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리보(Larribeau) 주교의 한국명. ⇒ 라리보
원주본당 [한] 原州本堂
원주교구 소속 본당으로서 현재는 강원도 원주시 원동 85의 1소재 주교좌 원동본당(園洞本堂)이며, 본당주보는 ‘천주 성총의 모친’이다. 원주본당은 1896년 강원도의 세 번째 본당으로 풍수원본당에서 분할되어, 풍수원을 맡고 있던 르메르(Le Merre, 李) 신부가 원주군청 가까이에 거처할 집을 구입하고 그해 8월 17일 초대(1896∼1898년) 본당신부로 부임하였다. 본당 창설 당시 신자수는 1,137명이고 관할공소는 20개였다. 1898년 7월 2대 리굴로(Rigoulot, 陸) 신부가 부임하였으나, 당시 군수가 천주교에 대해 적대적이었고, 원주읍내에는 신자가정이 넷밖에 없고 예비자도 대부분 공소에 있었으므로 곧 시골로 본당을 옮기려 하다가 1900년 3월 장티푸스에 걸려 사망하였다. 그해 5월 14일 3대 드브레(Devred, 兪) 신부가 부임하였는데 당시 관할지역은 원주 · 원성 · 양평 · 제천 · 영월 · 단양 · 여주 등지였다. 1902년 신부댁 부근의 가옥 열두 채를 모두 매입하여(부지 2,000명) 성당 신축의 터전을 마련하였고, 1904년 4월에는 용소막본당(龍召幕本堂)을 분할하였다. 1906년 8월 시잘레(Chizallet, 池) 신부가 4대 본당신부로 부임하여 2년간 500여명에게 성사를 베풀면서 성당 신축을 위한 목재를 비축하였다. 1909년 1월 조제(Jaugey, 楊) 신부가 5대 본당신부로 부임하여 1910년 문맹퇴치를 위한 야학(夜學)을 설립, 운영하였고, 1913년에는 마침내 건평 70평의 고딕식 성당을 신축,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가졌다(이 성당은 그 뒤 6.25동란으로 전소되고 말았음). 조제 신부가 1914년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어 원주본당은 용소막본당에서 관할하다가 1919년 조제 신부가 귀임, 다시 사목하게 되었다. 1923년에는 6대 폴리(Polly, 沈) 신부가 부임하여 엄격한 인품과 유창한 강론으로 신자들에게 감명을 주었으며 많은 교회 토지를 확보하였다. 1928년 7대 정규량(鄭圭良, 레오) 신부가 부임하여 10년간 사목하는 동안 원주본당은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1931년 4년제 사립학교를 설립, 운영하였으나 1937년 일제의 탄압으로 폐쇄되었고, 1934년에는 소화유치원을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회 수녀들이 부임하여 소화 유치원과 소화학원 학생들을 돌보고 가르쳤다. 1937년말의 신자수는 1,193명이었는데, 1939년 춘천지목구가 설정됨에 따라 서울교구로부터 이에 편입되었다. 1954년에는 건평 120평 규모의 현재의 성당을 신축하여 춘천교구장 퀸란(Quinlan, 具)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가졌다. 1958년 원주시 학성동본당, 1960년 단구동본당이 분할되었고, 1965년에는 원주교구의 설정으로 춘천교구에서 원주교구로 소속이 바뀌었다. 1972년 원주시 봉산동 본당, 1976년에는 일산동 본당이 분할되었고 현재는 원주교구 주교좌 원동본당으로서 신자수는 3,434명이며, 관할공소는 3개이다. 7대 정규량 신부 이후 역대 주임신부는 다음과 같다.
8대(1938~1939년) 유영근(兪榮根, 요한) 신부, 9대(1939~1941년) 배난(Bannan, 安) 신부, 10대(1941~1942년) 김교명(金敎明, 베네딕토) 신부, 11대(1942~1945년) 박일규(朴一圭, 안드레아) 신부, 12대(1945~1948년) 디어리(Deery) 신부, 13대(1948~1949년) 레일리(Reilly, 羅) 신부, 14대(1949~1950년) 커머포드(Comerford, 孔) 신부, 15대(1960~1956년) 디어리(Deery) 신부, 16대(1956~1966년) 양대석(梁大錫, 알로이시오 곤자가) 신부, 17대(1966~1969년) 최창규(崔昌圭?, 발도로메오) 신부, 18대(1969~1969년) 지학순(池學淳, 다니엘) 주교, 19대(1969~1971년) 이학근(李學根, 베네딕토) 신부, 20대(1971~1976년) 이영섭(李永燮, 프란치스코) 신부, 21대(1976~1979년) 최기식(崔基植, 베네딕토) 신부, 22대(1979~1983년) 김지석(金智錫, 야고보) 신부, 23대(1983~1984년 현재) 안승길(安承吉, 로베르토) 신부.
원주교구 [한] 原州敎區
원주를 중심으로 강원도의 일부를 관할하는 교구. 로마 교황 바오로 6세는 한국 교회가 날로 크게 발전하고 있음을 알고, 1965년 3월 22일에 춘천교구(春川敎區)의 일부지방을 떼어, 원주교구를 설정함과 아울러, 지학순(池學淳) 신부를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하고, 그 해 6월 29일에 주교 성성식(成聖式)을 갖게 하였다.
원주교구의 관할지역은 원래 강원도(江原道)와 충청북도(忠淸北道)의 북쪽 산악지대에 펼쳐 있으므로, 조선 교회 창설 이래 거듭된 박해에서 살아남은 천주교인들이 화를 면화고자 피신하여 화전(火田)을 일구어 삶을 이어가면서 신앙을 지켜 내려온 고장이 많았다. 1801년, 초기 한국 교회의 주요인물인 황사영(黃嗣永)이 박해를 피해, 제천 배론[舟論]이라는 산골짜기 토굴에 숨어, 이른바 백서(帛書)를 작성하고 체포되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당이 1856년 제4대 조선교구장인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에 의해 세워진 곳도 바로 이 곳이었다.
이렇듯 유서 깊은 고장인 이곳에도 1886년 한불조약(韓佛條約)의 체결 이후 신교의 자유가 찾아오자, 이제까지 숨어서 신앙생활을 계속해 오던 신자들이 이제는 공공연하게 이웃에도 복음을 전하니, 1887년에 입국한 르메르(Le Merre, 李類斯) 신부가 1890년 횡성군의 풍수원(豊水院)에다 성당 터전을 마련했을 때에는, 이웃 가까운 마을에서 모여든 신자만도 2,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1982년 말 현재 원주교구의 관할지역은 강원도의 원주(原州), 동해(東海), 태백(太白)의 3개 시(市)와, 원성(原城), 영월(寧越), 정선(旌善), 삼척(三陟), 횡성(橫城)의 5개 군(郡)과 충청북도의 제천시(堤川市), 제원군(堤原郡), 단양군(丹陽郡)을 포함하고 있는데 1983년말 교세는 다음과 같다.
신자수 4만 135명, 본당수 27개소, 공소 85개소, 한국인 신부 35명, 한국인 수녀 51명, 외국인 수녀 1명, 여자수도단체 9, 유치원 20개소, 중학교 1개교, 고등학교 1개교, 주일학교 45개소 등이다.
원죄 없는 잉태 [한] 原罪~孕胎 [라] conceptio immaculata [영] immaculate conception
마리아가 잉태 첫 순간부터 원죄의 아무 흔적도 받지 않았다는 교리. 이는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기에 적합하도록 그리스도의 예견된 공로에 비추어 미리 하느님이 섭리한신 특전이다. 교회는 ‘원죄없는 잉태’가 사도들에게 계시되어 교회 내에 전래되어 온 교리의 일부라고 가르친다. 성서에는 원죄 없는 잉태 교리에 대한 명시적인 표현이 없다. 그러나 사도들의 구두 가르침에 이 교리가 포함되어 있었고, 다른 명확한 가르침에 은연중 내포되어 있었는데, 이는 복음의 씨앗이 그리스도 교인의 가슴에 열매를 맺고 난 이후에 비로소 전면에 드러난 것이다. 성서상 간접적인 근거로 창세 3:15와 루가1:28을 들기도 하지만, 원죄 없는 잉태에 대한 뚜렷한 신앙은 마리아의 성덕(聖德)에 대한 일반적인 교리를 구체화하는데서 비롯되었다.
루가복음 제1장과 제2장은 마리아를 예외적으로 거룩한 사람으로 보고 있으며 그녀의 성덕을 그리스도의 어머니로 선택받은 사실과 관련시킨다.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루가 1:30-31), 이러한 마리아의 성덕은 성모 영보 때 뿐 아니라 마리아의 잉태 순간부터 갖추었음이 수세기가 지난 후에 비로소 밝혀졌다.
① 초기의 발전 : 초대 교회의 교부들은 마리아를 거룩하다고 여겼으나 죄의 흔적이 없다고 보지는 않았다. 시일이 지나면서 교회 안에서는 마리아의 성덕에 대한 신심으로 발전하였고, 한편 마리아가 잉태될 때부터 원죄에 물들지 않았다는 신심의 발전을 보았다. 이 신심은 8-9세기까지 비잔틴 세계 일대에 널리 전파되었다. 그러나 서방세계에는 전파 속도가 느린 편이었다. 아와 같은 신심의 발전은 마리아가 받은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나 명제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교인들의 가슴속에서 공통적으로 느끼는 신앙감(sensus fidei) 때문이었다. 복음을 실천하는 일상생활 가운데 그들은 이 진리를 긍정하고 싶은 내면적 요구를 경함한 것이다. 이 신심은 원죄 교리와 조화시키지 못했으나 이 시기에는 별다른 논쟁이 없었다.
② 중세 서방교회 : 서방교회는 1125년경 마리아의 잉태를 기념하는 축일을 부활시켰는데, 이때에 즈음하여 미리아의 잉태가 지닌 성격이 논점으로 부각되었다. 스콜라 신학자들에 의하면, 마리아가 원죄에 물든 적이 없다면 만인(萬人)의 구세주인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았다고 할 수 없지 않느냐 하는 점이 문제되었다. 즉 원죄 없는 잉태와 구원의 보편성을 조화시키는 문제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마리아가 원죄에 물들었으나 탄생 전에 원죄의 사함을 받았다고 설명했으나 요한 둔스 스코투스는 선행구속(先行救贖)이란 개념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즉 마리아는 아담의 후손이므로 의당히 원죄의 죄과를 받아야 했지만 하느님은 그리스도의 예견(豫見)된 공로에 비추어 마리아를 원죄에서 면제해 주기로 하셨다는 것이다.
③ 교의(敎義)의 규정 : 역대의 교황은 오랫동안 이 문제를 신학자들의 연구대상으로 남기었다. 17세기에 이르러 이를 믿을 교리로 규정에 달라는 신자들의 빗발치는 요청에도 불구하고 여러 교황은 거절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15세는 “끊임없이 기도했으나 성령은 이 신비의 비밀을 열어 보이지 않고 있다”고 대답하였다. 마침내 1854년 교황 비오 9세는 주교들과 신학자들의 협의를 거쳐 이를 교의로 선포하였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자기의 잉태 첫 순간에 전능하신 하느님의 특별은총과 특권으로 말미암아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예견된 공로에 비추어 원죄의 아무 흔적도 받지 않도록 보호되셨다.” 이처럼 단정하는 근거는 성령의 도유를 받은 신자들의 총체가 공통적 신앙감을 지니고 신앙이나 도덕에 관하여 같은 견해를 표시할 때 그 총체는 믿음에 있어서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교회 헌장 12참조).
원죄 [한] 原罪 [라] peccatum originale [영] original sin [관련] 죄
죄에 대한 이해의 하나로서 원조 아담의 범죄와 이로 인한 은총의 결핍상태. 이는 3세기에 유아세례 문제를 계기로 이론적인 발전을 하였다. 유아는 태어날 때부터 ‘죄의 얼룩’이 있다는 믿음에 대하여 펠라지우스파의 사람들은 그것을 악한 표양의 문제로 보았다. 즉 한 두 차례 어떤 범죄 행위가 이루어질 때 그 행위를 상상조차 못했던 다른 사람들이 그러한 행위를 하기가 용이해진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노는 아담을 근본적 범죄자로 보고 그 안에 모든 후손들을 결합시켜 주는 사람으로 여겼으며 아담이 범죄했을 때 자기 후손들을 존재의 근원에 있어서 오염시켰다고 하였다.
원죄에 대한 성서적 근거는 창세기 2장과 제 3장 및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제5장이며, 트리엔트 공의회가 원죄에 관하여 규정한 교리가 전통적인 교리로 남아 있다. 즉 원죄의 본질은 아담의 불순명으로 인한 거룩함과 의로움의 결핍이며 그 결과는 욕망과 고통과 죽음이요, 그 결핍의 상태가 번식에 의하여 후손에게 그 책임을 묻는 이유는 인류를 하나의 연대적인 인격체로 보기 때문이다.
성서의 고전적인 해석에 기초를 둔 이러한 전통적인 원죄 교리를 우리 시대에 의미가 있으면서 전통에도 맞는 표현으로 새롭게 이해하려는 노력이 신학자들 사이에 계속되고 있다. 헬비히, 레켄즈 등은 성서 기자의 관점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면서,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인류사의 연대기가 아니라 현재의 인간조건의 의미를 밝히려는 의도로 쓰여진 고전적 이야기 형식이라 한다. 아담 즉 남자와, 하와 즉 살아있는 자의 어머니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하느님에 의하여 존재한다. 그들의 존재는 전인적(全人的)이고 완전하고 통일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범죄로 한 가지 죄가 다른 죄를 유발하고 한 세대의 죄가 다음 세대의 죄로 이전되어 온 인류가 죄악의 상태 속에 뒤얽히게 된다. 이처럼 죄악에 빠져 있는 인류의 보편적인 혼란상태 즉 ‘세상의 죄’가 바로 원죄에 대한 근본적 성서적 개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는 인간이 하느님의 은총에로 나아가는 길을 막는 저항의 벽을 구축하는 것이 된다.
쇼넨베르크(Piet Schoonenberg)에 의하면, 인간은 출생함으로써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이러한 상태의 영향을 받게 된다. 인간이 말도 못하고 자아의식이 분명치 못한 채 태어나서, 성장하여 스스로 자신의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시점에 도달하기 전에, 많은 선택이 그를 대신하여 다른 사람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조건지어지고 방향지어졌으므로, 인간이 태어난 상황이란 그 사람 자신의 일부분이며 유전에 못지 않는 큰 부분이다. 갓난 유아라 할지라도 보편적인 죄의 상태 때문에 그 유아의 인생 출발은 어느 정도 훼손되어 있고 난관에 처하게 되어 있다. 즉 인간은 생식에 의하여 그런 상황을 전수받았으나 한편 생식행위 자체와는 무관한 것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 대하여 모든 사람은 공동으로, 각자는 개인적으로 그 책임을 져야한다. 인간은 앞서간 사람들의 선행 때문에 덕을 보는 동시에 그들의 악덕이나 실패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설명은 인류 다원조론(多元祖論)과도 조화될 수 있다. 교황 비오 12세는 회칙 <인류>(Humani generis, 1950)에서, 또 바오로 6세는 1966년 7월 로마에서 열린 원죄에 관한 심포지움에서 다원조론이 원죄교리와 일치되지 않는다고 한 적이 있으나 이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 죄
[참고문헌] C.J. Peter, Original Sin, New Catholic Encyclopedia, McGraw-Hill, 1967 / 유봉준 역, 원죄에 관한 새로운 고찰 / 유재국 역, 원죄에 관한 교리, 사목, 제6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