우리가 신앙을 통해서 만나고 제시되는 분을 나타내고 있고, 예수라고 할 때 예수는 역사적으로 팔레스틴에서 생활했던 분을 가리킨다. 그러면 신앙의 인식과 역사적 인식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그 관계는 이야기할 수 있는가? 어떤 인식이 그리스도론을 하는데 더 유익한가 쉽게 이야기할 수 없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이다.
    먼저 역사적 사건의 객관적 우위성을 확인할 수 있다. 객관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론은 역사의 예수를 인식하고자 노력한다. 실제로 그리스도교 자체가 역사에서 출발했다.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을 지지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교는 역사적 종교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스도교는 한 개인, 한 공동체의 정신에서 태어나거나 어떤 사상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분명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나중에 구체적 인간적 존재를 취하고 구원업적을 성취한 한 완전한 인간에서부터 태어나게 된다. 역사 안에서 하느님이 이 세상에 태어난 사실 그 역사적 사건을 무시할 수 없다. 이러한 역사적 기원에서부터 그리스도교 선포를 분리시킬 수 없다. 그리스도교가 선포하는 모든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Bultmann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리스도교는 교의적이다 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신앙은 모두 이 교의 안에 근거하고 있다고도 말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이 먼저 있었고 이를 정립시키고 보다 올바로 보존하고 전달시키고 확인시키기 위해서 찾은 것이 종교적 교의형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교의에 대한 신앙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요구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신앙이고 예수도 당신 위격에 대한 신앙을 당시 사람들에게 요구한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질문하면서 그 대답, 즉 당신께 대한 신앙을 요구한다. 신앙의 본질적 방향은 현재적인 신앙,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이다. 따라서 참된 신앙은 그리스도의 메시지에 대한 믿음 뿐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다. 구체적으로 팔레스틴에서 태어나고 죽으시고 부활한 구세주에 대한 신앙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론은 역사적 예수의 삶에 따라서 그분의 신비를 이해하려는 방향을 취해야 한다. 역사의 예수께 대한 충실성, 이러한 신앙은 예수론과 그리스도론을 구분하지 않게 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신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믿는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선포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교 선포도 처음부터 역사의 예수를 선포하기 시작했다. 복음들은 실제로 일어난 사실에 기초한다. 그것을 기초로 신앙의 증거로 복음이 씌어졌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신앙인식의 주체적 우위성을 볼 수 있다. 주체적으로 볼 때, 즉 객관적으로 볼 때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이 타당하다고 본다면 주관적으로 볼 때는 위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이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주관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론을 시작하는 사람의 마음과 정신 안에서 그리스도론은 신앙 안에 출발점을 갖고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 그리스도에 대한 연구를 하게 하는 것은 바로 신앙이다. 신앙이 없을 때 그리스도에 대한 탐구를 열렬히 할 수 없고 하더라도 인간적인 방법으로 할 수밖에 없고 실제로 그리스도에 참된 이해, 삶의 목표를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니다.

    (2) 신앙인식의 주체적 우위성
    주관적으로 볼 때 신학에 대해서 탐구하는 사람은 자신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론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서 시작한다. Fides quaerens Intellectum(안셀모). 신앙은 지성을 추구하는 신앙, 즉 모든 신학은 신앙을 전제로 한다. 신자와 비신자는 그 출발점 자체가 다르다. 이러한 연구를 자극하는 것은 신앙이다. 복음 안에 내포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모든 역사적 진리를 연구하는 사람은 역사가가 아니라 신학자들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역사의 여러 인물들처럼 역사적 탐구의 대상만이 아니다. 왜냐하면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 관심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가 신앙의 의미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신앙은 역사적 탐구의 단순한 변론으로 볼 수 없다. 오히려 역사적 탐구의 원칙이 신앙이 되고 있다. 이렇게 자신의 탐구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신앙 안에서 하고 그럼으로써 신앙이 더욱 풍요롭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따라서 탐구하는 자의 주관적 관점에서 볼 때 단순히 역사적 탐구의 우위성을 전제로 할 수 없다. 신앙이 역사의 법칙에 따라서 인도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의 교회적 모습이 먼저 역사적 탐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론의 탐구를 인도해주는 것은 신앙의 역동성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사도 베드로가 사도단의 이름으로 예수께 대답한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로 개인적인 신앙뿐 아니라 그 자체가 교회의 신앙이다. 단순히 교회에 속해있다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내용 그들의 삶이 그리스챤 공동체에 개입되어 있고 공동체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를 통해서 자신을 풍요롭게 하면서 역사 안에서 발전된 신앙을 말한다.
    이렇게 그리스도론을 자극하는 신앙의 역동성이 공동체적이라고 볼 때 개인신학자가 공동체의 신앙 전체를 대변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론에 관계되는 모든 방향과 모든 노선을 그려낼 수는 없다. 어떤 개인이 표현하는 그리스도론적 의견은 항상 부분적 특성을 갖게 마련이므로 다른 신학자들로부터 보완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론이나 신학안에서 많은 투쟁과 논쟁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위험스러운 것은 그 과정에서 내가 원하지도 않는 상황에서 더 극단적으로 치닫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확하지 않을 수가 있다.
    이런 다양한 의견들 중에서 오늘날 교회가 신앙으로 믿고 있고 예수가 우리에게 계시하여 준 그리스도론적인 본질적인 내용을 찾아야 한다. 그럴때 우리는 여러 가지 다양한 신학적 이론에도 불구하고 일치점을 찾게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론의 다양한 이론은 바람직한 것이고 그 자체가 일치를 깨뜨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지침에서부터 격리되어 있어서는 안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신경, 교의적 형식 같은 정통적인 표현이나 학설이 탐구의 노력을 완화시켜서는 안된다. 비록 하나의 형식이 참되다 하더라도 신앙의 역동성을 모두 정화시킬 수는 없다. 신앙은 항상 최종적인 숙고를 요구한다. 새로운 탐구의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신비 자체가 그리스도의 신비를 표현하는 모든 인간적 표현을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형식들이 그리스도론을 고정시키거나 노력을 방해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론은 교의 안에 담겨져 있는 풍요함을 더 올바른 말로 이해해서 표현하고 교회를 초월하는 구원의 신비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명확하게 드러낼 목적도 있다.

    (3) 신앙과 역사적 탐구
    신앙과 역사적 탐구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객관적으로 볼 때는 역사적 탐구, 주관적으로 볼 때는 신앙의 우월성이 확인되고 있다. Pannenberg는 그리스도론의 과제를 이렇게 정의한다. “하느님께서 예수안에 당신 자신을 계시하셨다라는 말로 종합될 수 있는 그 의미를 연구하고 탐구하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초세기 그리스도교의 모든 확인은 역사에서 태어났다. 교회안에 형식화된 그리스도론적 여러 주장들 역시 마찬가지다. 따라서 그리스도론에 관계되는 모든 것은 역사안에 사신 예수의 빛에 의해서 밝혀져야만 한다. 따라서 역사의 종말인 부활을 기초로 해서 하느님과 예수의 일치, 아버지와 아들의 위격적 일치를 규정하고자 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역사가 예수의 신적 부자관계에 관한 증거를 역사가 제공해 주고 있다 라고 확인한다. 그는 역사에서 출발하여 모든 것을 분명하게 규정하고 증거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신앙에 의해서 고백된 하느님의 아들과 역사의 예수를 함께 반증할 수 있었다. 그처럼 역사의 탐구가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역사를 통한 신앙 확인에 대한 입증을 그러한 의미에서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다. 이러한 역사적 입증은 신앙에 의해서 확인된 모든 것이 역사적 탐구로 접근 가능하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역사적 탐구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는 역사적 탐구가 신앙의 목적에 대해서 결정하고 신앙에 대해서 역사적 탐구의 결론이 제공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신앙은 역사적 학문의 확실성보다도 더 커다란 확실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역사적 증거를 통해서 가장 커다란 보다 분명한 증거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지만 신앙은 역사적 탐구가 제공하는 확실성보다도 더 큰 확실성을 갖고 있다고 신앙인들은 알고 있다. 역사적 탐구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좌우될 수 있다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신앙은 역사 안에서 실현되고 있지만 역사를 초월한 하느님 계시의 일치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구체적으로 역사의 예수안에 드러났다. 따라서 하느님의 아들의 육화는 역사안의 개입을 통해서 이루어졌고 역사 안에 살으신 그분의 삶을 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예수의 삶은 모든 역사적 확인을 초월하는 하나의 현실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이 역사의 법칙 위에 유일하게 기반을 두고서 혹은 입증을 통해서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러나 신앙은 내가 믿는 하느님, 그리스도를 항상 탐구하고 밝히고자 노력한다. 따라서 구체적인 역사적 탐구를 요구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은 역사의 예수에 대한 신앙이다.
    R.Wultmann의 경우 신앙의 그리스도 선포된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를 분리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처럼 신앙에서 모든 역사적 내용을 그 자체로 완전히 분리시킨다면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제거하는 것과 같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다른 신화적 존재처럼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신화에 기초하는 다른 종교와는 다르다. 역사 안에 성취된 구원적 사건 위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육화 그 자체가 하느님께서 인간 역사 안에 개입하셨음이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인간 자신의 존재론적인 분석 안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만을 보존하려 했다. 그래서 인간적인 체험에로 모든 그리스도교의 사건을 환원시킨다. 따라서 구원적 사건은 각자의 주관적 체험 안에서만 실현된다. 어찌보면 예수가 태어나고 선포하고 죽으시고 부활한 것의 사실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선포를 했고 그 선포된 메시지가 지금까지 지속되었고 인간을 구원에로 이끈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이 선포되었지만 객관적으로 실현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선포된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주관적인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따라서 K. Barth는 Bultmann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이러한 모습에 대해서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자신의 주관적인 믿음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고독한 자의 신학이다 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주관주의에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신다. 하느님이 되신 말씀은 객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신앙은 하느님과의 순수한 주관적인 내적인 관계만이 아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세상에 들어오시면서 참된 탈 신화화를 이룬다. 하느님의 사람들과 갖고 있는 구체적인 관계에 대한 표현이 될 수 없다. 모든 역사적 계시에 대한 외적 표현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신화는 인간적인 상상과 환상, 지적인 이론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신화는 하느님과 구체적인 구원역사안에서 일어난 구원업적에 대한 것을 묘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신화자체는 역사밖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역사 안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진 하느님의 개입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역사를 고찰할 때 구체적으로 하느님의 계시가 이루어졌고 육화를 통해서 충만하게 드러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는 신화의 포로가 된 인간을 해방시킨다. 역사안의 하느님의 아들의 개입은 지금까지의 모든 거짓 역사를 단죄한다. 어떤 것이 정말로 신화인지 그것을 드러낸다. 따라서 그리스도교가 다른 이교종교를 흡수한 것이 아니라 제거한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는 신화를 이용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르트는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거부하는 Bultmann은 오히려 더 정교한 신화에로 돌아갔다고 말한다 -철학적인 영지, 인간적 이론에 기인한-.
    만일 신학이 그리스도로부터 성취된 업적을 보다 올바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예수가 존재했던 그대로 규명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러한 신앙은 역사적인 객관성에 도달하려는 노력을 자극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내가 믿는 그리스도와 객관적인 모습을 발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앙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스도론을 연구하는 사람의 사전의 준비로써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준비는 연구와 결과를 받아들이겠다는 특별한 관심을 내포한다. 신앙은 항상 지성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우리 존재의 하느님께 대한 대답이다. 그리스도를 이해했다면 반드시 행동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삶의 양식을 구성해야 한다. 그 연구와 결과를 받아들이겠다는 것은 그렇게 살고 생활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연구하는 결과와 삶이 일치하지 않을 때 갈등을 느낀다. 그리스도론적 탐구에 있어서 이런 신앙의 역동성은 신학을 하면서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위해서 중립지대로 되돌아가서 판단하고 싶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객관성을 더 잘 보존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신앙을 떠나서 중립지대에서 바라볼 수는 없다. 그것은 하나의 환상이고 착각이다. 인간의 지성이 어린 아이처럼 모든 것을 완전히 새롭게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다. 신앙의 확신에서부터 뒷걸음질쳐서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은 또 다른 영향을 받겠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연히 거기에서부터 출발해야만 하는 그리스도론 탐구의 기초를 스스로 제거하는 것과도 같다.
    객관성에 대한 가장 올바른 보증은 신앙에 대한 마음의 준비이다. 신앙은 그 자체가 여러 진리중의 하나의 선택으로 될 때 문제가 된다. 우리가 택한 신앙은 그것을 위해서 일생을 바친 것이다. 이 신앙은 모든 진리에 대해서 개방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신앙은 역사적인 학문의 방법론에 따라서 객관적인 방법론을 항상 시도한다. 이 신앙은 성실성, 정직함을 존중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앙 안에서 객관적으로 연구하고 판단할 수 있다. 신앙은 우리가 절대적 진리라고 부르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다. 이 신앙은 역사적 탐구를 존중한다. 그래서 주관적으로 볼 때 위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이 대두된다. 이것이 신앙이 역사적 탐구의 결론을 규정하고 제한한다는 것은 아니다. 신앙이 역사를 대치하거나 규정할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역사의 교의화 안에도 그리스도론적 방법론이 존재할 수 없다. 항상 두 가지를 염두에 두고 존중하면서 하느님의 진리를 추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신앙의 역사적 탐구에서부터 무엇을 원하고 있는 것인가? 신앙은 내가 믿고 있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 그리스도가 역사적 탐구에 의해서 더 크게 분명하게 정확하게 나의 지성과 신앙을 비추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런 탐구는 자신이 믿는 동기를 더 잘 깨닫게 해준다. 신앙의 대상뿐 아니라 그 동기.. – 테이프 넘긴 부분이므로 강의 노트 참조해서 보충하시기 바랍니다 –
    역사적 탐구덕분에 신앙은 예수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더 깊이 하게 된다. 특히 교회가 자신의 신앙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의 존재와 업적, 그분이 어떤 분이고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고 왜 그분께 신앙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이 바뀌어진다.
    (4) 역사적 탐구와 교회의 조직화
    신앙의 역동성이 이런 역사적 탐구를 요구한다. 이 말은 다른 말로 이러한 신앙의 역동성은 교의적 형식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단순히 성서적 분석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그 분석으로부터 나온 결론이 종합되고 그것이 어떻게 지금까지 이해되어왔는가 라는 최근의 종합이 필요하다. 따라서 성서 주석과 그리스도론과의 관계가 대두된다. 주석가들의 연구가 많이 있고 그 결론들을 종합하기조차도 어렵고 끊임없이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여러 주석가들이 제공하는 여러 해석들을 그냥 버려둘 수는 없다. 성서의 자료에 대해서 이론을 제시하고자 하는 사람은 항상 비판적으로 그것을 평가할 수밖에 없다. 이런 하느님, 그리스도에 대한 사변, 주석가들의 여러 이론에서 그리스도론은 어떤 위치를 취하게 되는 가가 복잡한 문제이다.
    여기서 K. Rahner는 초월적 방법론을 제기한다. 초월적 그리스도론이다. 이것은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을 의미한다. 항상 존재하고 회피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인간적인 체험들, 그런 존재론적인 상황하에서 초월적 필연성을 강조한다. 즉 인간을 출발점으로 한다. 때문에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절대자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다. 하느님의 자유로운 통교를 받아들이고 그분을 찾고 있다. 이러한 인간의 공통된 희망으로부터 라너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연역한다. 하느님의 자기 계시, 통교 역사 안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죽음을 통해서 현 세상의 모든 미래를 포기했다는 것이다. 현세상의 모든 미래를 포기했지만 바로 그분 안에 하느님의 계시가 이루어졌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러한 하느님의 계시의 성취는 부활로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다. 초월적 그리스도론은 예수의 삶 안에서 이루어진 하느님의 계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이미 찾아진 것을 우리가 찾도록 인도한다. 이런 초월적 그리스도론은 절대자 구세주에 대한 신앙의 묘사에서부터 시작해서 신앙안에서 보존되어야 하는 것을 복음 Text에서 찾는데 가장 역사적인 면을 규정한다.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이지만 한편으로 신적 행위의 자유에 연결되어 있다. 물론 이런 것이 장점을 갖고 있지만 보는 시각에 따라서 단점도 지니고 있다. 이런 방법론을 받아들일 수가 있겠는가? 설득력을 갖고 있는가? 성서 Text에 대한 숙고 이전에 찾아지는 것 그것이 인간인가 하는 것이다. 신적 계획을 이해하기 위해서 성서 안에 담겨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인간의 공통된 초월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여기서 출발하여 하느님의 계시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거꾸로 인간존재 안에서 먼저 찾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참된 계시를 복음 안에서 찾고 다음에 인간존재의 의미를 비추기 위해서 복음 안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인간의 초월성을 강조하다 보니 인간 안에서 신적 구원계획의 초월성을 발견하려고 시도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 마음 안에서 그런 것을 갖고 있다 할지라고 모든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잘못하면 인간학을 신학으로 변형시킬 위험이 따른다. 그리스도론의 본질적 노선은 성서적 증거에서 결론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론의 과제는 우리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가톨릭 신앙이라고 받아들이는 확인에서부터 그 원천에까지 다시 소급되어야 한다. 거꾸로 말하면 역사 안에 살아 계신 예수에서부터 지금 교의적 형식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발전의 지속성을 고찰하게 된다. 그 뿐 아니라 그 가운데 여러 교부들의 신학적 전승의 발전을 고찰하고 특히 성서적 자료에 비추어 숙고하고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 특히 최근의 철학, 신학자들의 사상을 토대로 해서 현대 언어로써 그리스도론을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론과 주석학을 혼돈해서는 안된다. 신학자들은 교의적인 시도를 하면서 숙고와 추론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성서를 통해서 연역적인 과정을 거치지만 거기에 대한 숙고와 여러 추론을 하게 된다. 한편 이런 종합이 성서연구와의 지속성을 항상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성서와의 본질적인 관계를 보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론은 특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것, 그분의 존재양식과 의식, 현대철학이나 심리학을 빌려서 그리스도가 어떤 분으로 나타나는지 당신이 의도한 것은 무엇인지 규명하여야 할 과제를 갖고 있다. 물론 육화의 의미와 동기, 인류를 위한 그 의미를 규정하게 된다. 즉 구원업적의 전망 안에서 탐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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