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은총 이해: 구약 성서-하느님의 섭리(하)

 

은총의 필요성의 점진적 계시   


        일부 학자들은 구약성서 전체의 의미가 은총이라는 단어와 동일한 것임을 발견하는 것을 과제로 삼고 있다. 철학적 측면에서 이러한 연구는 필수불가결하다. 그러나 신학적인 입장에서 은총의 개념은 그리스도교적 본질이라는 사실은 늘 변함없이 고정되어 있다. 다른 한편 펠라지아니즘을 거슬러 논쟁하는 가운데 혹은 펠라니아즘으로부터 유래하는 오류와 대항하는 가운데 교회 교부들과 스콜라 신학자들은 실제로 그들이 담고 있는 것보다 구약성서로부터 더 많은 것을 이끌어 내어 묘사하고자 시도하였다. 예컨대 아우구스티노는 잠언 8, 35(나를 얻으면 생명을 얻고 야훼의 은총을 얻는다)이나 시편 58, 11(misericordia eius praeveiniet me:나에게 오는 사람은 자비를 얻는다: 과연 착한 사람이 상을 받는구나 하느님이 계셔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구나‘ 하게 하소서)과 같은 문헌을 은총의 유래와 필요성을 분명하게 증언하는 것으로 발견하고 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구약성서 전체를 그리스도교의 은총 개념을 위한 점진적 준비로 이해하고 있다. 은총이란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 작용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하느님의 도우심이라는 개념을 위해서도 구약성서는 점진적 준비를 마련하고 있다. 인간의 승화된 운명이 점점 분명하게 되고 호의적이 되는 만큼 하느님께 요구되는 성실성도 점점 더 요구되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우리 안에 죄의 힘에 대해서, 그리고 율법을 지키는데 인간의 무력함을 더욱 잘 알게되는 만큼 하느님의 도움이 절실하다는 것을 더욱 잘 이해하게 된다. 시편 119는 그러한 깨달음이 성숙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본보기이다. 시편작가들이 율법 찬양에서 토라나 전례적 준수에 관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시에 대해 심사숙고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매우 드물게 시편 안에서 그처럼 순수한 영성을 발견한다. 이와같은 태도는 후기 시대의 좁게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경향과는 매우 낯선 것이다. 그것은 복음의 실제적 자유를 향하여 큰 걸음을 보여주고 있다”(Robert). 아우구스티노의 은총에 관한 그의 전체적 가르침의 근거를 발견하고 있는 이 시편은 충실한 영혼이 하느님께 율법의 이해를 주시기를 청하고 있음을 보여준다(34). 그의 눈을 열어주시기를 청한다(18). 우리는 이미 사도 바울로의 목소리를 들은 바 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은총만이 계약을 읽으면서 그 뜻을 헤아릴 수 있다(2 코린 3, 14).


        그러나 문자와 정신 사이의 갈등은 더욱 뿌리깊다. 단순히 율법을 보존하는 것은 삶의 내재적 원리를 위해 요구된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느님의 법에 대한 배반으로 얼룩져 있다. 율법은 거룩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 스스로는 그것을 완성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이 로마 7장에서 그러한 사실을 비륵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우리들 각자가 그렇게 살기 전에 이스라엘이 그렇게 살았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귀양이라는 처벌 이후 갑자기 은총의 법에 대한 신비로운 예언이 선언되고 있다. 그러한 바울로의 가르침은 이어서 아우구스틴의 문자와 정신의 분석에서 연장되고 있다. 아퀴나스도 구약의 법과 신약의 법에 대해서 새로운 가르침을 주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에제키엘 예언으로부터 발전된 것이다. 소진할 수 없는 하느님의 자비에도 불구하고 유다인들은 반항하였고 율법 준수를 거부하였다. 그래서 하느님은 색바랜 과거의 업적들 때문에 또다시 기적을 수행하신다. 진정한 기적은 백성은 마음으로부터 변화시키는 은총이다. 내적 행위에 의해서 그분은 그의 백성들에게 자유롭게 율법을 준수하도록 하신다.


        “새 마음을 넣어 주며 새 기운을 불어 넣어 주리라. 너희 몸에서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 주리라. 나의 기운을 너희 속에 넣어 주리니, 그리되면 너희는 내가 세워준 규정을 따라 살 수 있고 나에게서 받은 법도를 실천할 수 있게 되리라.”(에제 36, 26-28).


        은총이라는 말은 여기서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은총의 신학이 이미 힘있게 계시되고 있다. 그리이스적 사고 방식에서 하느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 사이에 이율배반은 이제 새로운 차원으로 넘어가고 있다. 즉 인간의 심리적이고 초자연적 역사의 차원으로 넘어가고 있다. 하느님의 계획이라는 노선이 초점으로 부각되기 시작한다. 모든 창조물들이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로마 8, 22). 인간의 역사는 점차적으로 모든 창조 위에 행사하시는 하느님의 영의 역사이다. 율법은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에게로 이끄는 후원자로 변신한다(갈라 3, 24).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통하여 의화된다. 인간은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로마 5, 1; 7, 6). 그 안에 사는 성령 때문에 그를 율법에 의해서 명령된 일들을 자유 안에서 수행할 수 있게 한다(로마 8, 5). 그러나 이러한 계시는 유일하고 첫 번째가 되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지 않고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갈라 4,4; 히브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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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uest 님의 말:

     

    은총의 필요성의 점진적 계시   

            일부 학자들은 구약성서 전체의 의미가 은총이라는 단어와 동일한 것임을 발견하는 것을 과제로 삼고 있다. 철학적 측면에서 이러한 연구는 필수불가결하다. 그러나 신학적인 입장에서 은총의 개념은 그리스도교적 본질이라는 사실은 늘 변함없이 고정되어 있다. 다른 한편 펠라지아니즘을 거슬러 논쟁하는 가운데 혹은 펠라니아즘으로부터 유래하는 오류와 대항하는 가운데 교회 교부들과 스콜라 신학자들은 실제로 그들이 담고 있는 것보다 구약성서로부터 더 많은 것을 이끌어 내어 묘사하고자 시도하였다. 예컨대 아우구스티노는 잠언 8, 35(나를 얻으면 생명을 얻고 야훼의 은총을 얻는다)이나 시편 58, 11(misericordia eius praeveiniet me:나에게 오는 사람은 자비를 얻는다: 과연 착한 사람이 상을 받는구나 하느님이 계셔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구나‘ 하게 하소서)과 같은 문헌을 은총의 유래와 필요성을 분명하게 증언하는 것으로 발견하고 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구약성서 전체를 그리스도교의 은총 개념을 위한 점진적 준비로 이해하고 있다. 은총이란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 작용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하느님의 도우심이라는 개념을 위해서도 구약성서는 점진적 준비를 마련하고 있다. 인간의 승화된 운명이 점점 분명하게 되고 호의적이 되는 만큼 하느님께 요구되는 성실성도 점점 더 요구되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우리 안에 죄의 힘에 대해서, 그리고 율법을 지키는데 인간의 무력함을 더욱 잘 알게되는 만큼 하느님의 도움이 절실하다는 것을 더욱 잘 이해하게 된다. 시편 119는 그러한 깨달음이 성숙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본보기이다. 시편작가들이 율법 찬양에서 토라나 전례적 준수에 관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시에 대해 심사숙고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매우 드물게 시편 안에서 그처럼 순수한 영성을 발견한다. 이와같은 태도는 후기 시대의 좁게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경향과는 매우 낯선 것이다. 그것은 복음의 실제적 자유를 향하여 큰 걸음을 보여주고 있다”(Robert). 아우구스티노의 은총에 관한 그의 전체적 가르침의 근거를 발견하고 있는 이 시편은 충실한 영혼이 하느님께 율법의 이해를 주시기를 청하고 있음을 보여준다(34). 그의 눈을 열어주시기를 청한다(18). 우리는 이미 사도 바울로의 목소리를 들은 바 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은총만이 계약을 읽으면서 그 뜻을 헤아릴 수 있다(2 코린 3, 14).

            그러나 문자와 정신 사이의 갈등은 더욱 뿌리깊다. 단순히 율법을 보존하는 것은 삶의 내재적 원리를 위해 요구된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느님의 법에 대한 배반으로 얼룩져 있다. 율법은 거룩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 스스로는 그것을 완성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이 로마 7장에서 그러한 사실을 비륵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우리들 각자가 그렇게 살기 전에 이스라엘이 그렇게 살았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귀양이라는 처벌 이후 갑자기 은총의 법에 대한 신비로운 예언이 선언되고 있다. 그러한 바울로의 가르침은 이어서 아우구스틴의 문자와 정신의 분석에서 연장되고 있다. 아퀴나스도 구약의 법과 신약의 법에 대해서 새로운 가르침을 주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에제키엘 예언으로부터 발전된 것이다. 소진할 수 없는 하느님의 자비에도 불구하고 유다인들은 반항하였고 율법 준수를 거부하였다. 그래서 하느님은 색바랜 과거의 업적들 때문에 또다시 기적을 수행하신다. 진정한 기적은 백성은 마음으로부터 변화시키는 은총이다. 내적 행위에 의해서 그분은 그의 백성들에게 자유롭게 율법을 준수하도록 하신다.

            “새 마음을 넣어 주며 새 기운을 불어 넣어 주리라. 너희 몸에서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 주리라. 나의 기운을 너희 속에 넣어 주리니, 그리되면 너희는 내가 세워준 규정을 따라 살 수 있고 나에게서 받은 법도를 실천할 수 있게 되리라.”(에제 36, 26-28).

            은총이라는 말은 여기서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은총의 신학이 이미 힘있게 계시되고 있다. 그리이스적 사고 방식에서 하느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 사이에 이율배반은 이제 새로운 차원으로 넘어가고 있다. 즉 인간의 심리적이고 초자연적 역사의 차원으로 넘어가고 있다. 하느님의 계획이라는 노선이 초점으로 부각되기 시작한다. 모든 창조물들이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로마 8, 22). 인간의 역사는 점차적으로 모든 창조 위에 행사하시는 하느님의 영의 역사이다. 율법은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에게로 이끄는 후원자로 변신한다(갈라 3, 24).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통하여 의화된다. 인간은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로마 5, 1; 7, 6). 그 안에 사는 성령 때문에 그를 율법에 의해서 명령된 일들을 자유 안에서 수행할 수 있게 한다(로마 8, 5). 그러나 이러한 계시는 유일하고 첫 번째가 되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지 않고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갈라 4,4; 히브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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