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리카르도 롬바르디(R. Lombardi) 예수회 신부에 의해 시작되어 1952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M.B.W.(Movement for a Better World)라고 명명된 신심운동단체. 1966년 7월 25일 한국 진출. 형제애의 실천만이 인류가 구원될 수 있는 길임을 강조하면서 초창기에는 이 운동을 ‘사랑의 십자군’이라고 불렀다. 형제애의 강조와 더불어 제도적이고 전례 중심적인 교회가 쇄신하여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함도 강조하였다. 1965년부터 교황은 이 운동을 예수회에서 관장토록 하였다. 기본정신으로는 ‘생동하는 교회’(Live Church)로서 새로운 방향으로 신앙생활을 쇄신하는 것으로 되어 1966년 롬바르디 신부와 돌란(Delan) 신부가 내한하여 서울 명도원에서 첫 묵상회를 갖고, 1968년부터는 한국인들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리스도 공동체 묵상회라고도 하는 이 운동은 로마본부의 영성연구소에서 여러 가지 묵상방법을 계발하고 있으며 한국에 도입된 것으로는 기초묵상회, 대화묵상회, 현대의 복음선교묵상회, 새로운 본당상묵상회 등이 있다. 현재 한국 내 14개 교구 중 10개 교구에 추진회가 구성되어 있고, 회원은 정회원과 협조회원으로 구분되어 있다.
한국천주교회사연구 [한] 韓國天主敎會史硏究
한국 천주교회사에 관한 연구는 순교의 역사와 순교자들의 전기를 편찬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본연의 역사서술보다는 순교자들을 본받고 현양하려는 신심에서, 또는 장차 그들의 시복(諡福)에 필요한 그들의 행적을 후세에 남기려는 의도에서였다. 순교자에 관한 최초의 전기들은 서한형식을 취한 것으로서 1797년 구베아(Gouvea) 주교의 서한(Epistola Episcopi Pekinensis ad Episcopum Caradrensem)과 황사영(黃嗣永)의 백서(帛書)이다. 그 후 열전(列傳) 형식의 순교자전이 나오게 되었는데 그것이 유명한 ≪기해일기≫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있어서도 본연의 역사서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정약용(丁若鏞)은 만년에 ≪조선복음전래사≫(朝鮮福音傳來史)를 저술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것은 공서파(攻西派)의 대표격인 이기경(李基慶)의 ≪벽위편≫(闢衛編)을 의식하고 정약용이 신서파(信西派)를 대표하여 그것을 반박하고자 저술한 것으로 생각된다.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한국에 진출하자 순교사(殉敎史)를 위시하여 한국 천주교회 전반에 관한 역사를 서술하고자 이에 관한 자료수집과 편찬에 착수하였다. 1874년 파리에서 상 · 하 2책으로 간행된 유명한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Histoire de l’Eglise de Coree)는 바로 재한 프랑스 선교사들의 꾸준한 연구활동의 결정인 것이다. 한국 천주교회사에 관한 자료와 증언을 수집하고 편집하는 일을 주도한 선교사는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였다. 그는 여러 순교자들의 전기 외에도 조선사와 조선순교사에 관한 2권의 비망기(備忘記)를 남겼는데 달레는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그의 ≪한국천주교회사≫를 간행할 수 있었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가 출간된 이후 이에 비길만한 연구업적은 나오지 않았고 다만 시복수속에 필요한 자료집들이 간행되었을 뿐이다. 뮈텔(Mutel, 閔德孝) 주교는 관변측 기록에서 시복후보자 명단에 오른 순교자들과 관련된 부분을 발췌하여 프랑스어로 두 권의 자료집을 간행하였다(Documents relatifs aux Martyrs de Coreen de 1839 et 1846, Hongkong 1924; Documents relatifs aux Martyrs de 1866, Hongkong 1925). 1925년 시복식을 전후하여 한국교회와 한국의 순교복자들을 소개하는 두 권의 단행본이 나왔는데 하나는 ≪한국의 천주교≫(Le Catholicisme en Coree, Hongkong 1924)이고 또 하나는 파리 외방전교회의 저명한 역사가인 로네(A. Launay)가 저술한 ≪한국순교복자 79위전≫(Martyrs Francais et Coreens, Paris 1925)이다. 전자는 통속적인 약사에 불과하지만 후자는 학술적인 저술에 속하는 것이다. 피숑(L. Pichon, 宋世興) 신부는 1930년대에 한국 천주교회의 전사(前史)와 초기교회사에 관한 논문들을 교회 정기간행물에 발표하였는데 파리 외방전교회원으로서 이런 수준 높은 논문들을 발표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이 무렵 일본인 학자들도 한국 천주교회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야마구찌(山口正之), 오다(小田省吾), 아까끼(赤木仁兵衛), 이시이(石井壽夫) 등이 주로 초기 교회사에 관한 논문들을 1930년에서 1943년에 걸쳐 여러 학술지(靑丘學叢, 史學雜誌, 歷史學硏究, 東洋史硏究, 基督敎史硏究)에 발표하게 되었다. 그들의 연구가 식민지사관을 완전히 탈피할 수는 없었다 할지라도 처음으로 근대적 역사방법론을 적용했다는 점, 또한 사실적 탐구에 그치지 않고 사상적인 면에까지 확대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교회사연구사에서 특기할 만하다. 또한 이 시기에 2명의 아마추어 사가가 2권의 단행본을 간행했는데 하나는 구스다(楠田斧三郞)의 ≪조선천주교소사≫(朝鮮天主敎小史, 1933)이고 또 하나는 우라까와(浦川和三郞)의 ≪조선순교사≫(朝鮮殉敎史, 1944)이다.
한국 천주교회사에 관한 연구는 광복과 더불어 비로소 한국인에 의해 주도되고 또한 본연의 연구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부터 오늘에 이르는 연구는 연구인구의 증가, 연구주제의 다양화, 자료의 수집과 간행, 연구기관의 설립 등 여러 점에서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처음에 연구를 주도한 사학자들은 유홍렬(柳洪烈) 박사와 주재용(朱在用) 신부 등 소수에 불과했으나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걸쳐 그 수가 급속도로 증가되었다. 고무적인 것은 외국에서 사학을 전공한 성직자들과 학계의 소장학자들이 많이 연구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연구인구의 증가는 자연 연구주제의 폭을 넓힘으로써 다각적인 연구를 초래하였다. 특히 사학자들과 소장학자들의 참여로 종래의 순교나 선교중심의 연구에서 교회의 문화적 역할 전반에 관한 연구로 확대되고 심화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다각적인 연구는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간행으로 더욱 촉진될 수 있었다. 또한 한국 교회사연구소를 위시하여 한국 가톨릭문화연구소, 호남교회사연구소, 영남교회사연구소 등 교회사 연구기관의 설립으로 학자들간의 연대성이 형성되고, 더욱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발전을 기하게 되었다. 특히 한국 교회사연구소는 그간 연구발표회와 교회사간담회를 통해, 각종 자료집과 연구지의 간행을 통해 연구가들에게 발표의 광장을 열어주고, 공동연구를 진행시킴으로써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에 관해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崔奭祐)
[참고문헌] 洪以燮, 韓國基督敎史硏究小史, 白藥濬博士還甲紀念, 國學論叢, 思想界社, 1955 / 李元淳, 韓國天主敎會史硏究小史, 崔奭祐神父華甲紀念, 韓國敎會史論叢, 韓國敎會史硏究所, 1982 / 趙珖, 韓國天主敎會史關係 論著의 整理, 崔奭祐神父華甲紀念, 韓國敎會史論叢, 韓國敎會史硏究所, 1982 / 崔奭祐, 韓國敎會史는 어떻게 敍述되어 왔는가. 韓國敎會史의 探求, 韓國敎會史硏究所, 1982.
한국천주교회사 [한] 韓國天主敎會史 [프] Histoire de l’Eglise de Coree
1874년 프랑스에서 프랑스어(語)로 간행된 한국 천주교회사. 저자는 파리 외방전교회원 달레(Ch. Dellet) 신부. 상 · 하 2권(卷) 2책(冊)으로, 상권은 서설(序說)이 192면(面), 본문이 383면, 하권은 상권에 이은 본문이 592면, 총 1,167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설(序說)에서는 조선의 지리 · 역사 · 황실 · 정부 · 재판 · 과거(科擧) · 언어 · 신분제도 · 여성 · 가족 · 종교 · 조선인의 성격 · 오락 · 풍속 · 학문 등 15개 항에 걸쳐 한국학(韓國學)에 대한 개설이 소개되어 있고, 이어 본문에서는 1592년 임진왜란에서부터 1866년 병인(丙寅)박해 때까지 한국 천주교회의 통사(通史)가 서술되어 있다. 본문은 1592년에서 1831년 조선교구 설정까지가 제1편, 그 이후가 제2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다시 제1편은 4권 9장(章)으로, 제2편은 5권 26장으로 세분되어 있어 서설을 제외한 본문은 총 2편 9권 4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 각 편 각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제1편 1권(1592∼1793) : 임진왜란 피랍자들의 신교(信敎)와 순교(殉敎)를 비롯한 한국 천주교회의 전사(前史)와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이 주된 내용이다. ② 제1편 2권(1794∼1801) :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입국, 전교활동 및 순교, 그리고 신유(辛酉)박해의 발단 등을 다루고 있다. ③ 제1편 3권(1801∼1802) : 주문모 신부의 순교 이후부터 신유박해의 종식까지를 다루고 있다. ④ 제1편 4권(1802∼1831) : 신유박해 이후 교회재건운동 및 성직자 영입운동, 1815년 을해(乙亥)박해, 1827년 정해(丁亥)박해, 1831년 조선교구의 설정과 초대 교구장 임명까지를 다루고 있다. ⑤ 제2편 1권(1831∼1839) : 조선교구 설정 이후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 모방(Maubant, 羅), 샤스탕(Chastan, 鄭) 신부 등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입국과 전교활동을 다루고 있다. ⑥ 제2편 2권(1839∼1840) : 기해(己亥)박해 전반을 다루고 있다. ⑦ 제2편 3권(1840∼1853) : 페레올(Ferreol, 高) 주교와 김대건(金大建) 신부의 입국, 1846년 병오(丙午)박해, 페레올 주교의 사망까지를 다루고 있다. ⑧ 제2편 4권(1853∼1864) :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와 동료 선교사들의 입국에서 철종(哲宗)의 사망까지를 다루고 있다. ⑨ 제2편 5권(1864∼1866) : 고종(高宗) 즉위 후의 교회상황, 병인박해, 병인양요(丙寅洋擾), 신미양요(辛未洋擾) 등을 다루고 있다.
이상과 같은 내용의 ≪한국천주교회사≫는 원래 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가 편찬을 계획했던 것으로, 다블뤼 주교는 1845년 조선에 입국한 후 1854년 ≪한한불사전≫(韓漢佛辭典)의 편찬에 착수하는 한편 ≪조선사연대표≫를 작성하고 1857년부터 본격적인 ≪한국천주교회사≫ 편찬작업에 착수하였다. 먼저 순교자들의 전기들과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 정약용(丁若鏞)의 ≪조선복음전래사≫(朝鮮福音傳來史), 그리고 교회 밖의 자료인 이기경의 ≪벽위편≫(闢衛編), ≪용호한록≫(龍湖閑錄), ≪대전통편≫(大典通編) 등 국한문자료들을 수집하여 이를 불역(佛譯)해서 파리 외방전교회에 보내고, 한편으로는 위 자료를 근거로 <비망기>(備忘記)와 <순교자비망기>(殉敎者備忘記)를 작성하였으나 1862년 건강상의 이유로 편찬을 포기하고 불역된 모든 자료들을 파리로 보냈다. 이렇게 해서 다블뤼 주교의 자료들은 파리 외방전교회 고문서고(古文書庫)에 보관되어 오다가 1872년부터 달레 신부에 의해 정리되어 ≪한국 천주교회사≫의 기본사료로 이용되었고, 여기에 조선에서 활동하던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서한이 추가 자료로 이용되어 1874년 ≪한국천주교회사≫는 간행을 보게 되었다. ≪한국천주교회사≫는 간행 후 유럽에서 호응을 얻어 즉시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등지에서 번역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885년부터 로베르(Robert, 金保祿), 리우빌(Liouville, 柳達榮), 보두네(Beaudounet, 尹沙勿) 등의 선교사들에 의해 국역이 시작되어 1901년 거의 완역되었으나 간행되지는 못하고 1906년부터 1913년까지 <경향잡지>에 연재되기만 하였다. 그 후 1956년부터 새 번역문이 <경향잡지>에 연재되었으나 1974년 완역에 이르지 못한 채 중단되었다. 단행본으로는 1947년과 1966년 서설부분만이 번역되어 ≪조선교회사서설≫이란 제목으로 간행되었고, 그 후 1976년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최석우(崔奭祐) 신부와 불문학자 안응렬(安應烈) 교수에 의해 번역 · 주해 작업이 시작되어 1979년 상권이, 1980년 중 · 하권이 간행되어 비로소 완역되었다.
≪한국천주교회사≫의 사료적 가치로는 최초의 한국천주교회사 통사라는 점인데, 특히 다블뤼 주교가 수집한 원사료(原史料)인 국한문자료들이 1863년 화재로 소실되었기 때문에 유일무이의 사료로서 매우 높이 평가되며 아울러 이의 확인과 보완을 위해 한국측 자료들의 발굴이 요망된다.
[참고문헌] 샤를르 달레 原著, 李能植 · 尹志善 共譯, 朝鮮敎會史序說, 大成出版社, 1947 / 샤를르 달레 原著, 丁奇洙 譯, 朝鮮敎會史序說 / 샤를르 달레 原著, 安應烈 · 崔奭祐 譯註, 韓國天主敎會史, 上 · 中 · 下, 분도출판사, 1879∼1980 / 崔奭祐, 달레著 韓國天主敎會史의 形成過程, 韓國敎會史의 探究, 韓國敎會史硏究所, 1982.
한국천주교평신도사도직협의회 [한] 韓國天主敎平信徒使徒職協議會 [영] Lay Apostolate Council of Korea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하여 1965년 11월 제정 반포된 <평신도사도직에 관한 교령>(Apostolicam Actuositatem)의 정신에 따라 1968년 7월 창립총회와 함께 발족된 평신도들의 협의체. ‘회개와 쇄신’의 정신으로 개최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평신도들의 교회 참여에 대한 진보된 견해를 표명하게 되었고,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유홍렬(柳洪烈) 등의 한국대표 외 103개국의 평신도 대표들은 1967년 10월 로마에서 제3차 세계 평신도대회를 개최하였다. 한국에 있어서는 1967년 6월 처음으로 대구 대교구(大邱大敎區)에서 ‘대구대교구액션단체협의회’가 발족되어 서정길(徐廷吉) 대주교의 인준과 함께 김영환(金永煥) 신부의 지도를 받았다. 그 뒤 1968년 5월 한국 주교회의(韓國主敎會議) 임시총회에서는 전국 평신도기구의 설치에 관하여 그 사무실은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C.C.K.) 내에 둘 것과 그 외 기타 사항은 책임주교인 황민성(黃旼性) 주교에 일임한다는 원칙적인 의결을 보았다.
이에 1968년 7월 대전 주교좌성당(主敎座聖堂)에서 전국 11개 교구가 6개 전국단체의 성직자 및 평신도 대표 27명이 참석한 가운데 ‘평신도사도직중앙협의회’ 창립총회를 갖고, 총재 및 회장을 비롯한 각 임원을 선출하였다. 미처 협의회의 체제가 정비되기도 전인 1968년 10월 24위 복자에 대한 시복식이 로마에서 거행됨에 따라 이를 경축하기 위한 위원회가 곧 발족되어, 1968년 10월 3일부터 10월 13일까지 순교자 유물전시회를 비롯한 각종 행사를 무난히 치르게 되었다. 1968년 10월 14일 한국 주교회의 정기 총회에서는 평신도사도직 중앙협의회를 인준하는 한편 협의회에 건의한 한국 평신도사도직의 날 제정 등 몇 개 사항들을 의결하였다. 그러나 평신도들의 인식 부족으로 사목위원회 · 액션단체협의회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사도직협의회의 원의(原意)와는 달라지게 되어 적극적인 홍보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함께 국내적으로는 한국 정의평화위원회(韓國正義平和委員會)의 결성(1970. 8), 소데팍스(SODEPAX) 한국위원회의 결성(1971. 2)을 보았고, 국제적으로는 아시아 그리스도교개발회의 및 아시아지역 평신도 사도직운동회의 참석(1970. 7)을 비롯하여 세계평신도사무국에서 ‘교회 내에서의 대화’를 주제로 한 심포지움에 참석(1971. 3)하기도 하였다. 평신도사도직의 날 행사와 평신도들의 강론 등을 정착시키기 위한 노력과 아울러 시성시복촉진준비위원회 발족 및 협의회가 조직되지 못한 교구의 지원을 1972년 이후 적극 전개하였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에 있어서 전반적으로 평신도사도직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중앙협의회와 교구협의회 또는 전국단체 간의 협조가 잘 이루어지지 않아 1978년 주교회의 상임위원회에서는 전국기구를 폐기키로 한 때도 있었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도 협의회는 꾸준한 활동을 전개 하였다. 각 교구마다 그 명칭과 기능 등이 일원화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지침서에 따라 개편 보강토록 하였고, 1974년말에는 현재 위치한 꾸르실료회관에 독자적인 협의회 사무실을 마련하여 협의회의 활동을 지원토록 하였다. 또한 1977년에는 5인 소위원회(五人小委員會)를 구성하여 평신도 사도직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특히 1977년 이후부터는 도시와 농촌간의 상호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하여 도시에 소재한 본당과 농촌사회 속에 소재한 본당과의 자매결연을 적극 추진하였고, 신자 재교육 및 지도자 양성을 위해 1979년 8월 이후 부전기적으로 신앙대학(信仰大學)을 운영하였다. 1981년부터는 이향신자(離鄕信者) 사목위원회의 농촌본당자문위원회를 평신도사도직협의회에서 운영하기로 결의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신자들의 의식 계발이 그 어떤 활동보다도 우선되어야 한다는 견지에서 피정 및 연수회를 통한 신자 재교육문제를 장기적인 안목에서 계획함과 아울러 그 활동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현재 한국 내 14개 교구에 교구별 평신도사도직 협의회가 조직되어 운영되고 있다.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한] 韓國天主敎中央協議會 [영] Catholic Conference of Korea
교회는 주교(主敎)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공동체인 교구를 기반으로 한다. 한국 교회의 14개 교구는 각기 독자성을 유지하면서도 전국적인 차원에서 교구간의 협력이 요청되는 공동관심사를 협의하기 위해서 전국의 주교들로 주교회의를 구성하고 있는데, 주교회의와 그 사무처가 곧 사단법인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이다.
광복이 되자 한국 천주교회는 급속히 그 교세가 신장되어 여러 교구가 연이어 증설되고, 국제적인 교류가 빈번해졌으므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전국에 걸친 교회사업을 통일해야 할 필요성이 점차 높아졌다. 이에 1948년 11월 당시의 교황사절 번(Byrne, 方) 주교는 메리놀(Maryknol) 회원인 그레이그(Craig, 奇) 신부에게 이러한 협의체의 구성을 위촉하였다. 그 뒤 6.25동란으로 그 활동이 중단되었다가 1952년에 당시의 주한교황사절 푸르스덴베르(Furstenberg) 대주교가 대구(大邱)에서 주교회의를 소집함으로써 다시 계속되었다. 1955년에는 그레이그 신부의 뒤를 이어 성 베네딕토회 서석태(徐錫泰) 신부가 협의회의 사무를 맡게 되어 1956년에 천주교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 천주교연감≫을 출판하는 등 본격적으로 사업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그 동안 여러 번 조직의 개편이 이루어졌고, 1959년 이전에는 한 동안 교황사절관에 소속되기도 했으나 1959년부터는 다시금 주교들의 협의체로 재조직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협의회가 교황청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일반적 정의는 “전국 주교회의는 한 나라 주교들의 자발적인 협동체로서, 교육, 사회복지, 기타 전국적인 성격을 띤 사업에 있어서의 천주교의 활동을 유기화(有機化)하고 조정하고 통일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 사무처의 신부들은 주교들의 지휘감독 하에 사업을 연구 계획하고, 보도를 수집 발표하며, 서적 소책자 등을 발간하고, 갖가지 편의를 발전시켜 주교들께 제공한다. 이 편의들의 사용방법은 각 교구에서 주교들이 결정한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주교회의는 완전한 협의체로 운영되므로, 사무처 또한 중앙집권 기구가 아니라, 교구간의 교량역할을 담당한다. 그리고 교회적 차원에서 한국교회는 아시아지역의 교회, 나아가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 교회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대외관계의 창구역할을 담당하며, 국가적 차원에서도 한국 천주교회의 대 정부, 대 사회의 창구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이러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출판사를 두어, 오늘날 <회보>를 매달 1일에 발간하는 한편 월간지 <경향잡지>와 격월간지(隔月刊誌) <사목>(司牧)을 발간하고 있으며, 그 밖에 단행본과 통신교리를 수시로 간행하고 있다.
주교회의는 매년 2회의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필요시에는 임시총회를 열며, 상임위원회는 총회를 준비하고 필요 긴급시에는 총회의 권한을 대행하고 있는데, 주교회의 의장단과 상임위원회는 의장에 김수환(金壽煥) 추기경, 부의장에 윤공희(尹恭熙) 대주교, 총무에 김남수(金南洙) 주교가 각각 맡고 있다. 또한 총회 안에는 교리(敎理), 성직(聖職), 사목(司牧), 사회(社會) 등 상설 주교위원회가 있어 관계분야에 대한 문제들을 연구 심의하여, 그 산하 전국위원회 및 단체들의 활동을 지도 감독하고 있다. 한편 특별 주교위원회를 때에 따라 구성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기념하는 모든 업무를 지도 감독하기 위한 ‘200주년기념주교위원회’ 등이 그것이었다.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사무처는 현재 서울 중구 충무로 2가 52의 15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은규(鄭恩圭) 신부가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어 총재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의 감독 하에 많은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