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원] Persia

이란 고원(高原) 서쪽에 위치한 서남 아시아 국가. 1935년부터 국호를 ‘이란’이라고 개칭하였는데 이란은 유사(有史) 이전에 인도 게르만인에 속하는 이란인과 인도인의 원래 호칭이다. 그리스도교는 이미 1세기에 시리아로부터 선교사에 의하여 전해졌다. 성령 강림(降臨)의 목격자 중에서 “메소포타미아에서 온 사람도 있고”(사도 20:9)라는 구절이 주목된다. 시리아계의 자료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72인의 제자 중 한 사람인 에데사의 사도였던 아다이(Addai)가 그 제자 아가이(Aggai)와 마리(Mari)를 데리고 최초로 페르시아에 포교하고 거기에 신자단체를 세웠다고 한다. 아르베라의 연대기(年代記)에 따르면, 224년경 티그리스강 유역에 베트 슬로크(Bet-Slock) 등 주교좌(主敎座)가 20곳 이상이나 있었다. 그러나 그 위치를 볼 때 그리스도교는 이교도나 위정자의 박해의 우려가 적은 산골 깊숙이 들어간 곳이었다.

3세기 중엽에는 큰 도시에도 주교가 나오고, 샤프르 1세(Sehapur I, 재위 : 241∼271) 왕 시대에 그리스도교는 큰 증가세를 보였다. 로마제국은 한 때 거의 그리스도교 일색인 케레시리아주(州)로부터 주교까지 포함해서 온 마을사람을 포로로 하여 페르시아의 이주시킨 일도 있다. 그래서 4세기 초 페르시아의 웬만한 곳에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있었다(콘스탄티누스대제가 샤프르 2세에게 보낸 편지, 에우세비오 교회사 VIII 12). 수도인 셀레우키아 크테시폰에는 대주교가 있고, 교계(敎階)제도까지 실시되었다. 그러나 3세기에 사산 왕조가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정하면서부터 신앙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고, 특히 312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에서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뒤, 로마를 적대시하는 페르시아에서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342년에 이르자 갑자기 전국에 걸쳐 피비린내 나는 그리스도교 박해가 일어났다. 소조메누스의 교회사에 의하면, 이때에 총대주교를 비롯하여 이름이 기록된 순교자만 하여도 1만 6,000명에 달하였다.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자수는 늘었는데 5세기에 네스토리우스파가 들어와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마침내 중국에까지 포교하여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네스토리우스파는 인도와 몽고에도 선교사를 파견하였다. 페르시아는 642년 아랍인에게 패하여 이슬람교의 지배하에 놓였으며, 13∼14세기에는 몽고인의 압제하에 살았고, 1387년 오스만터키의 정복을 받았다. 그래서 이슬람교가 이 나라를 지배하게 되고, 사파비(Safawi, 1502∼1722년) 왕조는 이슬람교의 시아파(派)를 국교로 정하였다.

그와 같은 풍토에서 도미니코회, 아우구스티노회, 가르멜회, 프란치스코회, 예수회 등이 17세기를 통하여 활발한 선교활동을 벌이면서 끊임없이 박해도 당하였다. 특히 18세기에 나디르(Nadir, 1736∼1747)의 박해로 그리스도교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1750년 이 나라에 남은 사제는 3명에 불과하였다. 1840년 네스토리우스파에 대한 포교는 라자리스트회에 맡겨지고, 1874년에는 독자적인 교황사절(이전에는 메소포타미아에 속함)이 파견되었다. 1953년에 공사(公使)로 승격되고, 1차 세계대전 때 파괴된 포교 근거지 40곳 중에서 절반은 재건되었다. 이란에는 1982년 현재 약 1만 9,000명의 가톨릭 신자가 있고 4개 주교구로 나누어져 있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페르비스트 [원] Verbiest, Ferdinandus

Verbiest, Ferdinandus(1623∼1688). 벨기에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중국명은 남회인(南懷仁), 자(子)는 돈백(敦伯). 1641년 예수회에 입회하여 벨기에, 스페인, 로마 등지에서 5년 동안 공부하였다. 선교사로서 미국으로 파견되기를 희망했으나 1657년 중국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1659년 동회 선교사 마르티니(Martini 또는 Martin, 街匡國)와 함께 중국에 입국, 섬서(陝西) 지방에서 전교하였다. 1660년 청(淸)의 강희제(康熙帝)의 명으로 북경에 들어가 아담 샬(Adam Schall, 湯若望)을 도와 천문역산류의 책을 편찬, 강희제에게 등용되어 공부좌시랑(工部左侍郞), 중국성구회장(中國省區會長), 흠천감(欽天監) 감정(監正) 등을 역임하였다. 1688년 1월 28일 북경에서 사망하였다. 저서로는 ≪교요서론≫(敎要序論, 北京 1669), ≪성체답의≫(聖體答疑), ≪도학가전≫(道學家傳, 北京 1686), ≪고해원의≫(告解原義, 北京1730), ≪곤여전도≫(坤輿全圖, 北京 1674), ≪곤여도설≫(坤輿圖說, 北京 1672), ≪의상지≫(儀象志, 14권), ≪의상도≫(儀象圖, 2권, 北京 1673)외 다수가 있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페루 [원] Peru

페루는 북쪽으로 에콰도르, 북동으로 콜롬비아, 동쪽으로 브라질과 볼리비아, 남쪽으로 칠레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면적 128만 5,216㎢에 인구 약 1,823만명(1982년 추계)이다. 가톨릭은 스페인 내란이 종식되기 전(1537∼1554)에 이 나라에 들어왔다. 여러 수도단체에서 이 나라의 포교를 담당했지만 그 방법은 엇비슷하였다. 인력이 부족하여 스페인말을 할 줄 아는 인디언을 고용하여 사제일을 돕도록 하였다. 교회의 선교사업에 도덕적 또는 경제적으로 국가가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여러 가지 어려움이 뒤따랐다. 어린이의 경우는 별 문제가 없었으나 성인들에 대한 포교는 대단히 어려웠다.

페루 교회를 이야기할 때 뺄 수 없는 것이 주교회의이다. 모두 8차나 열린 회의 중에서 첫째(1551∼1552년), 둘째(1567∼1568년), 셋째(1582∼1583년), 여섯째(1772∼1773년)가 제일 중요한 것으로 개연성(蓋然性)에 관한 문제였다.

페루 자국민으로 하여금 사제 일을 맡도록 하여야 한다는 생각이 점점 지배적이지만, 또 사실 인디언들이 그리스도교 관습에 잘 적응하고 여러 방면에 재능도 뛰어나지만 아직도 원주민이 사제가 되는 데 대하여 이상한 편견이 존재하고 있다. 1960년대까지 인디언 출신의 사제로는 단 두 사람밖에 없었다. 가톨릭 신자는 1982년 현재 약 1,685만명에 1,201개소가 넘는 본당을 거느리고 있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페롱 [원] Feron, Stanislas

Feron, Stanislas(1827∼1903). 조선교구와 인도의 퐁티세리에서 전교한 선교사. 한국성 권(權). 프랑스의 세즈(Sez)에서 태어나 그 곳 대신학교를 나와 연령미달이었지만 특별배려로 1850년 12월 21일 사제서품을 받고, 플레르(Flers)와 아르장탕(Argentan)의 사제로 일하였다. 1854년 10월 14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1년간 수련한 다음 1856년 1월 23일 프랑스를 떠나 14개월 만에 한국에 도착하였다. 베르뇌(Berneux) 주교가 성직자 회의를 소집하여 다블뤼(Daveluy) 신부를 그의 후임으로 삼았을 때였다. 그는 곧 몽소승천지방 즉 경상도 서북부지방을 맡아 전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곧 박해의 불꽃이 타올라, 2명의 주교와 7명의 성직자가 순교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요행히도 살아남게 된 페롱 신부는 한국 교회의 장상이 되어, 하나밖에 남지 않은 동료인 칼레(Calais) 신부를 중국으로 피신시키고 스스로는 한국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운명은 달리 정해졌다. 본국으로 송환된 그는 1870년 인도(印度)의 퐁티세리로 파견되었고, 그 뒤 30년간을 그곳에서 사랑의 복음을 전하다가, 젊은 시절 그가 봉사했던 한국 교회가 기적적으로 되살아나는 걸 보고 만족해 하면서 1903년 6월에 77세의 고령으로 선종하였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페로시 [원] Perosi, Lorenzo

Perosi, Lorenzo(1872∼1956). 이탈리아의 가톨릭 성직자, 작곡가. 1895년 베네치아의 성 마르코 성당 성가대장에 임명, 1898년에는 시스티나 성당 성가대장이 되어, 그 곳에서 가톨릭 교회의 전례음악을 고전적 정신에 의해 정비하였다. 이것이 성 비오 10세가 발표한 교황자의교서(Motu proprio, 1903)의 발표동기가 되었다고도 한다. 1905년 성 비오 10세의 칙명으로 종신 ‘교황 성당 악장’이라는 최고지위를 받았다. 그는 많은 수난곡과 오라토리오를 작곡했는데, 그것들을 전례적(典禮的)인 라틴어 성서에 의한 대화라기보다는 카리시미(Giacomo Carissimi)적인 스타일에 의한 것이며, 더구나 단순하고도 장엄한 합창과 독창을 그레고리오 성가의 선율로써 정리한다는 그 특유의 새 수법에 의한 것이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