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매임 [한] 李梅任

이매임(1788∼1839). 성녀(聖女).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 데레사. 성녀 허계임(許季任)의 시누이. 성녀 이정희(李貞喜) · 이영희(李英喜) 자매의 고모.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20세에 과부가 되어 봉천동(奉天洞)의 친정으로 돌아온 후 한 동네에 사는 여교우의 전교로 입교하였다. 입교 후 친정 식구들을 가르치고 권면하여 신앙으로 인도했고 이어 조카 이영희가 혼기에 이르러 수정(守貞)을 결심하고는 혼담을 피해 상경하자 함께 따라가 살며 열심히 수계하였다. 1839년 4월초 함께 살고 있던 이정희 · 이영희 자매, 김 루시아, 김성임(金成任) 그리고 성사를 보러 상경한 허계임 등과 순교를 결심하고 이들과 함께 4월 11일 남명혁(南明赫)의 집을 파수하던 포졸들에게 자수하였다. 포청과 형조에서 매우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켰고, 결국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7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그 후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 중이던 교황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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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수 [한] 李晩秀 [관련] 토사주문

이만수(1752∼1820). 자(字)는 성중(成仲), 호는 극옹(-翁) 혹은 극원(-園). 연안(延安) 이(李)씨. 복원(福源)의 아들. 1783년 사마시(司馬試)에, 1789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각각 합격, 대사성(大司成) 겸 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 공조판서, 수원유수,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 호조판서, 평안도 관찰사를 지냈다.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 치안유지를 잘못했다는 이유로 유배되었으나 곧 사면되어 수원 유수로 부임했다가 그 곳에서 죽었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였다. 그래서 그가 대제학을 지내던 시절 <토사주문>(討邪奏文)을 짓기도 하였다. <토사주문>이란 황사영 백서(帛書) 사건으로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박해사실 때문에 청나라 황제가 문책할 것을 두려워 한 조정이 진주사(陳奏使)를 보내기로 하고 이 진주사가 청나라 황제를 만났을 때 전한 글을 말한다. (⇒) <토사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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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두 [한] 利瑪竇 [관련] 리치

리치(Ricci)의 중국명. ⇒ 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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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본당 [한] 裡里本當

1935년 전라북도 이리시(裡里市)에 창설된 전주교구 소속 본당. 현 본당명은 창인동(昌仁洞)본당. 주보는 예수 성심. 이리 지역은 천주교 불모지대였으나 1926년 경 이농민(離農民)들이 이리로 몰려들게 되었고 그 가운데 김창언(金昌彦, 프란치스코, 이리 지역의 초대 회장), 손덕로(孫德老, 요셉) 등 5, 6인의 교우가 포함되어있고 결국 그들에 의해 이리에서 5리 정도 떨어진 새실[新興里]에 공소가 개설되었다. 그 후 전주 지역을 담당한 김양홍(金洋洪, 스테파노) 신부의 순방을 받다가 1932년 군산 본당이 창설되자 군산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고, 계속 교세가 발전하여 1934년 이리시 주현동(珠峴洞)에 성당을 건축, 준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이듬해 6월 본당으로 창설되었다. 초대 주임으로 하한주(河漢珠, 요셉) 신부가 부임, 사제관과 부속건물들을 건축했고, 4대 주임 이기순(李基順, 도미니코) 신부는 1948년 이리시의 중심부인 북창동(北昌洞)에 대지 2,000여평을 매입하고 본당 이전에 착수, 6.25 전쟁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1955년 성당건축을 완공하고 본당을 이전했으며, 1967년에는 옛 본당자리에는 주현동의 동이리(東裡里)본당을 분할, 독립시켰다. 그 후 1977년 이리 시내의 도로 신설에 따라 성당이 철거되자 현 본당 자리인 창인동으로 본당이 이전되어 성당이 신축되었고 이때 동명(洞名)에 따라 창인동본당으로 개칭되었다. 1983년 말 교우 수는 2,746명, 공소 1개소이며,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분원이 설치되어 있다. 역대 주임 신부 명단은 다음과 같다. 1대(1935∼1939. 3) 하한주, 2대(1939. 3∼1941. 5) 김기봉(金基奉, 필립보), 3대(1941. 5∼1947. 4) 김영구(金榮九, 베드로), 4대(1947. 4∼1956. 4) 이기순, 5대(1956. 4∼1957. 8) 김후생(金後生, 바오로), 6대(1957. 9∼1962. 12) 정재석(鄭在石, 요셉), 7대(1962. 12∼1964. 6) 김영일(金永鎰, 아우구스티노), 8대(1964. 6∼1966. 7) 박영규(朴永圭, 바르나바), 9대(1966. 7∼1969. 12) 김재덕(金在德, 아우구스티노), 10대(1969. 10∼1970. 8) 김영구 재부임, 11대(1970. 8∼1974. 6) 오현택(吳賢澤, 가시미로), 12대(1974. 6∼1976. 5) 박진량(朴鎭亮, 라우렌시오), 13대(1976. 5∼1978년) 김용태(金容泰, 베네딕토), 14대(1978∼1984년) 김영신(金英信, 바오로), 15대(1984∼현재) 고경훈(高暻勳,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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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레네오 [라] Irenaeus

Irenaeus(140?∼202?). 성인. 초기 교부. 리용(Lyons)의 주교. 생애에 대해 거의 알려진 바가 없으나 소년 때 폴리카르포(Polycarpus)를 따랐다는 사실로 보아 소아시아의 스미르나(Smyrna) 출신으로 추정된다. 로마에서 수학 후 리용의 장로가 되었으며 소아시아의 몬타니즘 신봉자들에게 관용책을 취할 것을 호소하기 위해 로마로 교황 엘레우테리오(Eleutherius)를 방문했을 때 리용에서 벌어진 잔혹한 박해로 주교가 순교하자(177년경) 178년경 이 교구를 계승하였다. 그의 순교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축일은 6월 28일.

최초의 위대한 가톨릭 신학자이자 사상과 행동에 있어서 동서교회의 중요한 연결점이었던 그는 ≪모든 이단을 논박함≫(Adversus Haereses)과 근대에 발견된 ≪사도 연설집≫(Demonstration of the Apostolic Preaching) 등의 작품을 남겼는데 전자는 영지주의(靈知主義) 발렌티누스(Valentinus)의 체계, 몬타니즘 신봉자들에게 인기 있던 천년왕국설에 등에 대한 공격들을 자세히 싣고 있다. 또한 영지주의를 공격함에 있어서도 글레멘스(Clement of Alexandria)처럼 반대되는 그리스도교의 영지주의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주교의 지위, 성서정전, 현존하는 신학적 · 종교적 전통 등 교회의 전통적 요소를 강조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간성에 대하여 나름대로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하였으며 4개 복음서의 상호보완적인 권위를 깊이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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