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이성 [한] 信仰~理性 [라] fides et ratio [영] faith and reason [관련] 신앙

신앙이란 하느님의 부르심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인격적인 응답이요 신학 또는 교의(敎義)에 관한 지식이며 인간 상호간 및 인간에 관한 지식이며 인간과 하느님간에 성립하는 초자연적 측면이다. 한편 이성은 인간이 지식을 분석하고 전개시키는데 사용되는 지적(知的) 능력이며 피조물간에 상호간 및 피조물과 조물주간에 존재하는 자연적 측면이다. 이런 두 개념을 연관 시켜 신앙과 이성이라 할 때 이는 인식론적 조화의 문제 뿐 아니라 넓게는 자연과 초자연, 좁게는 학문과 계시의 관련성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다.

양자의 관계에 관하여 이를 구별하지 않는 견해와 구별하는 견해가 대립되어 있다. 전자에 속하는 견해로는 ① 신앙의 이성의 필요를 배제한다는 신앙주의나 전통주의, ② 이성이 신앙 문제를 망라하고 있다는 합리주의, 과학주의, 현대주의, ③ 신앙과 이성의 구별은 사고상의 한계에 기인할 뿐 실제적인 상태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는 자연주의 또는 초자연주의의 입장 등이 있다. 이와 반대로 후자의 견해는 ① 신앙과 이성은 두 가지 인식 양태로서 서로 대립되며 인간의 모든 사고와 행위 영역에서 독립된 역할을 수행하고, ② 신앙(또는 이성)은 인간에게 확실하고 적절한 지식을 제공하나 이성(또는 신앙)은 모호한 지식밖에 부여하지 않는다고 한다.

역사를 통해 볼 때, 초대 교회에서는 신앙과 이성의 문제가 그리스도교 계시와 그리스 · 로마적 지식과의 관계가 나타났다. 계시 진리를 받아들이는 근거는 계시하신 하느님의 권위이었으나 세속적 지식의 그것은 그 지식에 대한 합리적 증명이었다. 그러면서도 초대교회 호교론자들은 그리스도교를 유일하고 참된 철학으로 제시하고 신앙을 모든 이의 생활양식에 관련지으려 하였다. 아우구스티노에게 있어서 신앙과 이성은 구별되지 않는다. 그는 신앙에 접근함에 있어서 믿음에로 이끌어 주는 이성을 추구하며, 신앙으로 무장하여 이해에 도달하고자 한다.

6~7세기에도 교부들 특히 아우구스티노의 영향이 지속되었고 계시를 이해하기 위하여 인간적 지식이 총동원되기 시작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서방에 도입되었다. 신학은 11세기까지 문법체계를 갖추었고 12세기에 와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적 방법을 적용하였다. 13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전 저작이 소개되자 신학자들은 자연, 인간, 윤리, 존재 등에 관한 총체적 개념을 갖게 되었고,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두고 열띤 논쟁을 벌였다. 그 결과 대 알베르토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서에서 볼 수 있듯이 새롭게 균형잡힌 자유주의가 탄생하였고 마침내 신학은 신앙과 이성을 새롭게 종합함으로써 가히 학문이라는 칭호를 획득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종합도 오래가지 못하였다. 둔스 스코투스와 윌리암 오캄의 저서에서 지지받은 14세기의 비평신학은 신학의 학문 칭호를 부정하였고 신앙과 이성을 분리시켰던 것이다.

양자의 괴리는 15세기 이후 특히 종교개혁과 가톨릭 개혁(Counter-Reformation) 이래 더욱 깊어졌다. 그러나 신자들은 변천하는 세태로 인하여 신앙을 정치적, 사회적 발전에 더욱 관련시키고자 애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상과 현실간에 간격을 메우기 위한 시도가 에크하르트, 토마스 아 켐피스 등의 반(反)지성적 신비주의 경향(Devotio, Moderna), 쿠사의 니콜라오 (Nicholas of Cusa)의 ‘박학한 무지'(docta ignorantia), 에라스무스의 인문주의 등으로 표현되었다. 스콜라 철학은 신학교의 교과목으로 위축되고 가에타노(Cajetanus)와 성 토마스의 요한(John of St. Thomas)등이 펴낸 아퀴나스의 주석서들은 이성과 신앙을 더욱 분리시켰으며 신학이 교의신학과 윤리신학으로 분화되었다.

19세기의 신학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대결로 일관하였는데 그 결과 이성의 옹호자와 신망의 옹호자 양측은 극단적인 입장의 한계를 깨닫게 되어 그 후로는 대화를 모색하는 경향이다.

그렇다면 신앙과 이성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 물음은 양자 간에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음을 전제한다. 공통점은 지식을 습득하는 수단이다. 다만 이성은 지적을 습득하는 수단임에 반하여 신앙은 초자연적인 수단인 것이다. 유태 그리스도교 전승에 의하면 신앙인은 이성의 자연적 수용력을 초월하는 진리를 확신하는 자이다. 그 확신은 이성을 납득시키는 증명에 근거 하지 않고 속지도 속이시지도 않으시는 하느님의 권위에 근거하며 이 권위가 의지를 움직여 동의하게 만든다. 이 점에서 신앙이 이성은 일단 구별된다. 그러나 신앙이 지식을 수반하는 한 신앙인은 하느님의 권위를 인식하는데 있어서 다른 사람의 중개를 받는 등 인간적인 방법을 거친다. 한편 인간이 인식하는 진리는 그것이 아무리 이성적인 것이더라도 궁극적으로 진리의 원천이신 하느님의 창조적 현존에 바탕을 두고 있다. 더구나 그러한 지식은 감각의 사실성, 논리의 일관성, 원리들의 진실성 등에 대한 신뢰 또는 믿음을 전제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현대의 일부 경향은 신앙과 이성을 명확히 구별하지 않고 정도의 차이로 이해한다.

아퀴나스에 의하면 신앙은 교리에 대한 지식임과 동시에 교리를 진정한 것으로 받아들임 의미한다. 이 받아들임은 의지의 작용이다. 그러나 의지적 요소 역시 신앙과 이성을 구별하는 충분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 주어진 문제를 해결할 때 특정한 입장을 취하는 경우처럼 모든 지식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의지행위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신앙과 이성과의 관련문제는 인간적인 면과 신적(神的)인 면, 인식적 측면과 의지적 측면에서 해명되어야 할 것이 많다고 하겠다. (⇒) 신앙

[참고문헌] E.F. Byrne, E.A. Masziarz, Faith and reason, New Catholic Encyclopedia, Vol. 5, McGraw-Hill,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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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 [한] 信仰告白 [영] confession of faith

믿음을 공식적으로 표현하는 것. 신약성서에서 신앙고백이란 단어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을 의미하였다(l디모 6:13, 2고린 9:13). 그리스도란 히브리어 메시아의 그리스어역이다. 결국 신앙고백이란 예수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왔고, 그를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박해시대에 신앙고백은 순교자와 증거자에 의해 이뤄졌다. 이들은 박해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고백하였다. 초대 교회시대에는 많은 이단적인 교설을 물리치고 신앙의 본질을 명백히 하여 교회 내의 일치를 이룩하기 위해 사도신경이나 니체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였다. 1014년 교회는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하기로 한 후 매번 미사 중에 이로써 우리들의 신앙을 고백한다. 최초의 개신교 신앙고백서는 1530년 루터파의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다. 그 뒤 각각 분산된 교회의 교리적 일치를 위해 만들어 진 것이 유명한 신앙고백문(Konkordienformel, 1577)이다. 이러한 개신교의 신앙고백은 각 종교단체의 공동체 내부의 일치나 다른 종파와의 구별을 명확하게 하는 수단으로도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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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한] 信仰 [라] fides [영] faith

신앙이란 믿는 것을 뜻하며 ‘믿는다’는 말에는 크게 보아 두 가지 뜻을 지닌다. 친구를 믿는다고 할 때는 그의 능력과 성실성을 인정하여 그를 신뢰한다는 뜻이고, 교리를 믿는다고 할 때는 그 교리의 내용이 나에게 자명(自明)하지 않지만 교리를 제시하는 권위자가 그 내용을 잘 알고 있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전해 주리라는 사실을 인정하여 교리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양자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연구의 편의상 우리가 ‘무엇을’, ‘무엇 때문에’ 믿느냐 하는 신앙의 객관적 여건을 살피고 나서, 믿음이란 어떻게 행위하고 처신함을 의미하느냐 하는 신앙의 주관적 요인을 고찰하기로 한다.

1. 신앙의 객관적 여건 : 신학자들은 흔히 아우구스티노의 표현을 빌어 하느님을(Deum) 믿고[신앙의 직접 대상], 하느님에게(Deo) 믿고[신앙의 근거], 하느님께로(in Deum) 믿는다[신앙의 궁극목적]는 말로써 신앙을 묘사한다.

① 신앙의 대상 : 신앙의 집약적 표현인 사도신경에는 직접 하느님에 관한 조항 뿐 아니라 인간과 세상에 관한 것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조항은 하느님과의 관련 하에서만 신앙의 내용이 될 수 있다. 더욱 그것에 대하여 하느님의 계시가 있으면 신앙의 내용이 된다. ② 신앙의 목적 :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공경하는 것은 구원받기 위함이며 구원받는다는 것은 창조주가 인간에 설정한 목적을 달성함을 의미한다. 즉 하느님은 자신을 인간의 목적으로 설정했으므로 하느님에 합일(合一)하는 것이 인간의 행복이며 목적이다. 이 목적을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하느님 자신이므로 하느님이 먼저 거기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다(이사 64:4, 1고린 2:9 참조). 여기에 계시의 필요성이 있고 이를 신앙으로 받들어야 할 이유가 있다. 우리는 피조물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으나(로마 1:20), 그 범위를 초월하는 진리는 계시에 의존한다(히브 1:1-2).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인간의 행복은 신앙의 대상이자 목적인 하느님을 차지하고 뵈옵는데 있다면, 신앙은 이 세상에서 이미 어느 정도 하느님을 차지하는 것이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다. 따라서 우리가 신앙으로 추구하는 대상은 신앙 조목이 아니라 그것의 근본인 생활하시고 위격적(位格的)인 하느님 자신이다. ③ 신앙의 근거 :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것은 하느님이 스스로를 증거하기 때문이지 어떤 사람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 아니다(요한 6:65 참조). 하느님의 증거하심은 각 인간의 인격 내부에서 작용한다. 하느님은 사랑의 은총으로 영혼 안에서 잠잠히 속삭이시며 각 사람을 신앙으로 이끌어 주신다. 이 은총에 순응할 때 인간은 자기에게 내밀어준 어떤 손을 잡고 한 단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하느님의 증거하심은 또한 전 인류의 역사 안에 실현된다. 이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방식이다. 그분은 인간의 입을 빌어 인간에게 말씀하신다. 이 말씀의 최후 증인은 혈육을 취하신 말씀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의 증언을 계속하여 인류사회 안에 재현하고 있는 것이 바로 교회이다. 그리스도교와 교회를 통하여 전파된 이 증거의 말씀은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생활한 말씀이다(요한 12:49-50, 3:11, 8:26 · 28, 1요한 1:1-2 참조).

그리스도와 교회의 증인이 참되다는 사실을 밝혀 주는 표시는 기적과 기타 하느님의 섭리를 나타내는 표징(表徵)이다. 하느님을 거짓을 증거하시려고 전능을 발휘하지는 않으시기 때문이다(요한 10:37-38 참조). 이러한 여러 가지 표시 외에, 하나이고 거룩하고 공번되며 사도로부터 전래된 교회의 존재 자체가 “믿음을 가진 크고도 영구적인 동기요, 하느님과 연관되어 있다는 깨트릴 수 없는 증거”(제1차 바티칸 공의회)이다.

이와 같이 신앙의 객관적 여건이란 은총과 말씀과 표징으로써 인간을 당신에게로 부르시는, 생활하시고 위격체이신 하느님 자신이다. 하느님은 당신을 인간에게 주실 때 그리스도라는 인격(人格)을 통하여 나타나셨기 때문에 이러한 의미에서 신앙의 객관적 여건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주어진 천주성삼(天主聖三)이시다(요한 3:16 참조). 또 한 인류의 구원경륜은 그리스도 안에 예정되고 실현되었다(에페 1:4-5).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느님을 믿고 그리스도께 믿음으로써 하느님께 믿고 그리스도께 나아감이 곧 하느님께 나아감이다.

2. 신앙의 주관적 요인[인간의 응답]

① 신앙행위의 분석 : 신앙이란 하느님이 계시하신 모든 것을 하느님의 증거 때문에 믿는 덕행(德行)이다(제1차 바티칸 공의회). 일반적으로 무엇을 믿는다는 행위는 자기가 제시된 어떤 사물의 내용을 다 알지는 못하면서도 제시하는 사람의 진실된 성격과 그 사람은 그 일에 관하여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으리라는 전제하에 일단 인정해 주는 행위를 말한다. 인간의 정신작용을 고전적 학자들은 지성(知性)과 의지(意志)의 활동으로 규정했는데, 이에 준할 때 믿는다는 행위는 지성이 만족하게 파악하지 못한 것을 의지로써 결단을 내려 붙들고 있는 인식작용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명제를 자명하게 증명할 수 있을 때 이것은 ‘아는’ 것이지 ‘믿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믿음은 추측(推測)처럼 어떤 명제를 인정하면서도 항상 그 반대명제가 성립될 수 있으리라는 우려를 가지면서 인정하는 태도가 아니고, 반대명제의 두려움을 완전히 극복해 버린 결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지성이 만족하게 알지 못하는 것을 왜 의지가 간섭하여 믿게 하는 의지가 문제된다. 본래 지성이 추구하는 것은 진리요 의지의 추구대상은 선(善)이다. 그러나 지성이 추구하는 그 참됨이 거짓이 아니고 진실이면 이것은 동시에 좋은 것이기도 하므로 의지의 대상도 되는 것이다. 토마스에 의하면 신앙이란 하느님의 은총의 충동을 받은 의지의 명령에 의하여 지성이 하느님의 진리를 승인 파악함이다. 이 정의를 분석하면 하느님을 믿는다는 행위는 곧 하느님이 계시하신 초자연적 진리가 비록 인간의 미약한 지력으로 다 깨우쳐 알아들을 수 없을지라도 그것을 믿고 실천하는 자들에게 허락하신 영원한 생명은 지극히 좋은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이 최고의 선은 인간의 의지를 잡아끌어 결단을 내리게 한다는 뜻이다. 하느님은 최고의 진(眞)이요 최대의 선이므로 지성의 대상인 동시에 의지의 대상이다. 따라서 하느님을 신앙한다는 것은 지성과 의지의 동시적 작용이다.

② 신앙행위의 종합 : 지성과 의지의 작용은 독립된 별개의 기능이 아니고 인간의 기능이므로 신앙행위란 구체적인 한 인격체의 행위이다. 한 인격체인 인간이 다른 한 인격체인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행위가 곧 신앙이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두 인격의 만남이라 할 수 있다. 신앙의 만남은 나의 인격을 전적으로 네게 ‘맡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이란 제시된 어느 이론이 그러한 것이라고 인정해 두는 메마른 두뇌만의 활동이 아니라 원초적인 사랑을 겸비한 자기봉헌(自己奉獻)이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이 자기의 인격을 위대한 상대방의 인격에 주는 것이라면 신앙의 선택이야 말로 하나의 탈피 이상의 희생을 요하는 거창한 결단이다. 그것은 한 인격이 지녀온 묵은 세계관과 인생관의 붕괴를 의미하며 여태껏 영위한 세속생활과의 절연(絶緣)을 강요하고 ‘지금까지의 나’[小我]의 파탄내지 죽음을 결과하는 것이다. 이러한 붕괴와 절연과 죽음의 선을 넘지 않고는 절대자이신 ‘당신’에게 나를 온전히 맡겨 버릴 수 없다.

이처럼 신앙의 선택은 묵은 자아의 파괴에서 비롯하고 새로운 나의 건설에서 귀결되며 이 건설은 나의 중심인 하느님을 모심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그분이 내 안에서 나의 모든 사고와 원의와 행동을 운동하도록 길을 막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나를 사랑으로 채워야 한다. 진리와 선과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은 절대자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되고 통일되어야 한다.

③ 신앙행위의 특성 : 본래 정신적 실존(實存)을 파악하는 것은 비록 그 실존이 자연적 인격체라일지라도 언제나 그 파악은 불투명한 인식임을 면하기 어렵다. 더구나 신앙에 있어서 우리가 추구하는 실존은 그 자체로써 이미 초자연적 존재 곧 신(神)이기 때문에 신앙의 인식은 본질적으로 장막에 싸인 어두운 인식이다. 그래서 바울로는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보듯 희미하게 보지만 그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1고린 13:12)이라 하고, 토마스는 신앙을 가리켜 “장래에 올 직관의 전주(前奏)”라 한다. 신앙인식의 이 같은 특성은 믿는 이로 하여금 항상 긴장된 기다림 속에 처하게 하므로 신앙은 종말론적 희망이다. 언제나 이 신앙의 구름을 헤치고 하느님의 영광을 얼굴을 맞대고 보려는 갈망으로 차 있는 상태

이다.

확실성은 객관적 자명성(自明性)과 주관의 굳은 집착(執着)을 의미한다. 신앙에서는 그 대상이 인간에게 자명하게 인식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순교자들이 목숨을 버리기까지 굳이 믿는 이유는 그 대상을 자명하게 아시는 분께 대한 굳은 집착 때문이다. 이 집착은 그 대상을 열렬히 사랑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다. 그리하여 토마스는 신앙의 견고성은 지성의 세계 에 있지 않고 의지의 영역에 속한다고 하였다. 신앙개조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 반드시 굳은 신앙을 가지는 것이 아닌 것도 그 때문이다.

신앙은 삶에서 도저히 분리할 수 없는 내재적(內在的) 제문제에 대한 정면의 대결이요 이 대결을 통하여 해결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까지도 불사하는 결연한 행동이다. 진지한 신앙인은 참된 신앙을 끈기 있는 용기로써 계속한다. 이 같은 겸손과 성실과 관용은 위대한 인간가치이므로 가톨릭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낙관적이며 긍정적이다. 인간은 자연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초자연적 목적에로 지정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연적 존재로서의 모든 적극적인 인간가치를 인정하면서도 그 인간가치들은 영원한 가치인 하느님의 경륜 안에서 긍정되고 질서지어져야 한다. 이것이 가톨릭의 세계관이요 인생관이다.

이상에서 논한 바와 같이 신앙은 일종의 인식(認識)이기만 공허한 주관적 사색이 아니고, 철석같은 신뢰심이지만 공허한 느낌이 아니다. 그것은 적극적이고 인격적인 긍정이며, 신앙자가 결단으로써 자기 전인격을 내걸어 쟁취하는 답변(Yes)이다. 신앙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점화되고, 하느님의 증언을 동기로 하며, 하느님을 차지하는 시동적(始動的) 행위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지성적 인식과 의지의 결단에 의하여 신앙을 가지며, 희망으로 신앙이 지탱되고 사랑으로 생활화 한다. 한마디로 신앙은 인간을 하느님 앞에 인간답게 존재하고 행위하게 하는 실존적 지혜(實存的智慧)이다.

[참고문헌] 鄭夏權, 가톨릭 신앙의 개념, 신학전망, 32, 1976 / J. Ratzinger, 그리스도 신앙의 어제와 오늘, 분도출판사, 1974; 신앙과 미래, 가톨릭출판사, l975 / 崔昌武, 신앙생활, 신학전망, 32, 1976 / Juan, Alfaro, 신앙의 양면성, 전망, 11, 1970 / B. Cooke, 신앙의 형성,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67 / P. Berger, 신앙과 종교심의 구별은 가능항가?, 신학전망, 11, 1970 / H. Kung, 진리의 조작, 전망, 9, 1970 / K. Lutti, 현대와 더불어 대화하는 신앙, 기독사상, 11, 1967 / J. Mouroux, 신앙에 있어서 이성의 역할, 전망, 9, 1970 / P. Nemechegyi, 하느님을 찾아서, 분도출판사, 1975 / P. Nemeschegyi, 신앙과 영성, 신학전망, 26, 1974 / C. Duquoc, 신앙은 사적인 것인가?, 신학전망, 29,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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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암동본당 [한] 新岩洞本堂

소재지는 대구시 동구 신암1동(大邱市 東區 新岩一洞). l933년 신암 공소로부터. 준본당으로 승격, 계산(桂山)본당의 보좌신부가 매월 며칠씩 체류하면서 사목, 1945년 12월 본당으로 승격, 초대 주임 강찬형(姜贊亨, 파스칼) 신부가 부임, 1947년에 전임하였다. 1949년 2대 주임 김영호(金永浩, 멜키올) 신부가 현 위치에 새 성당 신축공사를 착수했으나 이듬해 6.25동란으로 중단, 4대 김동욱(金東旭, 마티아) 신부 때인 1951년에야 새 성당이 준공되었다. 1957년 구 사제관을 팔고 성당 옆에 사제관(2층)을, 1965년 유치원, 교사실, 강당으로 구성된 부속건물(3층)을 각각 신축 1975년에는 수녀원이 신축 준공되었다. 12대 김경식(金 式, 보니파시오) 신부 때인 1977년 대현동(大賢洞)본당과 효목동(孝睦洞)본당을 각각 분리 독립시켰다. 1978년 예수 성심상을 건립, 1979년 수녀원 및 식관을 신축, 1981년에는 신용조합 청사를 신축하였다. 현재 본당주임은 박도식(朴道植, 도미니코) 신부, 본당주보는 파티마의 성모, 신자수는 5,876명(1983년말 현재)이다. 성 베네딕토 수녀회 분원이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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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행위 [한] 信心行爲 [영] devotional action

신심의 내용을 표현하는 행위, 즉 하느님의 신비나 하느님과 관련된 어떤 창조적 실천에 관심을 기울이고 공경함으로써 하느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행위. 교회사를 통하여 사도시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안에 각종 신심행위가 태동하여 교회의 쇄신과 신자들의 영성생활의 활성화에 기여하여 왔다. 그러나 그 중에는 2세기의 몬타니즘, 17세기의 정적주위와 같이 교회안에 물의를 일으켜 교회로부터 배격받은 경우도 있으므로 교회는 경신성성을 통하여 신심행위에 관한 규정을 제시하며 공의회를 통하여 그 규정을 개정하고 있다(Denz. 1821~1825 및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헌장 13항 참조).

신심행위는 성사가 아닌 예배행위이며 이를 전례와 관련시켜 볼 때 준 전례적 행위와 비 전례적 행위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는 성체성사와 연관된 전례현시, 고백성사와 연관된 말씀의 전례 등 성사 집전의 연장의 성격을 띤 신심행위들이다. 이와 달리 후자는 로사리오의 기도, 십자가의 길 등 성사집전과는 무관한 신심행위들이다. 그런데 본질적으로는 항상 하느님께 대한 예배행위인 이 양자의 신심행위들은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께 대한 예배를 지향하는 한 전례와도 관계를 지니지만 엄격히 말해서 전례는 아니고 전례에 비하여 제2차적인 예배행위이다. 그러므로 모든 신심행위는 그 정신이 “전례와 조화되고 어느 정도 전례에서 나오며 또한 신자들을 전례에 인도하도록 마련되어야 한다”(전레 헌장 13).

신심행위는 이를 설천하고 전파하는 조직적인 운동 즉 신심운동으로 나타난다. 한국교회 안에서 신자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대표적인 운동들로서는 성령쇄신 운동, 레지오 마리에, M.B.W.(보다 나은 세계를 위한 운동), 휘콜라레 운동, 꾸르실료 운동, 매리지 엔카운터(Marriage Encounter), 성서읽기 운동 등을 들 수 있다. 모든 신심행사와 신심운동은 민족문화 및 사고와의 조화를 이룸으로써 신자들에게 주는 이질감을 해소하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신심이 되도록 유도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의 교의에 어긋나거나 신앙의 내실화를 결여한 신심행위는 한국인의 의식구조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무속신앙과 결부되어 기복적 신심형태로 전락하기 쉬우며 불안한 사회여건 가운데서 정서적 안정과 종교적 위안을 찾는 신자들을 감정위주의 주정주의적 신심에로 그릇 인도할 수 있으므로 이를 항상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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