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숑(Pichon) 신부의 한국명. ⇒ 피숑
송아가다 이력서 [한] 宋~履歷書
최양업(崔良業) 신부의 넷째 제수인 송 아가다의 전기(傳記)로 1927년에서 1933년에서 1933년에 걸쳐 저술되었다. 내용은 송 아가다의 집안 내력에서부터 시작하여 출생, 유년시절, 최신정(崔信鼎)과의 결혼, 그리고 사망하기까지의 고난스러운 생애가 주를 이루고 있고, 제일 끝부분에 ‘뒷날에 덧붙임’이라는 제목으로 송 아가다의 증언으로 인해 성인 최경환(崔京煥)의 묘지가 발굴되었음을 부기(附記)하고 있다.
송재기 [한] 宋再紀
宋再紀(?~1802). 순교자. 세례명은 미상(未詳). ≪사학징의≫(邪學懲義)에는 이름이 ‘宋再紀’로 나온다. 서울에서 태어나 황정동(黃井洞, 현재의 동대문(東大門 부근)에서 각수장(刻手匠)[돌에 글자나 무늬를 새기는 직업]을 하며 살았다. 1800년 입교하여 김의호(金義浩), 김한빈(金漢彬), 황사영(黃嗣永) 등과 고유하며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으나 이듬해 신유(辛酉)박해가 일어나고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사건이 일어나자 황사영의 피신을 도와주어 이로 인해 체포되어 1802년 1월 29일(음 1801년 12월 26일) 김의호, 변득중(邊得中), 장덕유(張德裕), 이경도(李景陶), 김백심(金百心), 홍익만(洪翼萬), 최설애(崔雪愛) 등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송정리본당 [한] 松汀里本堂
일정(日政) 때 전남 광산군(光山郡) 송정읍(松汀邑) 상도산 1000번지에서 광주 북동본당(北洞本堂) 소속 송정리 공소로서 발족한 뒤 8.15광복 후인 1950년 4월에 송정리(松汀里) 571번지에 성당을 건축하고, 성 요셉을 주보로 모시고 본당으로 승격, 1965년 4월 광주교구 관하의 송정리본당에서 신동본당이 분리 설립될 당시까지 이 호칭으로 불렀다. 그리고 이 때부터 모본당(母本堂)을 승계한 새 명칭사용으로 전남광산군 송정읍 원동 579의 14 소재 원동본당(元洞本堂)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자수는 1983년 12월 말 현재 4,114명이다.
1대에서 5대까지의 주임신부가 모두 성 골룸바노전교회 출신 신부인데, 역대 연혁을 더듬어 보면 다음과 같다. 초대(1959~1956년) 만건(Kevin Mangan, 萬) 신부, 2대(1956~1956말) 라이언(Eugene Ryan, 成) 신부를 거쳐 3대(1956~1962년) 라이언(Thomas D. Ryan, 羅) 신부 때 임곡, 하남, 본량, 서창, 동곡 등 공소를 설립하였다. 4대(1962~1963년) 오닐(Noel O’neil, 于) 신부, 5대(1963~1967년) 매귀어(Desmond Maguire, 梅) 신부를 거치는 동안 원동본당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6대(1967~1970년) 이상철(李相哲, 힐라리오) 신부 때는 ‘성모유치원’을 설립하고 초대 원장을 역임하였고, 사제관, 수녀원, 기타 부속건물도 신축하였다. 7대(1970~1973년) 박상수(朴常洙, 고스마) 신부는 본당숙원사업이던 성전을 신축 완공하였고, 8대(1973~1975년) 서상채(徐相彩, 유스티노) 신부 때는 노안본당(老安本堂)으로부터 상도공소가 원동본당에 편입됨에 따라 신자수도 360명이 늘어나게 되었고, 1975년 7월 20일에는 본당교우와 김상직 공군준장의 지원 협력으로 철제 종탑의 준공을 보았다. 9대(1975~1979년) 김무웅(金武雄, 율리오) 신부, 10대(1979~1983년) 강영식(姜永植, 안드레아)신부, 11대(1983. 2~1983. 4) 장옥석(張玉石, 루치오) 신부, 12대(1983. 4 현재) 우르비나(J. Ch Ulrbina, 한창우) 신부로 이어지며 우르비나 신부는 과달루페 외방전교회(Guadalupe Missioners) 소속이다.
송화본당 [한] 松禾本堂
황해도 송화군 송화면 읍내리에 위치했던 송화본당은 일찍부터 황해도 장연(長淵)본당의 공소였는데, 1939년 본당으로 승격, 강원도 이천(伊川)본당에서 전교하던 박우철(朴遇哲, 바오로) 신부가 초대 본당신부로 부임하였다. 2대 이보환(李普煥, 요셉) 신부가 1944년 3월에 강원도 평강(平康)본당으로 전임된 후 6개월 동안은 본당신부가 공석이어서 이웃의 본당신부가 성사를 집전 했으며, 그 당시 송화본당의 신자수는 517명이었다. 그 해의 9월, 평양교구 서포(西浦)본당에서 사목하고 있던 서기창(徐起昌, 프란치스코) 신부가 3대 본당신부로 부임해 왔다. 서 신부는 8.15광복 후 공산치하에서 고통의 나날을 보내던 중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성당을 군사동원부 건물로서 징발당하였다. 그 해 9월 10일경에서 서 신부는 정치보위부에 연행되었고, 그 10여일 후 유엔군의 북진 때 정치보위부 방공호 속에서 학살당한 서신부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이때부터 송화본당이 침묵의 성당이 되었다.
[참고문헌] 黃海道天主敎會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