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돌목장 [한] ~牧場 [영] Isidore Farm

제주도 북제주군 한림읍 금악리의 1236.5ha의 대지위에 소 170여 마리, 면양 1700여 마리, 돼지 3800여 마리의 이시돌목장은 1961년 11월 맥글린치(Patrick McGlinchey, 임피제) 신부에 의해 개설되었다. 현재 이시돌 농촌산업개발협회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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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 [한] ~農村産業開發協會 [영] Isidore Development Association

제주도 북제주군 한림읍 대림리에 위치한 본 협회는 천주교 한림교회의 주임신부 맥글린치(Patrick McGlinchey, 임피제) 신부에 의해 1962년 10월에 설립된 재단법인이다. 농 · 축산분야의 개량사업을 통한 농촌발전을 도모, 축산물의 증산장려, 사회사업, 육영사업을 그 설립목적으로 하며, 이를 위해 산하에 이시도르목장, 사료공장, 수직사, 이시도르의원, 이시도로회관, 양로원, 경로당 등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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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도로 [라] Isidorus

Isidorus(560?~636). 성인. 세빌랴(Sevilla)의 대주교. 교회학자. 축일은 4월 4일. 이시도로(Isidorus)의 초기 생애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고트족(Goths)이 카르타제나(Cartagena)에 침입해 왔을 때 가족들은 세빌랴로 이주, 그는 이곳에서 출생하였다. 뒤에 세빌랴의 대주교가 된 형 성 린더(St. Leander)의 감독하에 수도원에서 교육받았다. 이 동안에 백과전서적인 지식의 기초를 확립, 아리아니즘(Arianism)에 대항하여 가톨릭 수도원에 들어갔고, 600년경 형의 뒤를 이어 세빌랴의 대주교가 되어 학교와 수도원을 세우고 유태교인들의 개종을 위해 일하는 등 스페인 교회와 학문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주요한 스페인의 교회회의(Councils)를 주관했는데, 톨레도(Toledo) 4차 회의(633년)는 특히 유명하다. 1598년 시성되었고 1722년 교회 학자의 칭호가 주어졌다.

그의 저서는 중세기 많은 저술가들이 인용하는 지식의 보고가 되었다. 특히 ≪Etymologiae≫는 당시의 교회와 신학적 문제는 물론 문법, 수사학, 수학, 의학, 역사 전반에 걸친 일종의 백과사전이었다. ≪Sententiarum libri tres≫는 그리스도교 교의에 관한 편람서이며, ≪De ecclesiasticis officiis≫는 수도원의 권리와 의무, 전례에 관한 것이다. ≪Synonyma≫, ≪Chronica Majora≫, ≪Historia de Regibus Gothorum, Vandalorum et Suevorum≫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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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 [한] 李承薰

이승훈(1756~1801). 한국 최초의 영세자이며 한국 천주교회 창설자중의 한 사람. 세례명 베드로. 자는 자술(子述). 호는 만천(晩泉). 본관은 평창(平昌). 이가환(李家煥)의 생질이며 정약용(丁若鏞)의 매부. 서울에서 태어났다. 1780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을 단념하고 학문연구에만 전념하던 중 이벽(李檗)과 사귀게 되어 이벽으로부터 천주교를 배웠다. 1783년 말 이벽의 권유로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된 부친을 따라 북경(北京)에 가 그곳의 북당(北堂)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에게서 교리를 배운 후 그라몽(Jean Joseph de Grammont, 중국명 梁棟材, 1736~1812)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영세자가 되었다. 1874년 초 교리서적, 십자고상, 상본(像本)을 갖고 귀국, 이벽, 정약전(丁若銓) · 정약용 형제, 권일신(權日身) 등에게 세례를 베풀고, 다시 이벽으로 하여금 최창현(崔昌顯), 최인길(崔仁吉), 김종교(金宗敎) 등에게 세례를 베풀게 하여 신자공동체를 형성시켜 이들과 함께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였다. 1785년 명례방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종교집회를 갖던 중 형조(刑曹)의 관헌에게 적발되어 소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발생하자 친척과 집안 식구들의 탄압으로 배교, 천주교서적을 불태우고 벽이문(闢異文)을 지어 자신의 배교를 공언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다시 교회로 돌아와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주도, 신자들에게 세례와 견진 등 성사를 집전했고, 1787년에는 정약용과 함께 반촌(泮村, 현재의 惠化洞)에서 교리를 연구하였다. 1789년 평택현감(平澤縣監)으로 등용되어 선정을 베풀었고 1790년 북경에 파견되었던 조선 교회의 밀사 윤유일(尹有一)이 돌아와 가성직제도와 조상제사를 금지한 북경교구장 구베아(Alexander de Gouvea, 중국명 湯士選, ?~1808) 주교의 명령을 전하자 조상 제사문제로 교회를 떠났다. 1791년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권일신과 함께 체포되어 평택현감 재직시 향교(鄕校)에 배례하지 않았던 사실과 1787년 반촌에서 서학서(西學書)를 공부했던 사건[丁未泮會事件]이 문제되자 다시 배교, 관직을 삭탈당하고 석방되었다. 1794년 12월(음)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입국한 후 이듬해 6월(음) 최인길, 윤유일, 지황(池璜) 등이 주문모 신부를 맞이한 죄로 처형되자 이에 연루되어 예산(禮山)에 유배되었다가 얼마 후 풀려났다. 그러나 1801년 신유(辛酉)박해가 일어나 이듬해 3월 22일 이가환, 정약용, 홍낙민(洪樂敏) 등과 함께 체포되어 의금부(義禁府)의 국청(鞫廳)에서 배교했으나 4월 8일(음 2월 26일) 정약종(丁若鍾), 홍낙민, 홍교만 등 6명과 함께 참수되었다. 그 후 1856년 아들 이신규(李身逵)의 탄원으로 신원(伸寃)되었다.

이승훈은 비록 여러 번 배교하고 교회를 떠났던 인물이지만 초기 한국 천주교회를 주도했고 가성직제도를 주도했던 인물로서 한국 천주교회의 첫 장을 연 인물로 평가되며 그로부터 신앙을 찾은 아들 이신규와 손자 이재의(李在誼)는 1866년에, 증손 이연구(李蓮龜), 이균구(李筠龜)는 1871년에 각각 순교하였다. 이승훈의 유고문집으로 ≪만천유고≫(蔓川遺稿)가 있다.

[참고문헌] 샤를르 달레 原著, 安應烈 · 崔奭祐 譯註, 韓國天主敎會史, 上, 1979 / 崔奭祐, 韓國天主敎會의 歷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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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교 [한] ~敎 [영] Islam

서남아시아에서 나온 유일신적 종교 가운데 인류역사의 무대에 가장 뒤늦게 등장한 최후의 세계적 종교이다. 7세기 전반에 아라비아반도의 홍해안에서 나타난 이슬람의 가르침은 경전인 코란(Quran, 續經) 속에 들어있다. 코란은 교조(敎祖) 무하마드(Muhammad, 570년경~632)가 예언자로 자처한 40세 때부터 사망시까지 수시로 받은 계시를 수록한 책이다. 예언자는 10여년간 그의 고향인 메카에서 선교활동을 했으나 성공은커녕 박해를 견디지 못하여 622년에 메디나로 이주(hijra)하였다. 이 해가 곧 이슬람력(曆)의 시작인 히즈라 원년이다. 이때부터 이슬람은 급성장하여 예언자의 사망시까지 아라비아반도의 대부분을 석권하였다. 메디나에서 무하마드는 예언자로서 뿐만 아니라 이슬람공동체(Ummah)의 지도자로서 활약하였다. 이 공동체는 단순한 믿음의 공동체만이 아니고 스스로의 법제(法制) 성부 및 사회체제를 구비한 공동체였다. 이러한 이중적인 구조 때문에 이슬람은 종교인 동시에 국가인 것이다. 그것도 이원적인 것이 아니라 일원적인 것으로 그 추종자(muslim)는 보는 것이다.

무하마드의 후계자들은 아라비아반도 밖으로 정복을 개시하여 교조가 죽은 뒤 백년도 채 못 되어 동쪽으로는 중앙아시아의 중국접경과 인더스강 유역에서 서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를 거쳐 서쪽으로 스페인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이 정복지 가운데 스페인을 제외한 지역은 무슬림 다수지역으로 현존하고 있다. 그 뒤 정복에 의한 포교보다 무역을 통한 포교활동으로 이슬람은 동남아시아 즉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지역과 검은 아프리카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유럽의 발칸지역과 중국의 신강성 지역에도 진출했으나 그 한계를 넘어서는 이슬람의 선교사업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현재 세계 총인구의 6분의 1을 무슬림으로 추정하고 있다.

1. 교리(敎理) : 무슬림의 믿음과 사상이 명시되어 있는 쿠란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하여 무하마드에게 아랍어로 전달된 하느님의 말씀으로 본다. 예언자의 사후 새로운 계시가 끊어지고 쿠란만으로는 새로운 사태의 해결에 대한 방안을 마련하는데 미흡함을 느끼자 무슬림은 이를 보완할 방법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 무하마드는 절대과오를 범하지 않는 완전한 인간으로 전제하고 그의 생애에 착안하여 일여건 아래 그가 취한 행동과 가르침을 집대성하여 입법(立法)의 자료로 삼으니 곧 하디스(Hadith, 傳承)이다. 따라서 무하마드의 관행(慣行, sunnah)은 독실한 신자들이 따라야 할 기준이 된다고 보고, 스스로를 관행의 추종자(ahl al-sunnah)라고 부르니 곧 무슬림의 8할 이상을 점유하는 수니(sunni)파이다.

이슬람에서 무하마드의 중요성은 무슬림의 신조 가운데 신조인 신앙의 고백(shahada, 證言)즉 “알라(Allah, 하느님) 외에 다른 신은 없고 무하마드는 그의 사자(使者)다”란 두 구절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두 구절은 심지어 현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기 속에 명시되어 있을 정도이며 쿠란 속에 함께 나란히 표현되어 있지 않으나 한 구절씩 분리되어 자주 나타난다. 이 두 구절을 외우는 것은 곧 스스로 자기신분이 무슬림임을 밝히는 행위이며 또한 하느님을 믿는 이와 믿지 않는 이의 구분은 물론 다른 종교의 추종자와 무슬림이 구분되는 것이다. 즉 무하마드 는 단순히 수많은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고 하느님이 보낸 마지막 예언자이기 때문에 그가 받은 계시는 완벽하며 절대 변할 수 없는 하느님의 뜻인 것이다. 그는 역사적 인물로 잊혀지는 것이 아니고 하디스를 통하여 무슬림의 마음속에 마치 현실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공정하고 따뜻한 스승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코란은 114장(sura)으로 되어 있으며 제1장을 제외하고는 그 길이가 긴 것부터 짧은 것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 이슬람의 신조는 6신 5행(六信五行)으로 표현할 수 있다. 다섯 가지 믿음(iman)에는 알라, 천사, 예언자, 성서, 최후의 심판 및 천명(天命, gadr)이 있다. 엄격한 유일신교인 이슬람에서는 신에 버금가는 존재는 물론 어떠한 동반자도 있을 수 없다. 절대신(絶對神) 알라는 세계 도처의 각 민족에게 필요시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를 보낸다. 이들 예언자는 아담에서 시작하여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 등을 거쳐 무하마드에서 끝이 난다.

코란 3장 66절에서 아브라함은 유태교인도 그리스도교인도 아닌 순수한 무슬림[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이]이어서 알라에게 동반자를 두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것은 은연중에 유태교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구약성서와 신약성서)으로 혼탁해진 유일신사상을 이슬람이 쇄신하여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의 순수한 유일신사상을 다시 희생시켰음을 보이고 있다.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 예언자로 보는 점이 특이하며 최후의 심판에서 그리스도교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천명(天命)의 원리에서 하느님은 모든 인간의 운명을 규정하는 것으로 보고, 인간의 자유의지는 하느님의 절대영역인 창조에 대한 침범으로 보고 생각한다.

다섯 가지 헌신적 행동(islam 순종, 또는 ibadat 헌신)에는 신앙의 고백, 예배, 종교세(zakat), 단식, 순례가 있다. 신앙의 고백은 신자가 자기 신분이 무슬림임을 밝히는 것이다. 예배는 하루에 다섯 번 정해진 시간에 메카의 카바(kaabah) 신전에 있는 검은 돌을 향하여(qiblah)[예배의 방향] 행하며, 금요일 오후 1시경에는 성원(聖院)에서 집단예배를 가진다. 전세계 무슬림이 같은 시간에 같은 방향을 향하여 예배를 올리는 것은 무슬림의 유대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단식은 이슬람력 9월인 라마단(Ramadhan)의 한 달 동안에 병자, 임신부, 여행자를 제외한 성인남녀 신자 모두가 아침 해뜰 때부터 저녁 해질 때까지 먹거나, 마시거나 피우지 않는 완전한 금욕행위를 말한다. 재력이 허용되는 신자는 일생에 적어도 한 번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스마일이 세웠다는 메카의 카바신전과 무하마드의 무덤이 있는 메디나 등의 성지순례를 이슬람력 12월에 해야 한다. 이 순례를 의식에 따라 마친 신자는 하지(hajji)[순례를 행한 이]라는 칭호가 그 이름 앞에 공식적으로 붙게 되며 이것도 무슬림의 세계적 단결을 도모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2. 종파 : 이슬람은 정치와 종교가 합일되어 있기 때문에 종파의 발생도 정치적 투쟁에서 유래된 것이 많다. 예언자의 사후 그의 후계자 문제를 놓고 그의 동료(sahabah) 가운데 일부는 그의 사촌이며 사위인 알리(‘Ali)를 옹호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막역한 친구이며 연장자인 아부 바르크(Abu Bakr)를 할리파(Khalifah, 후계자)로 추대하였다. 결국 알리는 네 번째 할리파로 선임되었다. 뒤에 그의 추종자들은 정치적 파당에서 신학적 이론을 발전시켜 그를 완전무결한 인간(imam)으로 승화시키니 곧 시아(shi‘a, 무리)파이다.

이에 반하여 알리를 포함하여 그의 세 선임자 모두를 받아들여 즉 이루어진 관행을 그대로 인정하는 파가 정통파인 수니파이다. 시아파는 카리스마적인 개인인 이맘(imam)[앞에 서는 이, 즉 지도자, 또는 집단예배 인도자]을 공동체의 핵으로 보는 대신에 수니파는 카리스마적인 움마를 내세웠다. 전자는 무하마드의 완전무결성(‘ismah)이 알리를 통하여 그 자손인 이맘에게 이어받은 것으로 보나 후자는 움마가 이어받았다고 믿었다. 양파의 이슬람 교리논쟁을 통하여 이슬람신학은 크게 발전하였다. 수니파는 집권세력으로 그리스철학의 논리를 받아들여 그 신학을 체계화시켰고 시아파는 이슬람 등장 이전에 서남아시아에 있었던 여러 신앙과 접목(接木)되어 비교적(秘敎的)인 색채를 띠게 되었다.

전체 무슬림의 2할도 못되는 시아파의 집권 수니세력에 저항하는 재야세력으로 상당한 기간 존속했기 때문에 강력한 지도자를 구심점으로 삼았다. 그래서 이맘이 알리의 자손 가운데 누가 되느냐 하는 문제로 여러 분파가 나왔으나 재야세력으로서의 공통점을 그대로 간직하였다. 즉 비밀결사성, 시아적인 신분을 위험시에 감출 수 있는 가장성, 완전무결한 이맘의 비교적 지식 소유 및 언젠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구세주사상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시아파는 알리로부터 시작되는 이맘서열에서 제5대 이맘이 누구인가 하는 분규가 발생하여 다섯 이맘파인 자이드(Zaid)파가 분기해 나갔다. 이 파의 추종자는 현재 예멘에 다수가 잔존해 있다. 또다시 제7대 이맘의 적격자 문제로 일곱 이맘파가 분리해 나가니 곧 이스마일(Ism‘ail)파이다. 이 파는 극단적으로 흘러 혁명적 행동주의를 낳았다. 이 파에서 다시 11세기 전후에 활동한 암살단파[hashshashin, 일종의 대마초, 즉 저명인을 암살하기 전에 대마초를 복용했다함. 여기서 십자군을 통해 영어의 assassin이 유래]를 비롯하여, 레바논의 드루즈(Druzes, 일명 Hakimis)파, 시리아의 알라위(Alawis, 일명 Nusairis)파가 파생하였다. 순수한 이스마일파의 추종자는 오늘날 인도, 파키스탄, 동부 아프리카 지역에 산재해 있다.

한편 시아파의 대종을 이루는 열두 이맘파는 열두 번째 이맘인 무하마드 알-문타지르(Muhammad al-Muntazir, ?~878)는 죽지 않고 숨어 있으며 언젠가는 구세주로 돌아온다고 믿고 있다. 이 파는 16세부터 이란의 국교로 인정되어 현재 이란, 이라크를 비롯한 서남아시아의 각 지역에 살고 있다. 이 파는 이마미(imami)파라는 이름도 사용한다. 흔히 시아파라고 부를 때는 보통 이 파를 지칭한다.

3. 명칭의 유래와 우리나라와의 관계 : 이슬람(Islam)은 아랍어로 하느님께 절대 순종한다는 동명사(動名詞, masdar)이며 그 능동분사가 곧 무슬림(muslim, 절대 순종하는 이)이다. 영어에서 무하마드를 지칭하는 Mohammed에서 Mohammedanism이 파생하여 모하메드교라고도 부르나 이 명칭은 무슬림이 매우 싫어한다. 즉 그들은 알라를 믿는 것이지 무하마드를 믿지 않는다는 논리에 그 이유를 두고 있다. 이슬람교의 우리 고유 명칭은 회교(回敎) 또는 회회교(回回敎)이다.

이 명칭은 중국 신강성의 회흘(回紇) 사람들이 믿는 종교란 뜻으로 명청(明淸)대의 중국인들이 부른데서 유래하였다. 당송(唐宋)대의 사료에는 대식인(大食人) 또는 대식국인(大食國人)이란 용어가 회회를 대신하였다. 대식(大食)은 그 어원을 따지면 종교를 가리킨다기보다 페르시아인들이 아랍인들을 타지(Tazi)라 부른데서 당어(唐語)로 음역(音譯)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중동의 이슬람교도를 인종에 구애받지 않고 흔히 지칭한 것 같다.

당송대의 중국 이슬람교도들은 이슬람을 청진교(淸津敎)라고 부르고 스스로를 청진교도, 그들의 성원을 청진사(淸津寺)라 불렀다. 회흘지역이 이슬람화되자 명청대의 중국인들은 이 지역을 회강성(回疆省)이라고 부르고, 그 주민들은 회민(回民) 내지 회회인(回回人)이라 부른데서 회교 또는 회회교란 명칭이 일반화된 것이다. ≪고려사≫ 전반부에는 대식이란 명칭이 나타나 고려 후기에 생성된 고려가요에는 ‘회회아비’란 표현이 있다. 고려가 원(元) 나라의 부마국(駙馬國)으로 사실상 그 속국이 되자 신강성 지역의 터키계 이슬람교도들이 원의 관리로 또는 고려왕비가 된 원의 공주수행원으로 고려에 들어온 데서 이 표현이 나온 것 같다. 그 좋은 예가 덕수장씨(德水張氏)의 시조가 된 삼가(三哥)라는 인물은 ≪고려사≫에 회회인으로 소개되고 있다.

9세기경에 출간된 아랍문헌에는 우리나라가 Sila 또는 Shila로 소개되었다. 이것은 신라(新羅)의 음역임이 분명하다. 즉 신라는 공기와 물이 맑은 나라로서 병자가 들어가면 병이 저절로 치유되며 금이 많은 나라여서 무슬림이 들어가면 그곳에 정착하여 돌아오지 않는다고 기술되어 있다(한국사연구, 1977년 4월 제16호 拙稿, <이슬람文獻에 비친 한국像> 참조). 13세기의 일한조(Ilkhan, 1256~1353)의 재상인 라시드 알-딘(Rashid al-Din, ?~1318)은 그의 저서 속에 Kaoli(高麗의 中國語音譯)를 원의 부마국으로 소개하였다. 조선조의 세종 때에 이슬람력(回回曆)이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그 뒤 유럽국가가 강성해지고 무슬림국가는 상대적으로 약화됨에 따라 이들의 한반도 출입도 끊어졌다. 이와 함께 일부 정착한 대식인이나 회회인의 후손도 동화되어 사라진 것 같다.

우리나라에 이슬람교가 다시 들어온 것은 6.25동란 때 터키군을 수행한 이맘[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목사격]이 한국인과 접촉한데서 기원한다. 현재 서울의 이태원에 본부가 있는 한국 이슬람교중앙연합회는 그 산하에 3개의 이슬람성원을 각각 서울, 부산, 경기도 광주에 두고 있다. 신자수는 수천명으로 추산된다. (金定慰)

[참고문헌] H.A.R. Gibb, Muhammedanism, ed. 2, London 1961 / H. Lammens, Islam, Beliefs and Institution, trans. E.D. Ross, London 1929 / F. Rahman, Islam, Chicago 1966 / Encyclopaedia of Islam, Leyden 1913~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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