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로 [한] 功勞 [라] meritum [영] merit

인간관계에서 타인의 이익을 위하여 이행한 행위에 대하여 보답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 이는 정의의 관념에 기인한 적정공로(適正功勞, meritum de condigno)와 자유재량에 근거한 재량공로(merirum de congruo)로 구분된다. 인간관계에서 유효한 개념인 공로를 하느님에 대한 관계에 적용시킬 수 있는가가 문제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피조물이요 은총에 의하여 구속되고 양자(養子)가 되었을 뿐 하느님과 대등한 지위도, 독립한 당사자도 못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간의 선행은 하느님께 대한 의무이행에 불과하므로 그것이 하느님에게 이익이 될 수 없다. 바울로가 율법의 업적으로 구원받지 못한다고 한 것은(로마 3:9-20) 이 진리를 긍정한 것이다. 루터는 인간성의 원죄로 인하여 완전히 부패하여 의화에 의하여 본질적으로 변모될 수 없고, 공로개념은 하느님 홀로 구원자라는 신앙에 모순된다는 전제 아래, 하느님은 인간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공로와 무관하게 구원해 주신다는 신앙만이 인간을 비본질적으로(extrinsically) 의화시킨다고 함으로써, 인간행위가 의화되기 이전에 행해졌느냐 이후에 행해졌느냐를 불문하고 그 가치를 전적으로 부정하였다. 이에 대해 트리엔트 공의회는 인간행위의 가치를 검토하게 되었다.

이 공의회에 의하면, 인간은 의화에 의하여 본질적으로 변화되며 의화된 자는 하느님 눈에 가치 있는 행위를 할 수 있고 따라서 공로를 쌓을 수 있다. 인간은 성화은총에 의하여 하느님의 상대자가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의화된 자의 행위가치를 적정공로라 한다. 이는 의화되지 않는 자의 자연적 행위가치를 의미하는 재량공로와 구별된다. 공의회에 의하면 공로는 먼저 은총과 선물로, 다음으로 선행에 대한 보답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인간은 혼자 힘으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공로에 참여함으로써 공로 있는 행위를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성서는 의덕과 은총, 신앙과 사랑 및 내적 인간의 진보와 성장을 언급한다(잠언 4:18, 루가 17:52, 고린 4:15-17, 에페 4:15 등). 영원한 행복은 보답으로(지혜 5:16, 이사 40:10, 마태 5:12, 1고린 3:8), 상급으로(1고린 9:24, 필립 3:14, 2디모 2:3), 보상으로(골로 3:23, 히브 10:35, 11:6) 제시된다. 인간은 선행으로 영원한 행복을 얻을 자격이 있다(지혜 3:5, 루가 20:35, 2데살 1:5). 보답은 악행의 형벌과 대조된다(마태 25:34-46, 요한 5:29, 로마 2:6-). 마태 6:20은 보화를 하늘에 쌓으라고 한다.

인간공로를 이해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하느님 앞에 인간공로가 불가능한 영역과, 피조물의 공로는 유비적인 의미에서 공로라 칭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인간이 하느님 앞에 공로를 얻을 수 있는 근거는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며, 성화은총에 의하여 인간이 동등하지 못한 수준에서 유비적으로나마 하느님의 진정한 상대자라는 점에 있다. 물론 상대자가 된 것은 인간의 독립된 지위 때문이 아니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의해서이다. 이로써 공로의 교리는 구속된 인간의 본질적인 가치를 긍정하는 셈이며 인간이 하느님의 도움으로 자신의 존재를 완성시킬 수 있음을 의미한다.

[참고문헌] Waldemar Molinski, Merit, Sacramentum Mundi, vol.2, Burns & Oates, London 1968 / C.S. Sullivan, Merit, New Catholic Encyclopedia, vol.9, McGraw-Hill, New York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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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한] 共同體 [라] communitas [영] community [관련] 사회

자연적으로 생성된 인간의 모임의 단위를 가리키는 말인데, 사회(society)라는 말과는 구분해서 쓰인다. 공동체의 개념으로 묶어지는 것은 가족 · 종족 · 민족 같은 것이 있으며,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러한 공동체에 귀속된다. 공동체는 자체목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개인 완성을 위한 수단이다. 그렇지만, 개인은 반드시 공동체 속에서만이 충분히 발전할 수 있는 것이므로 공공(公共)의 복지를 유지해야 하며 공동체를 긍정해야 할 의무가 있다. 따라서 개인주의(individualism)나 집단주의 또는 집합주의(集合主義, collectivism) 같은 것도 공동체와는 반대되는 이념들이다.

창세기 때 하느님이 아담과 하와를 지음하셨지만, 그 후손인 카인은 아벨을 죽였다. 이미 이때부터 공동체에는 금이 가고 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공동체는 혈연 · 지연 · 정신 등 몇 가지의 복합적인 공동성(共同性)에 기초를 두어야 하는 것이기는 하나, 크게는 인류 공동체로서의 사명을 다할 때만이 가장 높은 가치를 지니며, 넓은 의미로서의 ‘인간관계’를 담은 단위 집단이라고 지칭할 수 있다. 공동체를 바로 문명과 문화에 연관지어 생각해 보았을 때, 단순한 공통분모(共通分母) 위에 모인 분자의 합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그리스나 로마의 문화의 한계를 한 발 짝 뛰어넘으면 ‘야만인’이 되고 만다고 생각했던, 좁은 지리적 시각(視角)에 사로잡혀 있던 이교적(異敎的)인 고대에 있어서는 ‘인류공동체’라는 관념은 전혀 낮선 말이었다. 그러다가 중기 및 후기 스토아파 시대에 와서 비로소 자연적인 인간 공동사회의 신앙 즉 공동체에 대한 의식이 희미하게나마 엿보였다. 예언자들에게서 바람직한 싹이 트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끝내 편협된 종교적 또는 정치적 민족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차원에서의 공동체에 대한 이해에 불과하였다.

세계적인 보편주의의 결정적인 동향을 최초로 초래한 그리스도교는 모든 인간의 자연적인 공동체 또는 공동사회를, 동일 사명과 성총을 부여받은 주님의 자식들 및 그리스도의 형제의 공동체, 즉 그리스도 안에서 결합된 ‘몸의 지체로서의 공동사회’(바울로적인 그리스도 신비체사상)로까지 깊이를 더해 갔다. 이리하여 인류는, 하느님의 의지에 의해서 태어나고 질서 잡혀지고 지배되며, 그 목표에 향하여 이끌림을 받는 ‘인류적 가족’이 되었다. 이 인류적 가족의 유기적인 조성(組成) 가운데서 즉 공동체의 생활을 통하여서만이 개인과 공동사회와의 관계는 민족적인 개체로 하여금 여러 민족공동체 사회로의 결합을 대규모적으로 촉진시켜 주며 반복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공동체라는 개념은 사회라는 말과는 구분해서 쓰이는 것이므로, 사회 쪽에서 풀이해 볼 수도 있겠다. 가령, 집단을 여러 성원(成員)의 인간적인 접촉이나 시간적인 지속성에 바탕을 두고 분류할 때 가족, 학교, 교회는 지속적 면접적 집단 쪽에 그리고 국가, 도시, 노동조합은 지속적 간접적 집단 쪽에 속한다. 그러나 통일성의 면에서 본다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가 공동체 또는 기초집단(community)이라고 부르는 가족 · 촌락 같은 것과, 둘째가 기능집단(association)이라고 부르는 노동조합 · 정당 · 클럽 따위다. 이 경우, 그 사람의 생활이 그 집단 가운데서 완전히 영위되며, 모든 사람의 사회관계가 그 집단속에서 찾아질 수 있는 그런 집단이 바로 기초집단이라 할 수 있고, 특정한 이해 또는 몇 가지의 이해가 합한 것을 공통적으로 추구하자는 목적으로 성원이 가입하거나, 혹은 창설된 집단은 곧 기능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기능집단의 경우의 공동체라는 개념은 개인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구속적인 사회관계, 아니면 일정한 토지를 공동으로 차지하고 있는 데 바탕을 둔 사회관계의 총체를 가리키게 되는 것이다.

이미 퇴니스(Ferdinand Tonnies, 1855~1936)에 의해 설정된 사회형(社會型)의 하나인 공동사회(共同社會, Gemeinschaft) 즉 자연적 실재적으로 통일하는 ‘본질의사’(本質意思, natural will)의 구성체 단위를 공동체, 협동체 등으로 흔히 호칭하는 때도 물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자연적인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성체로서의 초자연적인 공동사회로서 성당, 교구, 교회 등에서 그 최종의 근거와 생명적인 기초를 발견한다. 즉 종교적인 공동사회에 기여하는 광범한 의미에 있어서의 정신적 도덕적 종교적인 유대의식으로 표현되고 수렴되는 뿌리가 공동체이다. 공동체와 교회의 관계에 대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를 하느님의 백성으로 보아 과거와 같이 성직자나 수도자 중심이 아니라 평신도를 포함하는 유기적 공동체라는 사상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교회를 계층제도로 하는 것을 배격하였으며 모든 교회구성원이 한 백성으로서 각자에게 주어진 소명에 충실할 것을 다짐한 것이다. (⇒) 사회

[참고문헌] F. Tonnies, Gemeinschaft und Gesellschaft, 1887 / A. Pieper, Organische und mechanische Auffassung des Gemeinschaftslevens, Aufl. 3, 1929 / A. Rademacher, Die Kirche als Gemeinschaft und als Gesellschaft, 1932 / M.R. Stein, Eclipse of Community, Princeton 1960 / J. 회프너, 그리스도교 사회론, 분도출판사,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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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참회 [한] 共同懺悔 [라] poenitentia communis [영] common penitence

참회자들이 모여 참회를 공동으로 하는 행위. 죄는 하느님과의 개인적 관계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모욕이며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에 끼친 모욕이다. 그러므로 죄의 용서를 받고 화해를 이루기 위해서 초대교회는 참회도 공동체적으로 하였는데 오늘날 미사성제 때나 성무일도 중에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공동참회는 고해성사를 위하여 필요한 성찰(省察), 통회(痛悔), 정개(定改) 등을 참회의 전례로서 공동으로 이행한 참회자가 전례현장에 대기하고 있는 고해신부 앞에서 개별적으로 죄의 고백만 하고 그 다음 고백을 들은 사제들이 모든 고백자들에게 함께 사죄(赦罪)를 베푸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공동참회는 개별고백 없이 공동사죄를 베푸는 경우나, 개별고백을 하고 개별사죄를 받기 이전에 이를 준비하기 위하여 행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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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집전 [한] 共同執典 [라] concelebratio [영] concelebration

여러 사제들이 하나의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축성하면서 공동으로 미사를 올리는 의식. 초기 교회 때부터 공동집전이 빈번히 이루어졌으나 집전 사제들 중 주례자만이 성찬기도를 낭송했었고, 양편에 서 있던 사제들은 기도를 하되 축성의 말을 소리내어 하지는 않았다. 성찬기도를 모두 함께 낭송하는 관습은 7세기 로마에서 발전되어 8세기에서 12세기 사이에는 주교와 사제 서품식에 이 공동집전의 의식이 도입되는 등 동방이나 서방교회에서 공동집전은 하나의 전통으로 행해졌다. 그러나 1918년의 로마교회 법전은 서방교회에 허용되었던 유일한 형태는 서품식에서의 공동집전 뿐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공동집전의 부활에 관한 활발한 논의 끝에 이 특전을 확장시켰고 공동집전의 의식을 위한 공식적인 훈령까지 만들었다.

공동집전의 사제들은 ‘말씀의 전례’에서 독서를 할 수도 있으나 필수적인 것은 아니고, 보다 엄밀한 의미의 공동집전은 ‘성찬의 전례’에서 시작된다. 감사송을 바칠 때부터 사제들은 주례자 양편에 서게 되고 성찬기도를 함께 암송하기 때문이다. 즉 성찬 축성의 기도(거룩한 변화를 위한 기도)는 모든 사제가 한 목소리로 낭송하며 빵과 포도주 위로 손을 뻗쳐 축성하는 것이다. 이는 사제직의 일치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해 주는 것으로 하느님의 백성이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이유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다음의 경우에까지 공동집전을 허용하게 된 것이다. ① 성 목요일 성유 축성 미사와 주의 만찬 미사 ② 교회대회의(敎會大會議), 주교들의 회합, 전국 또는 관구, 교구회의 미사 ③ 아빠스 축성 미사. 그 밖에도 사제 공동집전의 적부(適否)를 판단할 권한이 있는 교구장이 허가하는 다음의 경우 : △ 참석한 모든 사제들이 신자들의 신익(神益)을 위하여 각자 미사성제를 집전할 필요가 없는 성당에서의 회중 미사와 주요 미사, △ 재속사제나 수도 사제의 각종 회합 때의 미사. 그러나 교구내의 사제 공동집전에 관한 조절 권한은 주교에게 속해 있다.

공동집전 미사를 통하여 제사와 사제직의 일치를 드러낸다. 특히 주교가 집전할 경우 신자들이 거기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때 하느님 백성의 일치를 독특한 방법으로 드러내게 된다. 공동집전은 동일한 신품의 힘과 사제직 사명으로 모두 형제적 사랑 안에 긴밀히 묶여져 있는 사제들의 형제적 유대를 뜻하며 또한 그 유대를 견고히 해 준다. 따라서 신자들의 유익(이것은 항상 사목적 관심으로 고려해야 할 점이다)에 지장이 없으면 공동으로 생활하는 사제들이나. 일정한 날에 갖는 회합에 모이는 사제들이 이 훌륭한 공동집전 미사를 드리면 좋다. 그러나 각 사제는 개인적으로 미사를 드릴 권리를 그대로 보존한다. 공동생활을 하거나 같은 본당에서 일하는 사제들은 여행 중인 사제들을 자기들의 합동미사에 기꺼이 초대해야 한다. 그래서 장상들은 사목적 필요와 다른 합당한 이유가 없는 한 공동집전 미사를 장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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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선 [한] 共同善 [라] bonum commune [영] common good

공동선의 개념은 가톨릭 사회교의(社會敎義)에 있어서 중추적 개념 중의 하나이며 독특한 의미를 지닌다. 가톨릭 사회회칙에서 사용되는 공동선의 뜻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공동선의 개념과는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독특한 개념이다. 어떤 해석에 따르면, 공동선은 사회성원들이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사회의 재산이다. 즉 공원과 같은 공동의 재산이 공동선이란 것이다. 공원이 개인소유의 정원과는 규모나 질에 있어서 비슷하다 해도, 개인소유의 정원은 사회성원 누구나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공동선이 아니라는 것이다. 공동사용의 가능성이 어떤 물질적 재산을 공동선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물질적 재산만이 공동선이 될 수 있다고 보는 해석과는 달리, 가톨릭 사회교의의 공동선은 훨씬 포괄적인 개념이다.

가톨릭 사회사상에서도 공동선의 개념은 최근에 와서야 정립되고 발전하였다. 1891년에 발표된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노동헌장>과 1931년에 발표된 교황 비오 11세의 회칙 <콰드라제시모 안노>에서 공동선의 개념이 여러 차례 사용되었으면서도, 확실하게 정의된 것은 아니다. 공동선의 정의는 1961년에 반포된 교황 요한 23세의 회칙 <어머니와 교사>에서 발견된다. “공동선은 인간이 자신이 완성을 좀 더 충족되고 또한 용이하게 성취하는 데 필요로 하는 사회생활 조건들의 총체이다”(M.M. 05). 그 뒤에 나온 <지상의 평화>, <사목헌장> 등 교회문헌에서도 거의 동일한 정의가 사용된다. 그러나 공동선과 동일시되는 사회적 조건들이 교회문헌에서 항상 공동선이라고 불리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완성에 필요한 사회적 조건들이 때로는 공동복지(共同福祉, common welfare)나 진보(progress)나 발전(development)으로 불기기도 한다. 종교자유 선언문(6항)에서는 공동선 대신에 공동이익, 혹은 공동복지가 사용된다. “인간이 보다 완전히, 보다 용이하게 자기완성에 도달할 수 있는 사회의 생활조건의 총화가 사회의 공동이익”이라고 하였다. 회칙 <민족들의 발전>에서는 인간 전체와 인류 전체의 발전향상을 가져오는 것들을 진보라고 규정함으로써 진보와 공동선은 거의 동일한 사회조건들을 지칭한다고 보인다. “진보는 경제성장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진보가 올바른 것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 전체와 인류 전체의 발전 향상인 전체적인 것이라야 한다”(p.14). 이렇게 보면, 교회문헌은 인간의 완성을 위해서 필요한 조건들을 지칭하는 데에 공동선이란 용어뿐 아니라 공동복지, 공동이익, 진보, 발전과 같은 용어도 병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공동선의 정의를 보면, 그것이 어떤 사회적 조건들로 구성되는 것이 확실하지 않으나, 공동선은 인간의 더욱 충족되고 용이한 완성을 위해서 필요하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인간의 완성과 사회적 조건들은 필수적 관계를 갖고, 인간의 충족된 완성과 발전은 사회적 조건에 따라서 이루어지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완성과 발전은 사회적이다. 공동선의 개념은 인간본성의 사회 의존성을 강조한다. 인간은 단독으로는 생활할 수 없고 사회 안에서 생활해야 하므로 사회적인 영향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은 사회를 이탈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사회를 떠나거나 무시하면서는 충족된 완성을 성취할 수 없는 것이다. 공동선의 개념이 강조하는 다른 점은 인간의 충족되고 용이한 완성을 촉진하는 데에 필요한 사회생활의 조건들은 따로 있는 것이고 어떤 사회조건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 사회에 존재하는 조건들은 다양하고 서로 상반될 수 있으나, 그 중의 일정한 조건들만이 인간의 충족된 완성을 촉진하는 것이고, 다른 것들은 완성을 저해할 수 있다. 따라서 사회조건들의 종류는 인간의 중대한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공동선을 구성하는 사회적 조건들은 점진적으로 구현되는 것이며, 그것의 완전한 구현은 사실상 매우 어렵다. 더 나아가 공동선의 내용인 사회조건들은 정태적(情態的)이기보다는 역동적(力動的)이고 항상 동일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여건 때문에 변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공동선이 완벽하게 실현된 사회도 발견되기 어렵고, 공동선이 전연 없는 사회도 없을 것이므로 사회들간의 차이는 공동선의 정도의 차이이다.

회칙 <지상의 평화>(41항)는 공동선의 다른 본질적 요소를 지적하고 있다. 사회의 모든 성원들은 공동선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일부의 사람들이 공동선에 참여하지 못하고 제외되는 일은 부당하다고 함으로써, 한 사회에 공동선이 구현되어 있으면서도 일부 사람들은 제외될 가능성도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에, 이 조항은 공동선의 개념을 약간 흐리게 한다. 일부의 사람들이 차별대우를 받아, 인간의 완성에 필요한 사회적 조건에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공동선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여간 사회의 일부 성원들이 차별대우를 받을 경우에는 공동선이 전연 구현되지 않은 것으로 보기보다는 공동선의 불완전한 실현으로 보는 듯하다. 그래서 정당한 것은 아닐지라도, 공동선은 사회의 일부 사람들에게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라고 보는 듯하다. 공동선은 사회의 성원 전체에게 미흡하게 구현될 수 있고, 일부를 위해서만 실현될 수도 있을 뿐 아니라, 전체를 위해서도 만족스럽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공동선은 필요한 사회생활조건들의 총체라면, 그 필요한 조건들은 무엇인지 규명하는 것은 중요하다. 교회문헌에서 언급되는 조건들은 다양하지만, 편의상 그것을 사회경제적 조건과 정치적 조건으로 구분한다. 회칙 <어머니와 교사>(19항)는 고용기회의 최대 확대, 노동자들의 평등, 좋은 생활에 필요한 자원과 서비스에 대한 모든 이들의 참여, 각 경제분야 종사자들의 수입균등, 생산증가에 준하는 서비스의 개선, 기술발전에 상응하는 생산방법, 후대인을 위한 투자 등이 공동선을 구성한다고 말한다. 회칙 <지상의 평화>(45항)는 위정자들이 공동선을 실현하기 위해서 전력을 기울여야 할 것은 도로, 통신시설, 음료수, 주택, 위생, 교육, 오락, 종교시설과 같은 기본적 봉사시설 외에 보험제도, 직장확대, 정당한 보수, 중간집단의 설립 등을 들고 있다. 이렇게 보면, 공동선이 사회경제적 조건에는 인간답고 좋은 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자원과 시설이 포함된다. 직업, 개선된 생산방법, 정당한 보수, 중간집단과 더불어 주택, 위생, 보험제도 등 기본적 봉사시설이 중요한 것이다.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인간에게 상당한 수준의 자원과 시설이 필요하다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공동선이 실현되기에는 이런 자원과 시설이 있는 것뿐 아니라, 그것의 분배가 공정하고 혜택이 최대한으로 확대되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이들이 필요한 자원을 가져야 하고 기본시설의 혜택을 누려야 하는 것이다. 공동선이 실현되자면, 좋은 사회경제적 자원과 시설이 있어야 하고, 그것들이 최대한 넓게 분배되어 모든 이가 참여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가톨릭 사회론에서는 어떤 형태의 분배를 지향하는 것인지 알 필요가 있다. 교회가 극심한 불평등한 분배를 배척하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러면 완전한 균등을 지향하는가. 교회문헌은 완전한 균등보다는 공평한 분배를 지향한다고 보인다. 회칙 <지상의 평화>(45항)는 노동자가 “정의와 공평의 법칙을 따라 보수를 받도록 알선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공평한 분배는 완전한 균등과 극심한 불균등 분배 사이에 있는 것이고, 정의에 부합해서 정당한 불균등 분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정의롭고 정당한 불균등 분배인가? 교회문헌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없다.

공동선은 사회경제적 차원과 혜택의 존재와 그것들의 공평한 분배만으로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공동선을 구성하는 다른 중요한 조건들은 정치적 사법적 조건들이다. “도덕질서와 부합하고 정치공동체의 발전수준에 상응한 국가의 사업구조가 공동선 실현에 크게 이롭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지상의 평화 50항)고 보기 때문이다. 공동선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인간의 완성을 촉진하는 데에 필요한 사회적 조건들 중에는 인권보호를 위한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가 포함되는 것이다. 인권을 보장하는 장치적 조건들이 실효를 발휘할 경우에 비로소 공동선이 실현되는 것이고, 그러한 조건과 장치들이 부족하거나 덜 보편화 되었을 경우에는 공동선의 실현이 미흡한 것이다. 회칙 <지상의 평화>는 이 점을 분명히 지적한다. “우리 시대에는 인간의 권리와 의무가 유지될 때에 주로 공동선이 보장된다고 간주되므로 국가 위정자들의 중요 관심은 이 권리들이 인정되고 존경받으며, 서로 조정되고 옹호되고 촉진되어서, 각자가 자기 임무를 용이하게 이행하도록 보장하는 데 있어야 한다”(지상의 평화 42항). 여기서 말하는 권리는 민주사회의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적 자유와 권리들이고, 생존의 권리, 의식주와 안전에 대한 권리, 양심과 사상의 자유, 의사표현의 자유, 신분선택의 자유, 재산소유의 권리, 집회의 자유, 정치에 참여할 권리 등을 포함한다.

공동선의 실현되자면, 모든 기본 권리들이 보장될 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공동선이 요구하는 것은 위정자들이 한편으로는 시민의 권고와 조정, 다른 편으로는 권리촉진 사이에 조심스러운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부 개인들이나 사회집단의 권리가 편파적 보호를 받지 않고 특별한 편의를 누리는 일이 발생하지 말아야 한다”(지상의 평화 46항). 기본 권리의 보장에 관해서 정의와 공평의 법칙이 적용된다는 언급이 없고 권리의 편파적 보호가 없어야 한다고 하는 것을 보면, 교회문헌은 기본권리에 대해서는 완전한 균등을 요구하는 것이다. 공동선의 정치적 조건들에 있어서는 완전히 균등한 보장만이 적당한 것이지, 공평한 분배, 즉 정당한 불균등이란 용납되지 않는다. 그런데 공동선을 실현할 책임자는 누구일까. 물론 누구나 공동선의 실현에 참여해야 하고 책임을 지지만, 가장 중요한 책임자는 국가와 위정자들이다. 회칙 <지상의 평화>는 공권력(公權力)의 존재 이유가 공동선이고, 공권력은 공동선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한다. “공권력의 존재 이유는 정치공동체의 공동선을 보호하는 데에 있는 것”이라고(65항) 하였다. 사목헌장은 국가의 목적은 바로 공동선이고 국가의 권리는 공동선을 추구하기 때문에 인정되는 것이라고 한다. “정치공동체는 공동선을 위해서 존재하고, 공동선 안에서 정당화되고 그 의의를 발견하며, 공동선에서 비로소 고유의 권리를 얻게 된다”(사목헌장 74항). 국가와 위정자는 공동선의 실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을 추구할 경우에 정당성이 인정되는 것이고, 국민에 대하여 권리를 갖는다. 동시에 공동선을 무시하거나 해치는 국가와 위정자는 존재할 필요가 없고 정당성을 상실하며 권리도 상실한다.

이렇게 고찰하면, 공동선의 개념은 발전사회학에서 말하는 사회복지의 핵심가치와 대동소이하다고 보인다. 핵심가치는 높은 물질적 삶, 높은 정신적 삶, 평등과 자유 등 네 개의 가치와 요약된다. 핵심가치는 삶의 질을 높이는 것과 삶의 기호를 골고루 펴는 것을 중요한 가치로 보고 있다. 삶의 질은 단순한 개념은 아니지만, 대체로 물질적 삶의 질과 정신적 삶의 질로 구분된다. 삶의 기회를 넓힌다는 것은 좋은 삶의 질을 각계각층에 골고루 분산하되, 높은 삶을 누구나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핵심가치와 공동선의 실현에 대한 인간의 갈구와 추구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인간은 언제나 핵심가치와 공동선을 소중하게 생각하였고 지속적으로 추구하여 왔다. (吳庚煥)

[참고문헌] 吳庚煥, 共同善과 發展, 神學展望, 48호, p.19~31, 1980 / 金雄泰, 倫理規範으로서의 共同善, 가톨릭대학 硯士論文, 1982 / A. Nemetz, Common Good, New Catholic Encyclopedia 3, McGraw-hill, New York 1967 / 요한 23세, 이해남 역, 어머니와 교사,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76 / 바오로 6세, 김남수 역, 민족들의 발전,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67 / 요한 23세, 정규만 역, 지상의 평화, 성바오로출판사, 1963 / 김남수 역, 제2차 바티칸 공의회문헌, 현대세계의 사목헌장,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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