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덕 [한] 勇德 [라] fortitudo [영] force [관련] 사추덕

사추덕(四樞德)의 하나로 어떠한 위험을 무릅쓰고 서라도 선(善)을 행하는 덕의 행위. 그러나 정의에 봉사하지 않는 단순한 용기는 만용이 되기 때문에 항상 정의에 봉사할 것을 요구하며, 또한 용기는 지성에 의해 정제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세계는 악의 존재로 인해 불의와 부패와 부정이 가득 차 있다. 이러한 세계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이것들과 싸워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려는 자세야말로 진정한 용덕이다. (⇒) 사추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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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한] ~記 [라] Liber Job [영] Book of Job

욥기의 목적은 불의(不義)한 고통의 수수께끼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며 나아가 악(惡)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느님과의 관계를 설정하기 위해 곤경 중에 고심하고 있는 인간의 시도인 것이다.

1. 성서 안에서의 위치와 일반적 주제 ① 위치 : 유태인 목록 속에서 항상 히브리 성서의 세 부분(율법서, 예언서, 성문서) 가운데 마지막 부분에 속하는 성문서(聖文書, Ketubim) 안에 속해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온 욥기는 그 안에서 상이한 위치로 배열되어 있다.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Theodore of Mopsuestia)를 제외하고 이 책의 정통성이 문제시된 적이 없었다. 성문서 안에서 드러나고 있는 이 책의 다양한 위치는 다음과 같다. △ 가장 오래된 전승인 탈무드(Talmud) : 룻기, 시편, 욥기, 잠언, 전도서, 아가, 애가, 다니엘, 에스텔, 에즈라. △ 알렉산드리아 사본(Codex Alexandrianus) : 시편, 욥기, 잠언. △ 예루살렘의 치릴로, 에피파누스, 예로니모, 루피누스, 사도들의 정경, 욥기, 시편, 잠언.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욥기와 시편이 전승들 속에서 서로 자리바꿈하고 있음을 인지할 수 있다. 그런데 시리아 번역본 안에서는 모세오경과 여호수아서 사이에, 그리고 불가타(Vulgata) 속에서는 교훈서 첫 번째에 욥기가 나타나 있음을 숙고할 때, 작품과 영웅의 시대에 영향을 주는 불확실성은 어느 정도 이 같은 상반현상의 근원이 되고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라틴 교부들은 다른 순서를 제시하고 있는데, 시서(詩書)의 첫머리에 욥기를 배열한 예로니모의 순서가 불가타의 공식적인 순서로서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채택되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구서에서는 성서 번역판들이 이 순서를 따르고 있으며, 우리의 공동 번역도 이 순서를 따른다.

② 일반적 주제 : 이 책의 일반적인 주제는 상대적으로 간단하다. 욥은 하느님께서 그에게 사탄의 시험을 허락하는, 정의로운 인간으로서 우리에게 소개된다. 욥의 세 친구들은 그가 죄인이기 때문에 고통당한다는 것을 그에게 보여 주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불행에 처하게 된 욥은 있는 힘을 다해 친구들의 견해를 반박한다. 그러나 네 번째 인물이 갑자기 나타나 그가 당하는 고통의 수수께끼를 풀어 주겠다고 장담한다. 마침내 야훼가 나타난다. 야훼는 필름의 파노라마와 같이 창조의 아름다움을 전개하면서 욥이 하고 있는 불평의 경솔함을 질책한다. 이 책은 새로운 축복으로, 고통받는 의인이 첫 번째 행복에로 복원되는 것을 내용으로 종결된다,

2. 저작의 일체성 ① 욥기의 외적인 일체성 : 이 책의 여러 곳에서 지적해 낼 수 있는 종교적 사상과 문화적 배경, 문체와 단어의 상이함은 이 책이 단 한 번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 현재 욥기가 내포하고 있는 복잡성으로부터 교의적인 차원에서의 일련의 동질성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즉 불의한 자의 번영에 부딪히고 있는 의인의 고통, 이것이야말로 교의의 중심 대상인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동질성은 심리적이고 문학적 차원의 숙고 위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산문으로 된 서론과 결론은 민담(民譚)을 형성하고 있음이 거의 확실하다(1:1-2:13, 42:7-17). 이 두 곳에서 욥의 태도가 동일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스라는 곳에, 아마도 사해(死海)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에덴이라는 곳에 사는 한 사람의 표본적인 인내가 소개되고 있다(1:1).

기원전 587년의 대재앙이 있은 후 바빌론으로 유배된 유대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잃었다. 그들의 곤경은 존재에서 모든 가치를 추구하게끔 유도했고 하느님의 정의에 대한 그들의 신앙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가련한 욥에 대해 잘 알려진 이야기(에제 14:14 · 20)를 사용해서 유배 2세에 속하는 한 시인이 자 기의 선임자(先任者) 에제키엘(기원전 592∼580)의 시와 비슷한 시를 사목적이며 예언적인 목적을 가지고 썼다. 그는 이유 없이 고통당하는 영웅과 그의 친구들을 책 속에 등장시켜 존재의 가치를 시적으로 토론하고 인간적 정의(31:35-37)와 신적 정의에 대한 인간의 권리를 토론하게 하였다. 주님 자신이 영웅에게 자신을 스스로 방어하고 신적 인도를 벌 할 기회를 주지만 욥은 도전하기를 거부하고 단순하게 자기의 자만에 대해 뉘우친다(42:1-6). ㉯ 신의 이름이 상이한 형태로 분산되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욥이나 그의 친구들 입술 위에 야훼라는 이름 이 올려진 적은 한 번도 없다(예외, 1:21 통상적인 형태). 그러나 시 속에서 다섯 번이나 언급되고 있는 엘로힘, 엘, 엘로아, 샤다이 같은 용어들은 시서 속에 일종의 기교를 가지고 분포되어 있다. ㉰ 끝으로 서언과 결어 부분의 상호 참조(1-2과 42:6-17, 1:5과 42:8, 1:11과 42:7-9을 비교하라), 산문으로 된 이야기와 시의 상호 참조(2:13과 3:1, 42:7과 친구들의 담화), 대화와 신의 현현(顯現)의 상호 참조(13:3-12, 13:25, 16:19-21, 19:25-29, 31:35-3 욥에 의해. 5:8, 8:5, 11:5-6 친구들에 의해. 19:27과 42:5을 비교하라) 엘리후의 담화와 대화와의 참조(32:1-22, 33:9-11), 대화와 지혜적 위의 내용과의 상호 참조는(접근 불가능한 지혜, 이것만이 수수께끼를 풀 수 있다) 이 책의 다양한 요소들을 연결하고 이어주는 관계를 형성한다. 이렇게 볼 때 대부분의 비판들이 이 책의 일체성을 변호한 것도 결코 놀랍지는 않다.

② 교정의 흔적 : 그렇다고 완전한 일체성에 이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 순서의 조화를 깨뜨리는 것은 특별히 지혜를 상기시키는 데서 나타나고 있다(28장). 지혜를 상기시키는 시는 삽입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시에 나타난 주제는 욥과 그의 친구들의 갈망에 의해 이끌려지지 않고 있으나 신의 현현 부분과 어떤 유사성이 있기에 그곳에 삽입시키는 것이 더 나았을지 모른다. 또한 이 시에 있어서 본질적인 요소로서 신적 개입을 취하지 않은 것은 전체의 흐름을 볼 때 결코 합리적인 것이 아니기에 여기에 삽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야훼의 담화 형태가 첨가나 교정이 그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암시하고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단 하나의 담화문(38:1-40:2)을 발표하셨다고 볼 수 있다. 이 담화문 속에 삽입되어 있는 타조와 말에 대한 묘사가 원초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39:13-25). 이 담화문에다가 베헤못(40:13-24)과 레비아단(40:25-41:26) 이야기가 삽입되었을 것이다.

엘리후의 연설은 초기 도식에 삽입된 것이다. 엘리후는 기다려지던 인물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욥의 대화자들인 세 친구들과는 전혀 다른 양식으로 표명하고 합리화한다.

③ 결론 : 결과적으로 일체성의 표지와 이질성의 흔적을 찾아보았는데 후자가 전자보다 더 이상적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주제는 이질성 속에서도 현존하고 있다. 그러기에 문학적 일체성 대신에 유기적 일체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필요한 것 같다. 저자는 아마도 욥의 친구들을 끌어들이고 시적 대화와 야훼의 담화를 지적하고 뒤이어 결말에 필요한 세 대화자를 마지막에 상기시킨 것 같다.

동일한 저자 또는 다른 저자는 이와 같이 구성된 작품 위에다가 야훼의 담화를 첨가해 책 전체를 균형 있게 했을 것이고 토론에 있어서 새로운 요소를 가져올 것으로 보이는(33:19-30) 엘리후라는 인물을 끌어들인 것 같다. 이 책의 유기적인 일체성이란 이 와 같이 산문으로 된 내용, 대화, 신의 현현, 즉 근본적인 내용으로부터 출발해서 확대의 양식을 통해 저자가 근본적인 내용에다가 어느 정도 기교적으로 첨부할 새로운 요소들을 풍부하게 하고자 했다는 점으로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3. 문학유형 : 욥기는 본질적으로 교훈서이다. 욥이 존재했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Ayyab이라는 형태로그의 이름이 발견된 것만이 그 점을 뒷받침하는 유일한 것은 아니다. 에제키엘 14:14-20의 암시는 그 자체로서 널리 알려진 현자만을 겨냥하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족보의 부재가 욥의 존재에 대해 불리한 증거처럼 보여지지는 않는다. 욥은 우리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외국인으로 소개되어 왔다. 70인역의 부록은 우스라는 땅을 이두메아와 아라비아의 경계 위에 설정해 주고 있다. 이같이 자세한 지형적 정보로부터 욥의 역사성보다도 저자의 조국에 대한 논리를 더 쉽게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Pfeiffer와 같은 학자는 이 시가 이두메아 땅에서 그 뿌리를 감췄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실제적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는 동양 전승의 기원은 아마도 욥의 역사성과 산문으로 된 내용 안에 나타난 근본적인 요소들을 절대적으로 부인하지 못하게 한다.

지혜문학서에 속한 읍기는 문학형태로 볼 때 상이한 유형에 연결된다, 욥기에 나타나는 대화펀이 철학적 테두리 위에 형성되었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이 대화편을 플라톤의 대화편과 비교하는 학자들이 있으나 욥기의 긴 시적인 독백과 플라톤의 짧고 분명하고 분석적인 대화편과는 유사성이 거의 없다. 욥기를 단 하나의 문학양식이나 또는 여러 문학의 혼합양식으로 묘사하는 것은 욥기의 일체성을 고려할 때 만족할 만한 일이 아니다.

4. 연대 : 이 책은 유배 이후에 씌어졌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나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유배 이후 시대라고 보는 것은 후기 언어를 통해서, 그리고 일반적으로 지혜문학이 유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통해서이다. 기원 전 5세기말로 보는 것이 가장 그럴듯한 가능성 있는 연대이다. 그러나 산문으로 된 이야기는 그 이전에 이루어진 것이다. 에제키엘은 노아와 다니엘과 함께 전설적 현자의 유형으로서 욥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에제 14:14-21). 욥의 역사는 글로써 씌어지기 전에 구전(口傳)의 형태로서 오랜 기간 동안 돌고 돌았을 것이다.

5. 저자 : 자기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다. 최소한 욥기는 그가 교육을 잘 받은 사람이고 깊이 있게 종교적, 윤리적인 정신을 가진 자로서 심리적인 예민함에 대해 숙고할 능력이 있고 불행에 대해 매우 동정적인 성격의 소유자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아마도 욥 자신은 고통을 몰랐던 자 같다. 많은 내용들은 그가 매우 박식한 자라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욥서에 나타나는 상당수의 세부적인 내용들은 이집트 주위 환경에 대해 종속성을 띠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28:1-11, 40:15-41, 9:26, 8:11, 40:11-12).

이 책의 영등은 에도미트 족장이며 그래서 에돔에서 사건이 전개되지만 저자가 유다인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Kissane은 “시대는 성조시대이며 장소는 에돔땅이다. 그러나 표현된 사상들은 유배 후기의 팔레스틴의 한 유다인의 사상들이다”고 지적하고 있다.

6. 도식(圖式 : 내용분류) : 욥기는 아주 명확한 도식에 따라 인지되어 왔다. 시의 중심부분은 담화의 세 과정으로 되어 있고(3-31장) 폭풍우 속에서 하신 야훼의 응답이 뒤따라 나온다(38-41장). 그런데 담화의 세 번째 과정인 22-27장은 서기(書記)의 잘못으로 인한 사실이거나 오히려 발행자가 욥의 대담한 선언을 약화시키고자 시도함으로써 일련의 난맥상을 보여준다. 28장의 지혜에 대한 시는 첨가된 것 같다. 그러나 이것 역시 저자 자신의 저작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엘리후의 담화(32-37장)는 더욱 분명하게 원초 도식의 일체성을 흐트러뜨리는 본래 텍스트와는 상이한 형태를 형성한다. 엘리후라는 인물은 욥의 친구들 가운데서, 서언이나 결어 그 어느 곳에서도 언급이 되지 않고 있다. 그는 토론의 세 단계가 진행되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분명한 이유없이 개입하고 있으며 그래서 모든 것이 다음의 구절로써 끝맺고 있다. “욥의 말은 끝난다”(31:40). 일반적으로 엘리후의 담화가 욥의 세 친구가 했던 것 보다 더 신중하게 전통적 교의를 방어하기를 원했던 후기 유다인 저자에 의해 첨가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일치하고 있다. 많은 주석학자들은 39:13-18과 40:15-41:26을 후기에 첨가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① 산문으로 된 서언(1,1a-2,13)

② 담화의 세 단계

㉮ 욥의 통곡(3)

㉯ 첫 번째 단계 엘리바즈(4+5)

욥의 응답(6+7)

빌닷(8)

욥의 응답(9+10)

소바르(11)

욥의 응답(12+14)

㉰ 두 번째 단계

엘리바즈(15)

욥의 응답(16+17)

빌닷(18)

욥의 응답(19)

소바르(20)

욥의 응답(21)

㉱ 세 번째 단계

엘리바즈(22)

욥의 응답(23:1a-24:17, 25)

빌닷(25:1-6, 26:5-14)

욥의 응답(26:1-4, 27:1-12)

소바르(27:13-23, 24:18-24)

지혜에 대한 시(28)

욥의 마지막 변론(29-31)

엘리후의 담화 (32-37)

③ 야훼께서 폭풍우 속에서 응답하시다.

㉮ 첫 번째 담화(38+39)

욥이 자기의 굴복을 표명(40:1-5)

㉯ 두 번째 담화(40:6-41:34)

욥의 참회(42:1-6)

④ 산문으로 된 결어(42:7-17)

7. 욥의 문제 : 대화 속에서 욥은 그를 괴롭히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 그는 고통을 당하고 있으나 무죄하다고 느끼고 있다. 선은 보상되고 악은 이 지상 삶에서 처벌받는다는 전통적인 교의(敎義)의 결핍이 확실한 사실로서 드러난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들을 부자유스럽게 하는 새로운 진리 앞에서 눈을 감아 버릴 수 있다. 이것이 욥의 세 친구가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거리낌 없이 전통적 가르침을 받아들이면서 그리고 그 가르침이 욥의 경우와 부합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서 ‘정통성’의 대표적 인물임을 자처한다. 그들의 태도는 간단하다. 고통은 죄의 처벌이다. 만일 한 사람이 고통을 당하면 그것은 그가 죄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이론에 사실들이 순응해야만 한다.

불행한 자인 욥에게 그들이 가져오는 모든 위로란 욥이 죄인이라는 것을 설득시키는 데 있다. 욥이 자기의 무죄를 주장하면 할수록 그들은 더욱 자기네들의 주장을 내세운다. 그러나 욥은 자기가 무죄하고 최소한 그 같은 시련과 고통을 당해야 할 만큼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안다’. 욥이 전통적인 관점을 받아들이자 온 세계가 자기 앞에 문제시되었다. 모든 것이 문제시된 지금 욥은 자기의 개인적인 경우에 대한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절망적인 그의 노력은 별 진전이 없다. 자기의 고통에 대한 설명이 없다. 그래서 욥은 하느님의 정의를 의심하게끔 유혹당한다. 욥은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길에서 의미를 찾기 위해 투쟁하는, 신앙의 어두움 속에서 헤매는 구체적인 인간이다.

욥의 위대함이란 고통의 심연에 빠져들은 그가 자신을 감추시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잃게 하는 도전에 고통들을 갖다놓을 줄 안다는 것이다.

토론이 절정에 달할 때, 때맞추어 하느님이 개입하셔서 욥에게 말하기 시작하신다. 세상 묘사하는 것을 듣고 놀란 욥은 신앙고백과 굴종을 언약한다(42:5-6). 하느님을 보았다고 욥은 말한다. 그러나 신비는 남아 있다. 왜냐하면 욥은 죽음 다음에 이어질 보상에 대한 개념을 조금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길이란 욥에게는 갖추어진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완전히 남아 있다면, 욥은 하느님 그 자체를 받아들여야 하고 이제부터 하느님 계획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를 거부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실제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점이다.

인내의 인간 욥은 비산(悲酸)하였다. 그의 위치에서 우리는 참된 욥의 모습, 즉 신앙의 인간의 모습이 묘사되는 것을 보았다. 욥은 어떻게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 – 그 길을 우리가 모르지만 – 인내와 평화에로 이끌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安秉鐵)

[참고문헌] Ancien Testament, TOB, 1977 / The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 Abiugdon Press / H. Cazelles, Introduction, Chitique a l’Ancien Testament, Desclee et Cie, Paris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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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편지 [라] Epistolae Catholica Beati Joannis Apostoli

1. 요한의 첫째 편지 ① 문헌의 유형 : 요한의 첫째편지 유형(genre)을 규정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우선 이 문헌의 첫머리에 발신인, 수신인, 그리고 인사말이 없을 뿐 아니라 맨 끝에 가서도 마지막 인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 외형으로 보아도 편지가 아님은 확실하다. 내용으로 보아도 어떤 구체적 교회에 보낸 편지도 아니며 그렇다고 회답서신도 아님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문헌의 수신인을 ‘내 어린 자녀들’(2:1)이라고 부르고, 그 내용이 그들의 믿음을 굳게 해 주며 신앙에 항구하라고 격려한 것으로 보아(1:1-3, 4:4-6, 5:4-12), 그 시대의 교회에 널리 알려진 존경과 신뢰를 받고 있던 교회의 지도자가 이 글을 쓴 것은 확실하다(2:18-27, 4:1-6, 5:21). 그는 교회 안에 새로 들어온 위험한 사상(영지주의)으로부터 신자들을 보호하려고, 그들을 경고하며 신자들을 격려하고 있다(2:15-17, 3:11-24, 4:7-12 19-5:3). 따라서 요한의 첫째 편지는 시간을 초월하여 항상 도움이 되고 교회 공동체에 필요한 격려의 말이 담긴 강론류의 문헌으로 보아 무난할 것이다.

② 시대적 배경 : 이 문헌이 쓰여진 역사적 상황은 교회가 설립되어 이미 오랜 시간이 경과하여 많은 발전을 한 다음이었다. 이때에 ‘처음부터’(2:7, 24:3-11) 받아들인 진리의 말씀을 거슬러 ‘반그리스도인’(antichrist)(2:18 · 22)이 일어나고 거짓 예언자(4:1)가 나타나 현혹할 때, 신자들은 그들의 바른 믿음을 지키려고 애쓰던 시기였다(4:4-16). 그러면 이 이단들의 주장은 무엇인가? 그들은 영지주의적 신비사상에 물들어 하느님과 더불어 살고(2:3), 빛 속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2:9).

특히 그리스도론적 오류로서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며(2:22), 하느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4:15). 따라서 성자의 사람되심(incarnatio)을 거부하고(4:2), ‘물과 피’(4:3, 5:6)로써 오심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③ 요한복음과의 관계 : 요한의 첫째 편지와 요한복음의 어휘 어구 및 문체가 거의 같아 언어적인 측면에서 볼 때 같은 저자의 작품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만큼 유사하다. 그리고 신학적으로 볼 때도 이 두 저서는 기타 신약성서와 비교하여 신학개념과 사상의 세계가 거의 같아 ‘요한의 신학’으로 말할 수 있을 만큼 동일하다. 예컨대 하느님의 개념(요한 4:24, 1요한 1:5, 4:8 16), 하느님을 거역하는 세력인 암흑과 죽음, 그리고 그것의 특징으로 나타나는 미움과 거짓 등의 이원론적 표현들이 같고, 그리스도론적 전문어의 일치(요한 1:1, 1요한 1:1), 구원은 ‘믿음’과 ‘인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사람이 되심(incarnatio)(요한 1:1, 1요한 1:1) 그리고 하느님의 계명과 사랑의 계명을 강조하는 것 등이다.

④ 저자와 연대 : 교회의 오랜 전승은 이레네오(Irenaeus) 교부 때부터 벌써 이 저서의 저자를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사도인 요한으로 생각하였고, 저술 장소를 소아시아로 믿어 왔다. 요한의 첫째 편지가 요한복음과 비교하여 언어가 거의 같고 신학전망이 일치하는 점을 미루어 두 저서의 저자가 같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고, 그가 곧 전승이 말하는 사도이며 제베대오의 아들이었던 요한이거나 아니면 그 제자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저술 연대는 요한복음과 긴밀한 점을 미루어 1세기 말로 보인다.

2. 요한의 둘째 편지, 셋째 편지 : 요한의 둘째 편지, 셋째 편지는 요한의 첫째 편지와는 달리 편지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요한의 둘째 편지는 교회에 보낸 편지이고, 요한의 셋째 편지는 개인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 두 편지의 발신인은 자기를 ‘원로’(o presbuteros)라고 부르고 있다. 그를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사도인 요한이라고 증명할 수는 없으나 ‘요한의 교회’의 중요한 인물로서 ‘요한의 전승’을 대표하며, 그것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다. 그가 사도 요한이 아니면 적어도 그의 제자임은 확실하다. 이 두 편지가 쓰여진 장소는 요한의 첫째 편지와 마찬가지로 소아시아로 생각되며 이 세 문헌이 쓰여진 시기와 같은 1세기말로 보인다. (金炳學)

[참고문헌] R. Schnackenburg, Die Johannesbriefe, Freiburg 1965 / R. Bultmann, Die drei Johannesbriefe, Gottingen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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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복음서 [한] ∼福音書 [라] Evangelium secundum Joannem [영] The Gospel according to Joh

1. 복음 : 요한의 복음서에는 “복음”(euangelisthai, evangelion)이라는 용어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이 복음서야말로 복음서 중의 복음서이다. 복음은 본시 문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산 말[口傳]로 전해졌다. 그것은 원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사자(使者)로서 이 세상에 가지고 온 것이었다(이사 52:7 참조). 그러나 원시 교회는 이 복음을 부활사건이 있는 후,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 하느님 오른편에 높이 거양(擧揚)되신 메시아시며 주(主)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말씀으로 알아듣게 되었고(사도 2:36, 5:42, 로마 1:1-4 참조), 훨씬 후에야 서면으로 전해지기 시작하였다. 이것을 우리는 복음서라고 부른다.

요한의 복음서는 원시교회의 이 예수 전승(傳承)을 충실히 따르며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복음서 전반부(1-12장)에 수록하였고, 복음의 핵심인 예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후반부(13-21장)에 기록함으로써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시며 하느님의 아들임을 믿고 그 믿음으로 구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요한 20:30-31 참조).

2. 공관복음서와의 관계 : 요한복음은 공관복음(共觀福音)[마태오, 마르코, 루가]과 복음서라는 관점에서는 거의 같지만 내용 면에서는 크게 차이를 보이고 있다. 첫째로 두 복음서간의 지리적 순서나 연대적 순서가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공관복음서에는 예수의 활동이 갈릴래아 지방에서 시작하여 유대지방을 거쳐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완성되는 것으로 나타나는 데 비하여 요한복음서에서는 예수의 전교활동이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수시로 자유롭게 이동하며 이루어지는 것으로 나타나며,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의 활동이 예루살렘에서 단 한 번의 빠스카(해방절) 축제를 맞이하여 끝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요한의 복음서에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빠스카 축제를 지낸 것이 적어도 세 번(2:13, 6:4, 11:55)은 기록되어 있으므로, 예수의 포교활동이 3년을 지속된 것으로 나타난다. 둘째로 복음서의 구성과 문체도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공관복음은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단편적으로 많이 수집하여 전하는 데 비하여 요한복음은 예수의 기적[징표, Semeion] 몇 가지만 선별하여 그것에 예수의 담화(談話, discourse)와 나란히 연결시켜 복음을 전개해 나아간다. 셋째로 요한복음에서는 공관복음에 비하여 예수의 행적이 적게 전해지는 것이 사실이나, 공관복음에는 전연 전해지지 않은 새로운 사실들이 전해지고 있다. 즉 가나의 혼인잔치(2:1-11), 니고데모와의 대화(3:1-11), 사마리아 인과의 대화(4:5-42), 라자로의 부활(11:1-57),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심(13:1-19) 그리고 최후만찬 때의 긴 이별의 담화(13:31, 17:26) 등이다.

그러면 요한복음의 저자는 공관복음을 알고 있었을까? 요한복음이 공관복음을 자기 복음의 자료로 인용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 전승과는 독립된 자기 고유의 전승에서 온 것이며, 간혹 두 복음 사이의 같은 내용이 발견되는 것은 공관복음을 자료로서 인용해서가 아니라, 그 이전 구전으로 전해질 때의 상태에서 온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3. 전승과 편집 : 19세기까지 요한복음은 한 사람의 작품으로 간단히 생각되어 왔으나, 오랜 연구를 거듭한 결과 이 복음서는 긴 세월을 두고 서서히 완성된 작품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어떤 부분은 전승 초기에 이미 형성된 것이 있고, 어떤 것은 전승 후기의 발달된 신학을 반영하는 것도 있다. 이처럼 생성 연대와 배경으로 다른 전승이 저자의 신학으로 집중되어 성숙하며 완성된 것이기 때문에 이 저서는 본질적으로 한 사람의 작품으로 봄이 옳을 것이다.

그러면 이 복음저자가 자기 복음서에 사용한 자료가 이미 서면(書面)으로 고정된 문헌이었을까? 우리는 단지 기적의 자료만 서면으로 된 것으로 보고 나머지는 거의 대부분 구전으로 전해진 전승에서 왔다고 본다. 그 중에도 예수의 어록(語錄, logion)과 담화는 전승 초기에 이미 형성된 것으로 본다. 그밖에 원시교회의 예전에 사용되었던 ‘말씀(Logos)의 찬가’(讚歌)(요한 1:1-18)와 요한의 교회에 전해지던 ‘복음선포’(Kerygma)(예컨대 요한 6:31-58) 등이 이 복음서에 들어와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복음서의 전체적 구성과 신학의 내용은 이 복음저자의 것이지만 그는 이 복음을 완성하지 못하였고, 요한복음의 21장을 추가한 그의 제자가 이 복음서를 출간한 것으로 생각된다.

4. 저자 : 교회에 전해 오는 오랜 전승은 요한복음의 저자를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12제자 중 하나였던 요한으로 생각하고 있다. 예컨대 파피아스(Papias)(에우세비오, ≪교회사≫, Ⅲ, 39:3-4), 이레네오(Irenaeus)(≪반이단론≫, Ⅲ, 1:1) 그리고 무라토리(Muratori) 단편(K. Alad, ≪4복음서 공간≫, P.533 참조)은 이미 2세기에 이를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19세기부터 이 전통적 견해에 이이가 제기되었다. 공관복음서에 비해 요한복음은 그 내용이나 신학이 너무나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12사도 중 하나인 요한이 이 복음서의 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복음서는 역사적 사건의 목격증인의 것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요한의 복음서 문제’ 중의 하나인 이 저자문제도 그 후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여러 가지가 밝혀졌으나 아직 많은 점이 어두움 속에 묻혀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연구를 종합하여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세우는 바이다.

요한의 복음 선포는 맨 처음 간결한 것이었고 구전으로 전해졌다. 그것이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많아지면서 서면으로 전해지기 시작하여 완전한 복음서를 집필할 결심을 하고 전승 속에 전해지는 여러 자료들을 수집 정리하여 그리스어를 구사하는 비서를 채용하여 그에게 전체적인 구성과 내용을 주어 이 저작을 완성케 하였다. 이 사람이 바로 오늘 우리에게 전해진 요한의 복음서를 출간한 사람으로서 21장을 첨가하고, 5장과 6장의 순서를 바꾸었다. 요한복음의 저자를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 ‘또 다른 제자’라고 불렀던 요한의 제자로 생각된다. 요한복음서의 완성 연대는 100년경을 보이며 저술 장소는 소아시아로 추측해 본다.

5. 사상적 배경 : 요한의 복음서를 이해하기 위하여 그 시대의 사상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첫째로 요한복음에 영향을 준 것은 구약성서이다. 요한의 구약성서를 분명하게 인용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지만, 19곳이나 인용하고 있으며, 특히 지혜서(智慧書)계 문헌의 주제들, 예컨대 물, 천상의 양식, 목자, 포도, 성전 등이 자주 등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요한은 구약을 깊이 묵상하고 있으며 그 사상을 자기 그리스도론의 자료로 삼고 있다. 둘째로 그 시대의 유대사상과의 접촉이 나타난다. 그 일부는 유대적 헬레니즘사상이고 또한 부분은 바리사이-랍비적 유대사상이다. 그리고 특기해야 할 것은 근자에 발견된 쿰란(Qumran)문헌과 요한복음 사이에 유사점이 많이 발견되는 점이다. 셋째로 그 시대에 널리 전파되어 있던 영지사상(靈知思想, Gnosticism)과는 어떠한 관계를 갖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요한복음과 유사한 점이 가장 많이 나타나는 영지사상의 문헌으로 cospus hermeticum(1, 13장)과 Manda문헌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요한복음의 logos와 비슷한 개념이 hermeticum(I, 5-6)에 나타난다. 그리고 그 문헌 XIII장에는 ‘새 생명으로 태어남’의 신비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요한복음과 비슷하게 구원을 주는 ‘계시’, ‘인식’, ‘직관’에 관한 언급이 있다. 그리고 Manda문헌에 나타나는 ‘구세주 신화’에 있어서 그 골격을 이루고 있는 구세주 즉 계시자의 이 지상에로의 하강과 다시 천사에로의 승천의 구조 속에 영지주의적 이원론적 개념(생명과 빛, 진리와 허위, 계시자와의 일치, 세상과의 이별)이 등장하는데 이 점이 요한복음과 비슷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유사점이 곧 요한복음 사상의 원류가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6. 신학 : 요한복음의 핵심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은 요한의 신학사상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과 같다. 그것은 그리스도론(Christology)이라고 한 마디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리스도론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으므로 그 속에는 구원론(soteriology)이 동시에 포함되어 있다. “이 책을 쓴 목적은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고 그 믿음으로 여러분이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요한 20:31). 그리고 요한복음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예수의 기적과 자기 계시인 ‘말씀의 계시’는 한결같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신앙으로 인도하고 있다. 예수는 ‘세상의 구원자’(요한 4:42)이기 때문이다.

이 구원을 얻는 방법으로 요한은 그 시대의 이원론적 세계관의 개념을 빌어 설명한다. 즉 암흑과 죽음의 이 물질적 지상의 세계에 살고 있는 인류를 광명과 생명의 저 영적인 천상의 세계로 인도하는 구세주이며 계시자인 예수를 ‘얻고’, ‘알고’, ‘고백함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한의 구원은 ‘기현화 종말론’(旣現化 終末論, realized eschatology)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그의 그리스도가 종말론적으로 현존하는 분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구원은 교회(Ecclesia)를 통하여 이 세상에 실현되고 있고, 구체적으로 교회의 성사(sacraments)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다고 본다. (金炳學)

[참고문헌] C.H. Dodd, The Interpretation of the Fourth Gospel, Cambridge 1953 / C.H. Dodd, Historical Tradition in the Fouth Gospel, Cambridge 1963 / R. Bultmann, Das Evangelium des Johannes, Gottingen 1957 / R.E. Brow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I-XII(1966), XIII-XXI(1970), Garden City, N.Y / R. Schnackenburg, Das Johannesevangelium I(1967, II(1971), III(1975), Freibu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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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묵시록 [한] ∼默示錄 [라] Apocalypsis Beati Joannes Apostoli [영] Book of Apocalypse

묵시록(黙示錄), 즉 “말없는 가운데 비밀을 나타내 보인다”는 우리말 표현이 성서의 마지막 책의 이름이다. 원래 이 표현은 그리스 말 apocaluptein, 다시 말해 ‘가리는 너울, 혹은 베일을 벗기다’라는 동사에서 파생한 명사이다. 그러므로 묵시록은 하느님의 비밀을 갖추고 또 가리고 있는 베일을 벗기는 책(revelatio)인 것이다. 묵시문학은 구약의 예언문학에서 출발한 성서의 매우 독특한 전통에서 연유하고 있으니, 예언자들의 신탁(神託)에 관한 일종의 재해석(re-interpretatio)이라고 규정할 수가 있다. 또 묵시문학은 대략 기원전 2세기부터 성서와 성서주변문학에서 나타나고 있으며(다니 7-12장 참조), 그 문학의 선구자들로서는 에제키엘, 요엘, 즈가리야와 이사 24∼27장의 저자 등을 손꼽을 수가 있다.

묵시록의 문학유형은 매우 난해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신탁과 현시(顯示, visio), 하늘세계를 묘사하는 풍부한 이미지, 은유, 환유, 상징들이 묵시록을 가득 채우고 있다. 전혀 차원이 다른 하느님의 세계와 영원으로부터 준비한 인류역사에 대한 하느님의 비밀과 그분의 결정적인 승리에 대한 계획을 묘사하는 것이 묵시록의 대상이다. 이 같은 문학유형의 의도는 우주나 인류의 역사가 통째로 하느님 왕국의 긴박한 도래(到來)에 의해 변혁, 결정되며 또 시간의 마지막에 대한 비전은 새로운 창조와 맞먹는다는 것에 있다. 시련과 유혹 그리고 알력의 때인 현시대는 종국적으로 하느님의 질서에 의해 대치될 것이다. 또 하느님은 우주와 역사의 주인이요 심판자인 까닭에, 인간의 구원은 창조의 한 ‘케이스’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은 구원이 완성되는 ‘주님의 날’을 위해 인내로이 깨어 있으며 또 그날의 선택받은 자가 되기 위해서 지금부터 하느님의 편에 서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요한의 묵시록은 묵시문학의 유형과 구조를 사용하고 있지만 매우 독특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 묵시록의 중대한 일부인 2-3장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니 이 편지들은 묵시문학의 형식보다는 예언자들의 설교양식을 취하고 있다. 편지의 발신자는 자기의 이름을 밝히고 수신자인 동시대인들에게 설교형식을 통해 중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요한의 묵시록은 종교사에 관한 독특한 해석과 그 주요 관심사 때문에 여타의 묵시문학과는 구별된다. 시간의 마지막에 대한 요한적 비전은 초대교회의 신학적 확신을 그 밑바닥에 깔고 있다. 유태교적 묵시문학이 기다리고 있던 ‘새 시대’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시작되었다. 마지막의 때[終末의 시간]는 이미 시작되었고 또 그때의 하느님의 선물 곧 모든 인간들에게 내리신 성령(사도 2:16-21 참조)은 전달되었으며, 그리스도 교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부활한 사람이다. 하지만 왕국의 도래는 비밀스럽게 성취되고 있으니, 이 신비가 계시의 대상이기에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왕국은 그 영광의 현시를 지향하는 완벽한 실현을 기다리고 있다. 역사에 대한 이 같은 비전은 묵시문학의 주제인 ‘주님의 날’을 이중적으로 수식한다. 이날은 그리스도의 부활사건과 그분의 최상주권을 지적한다. 또 이날은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는 하느님 왕국의 보편적이고도 찬란한 현시의 날(Parousia), 곧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날을 지적하고 있다. 이 두 날의 긴장감 속에서 교회의 때가 전개된다. 교회는 현시대의 때 안에 살고 있지만 동시에 종말의 실제 안에 살고 있는 것이다.

묵시록의 저자는 누구이며 그 책의 사건을 유발시킨 시대적 상황은 어떠한가? 불행히도 묵시록의 저자는 자신의 정체를 뚜렷이 밝히지 않고 있다. 저자는 자기의 가명을 요한이라 밝히고 있지만 스스로를 예언자로 소개한다(1:1 · 4 · 9, 22:8-9). 이 책의 어느 곳에서도 저자는 자신이 열두 사도들 중의 한 사람인 넷째 복음의 저자 요한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성서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오늘날 그들의 대부분은 사도 요한의 가르침을 받은 에페소 교회의 편집자들의 손에 의해 묵시록이 쓰여졌다고 보고 있다. 묵시록의 수신자들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1:3 · 11, 2-3장)인데 그 교회들의 소재는 소아시아의 지방에 해당하고 그 지방의 수도는 에페소이다. 일곱의 숫자는 완벽성을 뜻한다. 하여 묵시록의 저자는 단순히 아시아의 일곱 교회 공동체뿐만 아니라 전체 교회에 자신의 묵시적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한 것이다. 묵시록이란 책의 사건을 유발시킨 시대적 배경은 아직도 확실히 알 수가 없다. 혹자는 묵시록의 연대를 네로 황제의 그리스도교인 박해와 예루살렘 멸망을 선행하는 시대(기원후 65∼70년)로 보는가 하면 어떤 이는 “로마의 황제를 신으로 섬겨야 한다”고 선포한 도미티아누스(Domitianus)의 치세 도중, 그러니까 기원후 91∼96년 사이에 그 책이 쓰여진 것으로 보고 있다. 화제 숭배를 증언한 프랑스 리용의 교부 이레네오에 따라 오늘날 대부분 성서학자들은 둘째 번의 연대규정을 선택하고 있다. 묵시록이 주 예수의 왕국과 로마 황제의 신성 모독적인 왕국 사이의 적대관계를 매우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묵시록은 박해와 위기의 시대에 쓰여진 책인 것이다.

묵시록의 구조는 매우 복잡하고 그 해석 또한 심히 어렵다. 하지만 우리의 손에 전해진 오늘날의 묵시록 본문들은 어느 정도 일관성이 있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독자는 이 책이 2부로 나뉘어져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제1부는 예언자적 기질을 지니고 있으니, 그 형식은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들’(1:9-3:22)로 나타나고 제2부는 엄격하게 묵시적 형식(4:1-22:5)을 취하고 있다. 제2부는 또 다음의 묵시적 주제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 마지막 때의 전조(前兆)(6:1-11:19), △ 현시대의 시련과 대결투(12:1-20:15), 완성과 마지막의 현시(21:1-22:5). 이 도식은 또다시 일곱 숫자의 놀이로 복합적인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일곱 개의 인장, 일곱의 나팔과 잔이 그것이다. 일곱의 숫자 사이에 예언자의 비전들이 끼여들고 있으니, 수많은 암시, 구약본문들의 요약, 교회와 현시대의 신비에 대한 예언자의 명상록 등이 그 내용이다. 이 내용들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대부분의 묵시록 주석가들은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이 비전들의 대구법(對句法)을 감안하여 그것들의 수사학적(修辭學的) 구조에 유의하고 있다. 묵시록의 편찬자들은 이 비전들을 통해 언제나 변함없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적 가르침을 여러 가지 형태로 설명하며 재조명하고 있다는 것 때문이다.

이처럼 다양한 문학형식과 복잡한 구조에도 불구하고 묵시록의 메시지와 그 현실성은 놀랄 만큼 명백하다. 모든 예언자들의 메시지처럼 묵시록은 하느님 계획의 현실성을 선포하고 이와 연관시켜 우리들의 긴박한 참여를 강조한다. 이 선포는 ‘현시대’의 시간과 그 시간의 완성의 비밀을 밝히고 있다. 하느님의 창업은 이미 그 마지막 단계에 와 있으니, 인류는 이제 그 창업(創業)의 현시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1:7, 22:20). 이미 그리스도는 승리했고 그의 왕국이 창시되었다. 예수님이 구세주요 하느님이 세우신 우주와 인류역사의 주님이시다(5:5-14, 11:15-17, 12:10, 1911-16). 오늘의 우리는 역사의 마지막시대 안에 살고 있고 구원의 선참(先參)과 심판의 전조 안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 사건 앞에 불행히도 인간들은 서로 화해가 불가능한 두 부류로 나뉘어진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승리에 가담하고 메시아적 백성의 실현인 바 하느님의 백성을 구성한다(7:9-17, 14:1-5, 15:2-4, 17:4, 19:1-9, 20:4-6). 하지만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는 부류의 인간들이 있다. 그들은 하느님에게 저항하는 불경자들이다. 묵시록은 이들을 ‘땅의 주민들’이라 부르니, 사탄의 사주에 놀아나는 자들로서 사탄처럼 저주받은 사람들이다(6:15-17, 9:20-21, 13:7-8과 14-17, 14:9-11, 17:8-14, 18:9-19, 19:19-22, 20:7-9). 교회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위격과 업적에 연결되어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선택한 공동체요 그분 사랑의 대상이다(1:56, 3:9, 7:3-4, 12:6, 19:7-9).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공동체이다(1:56, 5:9, 7:14, 14:3-4). 또 교회는 그리스도 왕국의 시작이요 왕과 사제다운 백성이다(1:6, 5:10, 7:15, 20:4-6). 이 같은 특성들 때문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운명과 실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성실한 증인’으로서 예언자였으니(1:5, 3:14, 19:11) 교회도 이 세상 안에서 증언을 하는 거룩한 공동체이다.

교회도 그리스도처럼 예언자적사명을 수행한다(11:3-6, 12:17, 19:10, 22:9). 그리스도는 당신의 증언을 수난으로 완성했으니, 하느님의 원수인 세상의 적대 세력에 부딪쳤기 때문이다(1:5, 5:6). 교회도 그리스도처럼 시련과 투쟁, 순교를 통해 자신의 사명을 완수한다. 한국 교회의 순교자들은 묵시록의 진리를 그들의 피소리로 증언하고 있다(6:9, 7:14, 11:7-10, 12:2 · 4 · 11 16:6, 18:24, 20:4). 그리스도는 승리하신, 부활하신 분이다(1:5 · 18, 5:5, 12:5, 17:14, 19:11-21).

교회는 이미 그분의 승리에 참여하고 있으니, 그 교회가 선택받은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다고 말해야 한다. 교회가 부활의 발단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6:11, 7:16-17, 11:11-12, 12:11, 17:14, 20:4-6). 그리스도는 영광과 최고주권자이시다(1:5 · 12-16, 19:16). 그런 이유로 교회는 이미 사제적 왕국이다. 교회는 이 세상 안에서 경신(敬神)과 예배를 통해 천상의 전례(典禮)를 구현하고 있다. 교회의 전례는 곧 나타날 천국의 승리를 예시한다(7:9-12 · 15, 14:3, 20:4 · 6). 이리하여 현시대 안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다양한 신비들을 살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천주의 어린양이 가시는 모든 곳을 따라 다닌다(14:4). 어린양의 길이 모든 그리스도 교인들의 윤리적 영성적 귀감인 것이다. 교회는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 안에서 그분을 성실하게 증언해야 한다(1:3, 2:10 · 13 · 26, 3:8, 14:12, 22:7 · 9). 교회는 이 지상생활에서 유형의 처지에 있는 공동체다. 그렇지 못하면 교회는 세상의 빛도 소금도 아니다. 교회가 박해를 받는다는 것은 유형지에 와 있다는 것의 명백한 증거이다. 하지만 교회는 그 시련 때문에 하느님의 보호를 보증받고 있으니, 교회가 이미 부활의 시초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시련과 영광의 처지 안에서 교회가 취할 태도는 진리에 성실하게 사는 것이다. 끝까지 진리를 증언하는 것은 예언자들의 성실성이다. 피의 순교를 마다하지 않음은 증언의 특수형식이라 할 수 있다(1:9, 2:2 · 3 · 10, 3:10-11, 13:10, 14:12). 교회는 탈출(脫出) 애굽의 길 위에 있다. 그의 길은 험난하고 목마른 사막의 길이다. 하지만 그 해방의 길이 지향하는 터미널은 교회의 참다운 조국, 곧 천상 예루살렘이다. 교회는 그 천상수도(天上首都)의 왕, 곧 우리 주님의 나타나심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동녀들이다(마태 25:2). 비록 현시대의 시련이 냉혹하더라도, 우리의 조국과 왕의 나라에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 이유로 교회는 현재의 시련과 미래의 결정적인 승리의 긴장 안에서 모든 희망의 기수인 것이다. “오소서! 주 예수님!”의 외침은 이 불굴의 희망을 증언하고 있다(6:10, 10:7, 11:17-18, 12:10-12, 15:3-4, 19:7-9, 20:3-4, 22:17 20).

이 메시지는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와 각자에게 호소력과 현실성을 지니고 있다. 천상 예루살렘과 그 왕의 재림은 ‘인민의 아편’이 아니다. 교회와 그 안의 각 인간은 부활의 보증을 받은 이상 매 순간 그 부활의 사랑과 정의대로 행동하고 처신해야 한다. 신도 각자는 매 순간 이 세상의 우상숭배와 그 뒤에 숨어 있는 사탄과 싸워야 한다. 그리스도를 따른다 함은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현시점의 시간의 중대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교회와 그 신도들의 매일매일의 삶은 세상의 죄와 타협할 수가 없다.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편에 선다는 것은 지금 또 여기에서 전적인 투신과 참여를 요구하고 있다. “나의 현존을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의 전망 안에 둔다”는 것은 주 예수가 역사의 원칙이요 목적임을 의미하고 있으니, 지상적 실제들이 하느님의 계획에 의해 상대적이란 뜻이다. 또 묵시록은 전례를 통해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강조하고 있다. 전례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그분을 파스카의 주님으로, 천상 예루살렘의 다시 오실 주님으로 상징화한다. 오늘의 교회가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께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예배를 드리는 것은 장차 도래할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그리며 지내는 ‘초대받은 사람들의 행복’(묵시 19:9)을 상징화하고 있는 전례인 것이다. (徐仁錫)

[참고문헌] A. Bisping, 1876 / E.B. Allo, Paris 1921 / A. Wikenhauser, Regensburg 1949 / J. Sickenberger(2hg), 1942 / J. Bonsirven, Paris 1951 / E. Schik(Echter Bible), Wurzburg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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