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격 , 교회- 하느님 구원의 실현

 

하느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격




        교회란 역사 안에서의 하느님 구원의 실현이다. 확실히 그리스도의 육화와 인간 사이에서 역사하심에 의해서 하느님의 구원은 현실 세계에 실현되고 있다. 예언자가 대망했던 “때”는 지금 실현되어, 그리스도는 청중을 향해 때의 징표를 모르는 것을 책망한다(마르 1, 14). 사도들은 구약의 예언자와 의인들이 보기를 갈망했지만 보지 못했던 것을 본다. 그리스도의 도래와 함께 결정적인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된다는 것을 무시하고는 그리스도의 공생활, 설교, 기적의 참된 이해는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사람들 안에 시작된 하느님 나라는 많은 사람들이 그 현존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서 사람들의 기대에 반해 극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 시대의 유대인에게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현대인에게도 그러하고, 종말의 때까지도 언제나 그러할 것이다. 공관복음에서 보는 겨자씨, 밀과 가라지, 모르는 사이에 싹이 자라는 씨앗, 누룩 등의 비유들은 하느님 나라의 이러한 성격을 암시하고 있다.




        하느님 나라의 성장은 ‘하느님 능력에 의한’ 발전이 주된 특징을 이룬다. 위에 열거한 하느님 나라의 비유에서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식물의 성장과 같이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느님 나라는 인간의 협력을 필요로 하지만 인간적 노력만으로 획득되거나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구원이란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말씀과 업적과 현존으로서 드러난 하느님 나라는 교회의 시작이며 최종 목표로서 교회 신비의 보다 역사적이고 종말론적인 차원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 백성의 목적은 하느님 나라이니, 그 나라는 하느님께서 친히 이 땅에 건설하기 시작하셨고, 세말에 당신 친히 완성하실 때까지 계속 확장되어야 할 것이다”(교회헌장 9항).




        예수의 말씀과 업적과 인격을 통하여 세상에 도래한 하느님 나라가 현세의 교회와 동일시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현세에서 그리스도의 인간성에 근거를 두고 형성된 교회라는 백성을 통하여 작용한다. 달리 말해서 교회는 하느님 나라의 현세적 표현이고, 하느님 나라는 교회가 추구하는 이상이요 목적이라 할 수 있다. 교회는 ‘은총의 사건’인 하느님 나라를 담고 있는 구원의 성사이며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위한 도구인 것이다.




        교회는 공간적인 정지물이 아니라 시간 안에 끊임없이 우주와 더불어 진화한다. 현세에서 자기존재가 고정된 것이 아니고 우주의 종말까지 성장하고 마침내 최후의 완성에 이르도록 불리움을 받았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만백성 가운데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할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 마침내 이 사명이 완성되면 그 나라는 최고의 충만함에 도달할 것이다.




        이런 역사적 차원을 볼 때, 교회는 스스로 종말론적 자아의식을 가진다. 교회의 종말론적 자아의식은 교회 자신을 역동적으로, 또한 겸허하게 처신케한다. 그리스도의 승리, 즉 빠스카 신비의 승리는 이 ‘마지막 시기’에 이미 시작된 것이지만, 승리의 완결은 역사의 종점에서 모든 피조물이 새롭게 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간역사 안에서 승리하신 그리스도 현존의 표지인 교회도 성령의 강림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이르는 마지막 시대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현재의 교회는 완성된 교회가 아니라 최후의 완성을 향하여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전진하는 순례자의 입장이다(교회헌장 8항, 48-50항).




        교회가 현세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인간적인 조건을 면할 수가 없다. 지상의 순례자인 교회는 시공(時空)의 영향을 받으며 인간역사의 흥망성쇠와 밝음과 어둠 속을 거쳐가고 있다. 교회는 죄와 오류에서 완전히 격리된 것이 아니다. 이 백성의 역사 안에는 의인과 죄인이 공존하고 있기에 이 백성이 이룩한 업적이 전부 완전한 것도 아니고 최선의 것도 아니고 결정적인 것도 아님을 자각하고 있다. 구약의 백성을 잇는 신약의 백성인 교회는 항상 죄많은 백성이며 하느님의 용서가 필요한 공동체이다. 그리스도 친히 세우고 성령이 인도하는 교회는 그 기원과 본질에 있어서 지극히 거룩하지만 교회를 구성하는 인간들은 나약하여 죄에 떨어지기 쉽기 대문에 지상교회는 최후의 승리를 확신하고 기다리면서도 역사적 자취를 반성하고 불완전함을 인식하며 회개와 쇄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신약의 백성은 구약의 백성이 그러했듯이 거듭 반성하고 참회하고 회심하는 노력을 계속할 것이다(교회헌장 8항, 9항, 15항). 많은 약점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백성은 주님께 대한 근본적인 충실성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다. 왜냐하면 주께서 교회를 만민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일치의 성사로 세우셨고, 교회는 세기를 통하여 스스로 이 백성과 함께 계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4. 대조사회(對照社會)로서의 교회




        ‘교회’를 지칭하는 그리스어 ‘에클레시아’라는 말은 본시 ‘호출되어 소집된 자들의 회중(會衆)’을 뜻한다. 신약성서에서는 이 말이 ‘하느님 백성의 모임’, 즉 하느님에 의해 소집된 백성들의 회중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면서 교회를 지칭하는 말로 정착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교회에 속하는 신자들은 “하나로 불리웠고”(에페 41, 4) 더욱 정확히 ‘부르심에 의해서 거룩한 자’들이라는 자의식이 형성되어 있었다(로마 1, 7: 1고린 1, 2).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을 ‘성도(聖徒)’들이라고 지칭하였다(로마 15, 25-31: 1고린 1, 2). 사도 바오로에게 있어서도 ‘성도들’이란 교회 공동체와 동의어였다(로마 1, 7: 1고린 1, 2). 요컨대, 성성(聖性)은 이미 성도로 불린 이들을 뜻하는 ‘교회’라는 말 자체 안에 내포되어 있으며, 교회의 가장 기본적이고 강조되는 특성이었다고 볼 수 있다.




        교회 내에 어떤 성성이 있다면 그것은 거룩하신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다. 교회에 있어서 성성이란 무엇보다도 성부와 성령과 함께 거룩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를 역사 속에서 재현시키는 가운데에서 실현된다. 그들의 성덕은 하느님이 선사하신, 그리고 다른 모든 민족의 사회질서와는 첨예한 대조를 이루는 그런 사회질서를 백성이 참으로 실천하며 살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이것은 예수에게도 모든 행동의 자명한 배경이 되고 있다. 예수의 공동체는 하느님 나라의 사회질서를 구현하며 살아 갈 세말의 참 이스라엘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래서 교회는 초기부터 자신은 일반사회와는 구별되는 ‘대조사회(對照社會)라는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사실 하느님 백성은 단순히 한적한 벽지에서 구원을 대망하는 경건자들의 영적 공동체가 아니다. 하느님 백성은 온 실존으로 – 따라서 온 사회적 차원에서도 – 하느님의 선택과 소명을 의식하는 그런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거룩함의 요구는 순전히 윤리적인 면에 귀착시켜 사회적인 차원을 함몰시켜서는 안된다. 신약성서는 한 공동체의 신도들을 통틀어 ‘성도들’이라고 부르고 ‘거룩한 백성’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거룩하다”함은 “구별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것은 하나의 게토나 종교적인 자기해방이나 문화적이며 정신적인 고립에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동떨어져 병든 사회의 구조들에 맞서서 하느님에 의탁하여 실존하는 사회가 마땅히 실현해야 할 그런 다른 생활양식과 새로운 생활형태로 구별되는 것이다.




        하느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종말론적 전환을 이룩하였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 백성을 새로 창조하였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2고린 5, 17).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성성과 진리가 세계 안에서 궁극적으로 현존하게 된, 절대적으로 이타적이며 새로운 분이다. 그러므로 그의 말이 신봉되고 그의 진리에 기반을 둔 삶이 생활화되는 곳 어디서나, 이 세계 한가운데서 전혀 판이하고 새로운 것, 즉 진리의 거룩한 영역이 생겨나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역 안에서 생활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 지배 영역이 바로 교회이다. 그러므로 세례를 통해서 교회 안에 속하게 되는 사람은 내면의 새로운 변화를 맛보게되는데 이 변화는 개인에게만 머물지 않고 사회 차원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세상을 본뜨지 말고 정신을 다시 새롭게하여 여러분의 모습을 바꾸시오”(로마 12, 2). 오랜 습관 때문에 이런 성서구절이 대개는 극히 일방적으로 그리스도인 개인의 내적 쇄신이나 도덕적 무장이라는 방향에서 해석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서구절은 단순히 내적 자세의 변화나 새로운 동기 부여라는 개인적 차원에서 해석될 수 없다. 정신을 새롭게 하라는 것은 오히려 세상 한가운데 교회가 그리스도의 통치 영역으로서 펼쳐져 있는 거기서 새로운 창조를 일으켜 놓은 그런 세말론적 전환과 관련되어 있다. 이 새로운 창조는 비단 교회의 정신만이 아니라 교회의 몸, 교회의 모습 – 교회의 구조 – 에도 해당된다. 로마서 12장 2절이 말하는 듯은 공동체의 형태와 정신이 다른 사회의 형태와 정신에 적응되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길의 목표는 경건한 개인이 아니라 종말론적 의미에서의 하나요,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이다.




        물론 교회는 세상을 위한 교회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그 자신이 세상이 되어서는 안되고, 교회 본연의 모습을 간직해야 한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과업은 세상에 대한 대조사회로서, 형제애가 삶의 법칙이고 그리스도의 삶의 법칙인 그리스도의 통치영역으로서 건설되는 일이다. 바로 이 일을 교회가 행함으로써, 이교도 사회가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깨닫게 된다.






5. 시원교회의 모습




        앞에서는 신약성서에서 교회가 일반사회와 대조되는 거룩한 하느님의 백성으로 간주되고 있음이 드러났다. 그렇다면 교회의 일반 사화와의 대조 성격이 초대 교회 안에 어떻게 실천되었는가를 살펴보자.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되고 부활한 이후에 그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세상의 종말이 도래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하느님에 의한 새로운 구원의 공동생활을 시작한다. 유대인들, 이교인들, 자유인과 노예들, 남자와 여자들, 성인과 유약자들과의 차이가 엄격히 분리되었던 당시 사회 질서속에서 모든 벽과 선을 초월해서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함께 모여 생활하고 모두에게 하느님의 은사가 작용해서 각각 고유한 직무를 수행한다. 그리고 모든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지내려고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 주었다. 그들은 한 마음이 되어 날마다 성전에 모이고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사도 2, 14-46). 이들은 일반사회와는 다른 대조적인 생활 양식을 보여 주었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냈던 것이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보게 되었다. 주께서는 구원 받을 사람을 날마다 늘려주셔서 신도의 모임이 커갔다”(사도 2, 47).




        자유인과 노예인들이 서로 평등한 입장에서 형제 자매로 대하고, 배타적이었던 이민족들이 함께 모여 한 가족으로 생활했다. 예수를 통해서 발생한 이 사건은 단순히 혁명이라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부적합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통한 ‘새로운 세계의 역사적 돌입’이라는 말로밖에 적절하게 표현할 수 없겠다.




        초대 교회 신자들에 의해 생활화된 사랑은 아가페적 사랑이었다. 예수의 제자들은 바로 단지 존재하기 때문에 자신을 건네주는 몰아적 사랑으로서의 아가페에 관통되어 새로운 삶에 이르렀고, 이 삶을 나누도록 불림받았다. 그것은 배타적인 나 – 너의 사적인 차원을 넘어 집단과 민족, 종족이나 종교간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초월적 사랑이다.




        종말론적 하느님 나라로서의 교회는 복음을 믿는 사람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었으며, 당시 사회에서 제외되거나 종교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소외된 사람들을 조건없이 수용하였다. 당시 유대의 경직된 사회구조 안에서 예수는 자신의 제자공동체를 만인에게, 특히 나약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개방함으로써 하느님 나라가 돌입하는 곳에서는 어느 누구도, 인간의 눈에 보잘 것 없어 보이는 하찮은 어떤 사람이라도 결코 무가치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하느님 나라는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루가 18, 16). 그래서 특히 당시 사회질서에서 죄인시되었던 가난하고 병든 소외 계층이 이곳에서 구원을 체험하면서 희망찬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는 ‘종교적 실재’와 ‘사회적 실재’의 구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종교적 영역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실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 안에서 만인이 사랑받는 자녀라는 가르침이 이상적인 면에서도 그대로 통용되어 노예였던 사람들도 자유인과, 이교인은 유대인과 같은 위치에서 일을 처리하며 살았다. 여기서 동등성 그리고 일치된 모습들은 밖의 사회질서에서 엄격한 신분의 차이를 인정하고 지켜야 했던 노예와 주인과의 관계가 여기서는 형제의 관계로 변화되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예수를 만났던 사람들이 맛볼 수 있었던 참신한 것은 그들을 완전히 자유롭게 만든 아가페의 힘이었다. 여기서 다른 어느 형식적 권위 수행자에게서 느낄 수 없던 권위를 접했던 것이다. 아가페를 살고 증언하는 사람들에게서 범인(凡人)을 사로잡는 힘이 발해진다. 이 권위는 인간들을 구속하지 않고 자유롭게 봉사에로 부른다.




        초대 교회에서도 소위 지도권의 문제가 개입되엇다. 그 좋은 예가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청원과 관련된 본문에 나타나고 있다(마르 10, 35-45). 여기서 예수의 제자 공동체의 질서와 구조가 일반 사회의 질서와 구조와는 구별되는 대조성격이 더없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예수의 종말 – 복음 제자 공동체 안에는 지배 – 종속관계가 더 이상 존재해서는 안된다. 여기서는 첫째가 되려는 자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하고 다스리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초기 교회에서 지도자의 자리는 일반 사회에서처럼 군림하는 자리가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봉사하여 모든 이들에게 종이 되는 자리였다.




        예수는 이렇게 사회 질서를 뿌리채 의문에 처하게 하는 처신 때문에 지배층의 반발과 폭력에 의해 제거당한다. 그런데 예수 자신은 부당한 처신에 대해 마땅히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자신을 양도한다. 이런 외견상 무력한 처신, 권위가 하느님의 권위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 이야기할 때 전지전능하신 분 그리고 이 세상의 주님 혹은 왕으로 고백한다. 그런데 그분의 현실적 처신은 주님․왕과는 달리 드러나며, 그 절정이 십자가로 구체화된 것이다. 바로 자신을 십자가에 처형시키는 피지배적, 무력적 권위에 입각해서 교회의 권위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무력함이 지배적 폭력보다 더 강하다는 것이 제자들의 삶을 통해 확인된 것이다.




        바오로 사도도 자신이 사도적 전권을 부여받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지배자적 권위가 아니라 사랑과 온유로써 사람들을 대한다(1고린 4, 21). 그는 필레몬에게 명령할 수도 있었으나 사랑 때문에 명령 대신 그에게 청원한다(필레 1, 8-9). 그리고 그가 고린토에 있을 때에 고린토인과 심한 쟁론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지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의 행복을 위해서 여러분과 함께 일할 따름입니다”(2고린 1, 24).


        바오로가 이처럼, 신자들 위에 군림하고 명령하는 지배자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여러 서한들 형식이 증명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신자들을 확신시키려 하고 그들의 자발적인 동의를 구하려 노력한다. 그래서 자신의 교회로 하여금 그와 함께 결단을 내릴 수 있게 되기를 원하였다.




        바오로가 어떤 일을 지시할 때에는 단순한 지시만이 아니라 항상 지극히 인격적이고 진정한 차원의 뜻이 그 가운데 담겨 있다. 그리고 그가 함께 선교 활동에 종사한 협력자에 대해 동지로 대한다. 스승과 제자라든지 장상과 예하 사람의 관계가 아니라 협력자, 조력자, 동반자로 대우한다. 물론 이런 처신은 불확실성의 요인을 담고 있다. 그러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한 대화에 의해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고 이 합의는 한 개인의 일방적인 명령이 아니라 모두의 의견이 수렴된 내용이기에 자발적 성취 가능성이 증대된다.




        권력자들의 눈에는 그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신성시하는 기존 질서를 무시하고 새로운 질서를 사는 집단이 위협적, 반체제적 집단으로 보여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 때문에 초대 교회는 초기부터 경계의 대상집단으로 비추어지면서 로마 제국의 기본 질서를 붕괴할 위험 소인으로 간주되어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반대로 불의한 구조 안에서 소외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으로 비쳤고, 낡은 질서에서 새로운 질서에로 편입하고 거기서 구원을 체험하였다. 외부의 불신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의 생활을 하였다.




        이 시기의 교회는 외견상 초라한 규모에 머물러 있었고, 주위로부터 박해를 받는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외부 세계의 이질성, 박해 속에서도 좌절하거나 체념하지 않았다. 교회는 자신의 존재의 이타성, 구별성, 대조성을 명확히 의식하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약속된 그리고 부분적으로 성취된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기대하는 작은 무리로 인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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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격 , 교회- 하느님 구원의 실현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하느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격


            교회란 역사 안에서의 하느님 구원의 실현이다. 확실히 그리스도의 육화와 인간 사이에서 역사하심에 의해서 하느님의 구원은 현실 세계에 실현되고 있다. 예언자가 대망했던 “때”는 지금 실현되어, 그리스도는 청중을 향해 때의 징표를 모르는 것을 책망한다(마르 1, 14). 사도들은 구약의 예언자와 의인들이 보기를 갈망했지만 보지 못했던 것을 본다. 그리스도의 도래와 함께 결정적인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된다는 것을 무시하고는 그리스도의 공생활, 설교, 기적의 참된 이해는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사람들 안에 시작된 하느님 나라는 많은 사람들이 그 현존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서 사람들의 기대에 반해 극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 시대의 유대인에게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현대인에게도 그러하고, 종말의 때까지도 언제나 그러할 것이다. 공관복음에서 보는 겨자씨, 밀과 가라지, 모르는 사이에 싹이 자라는 씨앗, 누룩 등의 비유들은 하느님 나라의 이러한 성격을 암시하고 있다.


            하느님 나라의 성장은 ‘하느님 능력에 의한’ 발전이 주된 특징을 이룬다. 위에 열거한 하느님 나라의 비유에서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식물의 성장과 같이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느님 나라는 인간의 협력을 필요로 하지만 인간적 노력만으로 획득되거나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구원이란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말씀과 업적과 현존으로서 드러난 하느님 나라는 교회의 시작이며 최종 목표로서 교회 신비의 보다 역사적이고 종말론적인 차원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 백성의 목적은 하느님 나라이니, 그 나라는 하느님께서 친히 이 땅에 건설하기 시작하셨고, 세말에 당신 친히 완성하실 때까지 계속 확장되어야 할 것이다”(교회헌장 9항).


            예수의 말씀과 업적과 인격을 통하여 세상에 도래한 하느님 나라가 현세의 교회와 동일시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현세에서 그리스도의 인간성에 근거를 두고 형성된 교회라는 백성을 통하여 작용한다. 달리 말해서 교회는 하느님 나라의 현세적 표현이고, 하느님 나라는 교회가 추구하는 이상이요 목적이라 할 수 있다. 교회는 ‘은총의 사건’인 하느님 나라를 담고 있는 구원의 성사이며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위한 도구인 것이다.


            교회는 공간적인 정지물이 아니라 시간 안에 끊임없이 우주와 더불어 진화한다. 현세에서 자기존재가 고정된 것이 아니고 우주의 종말까지 성장하고 마침내 최후의 완성에 이르도록 불리움을 받았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만백성 가운데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할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 마침내 이 사명이 완성되면 그 나라는 최고의 충만함에 도달할 것이다.


            이런 역사적 차원을 볼 때, 교회는 스스로 종말론적 자아의식을 가진다. 교회의 종말론적 자아의식은 교회 자신을 역동적으로, 또한 겸허하게 처신케한다. 그리스도의 승리, 즉 빠스카 신비의 승리는 이 ‘마지막 시기’에 이미 시작된 것이지만, 승리의 완결은 역사의 종점에서 모든 피조물이 새롭게 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간역사 안에서 승리하신 그리스도 현존의 표지인 교회도 성령의 강림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이르는 마지막 시대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현재의 교회는 완성된 교회가 아니라 최후의 완성을 향하여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전진하는 순례자의 입장이다(교회헌장 8항, 48-50항).


            교회가 현세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인간적인 조건을 면할 수가 없다. 지상의 순례자인 교회는 시공(時空)의 영향을 받으며 인간역사의 흥망성쇠와 밝음과 어둠 속을 거쳐가고 있다. 교회는 죄와 오류에서 완전히 격리된 것이 아니다. 이 백성의 역사 안에는 의인과 죄인이 공존하고 있기에 이 백성이 이룩한 업적이 전부 완전한 것도 아니고 최선의 것도 아니고 결정적인 것도 아님을 자각하고 있다. 구약의 백성을 잇는 신약의 백성인 교회는 항상 죄많은 백성이며 하느님의 용서가 필요한 공동체이다. 그리스도 친히 세우고 성령이 인도하는 교회는 그 기원과 본질에 있어서 지극히 거룩하지만 교회를 구성하는 인간들은 나약하여 죄에 떨어지기 쉽기 대문에 지상교회는 최후의 승리를 확신하고 기다리면서도 역사적 자취를 반성하고 불완전함을 인식하며 회개와 쇄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신약의 백성은 구약의 백성이 그러했듯이 거듭 반성하고 참회하고 회심하는 노력을 계속할 것이다(교회헌장 8항, 9항, 15항). 많은 약점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백성은 주님께 대한 근본적인 충실성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다. 왜냐하면 주께서 교회를 만민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일치의 성사로 세우셨고, 교회는 세기를 통하여 스스로 이 백성과 함께 계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4. 대조사회(對照社會)로서의 교회


            ‘교회’를 지칭하는 그리스어 ‘에클레시아’라는 말은 본시 ‘호출되어 소집된 자들의 회중(會衆)’을 뜻한다. 신약성서에서는 이 말이 ‘하느님 백성의 모임’, 즉 하느님에 의해 소집된 백성들의 회중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면서 교회를 지칭하는 말로 정착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교회에 속하는 신자들은 “하나로 불리웠고”(에페 41, 4) 더욱 정확히 ‘부르심에 의해서 거룩한 자’들이라는 자의식이 형성되어 있었다(로마 1, 7: 1고린 1, 2).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을 ‘성도(聖徒)’들이라고 지칭하였다(로마 15, 25-31: 1고린 1, 2). 사도 바오로에게 있어서도 ‘성도들’이란 교회 공동체와 동의어였다(로마 1, 7: 1고린 1, 2). 요컨대, 성성(聖性)은 이미 성도로 불린 이들을 뜻하는 ‘교회’라는 말 자체 안에 내포되어 있으며, 교회의 가장 기본적이고 강조되는 특성이었다고 볼 수 있다.


            교회 내에 어떤 성성이 있다면 그것은 거룩하신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다. 교회에 있어서 성성이란 무엇보다도 성부와 성령과 함께 거룩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를 역사 속에서 재현시키는 가운데에서 실현된다. 그들의 성덕은 하느님이 선사하신, 그리고 다른 모든 민족의 사회질서와는 첨예한 대조를 이루는 그런 사회질서를 백성이 참으로 실천하며 살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이것은 예수에게도 모든 행동의 자명한 배경이 되고 있다. 예수의 공동체는 하느님 나라의 사회질서를 구현하며 살아 갈 세말의 참 이스라엘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래서 교회는 초기부터 자신은 일반사회와는 구별되는 ‘대조사회(對照社會)라는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사실 하느님 백성은 단순히 한적한 벽지에서 구원을 대망하는 경건자들의 영적 공동체가 아니다. 하느님 백성은 온 실존으로 – 따라서 온 사회적 차원에서도 – 하느님의 선택과 소명을 의식하는 그런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거룩함의 요구는 순전히 윤리적인 면에 귀착시켜 사회적인 차원을 함몰시켜서는 안된다. 신약성서는 한 공동체의 신도들을 통틀어 ‘성도들’이라고 부르고 ‘거룩한 백성’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거룩하다”함은 “구별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것은 하나의 게토나 종교적인 자기해방이나 문화적이며 정신적인 고립에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동떨어져 병든 사회의 구조들에 맞서서 하느님에 의탁하여 실존하는 사회가 마땅히 실현해야 할 그런 다른 생활양식과 새로운 생활형태로 구별되는 것이다.


            하느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종말론적 전환을 이룩하였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 백성을 새로 창조하였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2고린 5, 17).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성성과 진리가 세계 안에서 궁극적으로 현존하게 된, 절대적으로 이타적이며 새로운 분이다. 그러므로 그의 말이 신봉되고 그의 진리에 기반을 둔 삶이 생활화되는 곳 어디서나, 이 세계 한가운데서 전혀 판이하고 새로운 것, 즉 진리의 거룩한 영역이 생겨나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역 안에서 생활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 지배 영역이 바로 교회이다. 그러므로 세례를 통해서 교회 안에 속하게 되는 사람은 내면의 새로운 변화를 맛보게되는데 이 변화는 개인에게만 머물지 않고 사회 차원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세상을 본뜨지 말고 정신을 다시 새롭게하여 여러분의 모습을 바꾸시오”(로마 12, 2). 오랜 습관 때문에 이런 성서구절이 대개는 극히 일방적으로 그리스도인 개인의 내적 쇄신이나 도덕적 무장이라는 방향에서 해석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서구절은 단순히 내적 자세의 변화나 새로운 동기 부여라는 개인적 차원에서 해석될 수 없다. 정신을 새롭게 하라는 것은 오히려 세상 한가운데 교회가 그리스도의 통치 영역으로서 펼쳐져 있는 거기서 새로운 창조를 일으켜 놓은 그런 세말론적 전환과 관련되어 있다. 이 새로운 창조는 비단 교회의 정신만이 아니라 교회의 몸, 교회의 모습 – 교회의 구조 – 에도 해당된다. 로마서 12장 2절이 말하는 듯은 공동체의 형태와 정신이 다른 사회의 형태와 정신에 적응되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길의 목표는 경건한 개인이 아니라 종말론적 의미에서의 하나요,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이다.


            물론 교회는 세상을 위한 교회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그 자신이 세상이 되어서는 안되고, 교회 본연의 모습을 간직해야 한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과업은 세상에 대한 대조사회로서, 형제애가 삶의 법칙이고 그리스도의 삶의 법칙인 그리스도의 통치영역으로서 건설되는 일이다. 바로 이 일을 교회가 행함으로써, 이교도 사회가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깨닫게 된다.



    5. 시원교회의 모습


            앞에서는 신약성서에서 교회가 일반사회와 대조되는 거룩한 하느님의 백성으로 간주되고 있음이 드러났다. 그렇다면 교회의 일반 사화와의 대조 성격이 초대 교회 안에 어떻게 실천되었는가를 살펴보자.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되고 부활한 이후에 그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세상의 종말이 도래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하느님에 의한 새로운 구원의 공동생활을 시작한다. 유대인들, 이교인들, 자유인과 노예들, 남자와 여자들, 성인과 유약자들과의 차이가 엄격히 분리되었던 당시 사회 질서속에서 모든 벽과 선을 초월해서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함께 모여 생활하고 모두에게 하느님의 은사가 작용해서 각각 고유한 직무를 수행한다. 그리고 모든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지내려고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 주었다. 그들은 한 마음이 되어 날마다 성전에 모이고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사도 2, 14-46). 이들은 일반사회와는 다른 대조적인 생활 양식을 보여 주었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냈던 것이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보게 되었다. 주께서는 구원 받을 사람을 날마다 늘려주셔서 신도의 모임이 커갔다”(사도 2, 47).


            자유인과 노예인들이 서로 평등한 입장에서 형제 자매로 대하고, 배타적이었던 이민족들이 함께 모여 한 가족으로 생활했다. 예수를 통해서 발생한 이 사건은 단순히 혁명이라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부적합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통한 ‘새로운 세계의 역사적 돌입’이라는 말로밖에 적절하게 표현할 수 없겠다.


            초대 교회 신자들에 의해 생활화된 사랑은 아가페적 사랑이었다. 예수의 제자들은 바로 단지 존재하기 때문에 자신을 건네주는 몰아적 사랑으로서의 아가페에 관통되어 새로운 삶에 이르렀고, 이 삶을 나누도록 불림받았다. 그것은 배타적인 나 – 너의 사적인 차원을 넘어 집단과 민족, 종족이나 종교간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초월적 사랑이다.


            종말론적 하느님 나라로서의 교회는 복음을 믿는 사람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었으며, 당시 사회에서 제외되거나 종교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소외된 사람들을 조건없이 수용하였다. 당시 유대의 경직된 사회구조 안에서 예수는 자신의 제자공동체를 만인에게, 특히 나약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개방함으로써 하느님 나라가 돌입하는 곳에서는 어느 누구도, 인간의 눈에 보잘 것 없어 보이는 하찮은 어떤 사람이라도 결코 무가치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하느님 나라는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루가 18, 16). 그래서 특히 당시 사회질서에서 죄인시되었던 가난하고 병든 소외 계층이 이곳에서 구원을 체험하면서 희망찬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는 ‘종교적 실재’와 ‘사회적 실재’의 구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종교적 영역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실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 안에서 만인이 사랑받는 자녀라는 가르침이 이상적인 면에서도 그대로 통용되어 노예였던 사람들도 자유인과, 이교인은 유대인과 같은 위치에서 일을 처리하며 살았다. 여기서 동등성 그리고 일치된 모습들은 밖의 사회질서에서 엄격한 신분의 차이를 인정하고 지켜야 했던 노예와 주인과의 관계가 여기서는 형제의 관계로 변화되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예수를 만났던 사람들이 맛볼 수 있었던 참신한 것은 그들을 완전히 자유롭게 만든 아가페의 힘이었다. 여기서 다른 어느 형식적 권위 수행자에게서 느낄 수 없던 권위를 접했던 것이다. 아가페를 살고 증언하는 사람들에게서 범인(凡人)을 사로잡는 힘이 발해진다. 이 권위는 인간들을 구속하지 않고 자유롭게 봉사에로 부른다.


            초대 교회에서도 소위 지도권의 문제가 개입되엇다. 그 좋은 예가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청원과 관련된 본문에 나타나고 있다(마르 10, 35-45). 여기서 예수의 제자 공동체의 질서와 구조가 일반 사회의 질서와 구조와는 구별되는 대조성격이 더없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예수의 종말 – 복음 제자 공동체 안에는 지배 – 종속관계가 더 이상 존재해서는 안된다. 여기서는 첫째가 되려는 자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하고 다스리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초기 교회에서 지도자의 자리는 일반 사회에서처럼 군림하는 자리가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봉사하여 모든 이들에게 종이 되는 자리였다.


            예수는 이렇게 사회 질서를 뿌리채 의문에 처하게 하는 처신 때문에 지배층의 반발과 폭력에 의해 제거당한다. 그런데 예수 자신은 부당한 처신에 대해 마땅히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자신을 양도한다. 이런 외견상 무력한 처신, 권위가 하느님의 권위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 이야기할 때 전지전능하신 분 그리고 이 세상의 주님 혹은 왕으로 고백한다. 그런데 그분의 현실적 처신은 주님․왕과는 달리 드러나며, 그 절정이 십자가로 구체화된 것이다. 바로 자신을 십자가에 처형시키는 피지배적, 무력적 권위에 입각해서 교회의 권위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무력함이 지배적 폭력보다 더 강하다는 것이 제자들의 삶을 통해 확인된 것이다.


            바오로 사도도 자신이 사도적 전권을 부여받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지배자적 권위가 아니라 사랑과 온유로써 사람들을 대한다(1고린 4, 21). 그는 필레몬에게 명령할 수도 있었으나 사랑 때문에 명령 대신 그에게 청원한다(필레 1, 8-9). 그리고 그가 고린토에 있을 때에 고린토인과 심한 쟁론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지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의 행복을 위해서 여러분과 함께 일할 따름입니다”(2고린 1, 24).

            바오로가 이처럼, 신자들 위에 군림하고 명령하는 지배자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여러 서한들 형식이 증명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신자들을 확신시키려 하고 그들의 자발적인 동의를 구하려 노력한다. 그래서 자신의 교회로 하여금 그와 함께 결단을 내릴 수 있게 되기를 원하였다.


            바오로가 어떤 일을 지시할 때에는 단순한 지시만이 아니라 항상 지극히 인격적이고 진정한 차원의 뜻이 그 가운데 담겨 있다. 그리고 그가 함께 선교 활동에 종사한 협력자에 대해 동지로 대한다. 스승과 제자라든지 장상과 예하 사람의 관계가 아니라 협력자, 조력자, 동반자로 대우한다. 물론 이런 처신은 불확실성의 요인을 담고 있다. 그러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한 대화에 의해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고 이 합의는 한 개인의 일방적인 명령이 아니라 모두의 의견이 수렴된 내용이기에 자발적 성취 가능성이 증대된다.


            권력자들의 눈에는 그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신성시하는 기존 질서를 무시하고 새로운 질서를 사는 집단이 위협적, 반체제적 집단으로 보여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 때문에 초대 교회는 초기부터 경계의 대상집단으로 비추어지면서 로마 제국의 기본 질서를 붕괴할 위험 소인으로 간주되어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반대로 불의한 구조 안에서 소외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으로 비쳤고, 낡은 질서에서 새로운 질서에로 편입하고 거기서 구원을 체험하였다. 외부의 불신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의 생활을 하였다.


            이 시기의 교회는 외견상 초라한 규모에 머물러 있었고, 주위로부터 박해를 받는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외부 세계의 이질성, 박해 속에서도 좌절하거나 체념하지 않았다. 교회는 자신의 존재의 이타성, 구별성, 대조성을 명확히 의식하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약속된 그리고 부분적으로 성취된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기대하는 작은 무리로 인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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