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하(1863∼1943). 신부. 세례명은 바오로. 충남 아산군 신창면 남방리(忠南 牙山郡 新昌面 南方里)에서 부(父) 정기화(鄭基化, 마태오)와 모(母) 한 마르타의 3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 병인(丙寅)박해로 가족과 함께 충청도 일대를 유랑, 음성(陰城) 장호원을 거쳐 15세 경 충주(忠州) 근방 소탱이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화재로 인해 재산을 전부 잃고는 다시 경기도 광주(廣州)로 이주, 그 뒤 블랑(Blanc, 白圭三) 주교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상경, 명동 주교관 내 글방[韓漢學校]에서 공부하다가 1884년 3명의 동료와 함께 말레이반도의 페낭신학교로 유학하였으나 기후와 풍토가 맞지 않아 1891년 신학생들과 함께 귀국, 새로 설립된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여 1896년 4월 26일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주례로 강도영(姜道永, 마르코), 강성삼(姜聖三, 라우렌시오)과 함께 종현성당(鍾峴聖堂)[지금의 명동 대성당]에서 사제로 서품, 서품 후 강원도 횡성(橫城) 풍수원(豊水院)본당 주임신부로 임명되어 선종할 때까지 47년간을 그 곳에서 사목(司牧)하였다. 부임 초, 동학혁명의 실패와 1896년의 민비시해사건, 아관파천(俄館播遷) 등으로 전국에서 의병(義兵)이 일어나 산골인 풍수원에도 나타나곤 했는데 그들을 맞아 격려하고 침식을 제공하였고 풍수원본당 교우들 중에도 상당수가 의병에 가입하였다. 1907년에는 건평 120평의 연와조성당을 건축하였고, 1910년 한일합방이 일어나자 성당 사랑방에 삼위학교(三爲學校)을 개설하고 논산에서 박 토마스를 선생으로 초빙, 학생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치는 한편 ≪월남망국사≫(越南亡國史)를 가르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이 삼위학교는 후일 광동국민학교로 발전하였다. 1942년 노환으로 보좌 김학용(金學用) 신부에게 풍수원본당의 운영을 맡기고 휴양하다가 이듬해인 1943년 10월 23일 81세로 선종, 풍수원성당 뒷산 성직자묘지에 안장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