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보성인 [한] 主保聖人 [관련] 수호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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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보2 [한] 主保 [관련] 수호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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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보1 [한] 週報

본당이 소속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돕기 위해 매주 일요일마다 발행하는 홍보매체. 원래 부정기(不定期) 간행물이었으나 본당차원 홍보매체의 필요성이 증대됨에 따라 월간(月刊)으로 간행되다가 주보로 정착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70년대 이전까지는 주로 본당 단위로 발간되었고 그 후부터 대체로 지구 단위나 교구 단위로 통합주보를 내고 있다. 주로 강론, 말씀의 해설, 교리해설, 교회소식, 본당소식, 미사안내 등이 게재되는 주보의 역할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① 강론(Sermon)의 역할을 한다. 주보에 실리는 강론은 축일표에 정해진 그 주일의 복음 말씀을 주제로 하여 사제가 집필하며 이 난(欄)을 통하여 복음을 해설하고 복음의 현대적 의미를 제시한다. ② 교리해설 및 상식란의 역할을 한다. ③ 미사안내의 역할을 한다. ④ 교회 및 본당의 소식란 역할을 한다. ⑤ 신자들의 문예란(文藝欄) 역할을 한다. ⑥ 광고란의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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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진본당 [한] 注文津本堂

소재지는 강원도 명주군 주문진읍 교항리(江原道 溟洲郡 注文津邑 橋項里). 1923년 이길윤(방지거) 신부가 경성(京城)교구 부주교의 명으로 당시 강릉군 신리면 교항리(江陵郡 新里面 橋項里, 현 명주군 주문진읍 교항리)에 가옥 1채를 매입, 수리하고 동년 11월 본당으로 정식 발족하였다. 당시의 관할공소는 강릉군 7개소, 양양군(襄陽郡) 2개소, 평창군(平創郡) 16개소, 정선군(旌善郡) 3개소, 영월군(寧越郡) 2개소 도합 30개소에 교우 300여명이 있었다. 그 후 교우들의 도시진출과 전교부진으로 1931년 6월 본당을 강릉읍으로 이전, 향후 20년간 주문진본당은 주문진공소로서 강릉본당에 속하고 있었다. 1951년 성 골롬바노회 소속의 3대 주임 버크(Patrick Burk, 元) 신부에 의해 강릉본당에서 분리 · 설정, 다시 주문진본당으로 발족하였다. 1953년 부임한 한국인 본당주임 윤예원(尹禮源, 토마스) 신부가 1954년 3월 130여평의 성당을 신축하였고, 다시 1957년 5대 주임 최창규(바르톨로메오) 신부에 의해 현 성당으로 개축되었으며, 1973년 10대 주임 우 엠마누엘 신부에 의해 현 사제관이 개축되었다. 현재 14대 주임 최병철(崔炳喆,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사목하고 있고(1983.7∼), 본당주보는 루르드의 성모, 신자는 1,114명(1984년 현재), 공소는 3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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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모 [한] 周文謨

周文謨(1752∼1801). 한국에 입국한 최초의 외국인 신부. 순교자. 세례명 야고보. 포르투갈 이름은 벨로조(Vellozo). 중국 소주(蘇州)의 곤산(崑山)현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고모 밑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글을 읽으며 과거(科擧)를 준비했으나 여러 번 낙방하고 20세에 결혼하였다. 그러나 결혼 3년만에 아내를 잃고는 홀로 살다가 장년(壯年)에 이르러 북경신학교에 들어가 신부가 되었다. 1793년 조선입국에 실패하고 병사한 중국인 오(吳) 신부[포르투갈 이름은 도스 레메디오스]의 뒤를 이어 조선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1794년 12월 3일 윤유일(尹有一)과 지황(池璜)의 안내를 받아 입국하여 서울 북촌(北村)[지금의 계동] 최인길(崔仁吉)의 집에 도착, 조선에서 최초로 성사를 집전하였다. 입국 후 6개월 동안은 아무 어려움 없이 성직을 수행했으나 신입교우 한영익(韓永益)의 밀고로 자신의 입국 사실과 거처가 알려져 체포령이 내리자 곧 강완숙(姜完淑)의 집으로 피신하였고, 이로 인해 윤유일과 지황이 체포되어 1795년 6월 28일 순교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체포의 위험 속에서도 열심히 전교에 힘을 쏟아 여주(驪州), 고산(高山), 공주(公州), 온양(溫陽), 내포(內浦), 남포(藍袍) 등 지방을 순회 전교하며, 교리연구회인 명도회를 조직하여 정약종(丁若鐘)을 회장에 임명하고 황사영(黃嗣永), 홍필주(洪弼周), 현계흠(玄啓欽), 홍익만(洪翼萬) 등을 명도회의 하부조직인 육회(六會)의 책임자로 임명하여 이들로 하여금 교리연구와 전교에 힘쓰게 하였다. 그뿐 아니라 바쁜 사목일정 중에서도 교리서 · 신심서의 저술활동을 벌여 ≪사순절과 부활절을 위한 안내서≫라는 고해지침서를 저술하였고, 또한 강완숙을 여회장에 임명하여 여교우들의 신앙 활성화를 도모하는 한편 강완숙의 안내를 받아 폐궁(廢宮)에 살고 있던 은언군(恩彦君)의 처 송(宋)씨와 며느리 신(申)씨를 입교시켰다. 이러한 열성적인 노력으로 1801년 조선 교회는 교우수 1만명을 헤아리는 교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해 신유(辛酉)박해가 일어나자 중국으로 피신하려고 황해도 황주(黃州)까지 갔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와 4월 19일 의금부에 자현(自現), 5월 13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형으로 순교하였다.

[참고문헌] 黃嗣永帛書 / 邪學懲義(영인본), 韓國敎會史硏究所, 1977 / 崔奭祐, 邪學懲義를 통해서 본 初期天主敎會, 敎會史硏究, 第2輯, 韓國敎會史硏究所,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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