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가? 인성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가?
(1)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
이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너무 강조한 사실에서부터 기인한다. 예수의 신성이 확인되는 것은 좋으나 인성에 영향을 끼치면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 현대 그리스도론의 가장 긴급한 과제중의 하나는 그리스도의 모든 인간적인 존재를 고찰하는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의 인성, 역사의 예수 안에서 신성이 계시되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고 실제로 그러하다. 하느님이 아들에 대한 믿음 그것이 인간 마음에 내적인 비추심을 통해서 항상 부여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특히 예수 그리스도안에 이루어졌다. 역사적인 예수 안에 성취되었다.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에 대해서 아는 모든 것은 나자렛 예수의 말씀, 행위, 삶, 존재 사실에서부터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알기 위해서 이런 인간적 삶을 추구해야 한다. 예수에 대해서 인간적인 면을 추구할 때 인간이면서도 인간을 초월하는 신적 초월성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인성을 통해서 그것을 초월하시는 당신의 초월성을 계시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신앙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론의 기원에까지 역사의 예수 그것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끝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역사의 예수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즉 예수의 인성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며 안된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의 역사적 삶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것 즉 예수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다 라고 전제해 놓고 그 다음에 그분 안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발견하자는 의미는 아니다. 인간이 순수한 인간에게 제한되어 있는 모습이 있고 거기에서 출발하여 하느님께 올라가는 다음 단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인성 전체가 바로 신성을 계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신적 정체성을 알기 위해서 당신의 인간적 존재를 무시해서는 안된다. 그분의 인성을 강조하면서 초월적인 면을 제외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역사적 삶, 복음 안에서 그 위격의 신비를 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역사적 삶을 추구하면서도 그분의 역사성을 초월하는 위격의 신비가 인성을 연구하면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순수한 인간적인 삶으로만 연구할 때 그분의 인성은 의미없는 삶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위격의 신비를 추구하기 위해서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을 더 중요시해야 한다고 일부 학자들은 이야기한다.
(2) 위로부터의 그리스도론
그리스도론적인 연구가 현대에 특히 역사의 예수에서 출발하지만 위로부터의 출발점, 하향적 방향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하느님께 대한 위대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선행하고 있다. 이런 유다이즘에 있어서 본질적인 계시는 유일하신 하느님께 대한 것이었다. 유대 백성과 계약을 맺은 이 계약 속에서 하느님이 드러나는데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의 도래를 준비했다. 유대 유일신 사상의 출발점은 하느님 자신이었다. 따라서 하느님에서부터 사람이 되신 예수에로 나아가는 여정을 무시할 수 없다. 신약성서에서 이런 하향적 방향은 예수의 기원에 대한 숙고에서부터 시작한다. 특히 요한 복음 서론에서 나타난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로서 계시되었다. 사람의 아들의 도래가 전제하고 있는 신적 존재가 있다. 거기서부터 인간적 존재로의 과정을 필연적으로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론은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개입한 육화행위에 대해서 고찰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말씀이 육화하셨고 우리 가운데 거처하셨다는 것은 요한 복음 서론이 강조하고 있다. 필립비 2,6부터 나오는 그리스도론적 찬미가 안에서도 이런 노선이 나타나고 있다. 신적 조건에서 종의 조건으로 넘어가는 하향적 방향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스도론이 단지 아래로부터 고찰되는 것이라면 중요하지만 불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론이 추구해야 되는 것은 육화행위 자체 안에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게 하신 하느님의 의도를 항상 고려해야 한다. 바로 구원경륜의 신비가 여기에서 드러난다. 하향적인 방향은 하느님의 역동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하느님의 역동성을 염두에 둘 때 하느님께 대한 인간 편에서의 고정된 관념에서부터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다.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하느님과의 계약을 맺은 백성 가운데서 태어났다. 그분은 구원역사안에서 하느님 약속의 결실이며 완성으로 제시된다. 이런 인간을 향한 하향적 방향 안에서 인류 구원을 이루고자 하는 하느님의 사랑이 보다 완전하게 드러날 수 있다. 이런 사랑은 예수님의 지상적인 삶 안에서도 가장 강조되는 점이다. 예수의 지상 삶 안에서 이것이 보다 완전한 가치를 얻게 되는 것은 신적 사랑의 표현이고 하느님의 계시로써 하느님의 사랑이 나타나고 있다. 예수가 죄인들을 찾아 나서신 것처럼 죄인들을 부르시고 용서하시고 그들과 함께 있었던 것처럼 그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으로 나타날 때 더욱 하느님의 모습이, 그리스도의 신적 정체성이 분명하게 나타나게 된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을 향해서 내려온다. 인간의 차원에서 당신 자신을 낮추시고 그들과 결합하려 하신다. 즉 그리스도의 메시지의 본질을 구상하고 있다. 이것은 위로부터의 그리스도론 안에서 더욱 잘 설명될 수 있다. 이런 하느님의 역동성은 먼저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에로 나아가고 다음으로 인간에서부터 하느님에로 올라가게 된다. 이런 그리스도안에서 하느님의 움직임이 계시되고 인간을 부르시는 모습이 나타난다.

신성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가? 인성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가?
(1)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
이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너무 강조한 사실에서부터 기인한다. 예수의 신성이 확인되는 것은 좋으나 인성에 영향을 끼치면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 현대 그리스도론의 가장 긴급한 과제중의 하나는 그리스도의 모든 인간적인 존재를 고찰하는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의 인성, 역사의 예수 안에서 신성이 계시되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고 실제로 그러하다. 하느님이 아들에 대한 믿음 그것이 인간 마음에 내적인 비추심을 통해서 항상 부여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특히 예수 그리스도안에 이루어졌다. 역사적인 예수 안에 성취되었다.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에 대해서 아는 모든 것은 나자렛 예수의 말씀, 행위, 삶, 존재 사실에서부터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알기 위해서 이런 인간적 삶을 추구해야 한다. 예수에 대해서 인간적인 면을 추구할 때 인간이면서도 인간을 초월하는 신적 초월성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인성을 통해서 그것을 초월하시는 당신의 초월성을 계시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신앙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론의 기원에까지 역사의 예수 그것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끝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역사의 예수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즉 예수의 인성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며 안된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의 역사적 삶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것 즉 예수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다 라고 전제해 놓고 그 다음에 그분 안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발견하자는 의미는 아니다. 인간이 순수한 인간에게 제한되어 있는 모습이 있고 거기에서 출발하여 하느님께 올라가는 다음 단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인성 전체가 바로 신성을 계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신적 정체성을 알기 위해서 당신의 인간적 존재를 무시해서는 안된다. 그분의 인성을 강조하면서 초월적인 면을 제외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역사적 삶, 복음 안에서 그 위격의 신비를 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역사적 삶을 추구하면서도 그분의 역사성을 초월하는 위격의 신비가 인성을 연구하면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순수한 인간적인 삶으로만 연구할 때 그분의 인성은 의미없는 삶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위격의 신비를 추구하기 위해서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을 더 중요시해야 한다고 일부 학자들은 이야기한다.
(2) 위로부터의 그리스도론
그리스도론적인 연구가 현대에 특히 역사의 예수에서 출발하지만 위로부터의 출발점, 하향적 방향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하느님께 대한 위대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선행하고 있다. 이런 유다이즘에 있어서 본질적인 계시는 유일하신 하느님께 대한 것이었다. 유대 백성과 계약을 맺은 이 계약 속에서 하느님이 드러나는데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의 도래를 준비했다. 유대 유일신 사상의 출발점은 하느님 자신이었다. 따라서 하느님에서부터 사람이 되신 예수에로 나아가는 여정을 무시할 수 없다. 신약성서에서 이런 하향적 방향은 예수의 기원에 대한 숙고에서부터 시작한다. 특히 요한 복음 서론에서 나타난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로서 계시되었다. 사람의 아들의 도래가 전제하고 있는 신적 존재가 있다. 거기서부터 인간적 존재로의 과정을 필연적으로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론은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개입한 육화행위에 대해서 고찰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말씀이 육화하셨고 우리 가운데 거처하셨다는 것은 요한 복음 서론이 강조하고 있다. 필립비 2,6부터 나오는 그리스도론적 찬미가 안에서도 이런 노선이 나타나고 있다. 신적 조건에서 종의 조건으로 넘어가는 하향적 방향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스도론이 단지 아래로부터 고찰되는 것이라면 중요하지만 불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론이 추구해야 되는 것은 육화행위 자체 안에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게 하신 하느님의 의도를 항상 고려해야 한다. 바로 구원경륜의 신비가 여기에서 드러난다. 하향적인 방향은 하느님의 역동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하느님의 역동성을 염두에 둘 때 하느님께 대한 인간 편에서의 고정된 관념에서부터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다.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하느님과의 계약을 맺은 백성 가운데서 태어났다. 그분은 구원역사안에서 하느님 약속의 결실이며 완성으로 제시된다. 이런 인간을 향한 하향적 방향 안에서 인류 구원을 이루고자 하는 하느님의 사랑이 보다 완전하게 드러날 수 있다. 이런 사랑은 예수님의 지상적인 삶 안에서도 가장 강조되는 점이다. 예수의 지상 삶 안에서 이것이 보다 완전한 가치를 얻게 되는 것은 신적 사랑의 표현이고 하느님의 계시로써 하느님의 사랑이 나타나고 있다. 예수가 죄인들을 찾아 나서신 것처럼 죄인들을 부르시고 용서하시고 그들과 함께 있었던 것처럼 그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으로 나타날 때 더욱 하느님의 모습이, 그리스도의 신적 정체성이 분명하게 나타나게 된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을 향해서 내려온다. 인간의 차원에서 당신 자신을 낮추시고 그들과 결합하려 하신다. 즉 그리스도의 메시지의 본질을 구상하고 있다. 이것은 위로부터의 그리스도론 안에서 더욱 잘 설명될 수 있다. 이런 하느님의 역동성은 먼저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에로 나아가고 다음으로 인간에서부터 하느님에로 올라가게 된다. 이런 그리스도안에서 하느님의 움직임이 계시되고 인간을 부르시는 모습이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