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관대리구(倭館代理區) 소속 본당. 주보는 성녀 안나. 소재지는 경북 칠곡군 왜관읍 낙산동(慶北 漆谷郡 倭館邑 落山洞 764)이다. 1894년 기와집 한 채를 사서 본당을 설치하고 파이아스(Pailhasse, 河敬朝)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 1895년에 전임되었다. 1913년 5대(1911~1944년) 투르뇌(Tourneux, 呂東宣) 신부 재임시에 구성당이 준공되었고, 1923년 벽돌양옥 성당 및 사제관 신축에 착공, 1924년에 준공, 그해 9월에 축성식이 거행되었다. 1928년 6월 투르뇌 신부 사제서품 25주년 은경축 행사가 있었다. 이해부터 1년간 투르뇌 신부는 신설된 왜관본당 주임을 겸임하였다. 1954년 12월 본당 창설 60주년 기념 기념식을 거행, 1955년 6월 성체거동 행사가 있었다. 현재 본당 관할구역은 왜관읍 일부, 달성군(達成郡)의 하빈면(河濱面)과 다산면(茶山面)이며, 공소는 하빈면의 하산(霞山) 공소, 다사면의 다사공소, 다산면의 논실[蘆谷洞] 공소의 3개소이다. 현 19대 송만협(요셉) 신부는 앞서 1960년부터 1964년까지 15대 주임신부로 재직한 바 있었다. 신자수는 719명(1984년 현재), 공소는 3개소이다.
나훔서 [영] Book of Nahum [한] ~書 [라] Prophetia Nahum
1. 인물 : 엘코시(Elkosh) 출신의 예언자 나훔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길은 그가 남긴 조그마한 예언서밖에 없다. 그나마 이 예언서까지 숱한 주석상의 문제점을 던져주고 있다. 그래서 주석가들이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추정은. 그가 유대 출신의 예언자라는 사실 뿐이다. 왜냐하면 예언자가 유다에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동시에 유다에 구원을 선포하고 외적의 공략이 없으리라는 보장(2:1)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M. Delcor.). 그리고 1:2-8에 있는 시편으로 인해 나훔이 ‘성전(聖殿) 예언자’(un prophete culturel)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나훔이 성전의 제 의식(儀式)과 활동에 정통한 예언자로서 성전 주변에 머무르며 자기 예언직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2. 나훔서의 구조 : 나훔서는 알파벳 순서에 따른 시편(1:2-8)으로 시작되며, 이어 유다에게 구원을 선포하는 언사(言辭, 1:12.13, 2:1-3)와 니느웨(Nineveh)를 위협하는 언사(1:11)로 구성되어 있다. 이 시편에서는 성서에서 잔인하고 호전적인 민족으로 이름난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의 함락에 대해 단도직입적인 말을 하고 있다(2:4-3:19)[R. Weiss, A Comparison between the Masoretic and the Qumran Texts of Nahum 3:1-11, R.Q., 1963, pp.433~439], 한편 1:9-2:3절 사이의 단락은 니느웨가 멸망되기 직전에 쓰여진 것 같다. 물론 몇몇 구절(2:1, 3:8.19)이 니느웨의 함락을 기정사실인 듯 전제하고 있지만, 이는 미래에 일어날 사건을 이미 실현된 듯이 표현하는 ‘역사적 현재’의 기술방법 때문이다[Van Wyck, Allusions to Prehistory and History in the Book of Nahum, Melanges van Sehms, Leiden 1971, pp.222~232]. 이 귀절에서는 하느님 야훼께서 역사를 다스리는 주인(2:14)이라는 사실이 뚜렷하게 부각되어 있다. 그리고 의로운 이는 비극적인 순간에서도(1:12) 구원을 상징하는 하느님의 ‘포도밭’(2:3)으로 인도되나, 불경한 이들이 범한 죄악은 엄청난 벌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3:1. 4-6).
3. 메시지 : 나훔서는 주님의 분노를 알리는 알파벳 순서의 ‘시편 – 예언자의 반성 – 역사적 사건의 회고’ 라는 도식으로 짜여져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배 중, 이 찬미의 노래를 부름으로써 야훼의 지상 통치권을 찬양하였다. 비록 나훔서의 서두에 나오는 이 시편이 예언자 나훔의 생존 당시보다 훨씬 후대에 작시(作詩)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없지 않지만, 아직 확증할 방도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훔이 직접 이 시편을 작시했거나, 아니면 당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노래를 인용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찬양시를 봉독하며 우주를 지배하는 하느님의 권능을 찬미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역사를 주제하는 하느님의 정열과 그분의 선하심과 권능에 대한 신앙을 견고케 할 수가 있었다. 이에 이스라엘 살들은 하느님이 가지 나라만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나라를 괴롭히는 이방민족까지 지배한다고 믿고 있었다.
신앙고백과 찬미로 시작하는 이 예언자의 반성은 그가 선포한 메시지를 역사적 현실을 들어 예시하고 있다. 그가 제시한 하느님은 원수를 응징하는 하느님이요 외로운 이들에게 구원을 베푸나 불경한 이들에게는 벌을 내리는 하느님이다. 물론 여기서 의인(義人)이란 이스라엘 백성이고 악인이란 천벌을 받아 마땅한 아시리아인이다. 예언자는 기도문으로 사용된 이 예언서에 풍부한 비유적 표현을 통해 죄악의 도성(都城) 니느웨가 멸망하리라 예고하였다. 아마 이스라엘 사람들도 전례 때 이 기도문을 읽으면서 니느웨의 함락을 목적의 현실처럼 절감하고, 오랜 시일 동안 신앙과 희망을 고취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나훔서의 저자는 의(義)와 불의(不義)에 대해서 정열적으로 작품을 썼다[De Vries, The Acrostic of Nahum in the Jerusalem Liturgy, VT, 1966, pp.476~481(A. Bentzen, Introduction to the O.T., Copenhagen 1953 참조)].
나훔서의 메시지는 한 마디로 역사 안에 자신을 계시하는 하느님을 찬양하자는 외침이다. 예언자가 전례나 설교에서 역사의 하느님을 상기시키는 의도는 현재 생황의 의미를 깨닫고 지향해야 할 미래의 목표가 어디 있는지 밝히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정자의 전갈에서 중추를 이루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나 모든 인류의 ‘절대 미래’는 바로 하느님이라는 사실이다. (徐仁錫)
[참고문헌] P. Humbert, Essai d’analyse de Nahum 1:2-2:4, ZAW 1926; Le probleme de livre de Nahum, RHPR, 1933 / J. Leclercq, Nahum, in: Etudes sur les prophetes d’Israel, Paris 1954 pp.85~110 / A. George, Nahum, SDB, VI, Col. 291~301, Paris 1958.
나환자촌 [한] 癩患者村 [영] leper colonies [관련] 구라사업
나병은 최근세에 이르기까지 불치의 전염병이라고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1947년 설파제의 발견과 그 발달로 인해 효과적인 치료가 가능해졌고 1950년 이후에는 불치의 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이 나병에 대한 인식은 신 · 구약을 전기(轉期)로 하여 변화하였다. 구약시대에는 나병을 죄가 형상화된 것으로 보거나 사탄이 들린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래서 나환자가 발생하면 일단 사제가 규범에 따라 나병인가 아닌가를 확인하고, 만약 나병이면 그를 ‘부정한 자’ 라고 선언한다. ‘부정한 자’로 선고받은 사람은 진영(陣營)이나, 촌락에서 내쫓겨 그 외곽에서 살아야 하고, 그 사람은 머리를 산발하고 의복의 가슴팍 부근을 찢고 다니면서 거리를 다닐 때에는 ‘부정한 자’ 라고 소리쳐야 한다. 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사람이 이들과 교제하는 것도 금지된다(fp위 13:1-14:57, 민수 5:2, 애가 4:15, 욥기 2:7).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나환자의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인 소외에 깊은 연민과 자비심 및 사랑을 가지고 이들을 치유하였다(마태 8:1-4, 마르 1:40-45, 루가 5:12-16). 그리고 열두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면서 “나병환자를 깨끗이 고쳐주어라”(마태 10:5-8, 마르 6:7-13, 루가 9:1-6)고 분명하게 지시하셨다. 그 후 가톨릭 교회는 나환자들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여 왔다. 1978년 말 전세계 가톨릭 교회가 운영하는 의료시설 중 나환자촌은 537개소에 이른다.
한국 천주교회의 구라사업은 1950년대부터 시작된다. 1945년 이후 평양교구장인 캐롤(George Carroll, 安, 메리놀회 한국지부장) 주교는 서울 근교에서 떠돌아다니는 나환자들에 대한 구호 및 의료사업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48년 현재 성 나자로마을이 있는 자리에 있던 세브란스병원 부속 결핵요양소를 사들여 성 나자로 요양원을 설립하였다. 1955년에는 오랫동안 중국본토에서 구라사업을 해 오던 미국 메리놀회 소속 스위니(Sweeny, 徐) 신부가 한국에 진출하여 진료를 시작하면서 활기를 띠게 된다. 1980년 10월 31일 현재에는 전국 98개 나환자 정착촌 중에 49개소가 가톨릭 교회의 구라사업과 관련을 맺고 있으며, 그 중 25개소는 가톨릭 교회가 직접 설립, 운영하고 있다. 각 교구별 나환자촌은 춘천교구 1개소, 대전교구 1개소, 수원교구 2개소, 부산교구 3개소, 마산교구 1개소 안동교구 6개소, 광주교구 2개소, 전주교구 9개소 등이다. 이들 각 정착촌에 살고 있는 나환자들을 1만 9,916명이다. (⇒) 구라사업
나주본당 [한] 羅州本堂
전라남도의 주읍(主邑)으로 옛날부터 번창하여 왔으며 이 고장에 나주본당 설립 준비기라고 볼 수 있는 병인(丙寅)박해 때 포교에 의해 나주읍에 압송 또는 체포되어 순교한 강영원(姜, 바오로), 유치성(柳致成, 안드레아), 유문보(교명미상) 등 3명의 순혈(殉血)로써 가톨릭과의 접촉이 비롯된다. 이리하여 1933년 5월 당시 나주 십팔은행(十八銀行) 지점장인 임탁일(마태오)의 부인 이(李)루시아가 시장에서 삼종기도를 바치는 양천본당(良川本堂) 복사 이응범(李, 아오스딩)과 만나 이곳에 임시공소를 만들고, 양천본당 박재수(朴在秀, 요한) 신부에게 첫 인사를 드렸다. 1934년 7월 박신부는 대지 3,000평을 매입, 임시성당(건평 50평)과 사제관을 준공하여 1935년 5월 본당 승격을 보았다. 이것이 현재 나주본당이 자리 잡고 있는 전남 금성시 산정동 18번지이다. 당시 교세는 신자수 234명, 공소수는 5개소였다. 1937년에 광주지목구로 승격되어 오늘에 광주 대교구 관하에 있다. 나주본당의 역대 주임신부는, 1대(1935~1942년) 헨리(Harold Henry, 玄, 그후 광주교구 대주교) 신부를 비롯, 2대 (1942. 9~1942. 11) 오기순(吳基順, 알벨도), 3대(1942. 12~1943. 11) 김루수, 4대(1944~1945년) 김양홍(金洋洪, 스테파노), 5대(1945~1949년) 박문규(朴文圭, 미카엘), 6대(1949~1951) 우드(Franciscus Wood), 7대(1952~1953년) 로한(Patrick Lohan), 8대(1953~1954년) 장옥석(張玉石, 루치오), 9대(1954~1964년) 김창현(金昌鉉, 바오로), 10대(1964~1969년) 김병준(金丙準, 요한), 11대(1969. 4~1969. 11) 장옥석(張玉石, 루치오), 12대(1969~1973년) 김충호(金忠鎬, 미카엘), 13대(1973~1976년) 조철현(曺喆鉉, 비오), 14대(1976~1980년) 김희배(金喜培, 요한), 15대(1980~1981년) 고재영(高在榮, 야고버), 16대(1981~현재) 이성규(李成揆, 라파엘) 신부로 이어지고 있다.
초대 헨리 신부 때인 1937년 10월에는 당시 성당을 80평으로 늘려 로사리오 성모를 주보로 하여 축성식을 가졌고, 그 뒤에 와서 대지 총 면적이 5,000평으로 늘어났으며 성당도 40평이 더 증축되어 120평이 되었다. 그동안 함평, 영산포, 남평 등 소속 공소가 모두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9대 김창현 신부가 1961년 5월 4일 교황청으로부터 몬시뇰 칭호를 받기도 하였다. 나주본당의 1984년 6월 현재 신자수는 2,777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