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용호(1906∼?). 주교. 평양교구 제6대 교구장인 동시에 한국인으로서는 2대 교구장.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1906년 평남 평원군 한천면 감육리(平南 平原郡 漢川面 甘六里) 살구재에서 출생.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1919년 한천공립보통학교 5년 재학 중 모친마저 여읜 뒤 감칠리(甘七里)의 출가한 누이집으로 옮겨가 보통학교를 마쳤다. 1920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 1933년 5월 24일 라리보(Larribeau, 元亨根) 주교의 주례로 평양 관후리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었고, 서품 후 관후리본당 보좌 겸 평양교구 출판위원으로 임명되어 <가톨릭연구강좌> 강의록 편찬에 관여하다가 1934년 1월 <가톨릭연구강좌>가 <가톨릭연구>로 발전하자 편집장 겸 주필로 활동했으며 동년 8월 평양교구 가톨릭운동연맹의 의장(議長)으로 피임, 가톨릭운동을 활발히 전개시켰다. 1936년 3월 교구장 비서, 동년 8월부터 12월까지 영유(永柔)본당 주임신부로 사목했고 1937년 <가톨릭연구>가 <가톨릭조선>으로 개제되면서 교구 출판 책임을 전담하다가 1938년 12월 <가톨릭조선>이 폐간되자 1939년 평남 순천(順川)본당 주임신부로 전임되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평양교구를 담당하던 메리놀 외방전교회 신부들과 함께 간첩혐의로 체포되어 3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뒤 석방되어 1942년 교구장서리 직무대리로 교구장 없는 평양교구를 돌보던 중 1943년 3월 9일 주교로 승품, 정식으로 제6대 평양교구장으로 임명되어 3월 21일 착좌식을 거행하고 6월 29일 성성(成聖)되었다. 광복 후 일제에 징발되었던 관후리 주교좌성당을 되찾고자 북한 공산정권과의 끈질긴 교섭 끝에 1946년에 되찾고 대성당 신축공사를 착수하였다. 1949년 5월, 덕원 사우어(Sauer, 辛) 주교의 체포와 덕원 베네딕토 수도원의 몰수에 항의하여 내무상과의 면담을 청한 뒤 면담 예정일인 5월 14일 서포(西浦)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를 방문하고 귀가하던 중, 납치되어 1949년까지 평양 교화소(敎化所) 특별정치범 감옥에 수감된 것이 확인되었으나 그 뒤의 행방은 알 길이 없다.
홍영주 [한] 洪永周 [관련] 홍병주
홍영주(1801~1840). 성인(聖人). 축일은 9월 20일. 회장. 성인 홍병주(洪秉周)의 동생. 세례명. 바오로. 명문양반의 후예로 서울에서 태어나 충청도 내포(內浦)지방의 여사울에서 자랐다. 대대로 내려온 신앙을 이어받아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고 형 홍병주(洪秉周)와 함께 내포지방의 회장으로 교회일에 헌신하였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己亥)박해가 일어나고 서양 신부들이 체포되자 9월 말에 이르러 형과 함께 서양 신부들의 은신처를 제공한 죄로 체포되어 이듬해 2월 1일, 하루 먼저 순교한 형의 뒤를 따라 2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堂峴]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 홍병주
홍성본당 [한] 洪城本堂
대전교구 소속본당. 주보는 성모 성심. 1950년 본당으로 창설되어 강만수(姜晩秀, 요셉)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했으나, 6.25전쟁 중 강만수 신부가 공산군에게 살해됨으로써 사목활동이 중단되었다. 그 뒤 예산(禮山)본당 산하의 홍성 공소로서 존립하다가 1956년 구 성당을 신축하고 홍성본당으로 재출발, 2대 셰라장(Sieradzan, 徐) 신부가 부임, 본당 부활 미사가 집전되었다. 1958년 현 강당, 수녀원, 광천(廣川)공소 강당이 건립되고 1967년에는 산하의 덕산(德山), 봉산(鳳山), 삽교(揷橋)의 4개 공소가 삽교본당으로 합병, 1968년 광천본당이 분리 독립하였다. 6대 원종덕(元鍾德, 베드로) 주임신부 재직시인 1969년 현 성당과 사제관이 낙성되었고, 현재는 11대 올리비에(J. Ollivier, 오일복) 신부가 본당 주임으로 사목하고 있다. 신자수는 1,149명(1983년 현재), 산하 공소는 5개소이다.
홍봉주 [한] 洪鳳周
홍봉주(?∼1866). 순교자. 세례명 토마스. 충청도 예산(禮山) 출신. 1866년 병인(丙寅)박해 때의 순교자 홍낙민(洪樂民)의 손자이며, 부친 홍재영(洪梓榮) 역시 기해(己亥)박해로 순교하였다. 모친 정소사(丁召史)는 초대 명도회장(明道會長)이며 신유박해 때의 순교자 정약종(丁若鍾)의 맏형인 약현(若鉉)의 딸로 기해박해로 남편과 함께 순교하였다.
이렇듯 대대로 열렬히 천주교를 신봉해온 가정에 태어났으므로 어려서부터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은 홍봉주는 요행이도 박해를 피해 살아남을 수 있어, 1852년 메스트르(Maistre, 李) 신부가 입국하자, 그를 서울 전동(典洞)에 있는 이군심(李君心)의 집에 기거하게 하면서 그의 전교활동을 도왔다. 1852년 2월에 메스트르 신부의 명을 받고 선편으로 중국 상해(上海)에 건너가 조선교구의 제4대 주교로 임명된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를 만나, 그와 푸르티에(Pourthie, 申) 신부, 그리고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신부를 함께 무사히 서울까지 인도하여, 태평동(太平洞)에 집 한 채를 마련해서 주교의 포교활동을 도왔다.
그러던 중 1865년 러시아의 국경침범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나 정국(政局)이 시끄러워지자, 홍봉주는 평소 러시아의 침공을 우려한 주교의 의중을 감지하고, 이 기회를 이용해서 종교의 자유도 얻고 자신의 입신출세도 도모할 목적으로 김면호(金冕浩), 이유일(李惟一) 등과 상의하여 러시아 사람을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프랑스 및 영국과 조약을 맺는데 있으며, 이 조약을 맺는 데는 조선에 거주하고 있는 주교를 통해서 교섭하는 것이 좋다는 방아책(防俄策)을 쓴 서한을 대원군의 딸의 시아버지인 조기진(趙基晋)을 통해서 대원군에게 제출하였다. 그러나 별다른 반응이 없자 이번에는 천주교인으로서 높은 관직에 있는 승지(承旨) 남종삼(南鍾三)에게 그간의 경위를 설명하고 이 같은 방아책을 다시 청원토록 종용하였다. 이에 남종삼은 자신이 직접 작성한 청원서를 대원군에게 제출하였는데, 북경에서의 양인학살 등 사태의 변화로 오히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주교를 비롯한 많은 성직자와 신자들이 잡혀 순교하는 병인박해를 몰고 왔다.
홍봉주도 1866년 2월 23일 베르뇌 주교와 함께 잡혀, 3월 7일 주교가 새남터에서 순교하던 날, 남종삼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달레는 홍봉주의 순교사실을 상당히 의심하고 있으나 관변측 기록에 의하면 그가 배교를 취소하고 자기 신앙을 고백한 것이 거의 확실하다.
[참고문헌] 崔奭祐, 丙寅迫害資料硏究, 한국교회사연구소, 1968 / 日省錄 / Ch. Dallet, Histoire de I’Eglise de Core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