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아레스주의 [한] ~主義 [영] Suarezianism

스페인의 예수회 신학자요 저술가이며 베네딕토 4세 교황으로부터 ‘우수박사'(Doctor Eximius)칭호를 받은 프란치스코 수아레스(Francisco Suarez, 1548~1617)의 신학체계. 수아레스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원칙에 입각해서 독자적인 학설을 전개하였다. 그의 논설의 특징은, 사용한 자료를 많이 인용하고, 교설(敎說)을 전개함에 있어 그 역사를 중요한 요인으로서 강조한 점이다. 수아레스학설에서는, 본질과 실재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의 속에 내재하며, 가능유(可能有)와 현실유(現實有)로 구별되어 있지 않다. 지성은 개체(個體)에 대해 일종의 타고난 직감(直感)을 지니고 있다. 제1질료는, 이것을 순전한 가능유로 해석한 토마스의 경우보다도 현실성을 갖고 있다. 개체화의 원리는 질료가 아니라, 이 존재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은총과 자유의지의 관계에 대해, 수아레스학설은 ‘상응주의'(congruism)로서 알려져 있는 입장을 취하고, 바네스학설(Bannezianism)이라 불리는 토마스의 학설에서보다는 인간의 자유를 강조하였다. 수아레스가 하느님에게서 부여받은 왕권(王權)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근대 그리스도교 철학자들 사이에서 전개되어온 자연권, 만민법(law of nations), 헌법에 관한 철학의 원천임이 인정되고 있다. 수아레스의 원칙에 의하면, 국가에 있어서 통치권은 하느님의 의지가 그 기원(起源)이다. 그러나 누가 이 권력을 행사하느냐 하는 것은 신약시대 이래로 백성의 결정에 의해서 제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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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한] 修院 [관련] 수도원

수도원(修道院)의 옛말. ⇒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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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가톨릭대학 [한] 水原~大學 [영] Suwon Catholic College

경기도 화성군 봉담면 왕림리 소재의 신학대학. 사제 부족, 성소 증가, 외방선교활동 전개 등 여러 가지 여건으로 가톨릭대학, 대건신학대학, 선목신학대학에 이은 제4의 신학대학 설립의 필요성이 제기된 1982년 춘계주교회의에서 이 대학의 설립이 결정되었고, 한국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맞아 1984년 3월 개교하였다. 주보성인 정하상(丁夏祥, 바오로)의 사상을 계승하여 민족을 구원하고, 진리가 다스리는 사회를 건설할 가톨릭 성직자의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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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한] 水原敎區

한강 이남의 경기도 지역을 관할하는 교구. 4.19혁명 이후 한국 교회는 날로 발전하여, 1963년 10월 7일에 서울대교구의 일부지방을 분할하여, 수원교구(水原敎區)를 설정함과 아울러,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C.C.K)의 사무국장이던 윤공희(尹恭熙) 신부가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이어 그 해 10월 12일에 성성식(成聖式)을 가진 윤 주교는, 1967년 서울 대교구장이던 노기남(盧基南) 대주교가 은퇴하자, 약 1년 동안 서울 대교구장 서리를 겸임하면서, 수원교구 발전을 위해 헌신하였다. 1973년에 윤공희 주교가 대주교로 승품되어 광주 대교구장(光州大敎區長)으로 전임되었고, 그 후임으로 김남수(金南洙) 주교가 1974년 10월 5일에 제2대 교구장으로 취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원교구 관할구역은 수원시(水原市), 성남시(城南市), 안양시(安養市), 광명시(光明市), 반월시(半月市), 송탄시(松炭市)와 경기도 화성(華城), 시흥(詩興), 평택(平澤), 여주(驪州), 광주(廣州), 양평(楊平), 이천(利川), 용인(龍仁), 안성(安城)의 9개 군(郡) 5,371㎢에 이르고 있는데, 교구 내에는 안성의 미리내, 안양의 수리산, 여주의 주어사(走魚寺), 광주의 천진암(天眞菴) 등 한국 천주교회의 전사(前史) 또는 순교자와 관계가 깊은 사적지(史蹟地)가 많으며, 그 중 유서 깊은 교우촌인 갓등이[현 왕림]에는 1984년 신학생 양성을 목적으로 수원 가톨릭대학이 설립되었다. 1983년말 현재 교세는 다음과 같다.

신자수 13만 2,688명, 본당수 55개소, 공소 362개소, 한국인 신부 98명, 외국인 신부 7명, 한국인 수사 26명, 한국인 수녀 332명, 외국인 수녀 9명, 남자 수도단체 4개, 여자수도단체 15개, 병원 1개소, 양로원 1개소, 나병수용소 2개소, 유치원 15개소, 국민학교 1개교, 중학교 3개교, 고등학교 3개교, 주일학교 53개소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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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본당 [한] 水原本堂

주교관(主敎冠) 모양의 독특한 고딕식 건물로, 경기도 수원시 북수동(北水洞) 316번지에 우뚝 솟아 있는 이 본당은 대천사 성 미카엘을 주보로 모시고, 1891년 왕림(갓등이)본당의 공소로부터 출발하였다. 미미했던 교세는 이곳에 공소가 생기면서 차츰 활기를 얻어, 1904년 수원읍내의 유력한 신자인 차재형 · 나기원 · 최동필 · 이규재 등이 나서서 왕림본당의 알릭스(J. Alix, 韓若瑟) 신부와 협의하여 남수리(南水里)에 있는 황학정의 정자와 대지 800평을 사들여 공소 경당을 설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화양학교(華陽學敎)를 세워, 남녀 어린이 200명을 모아 교육사업까지 벌였다.

1906년에는 북수리에 있는 세칭 팔부자집(기와집 두 채와 행랑채)을 사들여 내부를 개조, 성당으로 만들었다. 1908년 왕림본당에서 어떤 사건이 발생하여 1년간 폐쇄되는 사태에 이르자, 그 곳의 알릭스 신부는 수원으로 옮겨와 주재하였다. 그 뒤 수원본당은 다시 왕림본당의 신부들이 겸임하였는데 1923년에 평양(관후리)본당에 있던 르메르(Lemerre, 李類斯) 신부가 부임한 후부터 완전히 독립된 본당으로 발전하였다. 이어 크렘프(H. Krempff, 慶元善) 신부와 박일규(朴一奎, 안드레아) 신부의 사목을 거쳐 1930년에 폴리(Desideratus Polly, 沈應榮) 신부가 부임한 뒤부터 본격적인 발전기로 접어들었다.

당시 수원에는 이 본당밖에 없었고, 전교가 잘 안 되기로 알려진 침체한 곳이었다. 폴리 신부는 부인들로 ‘명도회’를 조직, 전교활동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어린이 교리반을 만들고, 돈 보스코회 등 신심단체도 구성하여 신자들의 교육과 의식개발에 힘썼다. 이것은 일제 식민지하에서는 한국인들에 대한 일종의 민족계몽운동이기도 하였다. 폴리 신부는 타고난 웅변가요, 우리 민족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선교사였다. 그러기에 33년에는 교회를 신축하는데 자신과 어머니의 사재를 털고, 파리 외방전교회의 원조를 얻어 75명의 연와조 고딕식 성당을 완성시켰던 것이다. 34년 이 곳에 4년제의 ‘학술 강습회’를 만들어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다가 ‘소화학원’으로 발전시켜,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극빈자 자녀들에게 수업료 한 푼 받지 않고 국민학교 과정을 가르쳤다. 그는 1948년에 천안으로 전임하여, 6.25사변 때 교회를 사수하다가 납북되었다.

그 뒤 이복영(李福永, 요셉) 신부를 거쳐, 임종구(林鍾求, 바오로) 신부 때인 1959년에 고등동(高等洞)본당이 분할될 때까지 수원본당은 수원의 유일한 본당이었다. 고등동본당이 분할되면서 수원본당은 ‘북수동본당’으로 바뀌었다. 시대의 변천과 교세의 확장에 따라 1979년 4월 5일 연건평 236평에 이르는 오늘의 대성당을 축성하였다. 그리고 폴리 신부의 기념비를 세웠다. 이 성당은 신자들의 ‘열과 성’을 모아 자체의 힘만으로 건립된 수원교구 최초의 성전이다. 북수동본당은 1983년말 현재 남자 1,351명, 여자 2,155명의 신자를 가지고 있다. 수원의 유일한 본당이었던 이 본당에서는 이제 8개의 본당이 분할되어 나갔다. 북수동본당의 현 주임신부는 김병열(보니파시오) 신부이다.

그 동안 이 본당을 맡았던 주임신부는 1962년 9월 장금구(莊金九, 금구 요한) 신부, 1964년 7월 유봉구(柳鳳九, 아우구스티노) 신부, 1970년 7월 이계항(李啓恒, 베드로) 신부, 1971년 9월 정덕진(丁德鎭, 루가) 신부, 1973년 6월 정주성(鄭主成, 요셉) 신부, 1975년 4월 최경환(崔敬煥, 마티아) 신부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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