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성여자중고등학교 [한] 啓星女子中高等學校

1944년 8월 10일 경성구 천주교회유지재단에서 경성계성여자상업전수학교(京城啓星女子商業專修學校)로 개교한 여성중등교육기관. 어둠 속에서 항상 빛을 발하는 안내자 혹은 지도자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여성을 양성함과 아울러 성모님과 같이 현숙하고 순결하며 내적 용기를 가진 여성의 양성을 창립 목적으로 1942년 당시 국민학교 교육 의무화에 대비코자 여학교의 설립을 추진하여 당시 운영되던 계성여학원을 폐교하면서까지 1944년 계성여자상업전수학교를 설립하였다.그러나 곧 광복이 되어 1946년 6월 24일 인문계 여자중학교로 재개교하였지만 6.25동란으로 인하여 피난학교를 부산과 대구에서 운영하다가 1953년 본교로 복귀하였다. 한편 1951년 8월 31일 학제 변경으로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분리하였다. 1957년 3월 한국 샤르트르 성 바오로수녀회에서 학교 운영권을 이양받고 1959년 현재의 교표(校標)로 개정하였다. 1969년 3월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완전 분리하여 운영하기 시작하였고 1975년 7월에는 ≪계성 삼십년사≫(啓星三十年史)를 출간하였다. 현재 중학교 30학급, 고등학교 24학급을 운영하면서 여성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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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동본당 [한] 桂山洞本堂

대구 대교구 주교좌 성당. 1886년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가 경상남북도 지역의 전교를 담당하여 대구로 부임하여 읍내 밖 신나무골과 새방골에서 은신, 전교하다가 읍내 정규옥(鄭圭鈺) 집에 주거하며 7년 동안 전교 활동을 하였다. 그 뒤 1897년 현재의 계산동본당의 대지를 구입하고 그 곳에 있던 초가를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며 성당 신축을 계획하여 3년만인 1899년 한국식 목조 십자형의 성당을 신축하였다. 축성식은같은 해 성탄첨례날에 거행하고 성모를 성당 주보로 삼았다. 당시 성당 대지를 물색 중 처음에는 동산(東山)의 구릉지(丘陵地)를 내정하였으나 몇몇 사람들의 반대로 대구 시내에서 제일 저지대(低地帶)에 위치하게 되었는데 개신교가 그 동산을 매입하여 공사를 착수할 때는 적지 아니 후회도 많았다.

더욱이 어렵게 지은 한국식 목조 십자형은 완공한 지 1년도 못 되어 불에 타고 말았다. 그러나 서상돈(徐相燉), 김종학(金鍾學), 정규옥 등 몇몇 사람의 도움으로 성당 재건 계획을 세워 한국에서 구하지 못하는 자재를 프랑스 혹은 홍콩에서 수입하여 서양식 벽돌 건물을 건축하기로 하였다. 당시 대구에서 서양식 건물로는 처음인 새 성당이 1902년 5월에 준공되었다. 2개의 종각이 우뚝 솟아 뾰족집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그 뒤 1911년 대구교구 설정으로 주교좌 성당으로 승격되고 교우 수가 증가함에 따라 증축하지 않을 수 없어 성당 종각을 2배로 높이고 성당 뒤쪽을 확장하여 남북으로 나래를 달아 1918년 완공되었다. 축성식은 1919년 5월 11일 거행되었다. 1983년 현재 신자 수는 9,887명이며 루르드의 성모 마리아를 주보로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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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 [한] 啓蒙主義 [영] enlightenment [독] Aufklarung

‘계몽’이란 말은 원래 ‘빛이 들게 하는 것’, 그리하여 ‘어둠을 밝히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 말은 인간을 그 무지(無知)라는 암흑으로부터 이끌어 내어, 지식(知識)이라는 광명에로 옮겨 놓는 것을 말하게 되었다. 따라서 ‘계몽주의’란, 어리석고 몽매한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을 이성(理性)에 그 토대를 둔 지식에로 일깨워주려는 데 그 목표를 둔 근대 사조이다. 넓은 의미로 볼 때, 계몽 사상의 근원은 고대의 그리스에까지 소급된다. 그리스인들은 참된 지식과 지혜(智慧)를 추구하는 것을 그들의 가장 큰 이상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미 고대에 일종의 계몽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몽 사상이, 다만 철학의 영역에서뿐 아니라 삶의 모든 분야에 걸쳐서 그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여 인간의 의식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은 것은 근대에 들어서서의 일이다. 다시 말해서, 좁은 의미의 계몽 사상 즉 ‘계몽주의’는 17세기 후반기에서 시작되어 18세기에 이르러 그 전성기를 이룬다. 이러한 계몽주의는, 그 시초에는 프랑스 · 영국 · 독일을 중심으로 해서 생겨나게 되었으나, 곧 그 시대를 특징짓는 사상으로 등장하게 되어, 근대 이후의 사상과 사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1. 시대적 사상적 배경 : 역사적으로 볼 때, 첫째로 16세기에 시작하여 특히 프랑스의 루이 14세(1643~1715)로 대표되는 18세기 후반기는 ‘절대군주주의'(絶對君主主義) 시대였다. 이러한 절대 군주주의를 특징지어 보면 다음과 같다. 즉 군주는 신(神)의 대리자로서 모든 법을 초월하고 있다. 그리하여 군주는 신 앞에서만 책임을 지며, 지상의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따라서 백성 또는 신하가 군주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추궁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불충일 뿐 아니라 독성죄를 범하는 것이다.

둘째로, 16세기 초부터 17세기 중기까지 1세기가 넘는 기간은 ‘종교동란'(宗敎動亂) 내지는 ‘종교전쟁’ 시대였다. 즉 슈말칼덴 전쟁을 위시하여 30년 전쟁(1618~1648)에 이르기까지, 주로 새로이 대두한 프로테스탄트 계통과 가톨릭 계통이 대립하여 종교의 이름으로(비록 그 내용에 있어서는 재산의 문제와 영토의 문제가 더 중요한 문제였다 할지라도) 서로를 살육하는 참극을 벌였다. 이러한 사실은 사람들에게 종교에 대한 깊은 실망을 안겨 주었고 특히 종교를 근본적으로 불신하고 배척할 수 있는 소지를 마련해 주었다. 사상적으로 볼 때, 근대는 경험론(經驗論)과 합리론(合理論)의 시대이다. 첫째로, 경험론은 베이컨(F. Bacon, 1561~1626)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는 주장하기를, 학문의 최대의 과업은 자연을 서술하는 것이며, 이것을 토대로 하여 문화를 형성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그에 의하면 자연을 서술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잘못된 표상들 즉 우상(偶像)들을 제거해 버려야 한다. 인간의 의식이 가진 미신들을 제거해 타파해야 한다고 하였다. 인간이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인식의 원천은 관찰과 실험을 토대로 한 경험이다. 그리고 유일한 참된 방법은 귀납법(歸納法)이라 하였다. 이렇게 얻어낸 지식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의 힘을 기를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경험론은 이제 로크(J. Locke, 1632~1704)에 이르러 그 전성기를 이룬다.

둘째로, 합리론은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와 더불어 시작된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우리 인간이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확고한 토대는 ‘생각하는 존재’인 ‘나'[我]이다. 그리하여 이제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나는 그 이성(理性)으로 명백하고 확실하게 인식되는 것, 그것만이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진리라 하였다. 데카르트는 이성을 한없이 신뢰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제 근대의 인간은 전통과 권위에 맞서서 인간의 이성을 앞세우게 되었고, 또한 사회 체제 특히 절대 군주에 맞서서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게 되었다.

2. 계몽주의의 특성 : 1783년 쵤너(J.F. Zollner, 1753~1804)는 <베를린 월보>에 발표한 글 속에서, “오늘날 계몽주의란 말은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고 계몽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어디에도 그 해답을 발견할 수 없다”고 한탄하였다. 곧, 그 물음에 대한 몇 개의 글이 발표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칸트(I. Kant, 1724~1804)의 해답(1784년)이다. 칸트는 계몽주의를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다.

계몽이란, 인간이 자기 탓으로 초래한 미몽(未蒙) 또는 미성숙(未成熟)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미성숙이란, 자기 자신의 이성(理性)을 남의 도움 없이 사용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미성숙은 다음과 같은 경우 자기 탓이다. 즉 자기 자신의 이성을 남의 도움 없이는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가, 자기 이성의 결함 때문이 아니고 다만 자신의 결단과 용기의 결함 때문인 경우이다. “제발, 네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이것이 계몽주의의 구호이다. 칸트의 이러한 규정을 통해서, 계몽주의의 윤곽이 뚜렷이 드러난다. 계몽이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기 탓으로 초래한 인간의 미몽 내지는 미성숙”이다. 그리고 인간의 이러한 미성숙 앞에서, 계몽의 목표는 첫째, 인간을 그 후견인(後見人)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이고 둘째, 인간이 자기 이성을 스스로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가르치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그 이성의 힘으로 확실하고도 명백하게 인식한 진리를 토대로 하여 자기 자신의 삶의 방식을 스스로 결정해 나가도록 교육하는 일이다.

이와 같이 계몽주의의 특성은, 인간 이성의 자율성(自律性)과 독자성(獨自性)을 그 핵심으로 하고 있다. 그리하여 계몽주의에 의하면 인간의 이성은 스스로 자기 법칙을 가지고 있으며, 이 법칙을 토대로 하여 모든 것, 즉 세계 · 인간 · 신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것을 하나의 완결된 체계로 작업해 낼 수 있다고 한다. 이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성은 그 자체로 진리의 척도가 된다. 그리하여 이러한 이성은, 입법의 존엄성뿐 아니라 종교의 ‘거룩한 것’까지도 그 계몽의 대상으로 삼기에 이른다.

3. 계몽주의와 종교 : 계몽주의는 종교, 특히 당시의 계시종교(啓示宗敎)가 인간에게 타율을 조장할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미성숙을 강요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계몽주의는 계시종교를 그 일차적인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 결과 계몽주의는 계시종교를 한편으로는 단순한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로 설명해버리려 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이성의 이름으로 계시종교를 극복해 버리려 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계몽주의와 계시종교 사이에는 처음부터 하나의 긴장 관계 내지는 적대 관계가 성립되어 왔다. 그리고 이러한 긴장 관계 내지 적대 관계로부터 서로 대립되는 주의(主義)가 생겨나게 되었다. 즉 자연주의와 초자연주의, 신앙주의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계몽주의와 계시종교는 그 긴장 관계 내지 적대 관계를 통해서 서로 얻은 바가 많다. 즉 양편이 서로 자기 자신을 좀더 명백히 이해하기에 이르렀다. 한편으로, 계시종교는 역사 속에서 계몽주의와 대결하면서, 일종의 ‘살빼기’ 요양을 해야 하였다. 그리하여 계시종교는 자기 이해에 있어서 새로운 면모를 드러내게 되었다. 다른 한편, 계몽주의는 역사 속에서 계시종교와 대결하면서 계몽의 의미를 좀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즉 참된 계몽이란, 이성이 전통 · 권위 · 계시종교 등 다른 것을 계몽해야 할 뿐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계몽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성 자체는 고정 불변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한정되어 있고 또한 제약되어 있기 때문에, 계몽된 이성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한계성을 의식하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검토해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배운 것이다. 계몽주의나 계시종교 사이에 대두된 문제는, 그것이 역사의 일정한 시기에 생겨났고 또한 어떤 의미로는 마무리 지어졌다고 평가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앞으로도 결코 끝나버릴 수 없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한편으로 계시종교가 계몽사상을 피해 버리지 않고 정면으로 대결해 나갈 때에야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자기의 진면목을 보다 명백히 드러낼 것이다. 다른 한편 계몽사상이 계시종교를 피해 버리지 않고 정면으로 대결해 갈 때, 자기 자신에 대한 계몽을 소홀히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계몽사상은 비로소 계몽된 계몽사상이 될 것이다.

[참고문헌] E. Cassirer, Die Philosophie der Aufkl?rung, 2. Aufl., Tubingen 1932 / M. Horkheimer-Th. W. Adorno, Dialektik der Aufklarung, Amsterdam 1947 / M. Seckler, Aufklarung und Offenbarung, in: Christlicher Glaube in moderner Gesellschaft, Teilband 21, hrsg. von F. Bockle-F.-X. Kaufmann-K. Rahner-B. Welte, pp.5-78 / Was ist Aufklarung? Beitrage aus der Berlinischen Monatsschrift(1783-1786), hrsg. von M. Albrecht und N. Hinske, Darmstadt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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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학교 [한] 啓明學校 [관련] 화산본당 계성학교

① 전주교구 화산본당(현나바위본당)의 초대 주임 베르모렐(Josephus Vermorel, 張) 신부가 1907년 설립한 초등 교육기관으로 한때 폐지되었다가 1930년 다시 문을 열었다. 1937년 다시 폐교되었다. 태극계명학교라고도 불렀다 (⇒) 화산본당

② 계성학교의 여학생부를 한때 계명학교라고 불렀다. (⇒) 계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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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투쟁 [한] 階級鬪爭 [영] class struggle [독] klassen-kampf [관련] 계급의식

계급투쟁은 공산주의 사회를 실현하기 위하여 인간의 행동을 휘몰아칠 목적으로 제창된 것이다. 마르크스는 변증적적 이론을 역사에 응용해서 ‘일체의 모든 사회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라고 공산당 선언의 서두에서 주장하고 있다. 이 견해는 물질적인 힘으로 역사가 전개되어 간다는 것이며, 인간의 정신적 내면적인 요구를 완전히 무시한 유물사관(唯物史觀)의 사상이다. 공산주의는 계급투쟁을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로 유도하는 계급 사회 발전의 원동력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마르크스주의 곧 공산주의의 계급과 계급투쟁에 대한 이론의 핵심이며 또한 이론의 실질인 것이다. 실제로 공산주의는 인간을 귀속돼 있는 계급적 상태에 의해 형성된다고 가정하는 동시에 계급투쟁을 기본적인 정치적 실체로 가정하고 있다.

마르크스나 레닌이 말하는 계급이란 빈부의 차 즉 재산이 많다 적다든가 하는 수입의 다소에 의해 구별되는 것도 아니며, 수입원으로서의 임금 · 이윤 · 지대(地代)에 따라서 임금 노동자, 자본가, 지주로 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규정된 사회적 생산의 체제 안에서 차지하는 지위가, 생산수단에 대한 그 관계가, 사회적 노동 조직 안에서의 역할이 사람들과 다른 큰 집단을 계급이라고 말한다. 생산의 전체에 대해서 어떤 위치에 서 있느냐에 따라서 구별된 것이 계급이라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생산에 있어 지휘하는 입장에 있는 것이 자본가이며, 지휘되는 입장에 있는 자가 노동자라는 말이다. 즉 지휘하는 자는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고 지휘되는 자는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음으로써 구별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가와 노동자의 존재가 있다 하더라도 그 계급에 있어서의 공통 자각이 없으면 서로 대립하는 일이 없으므로 계급의식이 수반되어야 투쟁적인 계급의 개념이 성립하게 된다. 따라서 계급이란 생산수단을 갖고 있느냐 아니냐, 그리고 그와 같은 의식을 갖고 있느냐 어떠냐에 의하여 구별된 인간의 집단이라는 것이다. 변증법적 이론은 별 도리 없이 양극적인 생각을 하게 마련이기에 마르크스는 사회의 계급을 두 계급 즉 자본가(부르좌)와 노동자(프롤레타리아)의 두 계급으로 환원하게 마련이었다.

마르크스는 부르좌(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노동자)와의 두 계급 사이의 필연적 투쟁을 잉여가치설(剩餘價値設)에 의해 설명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임금 노동에 입각하여 법률 위에서는 자유로우나 생산 수단을 갖지 않는 노동자는 자기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팔아서 생활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 자본가는 공장이나 기계, 원료 등의 생산 수단을 갖고 있기에 노동자의 노동력을 사서 임금을 지불하고 이익을 올린다. 자본가는 상품의 대량 생산에 의해 경쟁을 심히 하고, 많은 큰 부분을 프롤레타리아에게로 전화케 한다. 여기서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단지 노동자의 생산물이 상품으로 전화할 뿐 아니라 노동력도 역시 상품으로 전화하는 것이며 그것이 잉여 가치를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잉여가치론은 모든 물건의 가치가 그 물건을 생산하기 위해서 필요한 노동량 즉 노동 비용에 의하여 정해진다는 노동가치설(勞動價値設)을 도입하는 것에 의하여 성립된다. 노동자는 그 노동에 의해 자기 생활에 필요한 이상의 잉여가치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자본가나 지주에게 착취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노동자에 의하여 생산된 부(富)의 잉여가치가 자본가의 소유로 빼앗긴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계급투쟁을 부채질하기 위해서 ≪자본론≫(資本論)의 제1권에서 잉여가치를 논급하고, 자본가가 임금 노동자로부터 무상의 노동을 착취하고 있다고 서술하고, 그 착취가 심하면 심할수록 자본가는 많은 잉여가치를 빼내며 따라서 보다 많은 이윤을 획득하게끔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자본가에 대한 증오심과 적대감을 높이고 계급투쟁을 격렬하게 전개 시키기 위해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참을 수 없는 부정의 희생이 되어 있다고 강조한다.

과연 가치가 노동량 내지 노동 비용에 의해서만 정해지는 것일까. 물건의 가치라는 것은 노동으로부터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재화의 수요 공급의 관계 즉 그 유용성과 희소성(稀少性)에 의해서 정해진다. 노동이 만드는 것은 생산물의 가치 결코 그 자체는 아니다. 노동가치설은 상품이 반드시 그 가치대로 곧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량으로 교환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자본론≫ 제3권에서 마르크스는 수급 관계에 의해 정해지는 바 평균 이윤율에 의하여 가치와도 일치하지 않는 가치가 성립되는 것을 인정하고, 현실의 가격이 가치 곧 상품에 포함되는 사회적 필요 노동량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주장하여 노동가치설의 모순을 나타내기에 이르렀다. 이 노동가치설의 동요는 당연히 이 이론에 의거한 잉여가치설까지도 동요시키고 더욱이 착취론(搾取論)까지도 불명확한 것으로 한다.

착취라는 것은 노동자가 그 노동에 의해서 제공하는 가치보다도 임금으로 받는 가치가 적다는 것일진대 노동자의 노동이라는 것이 그가 받고 있는 임금보다도 많은 가치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여야 한다. 그런데 그 증명이 노동가치설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마르크스 스스로도 말하듯이 “그 물건이 무용(無用)하다면 그 안에 포함되고 있는 노동도 역시 무용한 것이며, 노동에 시간이 얼마 걸렸든 간에 그 물건은 하등의 가치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다. 가치의 문제는 노동의 양(量)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물건의 유용(有用) 즉 필요에 있다.”

계급투쟁은 어쨌든 착취론을 기조로 해서 성립되고 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좌지 전체와 아울러 정부 전체에 대하여 투쟁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 비로소 계급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 레닌의 주장이다. 계급투쟁은 필연적으로 정치투쟁으로 전개되기 마련이다. 그 정치투쟁이란 정치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이며 공산당 선언에서는 “모든 종래의 사회 조직을 강력히 뒤엎는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말하자면, 자본주의 사회의 박멸로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계급이 존속하는 한 계급투쟁이 꼭 필요하다고 믿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계급투쟁의 역사가 반드시 종말을 볼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의견에서 끌어 낸 것을 포함한 계급투쟁에 대한 견해와 아울러 다른 견해들이 사회 계급들 사이의 화해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하더라도 공산주의자들은 계급투쟁 자체가 지니는 그 성격 때문에 화해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한편 공산주의자들은 계급투쟁도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도 필연적이며 불가피한 것이긴 하나 인간은 단지 수동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하여 모든 노동자가 굳게 일치 단결해서 부르좌 사회의 타도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계급투쟁은 잉여가치에 그 기초를 두고 자본가의 발전과 그에 수반한 노동자의 필연적 빈곤화를 가정해서 성립되고 있다. 그런데 21세기를 바라보고 있는 오늘날 과연 그러한가.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자본주의의 여러 국가에서는 노동자의 제반 조건이 점점 좋아지고 있는 현상을 마르크스는 지하에서 어떻게 보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가톨릭 교회가 “노동의 보수는 각 자의 임무와 생산성, 기업의 상황과 공동선(共同善)을 고려해서 본인과 그 가족들에게 물질적 사회적 문화적 정시적 생활을 품위있게 영위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할 정도의 것이라야 한다”(사목헌장 67). “자본주, 고용주, 지배인, 노동자 등 각자의 직무에 따라 업무상 필요한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적절히 규정된 방법에 의하여 모든 이가 기업 운영에 적극 참여하도록 촉진해야 하고, 노동자들을 진실로 대표하여 경제 생활의 올바른 질서를 수립하는 데에 이바지할 수 있는 노동조합을 자유로이 조직할 권리와 아무런 보복의 위험 없이 조합 활동에 참여할 권리는 기본 인권에 속하는 것으로 인정돼야 할 것이다”(사목헌장 68). “개인의 권리와 각 민족의 특성을 존중하면서 정의와 평등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개인적 내지 사회적 차별 대우와 결부돼 가끔 증대해 가는 현재의 경제적 불평등을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제거하도록 계속 노력해야 하겠다”(사목헌장 66)라고 선언하고 있는데, 과연 그대로 지켜지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교회는 더욱더 노동자의 세계에 대해서 사목적 배려를 끊임없이 하고 계급투쟁이 아니라 정의 복음으로 사랑과 화해에의 일치 운동을 조정할 메시아적 사명을 완수하여야 할 것이다. (⇒) 계급의식 (梁漢模)

[참고문헌] N. 베르자예프 原著, 鄭容燮 譯, 그리스도와 階級鬪爭, 大韓基督敎書會, 서울 1977 / 金南洙 譯, 현대세계의 사목헌장,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서울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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