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례논쟁 [한] 中國儀禮論爭 [라] Controversia de ritibus [관련] 조상제사문제

17세기에서 18세기 중엽까지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선교사들과 도미니코회 ·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 사이에서 일어난 중국의례에 대한 100여년간의 논쟁을 말한다. 16세기말 중국에 진출한 예수회 선교사 리치(Ricci, 1552∼1610)와 동료 선교사들은 중국선교에 있어서 중국의례, 즉 조상숭배와 공자숭배를 중국문화와 관련된 의식(儀式)으로 파악하고 이를 허용했으나 예수회부터 반세기 늦게 중국에 진출한 도미니코회 ·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은 예수회의 적응주의적 선교방법에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1643년 도미니코회 선교사 모랄레스(Morales)가 예수회의 선교방법을 비판하는 17개항의 문제점을 교황에게 제출하여 1645년 인노첸시오 9세는 중국의례를 금하는 훈령을 내렸고, 이에 대해 예수회에서는 1651년 마르티니(Martini)를 교황청에 파견, 1656년 알렉산데르 7세로 하여금 중국의례의 허락을 받아냈다. 그 뒤 중국의례의 찬 · 반에 관한 논쟁은 100년간 계속되었으나 1715년 글레멘스 11세가 중국의례를 금하는 칙령 를 발표하고, 이어 1742년 베네딕토 14세가 를 재천명하는 결정적 칙서 를 발표함으로써 중국의례에 관한 논쟁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 조상제사문제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중국교회사 [한] 中國敎會史

그리스도교가 중국에 전래되어 번영하였던 것은 세 단계로 볼 수 있다. 첫째 당 · 원(唐元)시대, 둘째 명 · 청(明淸)시대, 셋째 근대(19세기) 이후이다. 당의 635년 전래된 경교(景敎, Nestorianism)는 소아시아적 특성을 지닌 그리스도교의 일파로서 미시소경(迷詩所經), 일신론(一神論), 경교삼위몽도찬(景敎三威蒙度讚) 같은 한문 전교서를 만들어 중국인을 대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고 대진사(大秦寺)라는 사원도 건립하였다, 그러나 그 교세는 마니교(摩尼敎)나 배화교(拜火敎)를 능가한 것은 아니고 10세기 당의 멸망과 함께 소멸되었다. 그 후 13세기에 일어난 몽고세력권 내의 중앙아시아, 인도, 중국 각지에 다시 경교가 다시 성하게 되었다. 한편 서방 가톨릭 교회도 프란치스코회 · 도미니코회 등이 아프리카 · 서아시아에 전도를 시작하였는데 원제국 지배 하의 중국에는 1292년 이탈리아 프란치스코회의 몬테 코르비노(Monte Corvino)가 교황의 신서를 휴대하고 쿠빌라이 칸(Khubilai, 元世祖)에게 와서 전교를 시작하여, 이미 궁정 내에 세력을 부식하고 있던 네스토리우스파의 심한 저항을 받았다. 그러나 14세기 초에는 교회를 건설하여 개종자는 600명 이상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 후 원이 망하면서 14세기 중엽에는 거의 소멸되었고 1582년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의 예수회 전교를 맞이하게 되었다.

명 · 청시대(16세기말∼18세기) 그리스도교의 발전은 가톨릭(天主敎)인데 전후에 비하여 가장 큰 번영과 동 · 서양의 문화교류가 이루어졌다. 1498년 바스코 다 가마의 대항해로 포르투갈인의 인도항로가 개척된 후, 포르투갈인은 향료 무역으로 큰 이익을 얻는 동시에 현지인의 영혼을 구제하려는 목적으로 동양에 내항하기 시작하였다. 이 영혼 구제사업에 협력한 것이 1540년 이냐시오 로욜라(Ignatius Loyola)에 의하여 창설된 예수회였다. 1541년 포르투갈왕의 청에 의하여 동회의 사비에르(F. Xavier)가 인도 전교를 위해 출발하였다. 그는 처음에 인도를 중심으로 실론 · 말래카에 전교하였고, 1549년 일본의 가고시마(鹿兒島)에 와서 활동하였으며, 1551년 중국 전교를 위해 떠났으나 도중에 마카오 부근의 작은 섬 상천도(上川島)에서 선종하였다.

16세기말 중국은 명초 이후 강력한 절대군주체제로서 대외정책도 폐쇄적이어서 외국인의 입국은 어려웠다. 따라서 입국을 시도하려면 중국인이 원하는, 중국인에 필요한 방법으로 상류층에 접근해야만 하였다. 초기의 루지에리(Ruggieri), 리치 등 선교사는 발리냐니(Valignani)의 지도로 중국 사대부들과 교제하기 위한 어학 · 문학 · 지식 · 풍습 등을 익혔으며, 중국인이 원하는 과학(수학 · 천문학 · 지리학 등)을 가르치고 서양의 기기(器機)(시계 · 일시계 · 프리즘 · 망원경)를 선물함으로써 중국에 들어가는 데 성공하였다. 이들 예수회 선교사들은 유복(儒服)을 입고, 사대부들에게 접근하였는데 그들은 자연과학에 특별한 호기심과 경의를 품고 있었다. 그리고 사대부를 대상으로, 그들의 협조를 얻어서 400여종의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를 저작하였는데 그 상당수는 천주교를 소개하는 성서 및 해설서 등이지만, 르네상스 이후 발달된 자연과학에 관한 것도 많았다. 그 중 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가 중국 사대부와 유럽 선교사와의 대화형식으로 가톨릭의 진수를 설명한 책이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며 그 중 상당수가 조선에 유입되어 우리 천주교 형성의 기초가 되기도 하였다. 반면 일본은 지도층이 무사(武士) 계층이었기 때문에 상이한 특색을 지니고 있다.

리치는 조경(肇慶) · 소주(詔州) · 남창(南昌) · 남경(南京)을 거쳐 1601년 북경에 들어가 신종(神宗)에게 자명종을 비롯하여 천주 및 마리아 화상, 보석 박힌 십자가, 서양금(西洋琴) 등 진기품을 헌상하여 선교사의 체재를 허락 받았고 1610년 북경에서 사망할 때까지 중국 전체에서 약 2,500여명의 신자를 얻었다. 이것은 27년의 활동기간이란 점에서 매우 적은 수치인데, 일본은 개교 33년에 15만명의 신자를 확보하였으며 중국이 이 수치에 이른 것은 다시 40년이 지난 1650년이었으니 그리스도교의 동양 전교가 나라에 따라 얼마나 다른 특성을 지녔는지 알 수 있다. 중국적인 특성은 리치가, 선교사들은 1만명의 그리스도 교도를 더 만드는 것보다는 중국인을 더 잘 이해하고 중국의 경서(經書)를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 사실로도 잘 이해 할 수 있다. 리치 이후 1620년경부터 명나라의 지배력이 흔들려 국내는 반란이 빈번하고 동북지역은 만주족의 침해가 더욱 심해지는 등 국내의 정치적 혼란으로 말미암아 외국인 및 외국종교에 대한 단속도 자연히 완화되었으며 중국인 지식층도 천주교나 서양 과학기술로서 명나라 조정을 회복하려는 구국의 의지가 서광계(徐光啓)나 이지조(李之藻) 등에게서 표출되었다.

1644년 이자성(李自成)의 난으로 명나라는 멸망하고 만주족의 청조(淸朝)가 등장하였다. 명말에 역(曆)의 개수자(改修者), 대포의 제조자로서 궁정에 발을 들여놓았던 선교사들은 계속해서 청조에 봉사하게 되는데, 역의 제작은 제왕통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착오가 있어서는 안 되는데도 명말 이후 오차가 많아 서양인 선교사들이 그 제작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아담 샬(Adam Schall), 페르비스트(F. Verbiest)는 흠천감(欽天監)의 감정(監正) 또는 감부(監副)에 임명되어 수력(修曆)의 일을 총재하였는데, 이것은 서양력의 우수성이 인정되었음을 의미한다. 서학(西學)의 이해자 강희제(康熙帝)는 호국의 의미, 개인의 취미로 기하학, 천문 역법, 대포 제조, 의약, 지도 등에 큰 관심을 쏟고 있었으며 특히 예수회 선교사들이 조정에 봉사하는 천문학자 · 수학자 · 대포 주조자 · 의약사 · 예술가 · 통역관으로서 장래의 천주교 전교를 위하여 헌신한 결과 1692년 천주교 공허(公許)의 칙령이 내렸다. 그러나 이 칙령의 이면에는 상당한 규제나 제한이 있었던 것이며 황제 자신은 천주교에 냉담하였다.

반면 이 때를 전후하여 예수회와 그 후 스페인의 원조를 얻어 내항한 수도회인 도미니코회, 프란치스코회, 아우구스티노회,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파리 외방선교회 등의 선교사와의 사이에 전교방법에 관한 논쟁이 있어 전례문제(典禮問題, rites controversy)가 일어났고 그 해결을 위해 두 번 교황사절이 특파되었다. 결과는 중국의 공자숭배, 조상숭배에 관한 예식은 일체 미신적인 것이라고 단정을 내려 중국인 신자가 여기에 참가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중국황제는 이것은 외국인이 중국의 전례를 비난하는 것이라고 간주하여 전례 부인파의 선교사를 추방하였으며, 1724년 옹정제(雍正帝)는 드디어 금교의 조서를 내렸다.

이후 1844년까지는 중국 그리스도교의 박해시기로서 그 때까지의 예수회적 전교방법인 천주 즉 상제(天主 卽 上帝)라는 원시유교에의 그리스도 교리 부합, 중국적인 풍속, 예절에의 적응, 그러한 방편으로서의 무수한 한역서학서 등 적응주의적 전교방법은 종지부를 찍고 선교사들은 조정에 봉사하는 관리 · 예술가 · 전문인으로서만 그들의 체류를 인정받았다. 그리고 미약하지만 전교활동이 진행되었고 복건(福建)박해를 위시하여 120여년간 대소 박해가 있었다. 또 18세기말 이슬람 교도나 백련교(白蓮敎)의 반란은 비합법적인 종교에 대한 당국의 의심을 높여 엄중한 단속을 받았고 천주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어느 회가 전교했느냐에 따라 그 대상계층과 방법, 수용대상의 차이는 있었지만 유교적 바탕 위에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여 중국화된 천주교로서 그 면모를 지녔던 것이다.

19세기 중엽에 들어서서 가톨릭은 식민주의를 표방하는 강력한 제국주의 국가의 보호 아래 다시 전교활동을 시작하였는데, 프랑스는 황포조약(黃埔條約, 1844년) 이후 중국에서 그리스도 교인에 대한 해금지역이 다시 항구(남경조약에서 개항지로 된 상해 · 광동 · 북주 · 하문 · 영파)로 되어있는 제한을 풀려고 시도하여 1858년 천진조약, 1860년 북경조약에 의하여 달성시켰다. 그로부터 청국 관헌은 정규여권만 휴대하면 선교사들을 보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프랑스는 가톨릭 전교 보호권을 얻었고 독일도 19세기말에 국력을 이용하여 자국 선교사의 보호권을 쟁취하게 되었다. 사실 이 시기에 서구열강은 국가권력과 종교신앙을 분리하지 않고 혼동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전교에 오히려 큰 폐해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여하튼 20세기에 가톨릭 전교는 착착 발전하여 1939년 신자수는 318만명으로 이르렀고 현 정권은 중국 교회를 로마로부터 단절시키려는 운동을 진행시키기도 하였다.

한편 신교(Protestant)는 영국의 전도 단체인 런던회가 모리슨(R. Morrison)을 1807년 중국에 파견함으로써 개시되었다. 당시는 금교의 와중이었으므로 내지에의 입국이 허용되지 않았고 중국어에 힘써 성서 번역을 진행시킨 인물이 귀츨라프(Karl Gutzlaff)이며 그가 번역한 성서나 종교서는 태평천국(太平天國)의 수중에 들어가 대중운동의 이론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19세기 중엽 내지전도가 개시되었지만 영국 · 미국 · 네덜란드 등의 신교 선교활동은 가톨릭의 적극적인 활동을 따를 수가 없었고 신자 획득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무료 또는 값싼 종교서를 배포하는 문서 전교, 교회학교를 설립하여 지식인 신자들을 획득하는 교육전교, 의료에 의하여 민심을 얻는 의료 전도 등에 노력하였다.

20세기에 이르러 그들 선교사들의 노력의 효과가 나타나게 되는데, 교세는 융성해져서 1935년에는 51만명의 신자를 갖게 되었으며, 이 발전에는 미국의 자본주의의 발달이 은연중 커다란 힘이 되었다. 즉 다액의 자금이 중국 전교에 충당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그 전후부터 교회를 중국적인 것으로 방향전환하려는 본색교회운동(本色敎會運動)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어쨌든 19∼20세기의 그리스도교 운동은 정치적인 문제들과 선교사들의 여러 가지 역할 등 당시 처해진 국내외 상황에서 많은 시련을 극복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崔詔子)

[참고문헌] 德禮賢, 中國天主敎傳敎史, 商務印書舘, 臺北 1972 / 方豪, 李之藻硏究, 商務印書舘, 臺北 1965 / 中國天主敎會史 人物傳, 3冊, 公敎眞理學會, 香港 1970/ 羅光, 李瑪竇傳, 學生書局, 臺北 1979: 徐光啓傳, 傳記文學雜誌社, 臺北 1982 / 徐宗澤 編著, 明淸間耶蘇會士譯著提要, 中華書局, 臺北, 1958 / 矢澤利彦, 中國とキリスト敎, 近藤出版社, 東京 1972 / 佐伯好郞, 支那基督敎史の硏究, 春秋社, 東京 1944; 淸朝基督敎史の硏究, 春秋社, 東京 1949 / 徐光啓 等撰, 天主敎東傳文獻續編, 學生書局, 臺北 1965/ 李瑪竇 等述 天主敎東傳文獻, 學生書局, 臺北 1965/ 艾儒路 等, 天主敎東傳文獻, 三編, 學生書局, 臺北 1965 / 黃伯祿 編, 正敎奉褒, 上 · 下, 慈母堂, 上海 1884.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중강진본당 [한] 中江鎭本堂

1930년 평북 자성군 중강진읍(平北 慈城郡 中江鎭邑)에 창설되어 1941년 폐쇄된 평양교구 소속 본당. 1927년 신의주(新義州)에서 이사해 온 백 레지나에 의해 복음이 전파된 중강진은 1930년 10월 28일 본당으로 창설되었고, 폐쇄되기까지 평북 자성군 · 후창군(厚昌郡)일대에 자성, 후창, 동흥(東興), 누룩골, 서수덕, 중동 등 6개 공소를 두고 관할하였다. 초대 주임신부로는 스위니(Sweeney, 徐) 신부가 부임하여 2개월간 사목했고 1931년 2월 클리어리(Cleary, 吉) 신부가 2대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전교와 교세확장에 주력하여 1933년 강계(江界) 공소를 본당으로 분할 창설시키고 누룩골, 서수덕 등의 공소를 개설시키는 등 본당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어 레이(Ray, 李) 신부가 3대 주임신부로 몇 개월간 사목한 후, 1933년 9월 펠로퀸(Peliquin, 白) 4대 주임신부가 부임, 성당과 사제관 신축을 시작하는 한편 빈민아동 교육을 위한 학교를 개설했고, 1935년 2월 클리어리 신부가 5대 주임신부로 재부임하여 미완성이었던 신축성당을 완공하고 구(舊)성당을 수리 개조하여 교리강습소를 개설하였다. 그 후 1938년 카펠(Cappel, 慶) 신부가 6대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사목했으나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인해 카펠 신부가 평양교구 내의 동료 메리놀회 성직자들과 함께 일제(日帝)당국에 체포되어 중강진본당은 폐쇄되어 의주(義州)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다. 1943년 4월 의주본당에서 강계본당으로 이관된 후 공소마저도 1949년 북한 공산정권에 의해 강계본당과 함께 폐쇄되었다. 중강진본당의 신심단체로는 부인회가 있었고, 1937년의 본당 현황은 총 신자수 211명, 공소 6개소, 교리강습소 1개소, 전교회장 2명 등이 있었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줄무덤 [관련] 다락골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忠南 靑陽郡 化城面 農岩里) 다락골에 있는 무명 순교자들의 모소. 병인(丙寅)박해 때 홍주(洪州)옥에서 순교한 무명 순교자들이 안장된 이곳은 14기의 순교자 묘소와 형체가 뚜렷하지 않은 20여기의 봉분이 있는데 묘소가 줄을 이어 있기 때문에 줄무덤이라고 한다. 1982년 11월 23일 청양본당 주임 방윤석(方潤錫) 신부와 신자들에 의해 이곳에 묘비가 건립되었다. (⇒) 다락골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줄리앙 그린 [원] Julien Green [관련] 그린2

⇒ 그린2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