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남규(1886∼?). 사회사업가. 세례명은 요한. 1886년 5월 14일 서울 옥인동(옛 지명은 옥동)에서 구한말의 정2품(正二品)벼슬을 지낸 부(父) 정창인(鄭昌寅)과 모(母) 최 바르바라 사이의 3남2녀 중 2남으로 출생하였다. 1903년 일본인 경영의 경성학당(京城學堂)을 졸업하고 탁지부(度地部) 토지조사국 감사원으로 채용되었고 이듬해인 1904년 영세, 입교하였다. 한일합방 후, 경북 의성군수(義城郡守)로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경성부(京城府)[현 서울시]의 재무주임으로 있다가 일제의 수탈정책을 의식하고 사직, 1923년 모친과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권유로 교회사업에 투신하여 명동본당의 회장으로 명동성당 구내의 ‘홍길동 집’에 수용되어 있던 노인들을 돌보았다. 그 뒤 본격적인 자선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심, 1924년 명동본당의 회장들과 ‘애긍회’(哀矜會)를 조직하고 1925년 을지로 1가에 집 한 채를 마련하여 양로원을 설립, 행려병자, 보호자 없는 노약자들을 수용하였다. 그 후 양로원을 왕십리로, 다시 화양리로 확장, 이전하여 1950년 6월까지 연 261명 수용하였다. 1950년 9월 16일 납북된 후로 행방불명되었다.
정규하 [한] 鄭圭夏
정규하(1863∼1943). 신부. 세례명은 바오로. 충남 아산군 신창면 남방리(忠南 牙山郡 新昌面 南方里)에서 부(父) 정기화(鄭基化, 마태오)와 모(母) 한 마르타의 3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 병인(丙寅)박해로 가족과 함께 충청도 일대를 유랑, 음성(陰城) 장호원을 거쳐 15세 경 충주(忠州) 근방 소탱이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화재로 인해 재산을 전부 잃고는 다시 경기도 광주(廣州)로 이주, 그 뒤 블랑(Blanc, 白圭三) 주교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상경, 명동 주교관 내 글방[韓漢學校]에서 공부하다가 1884년 3명의 동료와 함께 말레이반도의 페낭신학교로 유학하였으나 기후와 풍토가 맞지 않아 1891년 신학생들과 함께 귀국, 새로 설립된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여 1896년 4월 26일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주례로 강도영(姜道永, 마르코), 강성삼(姜聖三, 라우렌시오)과 함께 종현성당(鍾峴聖堂)[지금의 명동 대성당]에서 사제로 서품, 서품 후 강원도 횡성(橫城) 풍수원(豊水院)본당 주임신부로 임명되어 선종할 때까지 47년간을 그 곳에서 사목(司牧)하였다. 부임 초, 동학혁명의 실패와 1896년의 민비시해사건, 아관파천(俄館播遷) 등으로 전국에서 의병(義兵)이 일어나 산골인 풍수원에도 나타나곤 했는데 그들을 맞아 격려하고 침식을 제공하였고 풍수원본당 교우들 중에도 상당수가 의병에 가입하였다. 1907년에는 건평 120평의 연와조성당을 건축하였고, 1910년 한일합방이 일어나자 성당 사랑방에 삼위학교(三爲學校)을 개설하고 논산에서 박 토마스를 선생으로 초빙, 학생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치는 한편 ≪월남망국사≫(越南亡國史)를 가르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이 삼위학교는 후일 광동국민학교로 발전하였다. 1942년 노환으로 보좌 김학용(金學用) 신부에게 풍수원본당의 운영을 맡기고 휴양하다가 이듬해인 1943년 10월 23일 81세로 선종, 풍수원성당 뒷산 성직자묘지에 안장되었다.
정규만 [한] 丁奎萬
정규만(1915∼1981). 서울 대교구 소속신부. 세례명 마르코. 황해도 곡산군 도하면 현암리에서 출생. 1937년 동성상업학교 을조(東星商業學校乙組)[소신학교]를 졸업한 뒤 로마 성 우르바노대학에 유학, 1939년 철학과를 졸업하고 1942년 12월 20일 사제서품을 받았다. 1943년 동대학 신학과를 졸업하고 다시 대학원에 진학하여 1946년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천주공교신학교[성신대학의 전신, 성신대학은 가톨릭대학의 전신]교수, 서울대 문리대 교수를 거쳐 1950년부터 1955년까지 성신대학 학장, 1955년부터 1960년까지 인천 성 바오로수녀회 지도신부를 역임하였다. 1960년 다시 가톨릭대학 교수로 복귀, 1967년 학장으로 임명되었으나 1969년 취임 2년은 병으로 학장직을 사임하고 그 뒤로 휴양하면서 투병생활을 하던 중 1981년 5월 7일 명동 성모병원에서 사망하였다. 유해는 용산 성직자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정국보
정국보(1799∼1839). 성인(聖人).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 프로타시오. 경기도 개성(開城)의 명문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성장하여 벼슬을 하던 조부(祖父)가 죄를 짓자 부친을 따라 상경, 상민(常民)으로 신분을 감추고 선공감(繕工監)[朝鮮시대 土木과 營繕을 담당하던 관청]에서 일하며 살았다. 30세 경 입교하여 유방제(劉方濟) 신부에게 성세를 받았고 그 후로는 아내와 함께 홍살문 근처에 살면서 성사를 받기 위해 상경하는 시골교우들을 돌보았다. 가난과 병으로 14자녀를 모두 잃고 자신 또한 가난과 병에 시달리면서도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항상 인내와 극기의 신앙자세를 잃지 않아 모든 교우들의 귀감이 되었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己亥)박해가 일어나자 이해 4월 천주교인으로 밀고되어 아내와 함께 체포되었고 포청에서의 혹형과 고문을 참아냈으나 형조에서는 참아내지 못하고 배교하였다. 그러나 석방되자 곧 배교한 것을 뉘우치고 다시 형조에 가서 자신을 체포해 달라고 연 3일 동안 청원했고 그것이 거절당하자 5월 12일 형조판서가 다니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형조판서에게 직접 자신을 체포해 줄 것을 요청, 그 날로 체포되어 결국 5월 21일 포청에서 곤장 25도를 맞고 장사(杖死),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이어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정교회 [한] 正敎會 [라] Ecclesia orthodoxa [영] orthodox Churches
동방교회, 정교회, 하리스트스 정교회 등 여러 이름으로 알려진 교회들의 총칭. 고대 말기 동로마제국의 교회에서 생겨난 많은 민족교회가 포함되어 있다. 이들 정교회는 고대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등 4개의 총주교 관구(Patriarchatus)에서 갈라져 나온 교회들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 독자적인 교회조직을 가지며, 부분적으로 서로 교류하고 있다. 정교회가 성립된 순서별로 보면 시리아, 불가리아 (917년), 세르비아(1346년), 러시아(1589년), 그리스(1830년), 루마니아(1925년), 알바니아(1937년)의 순이다. 아프리카와 아라비아에 퍼져있으며 그리스도 단성론(單性論)을 신봉하는 콥트교회, 아비시니아교회, 아르메니아교회, 야곱파교회, 남인도의 말라바르교회, 한때 페르시아에서 중국에 이르기까지 광범하게 펴졌던 네스토리우스파[景敎]도 모두 동방 정교회의 이단이다. 이들 교회의 신자는 통틀어 약 3억명 정도다.
정교회는 5∼6세기 그리스도의 위격(位格)을 둘러싸고 동서교회가 분열되기 시작하면서 형성되었다. 1054년에는 로마의 교황과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서로 파문하면서 동서교회는 결정적으로 분리되었다. 서로 그리스도의 참되고 유일한 교회라고 주장하면서 그 뒤 분열의 폭은 더욱 깊어졌다. 동방 정교회의 중핵은 러시아 정교회와 그리스 정교회다. 이들 정교회들은 둘 다 콘스탄티노플에서 떨어져 나온 교회다. 콘스탄티노플 함락 후에 시작된 러시아교회는 모스크바 대주교를 독립시켜 총주교로 삼았다(1589년). 1917년 러시아 혁명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정교회는 동방정교회의 신학과 전도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1961년 동방 정교회는 세계교회협희회(W.C.C.)에 정식으로 가입하였다.
동방교회의 특징은 신학과 전례에서 신비주의적인 색채가 농후하며 교회가 각 국민문화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전례와 성서는 일찍부터 각국어로 번역되어 사용되었고, 이 과정에서 국민문학이 발흥하였다. 동방 정교회의 성직자는 수도지원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결혼을 하며, 성직은 사도전승에 따라 주교 · 사제 · 부제 등을 모두 고대의 성직제도를 고수하고 있다. 동방 정교회의 성찬의 전례는 장엄하고 아름다운 것이 특색이다. 주로 성 크리소스토모(Chrisostomus)의 전례를 사용하지만 1년 중 10번은 성 바실리오 전례를, 한번은 성 야곱전례를 사용한다. 교회생활의 중심은 삼위일체의 예배이고, 여기에 성모와 여러 성인에 대한 공경이 첨가된다.
① 그리스 정교회(Greek orthodox church) : 그리스 지방에 처음 복음이 전해진 것은 사도 바울로에 의해서다. 당시에는 로마제국의 속국이었고, 고린토를 비롯한 주요도시에 세워진 교회는 서로 고립된 채로 남아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 중부 그리스지방이 마케도니아에 통합되었고 지방구로 설정되어 콘스탄티노플의 재치권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뒤 콘스탄티노플 분열(486∼516년) 때 로마교회에서 분리되었고 성화상논쟁(聖畵像論爭, 725∼842년)때에 성화상공경을 옹호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1054년을 기하여 서방교회와 완전히 분리되었다. 1453년 오스만제국이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킨 뒤에는 그리스 정교회도 터키인의 지배를 받았다. 19세기 오스만제국이 쇠퇴함에 따라 발칸제국은 독립을 얻었고, 그리스의 독립전쟁(1821∼1827년)에서 승리하여 독립하였다. 교회는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에서 분리, 독립을 선언했고(1833년), 총주교도 결국 승인을 하였다(1850년). 1852년 그리스 국회는 그리스 정교회를 구교로 정했고, 아테네 대주교를 중심으로 한 주교회의(Holy Synod)를 설치하였다.
② 러시아 정교회(Russian orthodox church) : 9세기경 키에프 주민들이 콘스탄티노플과 접촉하면서 복음이 전해진 러시아에는 공주 올가(Olga)의 입교(957년), 그의 손자 블라디미르 1세와 황제 바실리오 1세의 딸 안나와의 결혼으로 전도가 활발하였다. 13세기 타타르인이 러시아에 침입하면서 러시아인들이 동북부로 이주하였고, 교회의 중심도 키에프에서 모스크바로 넘겨졌다(1328). 1589년 모스크바의 주교 욥(Job)이 콘스탄티노플 총주교로부터 총주교의 칭호를 부여받은 뒤부터 모스크바는 소위 제3의 로마로서 당시 터키인의 지배 아래 있던 콘스탄티노플을 대신하여 정교회의 중심이 되었다. 교회를 국가의 지배아래 두는 데 성공한 최초의 인물은 표트르대제였다. 그는 총대주교 제도를 폐지하고(1700년), 12인의 위원을 두어 주교회의(Holy Synod)를 관장케 하였다. 이 제도는 러시아혁명까지 존속하였다. 혁명 후 2차 대전 시작(1941년)까지 교회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소비에트 정부는 마르크스 유물론과 반종교정책으로 교회가 차르 체제를 지탱한 점을 신랄하게 공격, 탄압하였다. 교회재산을 몰수되었고, 성직자는 투옥, 처형당하였다. 1929년 이후 정부는 조직적인 반종교투쟁을 감행했고, 이는 1941년 대독일전쟁 개시 때까지 계속되었다. 전쟁은 반종교정책을 완화시켰다. 반종교선전이 중지되고 1943년에는 주교회의 개최가 허락되었다. 뒤퐁이 죽은 뒤(1924년) 공석으로 남아 있던 총주교좌에 세리키가 선임되었다. 이후 교회는 서서히 힘을 회복하였고 성직자 교육과 신학연구를 위한 신학교와 대학을 설립하였다. 이후 동서냉전이 강화됨에 따라 정부의 대종교정책도 강화되었지만 신자의 공직취임 금지조치 이외에는 정책에 반대하지 않는 한 상당한 자유로 인정되었다. 러시아 정교회는 해외선교사업에 현저한 업적을 남겼고, 1961년 뉴델리의 세계 교회회의를 통해 세계교회협의회에도 가입하였다.
③ 루마니아 정교회(Rumanian orthodox church) : 1856년 공국(公國)이 된 루마니아는 25년 뒤에 독립왕국이 되었다. 최초의 왕자 코사(Couza)는 교회를 독립시키기로 하여 국회의 동조를 구했고, 그에 따를 법률도 통과되었다. 1885년 콘스탄티노플 총주교 요아킴 4세는 정식으로 루마니아 교회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1차 대전 후 영토와 국민이 증대하면서 교회의 지위도 강화되어 1925년에는 총주교좌가 설치되었다.
④ 불가리아 정교회(Bulgarian orthodox church) : 1204년에서 1393년까지 불가리아 교회는 독립된 주교좌를 갖고 있었지만, 터키인의 침략 이후 투르크제국이 멸망할 때(1393∼1856년)까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지배아래 있었다. 주교 힐라리온(Hilarion)이 교회의 독립을 선언했지만 (1860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이를 민족주의적 이단이라 하여 반대했고 다시 총대주교 안티모스(Anthimos) 6세는 불가리아 정교회를 파문하였다. 그 뒤 모스크바 총대주교의 배려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파문을 풀면서 양교회의 관계는 정상적으로 회복되었다.
⑤ 세르비아 정교회(Serbian orthodox church) : 1219년 성 사바(Sava)에 의해 독립 주교좌가 되었고, 1346년 총주교좌 교회로 승격되었다. 1389년 이후 약 5세기간 터키인의 지배를 받으면서 교회도 독립을 잃고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재치권 아래 있었다. 1876년 국가가 완전 독립하면서 교회도 1879년에 자치를 회복하였다.
⑥ 알바니아 정교회(Albanian orthodox church) : 1912년 터키로부터 독립한 뒤 교회는 정치적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투쟁을 폈다. 아메리카에 살고 있던 알바니아인들에 의해 추진된 이 투쟁은, 1908년부터 사제 놀리(Noli)를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1920년 그는 고국으로 돌아와 수상이 되었다. 그러나 회교인으로서 뒷날 국왕이 된 조구(Zogu)의 침입을 받아 놀리는 미국으로 되돌아갔다. 1937년에야 알바니아 정교회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로부터 정식교회로 인정되었다.
그 외에도 체코슬로바키아 정교회(1951년), 폴란드 정교회(1925년) 등의 교회가 성립되었고, 핀란드 · 에스토니아 · 라트비아 · 헝가리 · 마케도니아 · 우크라이나 등에도 동방정교회 신자들이 살고 있다. 가톨릭과 정교회 사이는 15세기 이후 완전히 단절되었다. 그러나 20세기의 화해분위기 속에서 대회가 시도되었다. 500여년만이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와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 1세가 예루살렘의 올리브산에서 만났다. 양측은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화해를 위한 노력을 계속하기로 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기간 동안 정교회측의 업저버가 참관하여 여러 가지 조언을 하기도 했으며, 1964년 제2차 정교회회의(Pan-Orthodox Conference)에 모인 14개 정교회 대표들은 로마와 교회일치적인 입장에서 계속 대화를 갖기로 합의하였다. 가톨릭에서는 동방교회에 관한 문제를 관할하는 성(省)을 1917년에 독립시켜 동방교회성성(Congregation for Oriental Church)이라 명명하고 있다.
한국의 정교회는 1897년 러시아 정교회의 암브로시 신부에 의해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암보로시 신부에 의해 주한 러시아공사관에서 시작된 선교는 1900년 황제 고종으로부터 정동의 땅 1,000평을 하사받아 성 니콜라이 성당을 건립하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고, 2대 신부로 온 스케초프스키(Chrysanthus Sketkovsky)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상당수의 신자를 확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06년 노일전쟁(露日戰爭)에서 러시아의 패전과 이에 따른 원조의 중단, 1917년 러시아에서의 공산주의 혁명과 이에 따른 선교활동 중단 등으로 선교활동이 크게 위축된 데다가, 1945년 이후 정교회를 주관하던 폴리카르프(Polycarp) 신부와 김의환(金義煥) 신부가 추방되거나 납북됨으로써 교회는 거의 문을 닫다시피 하였다. 1950년 유엔군의 일원으로 출전하였던 그리스군 군목들의 주선으로 1956년 소속이 그리스정교회 산하로 옮겨졌고, 1966년 성당도 서울시 마포구 아현동으로 옮겼다.
[참고문헌] Nicolas Zernov, Estern Christendom, 1961 / A. Schmeman, The Historical Road of Eastern Orthodoxy, 196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