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원] Israel

‘하느님과 싸우다’ 혹은 ‘하느님은 강하다’라는 의미를 갖는 이스라엘이란 말은 계약을 통하여 하느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성조 야곱(Jacob)에게서 유래되었다. 이사악의 둘째 아들인 야곱이 장자상속(長子相續)의 문제로 불화상태에 있던 형 에사오와 화해하기 위해 그를 만나러 가는 도중 어떤 사람과 만나 밤이 새도록 씨름을 하며 겨뤘는데, 날이 밝자 그와 겨루던 사람이 “너는 하느님과 겨루어 냈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긴 사람이니 앞으로는 너의 이름을 야곱이라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하여라” 하고서는 야곱에게 축복을 내리고 떠나갔다(창세 32:23-32)는 기록이 성서에 나오는데 그 뒤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하느님께서 축복을 내리신 야곱과 그의 후손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12지파로 나뉘어진 야곱의 후손들은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통하여 자신들이 하느님의 백성이란 점을 상기하곤 했는데(창세 34:7, 출애 1:1) 기원전 11세기경에 이르면 가나안을 중심으로 왕국을 세우고, 이를 이스라엘이라 부르기에 이르렀다. 기원전 933년경 왕국이 남북으로 분열될 때 남왕국은 유다라는 국명을 취하였고, 북왕국은 그대로 이스라엘이란 국명을 따랐다. 그 후 남북왕국이 모두 멸망하고 바빌론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레위족의 사제들과 구별하여 평신자만을 이스라엘 백성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어쨌든 구약시대까지 이스라엘이란 말은 선택된 하느님의 백성을 가리키는 말이긴 했지만 종속적인 범위를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그 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스라엘이란 말은 종속적인 범위를 넘어선 용어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즉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하느님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로가 ‘간택받은 자’(갈라 6:16)를 이스라엘이라 부르고 있음은 이를 잘 입증해 준다 하겠다.

한편 신약시대 이후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지 않고 있던 유태인들 가운데에는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고집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1947년 서아시아 지방 지중해 연안에다 그들의 국가를 세우고 이를 이스라엘이라 칭하였다. 이 이스라엘은 2만 770km 의 면적에 402만명의 인구를 가진 국가로 주민의 90%가 유태인이며, 히브리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1982년말 현재 전국민의 3.2%인 13만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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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이 [한] 李順伊

이순이(1781~1802). 동정순교자, 세례명 루갈다, 아명은 유희. 서울에서 부(父) 이윤하(李潤夏)와 모(母) 권씨(權氏)[權哲身의 누이동생] 사이의 2남 1녀 중 장녀로 출생. 어려서부터 어머니 권씨의 모범을 따라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장했고 1795년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입국하자 3일동안 성사를 예비한 후 성체성사를 받고 곧 수정(守貞)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조선 풍습 때문에 동정 생활이 불가능해지자 주문모 신부의 허락과 알선으로 역시 동정생활을 원하던 유중철(柳重哲, 요한)[柳恒儉의 長男]과 1797년 동정부부로서 결혼하였고 이듬해 9월 시가(媤家)인 전주(全州)에서 서로 동정서원을 한 후, 남편과 함께 서로 격려하며 끊임없는 극기와 인내로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순교하기까지 4년 동안이나 성모마리아와 성 요셉 같은 결혼생활을 하였다.

1801년 3월 신유박해(辛酉迫害) 중 시부(媤父) 유항검과 남편이 소위 ‘대박청래’(大舶請來) 사건과 연루되어 체포된 뒤 전주옥에 갇혔고 이어 10월 18일(음 9월 11일) 국청(鞫廳)에서 사형이 선고되어 전주로 환송되자 나머지 시댁 식구들과 10월 22일(음 9월 보름)경 체포되어 전주옥에 갇혔고 이어 10월 24일 시부 유항검이, 11월 14일 남편 유중철이 순교한 후 이듬해 1월 31일 (음 1801년 12월 28일) 시모 신희(申喜), 시숙모 이육희(李六喜), 시사촌동생 유중성(柳重誠, 마테오) 등과 함께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당해 순교하였다. 순교하기 전 어머니 권씨, 친언니와 올케 등에게 보낸 옥중서간을 남겼고 이는 후에 1802년 1월 29일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큰오빠 이경도(李景陶, 가롤로)가 순교 전날 어머니 권씨에게 보낸 서한, 1827년 전주옥에서 옥사(獄死)한 동생 이경언(李景彦, 바오로)의 일지 등과 합쳐져 ≪누갈다 초남이 일기남매≫라는 제목으로 필사되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유해는 순교 후 전주 초남리(草南里)에 안장되었다가 1920년 라크루(Lacrouts, 具瑪瑟) 신부에 의해 중바위산으로 이장되어 유중철, 신희, 이육희, 유중성 4인의 유해와 함께 합장되었다.

[참고문헌] 샤를르 달레 原著, 安應烈 · 崔奭佑 譯註, 韓國天主敎會史, 上 · 中 · 下, 분도출판사, 1979~1980 / 金玉姬, 李루갈다의 獄中書簡과 그 史的 意義, 崔奭佑神父華甲紀念 韓國敎會史論叢, 韓國敎會史硏究所, 1982 / 柳洪烈, 韓國天主敎會史, 上 · 下, 가톨릭出版社,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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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석 [한] 李順石

이순석(1905~1986). 공예가. 세례명은 바오로, 호는 하라(賀羅). 충남 아산(牙山)의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나 서울 남대문 상업학교를 다니다가 일본에 건너가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동경 미술학교에 입학, 도안(圖案)을 전공하고 1931년에 졸업하였다. 그 후 한국 근대 그래픽 디자인의 개척자로서 활약하였으나, 일제(日帝)의 식민지 정책이던 조선미술전람회(鮮展) 공예부 참가는 일절 거부하였다. 반면, 그는 가톨릭 집안의 미술학도로서 1923년에 서울 중림동 성당을 위해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두 상본화(像本畵)를 반신상 유화로 그려 성당 안 양 벽에 걸게 했었으나, 6.25전쟁 중에 파괴되어 없어졌다. 8.15광복 후에는 1946년부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응용미술과 교수로 지내고, 1969년에 정년퇴임하고는 명예교수를 역임하였다. 1954년에 서울 미도파백화점 화랑에서 개최된 종합적인 첫 성미술전(聖美術展)은 장발(張勃)을 중심으로 하여 그가 조직하였고, 그 공예 부문에 <십자가의 촛대>를 출품했으며, 1970년에 서울 가톨릭미술가협회가 창립되자 초대회장으로 추대되어 다음해부터의 회원작품전에 빠짐없이 출품하였다. 순수 작품활동으로는 1947년 이후 1978년까지 국내외에서 9회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국전(國展)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그밖에 상공미술전(商工美術展) 심사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70년대 이후에는 주로 돌공예에 열중하였다. 1961년에 유럽의 현대 공예를 연구시찰한 뒤 제1회 세계공예 회의(1964년, 뉴욕)와 제2회 회의(1969년, 인도)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다. 1969년에는 또 독일 시투트가르트에서 열린 국제공예전에 대리석 작품 5점을 출품, 우수상에 뽑혔다. 그러한 여러 공로로 서울시 문화상(1955년), 대한민국문화훈장 대통령상(1962년), 한국문화예술상, 대통령상(1969년) 등을 수상하였다. 대표적인 성미술 작품으로는 <순교자>(1971), <성모승천>(1973) 등이 있다.

[참고 : 이순석은 1986년 10월 7일 82세로 선종하여,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산북리 청량리 본당 천주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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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광 [한] 李睟光

이수광(1563~1628). 조선조 중엽(中葉)의 정치가이며, 유학자, 시인(詩人)으로 실학운동의 개척자. 1563년(明宗 18년) 2월 경기도 장단(長湍)에서 태어나 자(字)를 윤경(潤卿), 호를 지봉(芝峰)이라고 하였다. 조선 건국의 주동자인 태종(太宗)의 7대 후손으로 어려서부터 학문을 즐겨 읽고 16세 때에 이미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했고, 22세 때에는 별시대과(別試大科)에 합격함으로써, 관계에서 출세의 길을 달리게 되었다. 그는 선조(宣祖)와 광해군(光海君), 인조(仁祖)의 3대에 걸쳐 이조(吏曹), 병조(兵曹), 공조(工曹) 등의 판서를 위시하여 홍문관(弘文館) 대제학(大提學), 대사헌(大司憲)과 여러 고을의 부사(府使)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정치가로서의 수완을 발휘했고,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 등 전란(戰亂)으로 황폐해진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데도 큰 공을 세웠다.

그는 또한 재위기간 중 3차에 걸쳐 북경에 사신으로 왕래하는 동안, 그곳에서 접촉하게 된 서양학술사상에 관한 지식을 처음으로 소개함으로써 실학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젊었을 때부터 시문(詩文)에 능통했던 그는 연행사(燕行使)로 중국 북경에 다녀올 때마다 견문을 넓힘과 아울러 이를 시문으로 적어두고, 북경에서 얻어온 책들을 탐독하여 그 개요를 적어 두었었다. 이렇게 해서 60평생 동안 적어 두고 저술한 책은 ≪지봉유설≫(芝峰類說)을 비롯하여 모두 78권에 이른다.

그의 이와 같은 저술은 그의 생존시부터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지봉유설≫은 그 속에서 서양의 여러 나라와 종교를 소개함으로써, 주자학에만 사로잡혀 있던 당시의 국민들에게 그들의 우주관 내지는 인생관을 일신케 하는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특히 이수광은 그의 저서 ≪지봉유설≫에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의 저서 ≪천주실의≫(天主實義)와 ≪교우론≫(交友論) 등 천주교 서적들을 소개하면서 약간의 비평까지도 가해 천주교를 우리나라에 소개하였는데, 이런 것이 인연이 되어서인지 그의 후손으로 8대손인 이윤하(李潤夏), 그리고 그의 아들 이경도(李景陶), 딸 루갈다 등은 모두 순교하였다.

[참고문헌] 柳洪烈, 李睟光의 生涯와 그 後孫들의 天主敎信奉, 韓國天主敎會史論文選集, 第1輯, 한국교회사연구소, 1976 / 崔奭佑, 韓國天主敎會의 歷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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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지 [한] 李~

이성지(1778~1835). 순교자. 세례명 세례자 요한. ≪일성록≫(日省錄)에는 이름이 유진(儒震)으로 나온다. 충청도 덕산 높은뫼(현 지명은 忠南 禮山郡 古德面 夢谷里)의 양반 가정에서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신유(辛酉)박해 후 동생들과 함께 입교하여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다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전라도 고산(高山)으로 이사하였다. 그러던 중 1827년 정해(丁亥)박해가 일어나자 온 가족 13명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감영(全州監營)으로 압송되었고, 그곳에서 숱한 형벌과 고문을 이겨내고 9년간의 옥살이 끝에 1835년 4월 11일(음) 옥사(獄死), 순교하였다. 그의 동생들 중 이시임(李時壬)은 1816년 대구에서, 막내 이성삼은 1827년 전주에서 각각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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