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리오 성가란 로마 교회의 전례용 성가로 전례와 함께 발달했고, 전례와 함께 정형화되어 오늘날까지 불려지고 있다. 그레고리오 성가는 7세기 교황 성 그레고리오(Gregorius) 1세 때 형성된 것으로, 그 전까지 구전되어 오던 성가를 집대성하여 정착화시켰다는 점에서 그레고리오 성가라 불리게 되었다. 교황은 전례를 정식화(定式化)하였고, 전례음악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졌으며 가수학교(歌手學校, schola cantorum)를 신설하고 성가대(聖歌隊)를 육성하였다. 그레고리오 성가에서 비로소 전례성가의 전통이 수립되었고, 중세의 음악교육은 커다란 발전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14세기 이후 다성음악(多聲音樂)이 점차 보급되면서 그레고리오 성가에 대한 일반인의 감격은 차차 식어갔다.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도 성가개혁의 움직임이 나타났고, 1612년 출간된 성가집은 그레고리오 성가의 많은 부분을 수정하고 있다. 특히 가사(歌詞)에서 강조하지 않아도 될 부분에 긴 음표가 주어진 것은 음의 길이를 단축시키거나, 강조되어야 할 부분으로 옮겨놓았다. 그 후 그레고리오 성가를 재인식하게 된 것은 19세기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다. 중세적 선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그레고리오 성가의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1928년 교황 비오(Pius) 11세는 교령을 통하여 그레고리오 성가의 사용을 장려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레고리오 성가는 그리스도교 예술의 귀중한 재산이다. 단성음악(單聲音樂)으로는 인류 최고의 형식으로 손꼽힌다. 그 구성은 간단한 전례문을 노래하는 부분이나 복잡한 독창(獨唱)의 선율까지를 잘 배합하고 있다. 일정한 선율을 일정한 가사에 적용시키려 했기 때문에 그 예술적 가치는 별로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선율의 풍부함, 표현의 다양성과 직접성, 예술적으로 표현된 모티브 등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적당치 못한 견해이다. 교회음악의 거장들이 가장 효과적으로 사상을 정리하기 위해 그레고리오 성가를 감상했다는 것이 이를 잘 증명한다. 또 그레고리오 성가는 전례적인 움직임을 숭고하게 잘 표현해 주고 있다.
그레고리오 미사 [라] Missae Gregorianae [영] Gregorian Masses
가톨릭 교회에서 죽은 이를 위하여 30일 동안 계속해서 봉헌하는 미사를 말한다. 즉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죽은 이의 영혼이 연옥(煉獄)에서부터 구원받기를 30일간의 미사를 통해 기도하는 것이다. 미사예물은 최소한 30차례의 개별적인 미사를 위해 바쳐지는 미사예물보다 적어서는 안 된다. 미사 효력에 대한 믿음은 교황 성 그레고리오(St. Gregorius) 1세의 사적(私的) 계시에 근거를 두는데, 미사 효력은 죽은 이에게만 적용된다. 1888년 교황청의 대사성성(大赦聖省, Sacred Congregation for Indulgences)은 미사 효력에 대한 신자들의 믿음은 매우 귀중하며 합당하다고 선언한 바 있다. 이 미사는 1회 이상 봉헌될 수 있지만, 동시에 한 사람 이상의 사람들을 위해서 봉헌될 수 없다. 또한 반드시 동일한 사제에 의해서, 동일한 제대에서 30일간 미사를 드릴 필요는 없다.
그레고리오 개혁 [한] ~改革 [라] reformatio Gregoriana [영] Gregorian reform
11세기 중반부터 12세기 초반에 걸친 교회 내의 대개혁운동을 말한다. 교황 성 그레고리오 7세(재위 : 1073~1085)의 이름을 따서 이렇게 호칭되는데, 비록 그가 이 운동의 주창자나 완성자는 아니었지만 교회의 자율성 회복을 통해 교황권(敎皇權)의 확립에 크게 기여한 그의 업적의 비중 때문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이 개혁운동은 카롤링거 왕조와 오토왕조의 범세계적 교회의 이상으로 종교와 통치권이 혼합되고 교회가 세속권에 종속된 상태에 놓여 있었던 암흑기의 부패한 상태로부터 교회를 혁신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대체로 니콜라오(Nicolaus) 2세의 교황 선거법이 공포된 때(1059년)부터 제 1차 라테란 공의회(1123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이 개혁의 성과는 교황 우위권(優位權)의 재확인, 성직자의 생활 쇄신, 교회의 세속권으로부터의 독립 보장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10세기와 11세기 초반에 크게 약화된 교황 우위권은 니콜라오 2세 및 알렉산데르(Alexander) 2세에 의해 그 개혁의 기반이 마련되었으며, 성 그레고리오 7세 교황에 의해 강조된 우위권과 교황의 권위는 수차례의 교회 회의를 통해 인정되어 그의 사절들을 통해 실행에 옮겨졌다. 또한 교황 우위권의 안정된 기반 위에서 우르바노(Urbanus) 2세(재위 :1088~1099)는 클뤼니(Cluny) 수도원(1088년 창설)에 특별한 면속특전을 부여하여 수도원 개혁을 통해 수도자들의 생활을 쇄신시켰다. 당시 속인(俗人)의 성직 서임권(敍任權)으로 교회재산의 남용, 성직자의 부패가 조장되었는데, 서임권 논쟁 등을 통한 속권의 교회에 대한 간섭 배제는 주교의 권한 강화, 성직 매매, 성직자의 결혼 및 축첩(蓄妾) 등 중세교회의 고질적인 병폐를 점차로 일소할 수 있었다. 또한 11세기 중반부터 일련의 교회 회의들을 통해 관철된 교회와 교회토지 및 십일조세에 대한 회복으로 인하여 교권(敎權)의 로마 집중화, 교회 세습권의 확보 등에 있어 괄목할 만한 성과가 나타났으며 교황권의 절정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랑메종 [원] Grandmaison, Leonce de
Grandmaison, Leonce de(1868~1927). 프랑스의 가톨릭 신학자. 상대주의(relativism) 및 근대주의(Modernism)의 침투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의 옹호자. 르망(Le Mans)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죽었다. 1886년 예수회에 입회, 1890년부터 1893년까지 저지섬(Isle of Jersey)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르망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학업을 마쳤다. 사제로 서품된 이듬해인 1899년부터 프랑스의 푸르베르(Ffourviere)대학 및 영국의 헤이스팅즈(Hastings)대학 변증법 교수로 있었다. 1908년 학습지 <에튀드>(Etudes) 편집인으로 취임, 1910년 반근대주의자(反近代主義者)에 대한 회칙 (1907)에 고무되어 잡지 를 창간하였다. 그는 전공이 변증법인 다작가(多作家)로 종교학 및 신학의 여러 분야에 걸친 150편 이상의 논문을 작성하였다. 그의 주저(主著)인 《Jesus Christ : sa personne, son message, ses epreuves》(2권)는 그가 죽은 후에 친구 르브레통(Jules Lebreton)에 의해 출판되었다.
그라프만 [원] Grabmann, Martin
Grabmann, Martin(1875~1949).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 중세 철학사가. 독일의 빈터초펜 출신. 주교로 임명되었으며, 아이히슈타트에서 신학 · 철학교수(1906년), 빈대학 그리스도교 철학교수(1913년), 뮌헨대학 교의학 교수(1918년)를 역임하였다. 《스콜라학적 방법의 역사》(Geschichte der scholastischen Methode, 2권, 1909~1911), 《성 토마스 아퀴나스》(Der heilige Thomas von Aquin, 1912), 《중세의 정신생활》(Mittelalterliches Geistesleben, 3권, 1926~1956) 등 현대의 중세철학 연구에 획기적 업적을 올리고, 지도적 역할을 하였다. 뮌헨의 그라프만 중세연구소는 그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하여, 시마우스(M. Schmaus (1897~ ) 등에 의해 활발한 연구활동이 진행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