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학변 [한] 西學辨

영조(英祖)시대의 학자 신후담(愼後聃, 호는 遯窩, 1702-1761)이 당시에 전래된 서학서(西學書)에 대한 비평의 글을 담은 책. 원저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아만 이만채(李晩菜)의 편저(編著)로 된 ≪벽위편≫(闢衛編) 제1권 14면에서 47면에 걸쳐 수록되어 있는 것과 일부가 결락된 사본이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에는 17세기초부터 서학서가 주로 북경을 왕래하던 사신들을 통해 들어왔는데, 그 중에는 천주교에 관한 서적들도 많이 끼어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리치(Matteo Ricci, 利瑪竇)의 ≪천주실의≫, 판토하(D. Pantoja, 龐迪我)의 ≪칠극≫, 삼비아시(F. Sambiasi, 畢方濟)의 ≪영언여작≫(靈言蠡勺), 알레니(Alleni, 艾儒略)의 ≪직방외기≫(職方外紀), 마이야(de Mailla, 秉正)의 ≪성세추요≫(盛世芻-) 등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책들은 자연 우리나라 학자들의 관심을 끌어, 많이 읽히고 연구되고 논평되기에 이르렀다.

신후담은 그의 저서 ≪서학변≫을 통해 ≪영언여작≫과 ≪천주실의≫에 대해 차례로 장문의 논평을 가했는데, ≪천주실의≫에 대한 천주의 천지창조설 등을 일일이 논박하였으며, ≪영언여작≫에 대해서도 서학에서 주장하는 영혼의 자립성과 불멸성을 일축하고 있다. 이 책은 후세 벽사론(闢邪論)에 다대한 영향을 준 장문의 척사기록이다. 그런데 ≪벽위편≫에는 이 ≪서학변≫의 저작연대가 갑진년(甲辰年), 즉 1724년 신후담이 23세 때의 작품으로 기술되어 있으나, 그의 깊이 있는 논평내용으로 보아 원숙기에 접어든 후기작품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참고문헌] 崔東熙, 愼後聃의 西學辨에 關한 硏究, 亞細亞硏究, 弟5卷 弟2號, 1972 / 朴鍾鴻, 西歐思想의 導入批判과 攝取, 韓國天主敎會史論文選集, 弟1輯, 한국교회사연구소,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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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학범 [한] 西學凡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 중국선교사 알레니(Aleni, 艾儒略, 1852-1649) 신부가 유럽의 학문과 교육제도를 중국사회에 소개하기 위해서 한문으로 저술한 책. ≪서학범≫의 범(凡)은 개요(槪要) 또는 개론(槪論)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서학범≫은 서학개요 또는 서학개론이라는 뜻이다. 서양 중세의 대학교육과정, 교수내용과 수학 후의 학덕에 의한 고시(考試) 임용(任用)에 대해서 소상히 소개한 소책자이다. 즉 유럽에서의 교과과목과 고시임용제도는 대동소이하다고 전제하면서, 유럽에서의 교과는 문과(文科), 이과(理科), 의과(醫科), 법과(法科), 교과(敎科), 도과(道科)의 6개 분과로 구분하였고, 이어 이들 6과의 과정과 교수내용 및

학문의 특징 등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또한 유럽의 교육과정은 초학(初學)과정과 철학과정, 전문과정의 3단계로 나누어져 있고, 초학과정인 문과는 여러 학문의 기초교양을 얻기 위해 문예지학(文藝之學)을 배우며, 이를 이수하여 학업성취 여부를 판정받은 후 합격자만이 철학과정으로 진학케 된다. 이과 즉 철학과정은 3년 내지 4년간 이수하여 시험에 합격하면 전문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의(醫) · 교(敎) · 법(法) · 도(道)과로 원에 따라 진학케 한다고 하였다. 이어 이들 전문과목의 학문내용을 하나하나 설명하고 나서 유럽에서는 국왕이 이런 학교를 각지에 설립하여, 학생을 후대하면서 학문의 부흥을 도모하고 있어 교육활동이 활발함을 강조하였다.

≪서학범≫이 언제 우리나라에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1801년 신유(辛酉)박해 때의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에, 이가환(李家煥)의 집에서 ≪직방외기≫(職方外記)와 ≪서학범≫이 나왔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한국 교회 초창기에는 이미 도입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李元淳, 朝鮮後期 實學知性의 西洋敎育論, 敎會史硏究, 弟2輯, 한국교회사연구소, 1979 / 朴鍾鴻, 西洋思想의 導入批判과 攝取, 韓國天主敎會史論文選集, 弟1輯, 한국교회사연구소, 1976 / Le P. Louis Pfister, Notices Biographiques et Bibliographiques, Chang-Hai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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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학 [한] 西學 [관련] 실학

1. 서학의 개념 : ‘서학’이란 명(明) · 청(淸)과 조선(朝鮮) 등 유교적 전통사회의 일부학자들이 서구과학기술(西歐科學技術)과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를 자료로 하여 전개했던 서양문명에 대한 학문활동과 그 내용을 뜻한다. 그것은 단순히 서방(西方)에 배우는[學], 서학이 아니라 유교문화세계에 있어서 전개되었던 학문활동을 가리키는 역사용어(歷史用語)이다. ‘서학’이라는 말을 서양문화와 연결시켜 사용한 것은 1601년부터 시작되는 중국천주교회(中國天主敎會) 관계의 예수회(Jesuit Order, 耶蘇會) 소속의 서양 전교 신부(傳敎神父)들이었다. 중국 천주교회가 출발된 1601년 후 불과 4년 만에 남경(南京)에 자리 잡고 활동하게 된 예수회 신부 바뇨니(P. Alphonsus Vagnoni, 중국명 高一志)는 15종의 한역서학서를 저술하였는데 그 가운데 서양정치학서인 ≪서학치평≫(西學治平), ≪민치서학≫(民治西學)과 서양윤리학서인 ≪수신서학≫(修身西學)이 있었다. 한편 그보다 늦게 중국 전도에 나선 예수회 알레니(P. Julius Aleni, 艾儒略) 신부는 서양의 교육과 학문활동을 소개하는 ≪서학범≫(西學凡)을 저술한 바 있다. 이처럼 ‘서학’이라는 어쉬는 명 · 청에서 전교에 종사하던 예수회 회원들이 문화주의(文化主義) · 영합주의(迎合主義)적 전교방침에 따라 그리스도교 전교의 한 방법으로 그리스도교 문화의 우수성을 깨우쳐주기 위해 서양문화를 이식하고자 서양문화에 관한 일을 한역논저화(漢譯論著化)할 때 쓰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편 조선왕국에서는 서학을 ‘서태지학'(西泰之學)이나 ‘태서인지학'(泰西人之學)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장문의 척사논문(斥邪論文)을 써 유명한 정조 초의 학자 신후담(愼後聃, 1702-1762)은 ‘서태지학’의 해가 홍수나 맹수보다도 큰 것이라고 경고하였고, 북학파(北學派)의 홍대용(洪大用, 1731-1783)은 ‘태서인지학’이라는 말을 쓰는 한편 “강희(康熙) 이래로 서양인으로 중국에 오는 자가 많고 … 4천주당을 북경에 세우니 이로 인하여 서학이 비로소 성해지기 시작했다”고 적고 있다. 요컨대 서학이란 서양과 서양문명에 대한 유교적 전통사회의 학자들에 의한 학문적 연구와 그 내용으로 개념지어진다.

2. 서학 자료의 한계성 : 명나라 말기, 청나라 초기에 북경(北京)을 중심한 지역에 융성했던 서학은 그것을 선도한 사람이 예수회 소속의 성직자들이었으며, 그들의 학문적 의도가 전도(傳道)를 위한 문화의 이식, 관심의 진작에 있었기 때문에 순수한 문화적 의의를 지닌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들의 의도와 신분에서 오는 한계성을 안고 있었다. 즉 ‘서학’은 중세적 스콜라철학에 입각한 그리스도교 사상과 서양의 중세와 르네상스기의 과학 · 기술문명을 포괄한 것이며, 그나마 그리스도교적 안목에서 선별되어 제작되고 편술된 번안적(飜案的) 내지는 재정리(再整理)에 의해 이루어진 번역문화(飜譯文化)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바로 이 점이 서학이 안게 된 한계성이었다.

3. 조선 서학의 전개 : 명말 · 청초 북경에서 전개된 중국 서학의 산물인 서구과학기기(西歐科學器機)와 한역서학서는 정치적 목적에서 북경을 왕래하게 된 부경사대 사행원(赴京事大使行員)의 손을 통해 쇄국 조선으로 도입되었다. 한역서학서의 도입은 이미 선조(宣祖) 말년부터 시작되었다. 17세기초에 ≪천주실의≫(天主實義)가 조선사회로 도입되었음은 이수광(李晬光, 1563-1628)의 ≪지봉유설≫(芝峰類說)에 실려 있는 천주실의 관계 기사를 보아 알 수 있다. 그 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중국으로부터 조선사회로 도입되는 한역서학서의 종류는 다양해졌고 그 수량도 늘어났으며 그러한 한역서학서 가운데는 학자들이 사본화(寫本化)하여 유포시킨 것이 있고 일부는 한글로 번역되기도 했다. 이러한 서구 과학기기와 한역(漢譯)의 과학서와 윤리서(倫理書) 및 종교서(宗敎書)는 그것이 유교와는 다른 이질문화세계(異質文化世界)의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조선후기 유교지식인들의 호기심이 작용하는 대상이 되었고 이를 관찰 독파하고 자신의 느낌을 글로 남기는 사람들이 나오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점차 거세어져서 영조 · 정조 때인 18세기 중엽에 들어서서는 실학사가(實學史家) 안정복(安鼎福)이 적고 있는 바와 같이 서학서는 도·불서(道佛書)와 같이 학자의 서재에 비치해 두고 가까이하게 되었으며, 뒷날 정약용(丁若鏞)이 실토하고 있는 바 자신이 젊은 시절에 학자들이 서학서를 가까이 함은 ‘일종기풍'(一種氣風)[하나의 유행]이었을 정도로 널리 유포되고 열독 음미되었다. 이러한 관심과 열독으로 마침내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서 학문적 연구로까지 진전되었고 이에 ‘조선 서학’의 세계가 열리게 되었다. ‘조선서학’은 이익(李瀷)을 종사(宗師)로 그의 학문을 이은 근기학파(近畿學派)와 홍대용의 뒤를 이어 활동하는 북학론자(北學論者)들을 중심으로 전개하였다.

4. 조선 서학의 세 유파 : 실학운동의 선구적 영도자였던 이익은 그의 실학정신에서 서학에 대해서도 학문적 관심이 컸다. 그는 당시 국내에 도입 유포되던 30여 종의 한역서학서를 섭렵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의견을 기회있을 때마다 기록해 두었다. 오늘날 이러한 기록은 ≪성호사설≫(聖湖僿說)이나 ≪성호선생문집≫(星湖先生文集) 가운데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서학열(西學熱)은 그의 학문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그대로 이어진다. 신후담, 안정복 등 유교적 입장을 고수하는 경우에서부터 권철신(權哲身), 이벽(李檗), 정약용 유교적 체질을 지니면서도 서학의 수용의식을 가진 후생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근기하파에 속하는 다수 학자들이 서학서를 비교로 하여, 이를 독파하고, 예리한 배격 수용의 논리를 펴 조선서학의 경지를 개척하였다. 한편 국내에 머물러, 도입된 서학 자료를 가지고 학문적 접촉을 하는 것과 달리 직접 북경에 왕래하면서 현지에서 중국 학자나 서양 성직자와 교류를 가지면서 서학에 흥미를 가지고 학문적 이해에 힘쓴 사람들로 북학파의 서학이 있었다. 이러한 조선서학은 18세기 중엽을 이후하여 활발하였던 것으로 많은 사람이 관계되는 것은 아니었으나 서울과 경기 일원을 중심으로 실학 · 북학의 학문의식을 가진 학자들 사이에 벌어졌던 대외지향성(對外指向性)을 지닌 학문활동이었다. 서학에 대한 학문적 이해가 심화 확대되면서 조선서학은 세 가지의 유파 경향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첫째 하나는 전면 배격의 척사론적 경향이고, 둘째는 전면 수용론적 경향이고, 다른 하나는 일면 배격, 일면 수용의 이원론적 유파였다. 첫째 배격론자의 서학은 서학을 전통적 가치체제와 전통사회에 위해(危害)를 가져다 줄 것으로 인식하게 되고 이것의 배격을 위한 벽위문(闢衛文)작성에 정열을 기울인 유파로 ≪서학변≫(西學辨)을 쓴 신후담이나, ≪천학고≫(天學考), ≪천학문답≫(天學問答)을 엮은 안정복, 또 하나의 ≪천학문답≫을 지은 이헌경(李獻慶) 등이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둘째로 전면 수용의 논리를 펴 서학의 연구 뿐만 아니라 수용과 실천을 실행한 유파의 인물은 권철신 · 권일신(權日身) · 이가환(李家煥) · 정약전(丁若銓) · 정약종(丁若鍾) · 정약용 · 이벽 · 이승훈(李承薰) 등이며 이들은 학문적 연구만이 아니라 서구 과학기술의 도입 활동과 그리스도교 신앙과 윤리의 실천에 헌신하여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과 천주교 신앙생활의 선두에 서게 되는 인물들이었다. 셋째 이원론적인 서학의 유파는 서학의 기적 측면(器的側面)인 서양 과학과 기술의 유용성(有用性)과 선진성(先進性)을 인식하고 이것의 도입 활용의 주장을 펴 나간 반면에 서학의 이적 측면(理的側面)인 그리스도교의 종교와 10계에 터전한 윤리는 배격하여야 한다는 일면 수용·일면 배격의 논리를 폈던 북학론자들로는 홍대용 · 박지원(朴趾源) · 이덕무(李德懋) · 박제가(朴齊家) 등이 그 대표자들이었다. 그들의 북학이란 단순히 청조 문명의 수용만이 아니라 청경(淸京)인 북경을 중심으로 퍼져나간 서구문명의 도입을 내포하는 청구문명(淸歐文明)의 북학(北學, 북의 것을 배우고 도입하자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5. 조선서학의 근대문화적 맹아(萌芽) : 조선서학은 비록 조선왕조의 정책적 변화를 이끌게 할 일과는 거리가 먼 초야(草野) 실학자나 관료학자(官僚學者)들에 의한 학문활동이었다. 그러기에 조선의 역사를 바꾸어 놓지는 못하였으나 근대 지향적인 학문활동으로서 조선사회에 근대적 맹아를 키워 내고 있었다. 첫째로 한역의 세계지도[坤輿全覽圖, 兩儀現覽圖, 萬國全圖, 坤輿全圖 등]나 한역지리서(職方外紀, 坤輿圖說] 등을 보는 가운데 화이론(華夷論)에 입각한 전통적 세계관에 동요가 일어나게 되고 근대적 세계관으로의 전회(轉回)가 진전된다. 서학을 통하여 얻어진 과학적인 천문 · 지리의 새로운 지식은 ‘내외지분'(內外之分), ‘화이지분'(華夷之分)을 기반으로 하는 춘추대의(春秋大義)를 내세우는 중화중심의 세계관과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는 퇴영적인 문화의식을 극복할 수 있는 과학적 세계관으로의 접근이 진행되고, 여기에서 자주적인 국가의식, 개방적인 문화활동의 추구라는 근대적 세계관으로의 전회가 진정되었다. 둘째로 서구 과학기술의 가치를 인식하게 되어 합리적 실용과학으로의 열의가 움트게 된다. 종래 연역적 원리(演繹的原理)의 적용과 추상적으로 이론화되었던 전통유가(傳統儒家)의 자연철학은 선각적 서학자들이 서구과학과 기술에 접촉하게 되면서 실용과학에 관심이 커지고 합리정신의 깨우침이 생겨나면서 경험적(經驗的)이고 실증적(實證的)인 근대 자연철학에 대한 깨우침이 일어나게 되었다. ‘성명의리'(性命義理)의 존중과 도학적(道學的) 샤머니즘적 과학의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생각에서 합리적 실용과학을 추구하게 되는 근대적 맹아를 돋게 해 주었다. 셋째로 천주교 신앙의 이해와 신앙으로의 실천을 통해 새로운 인간상, 새로운 가치체계(價値體系)를 추구하는 움직임이 생겨난다. 이벽, 이승훈, 권일신 등에 의한 1784년의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과 천주교 신앙의 실천은 좁게는 그리스도교라는 새로운 종교의 수용 실천이나 넓게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터전한 새로운 가치체계의 수용이었다. 그것은 신(神)의 질서를 내세우고 새로운 인간관(人間觀)에 터전한 새로운 생(生)의 가치의 추구와 실천을 목적한 것이지만 동시에 그리스도교적 사랑과 평등에 터전한 전통적 신분제, 직업의식, 사회 조성의 불평등을 극복한 새로운 원리의 수용이요 실천이었다. 이 점에서 천주교 신앙의 수용과 실천은 이성주의적(理性主義的)이고, 인문주의적(人文主義的)인 근대정신과는 거리가 있는 종교적 차원에서의 새 경향이기는 하나 전통사회의 봉건성 · 윤리성과 신분적 모순 극복을 지향하는 새로운 인간상의 추구요 문화가치의 수용이었으며, 근대사회와 연계될 맹아적(萌芽的) 역사의 전개였다.

6. 서학적 근대문화 맹아의 삼제(芟除) : 조선후기 18세기 후반기에 들어 쇄국의 전통사회인 조선왕국내에서 근대에의 새로운 역사 전개를 가져다 줄 전진적인 학문적·사상적·종교적 움직임이 일부에서나마 추구되고 있었다. 이 서학 연구로 생겨난 근대적 맹아는 아편전쟁(阿片戰爭)과 같은 물리적 군사적 힘에 의한 충격을 받은 후, 그 충격의 대응과는 달리 조선유교사회의 유교적 바탕을 가진 학자들이 한역서학서의 학문 연구와 서구 과학기술에 대한 유용가치의 인식을 바탕으로 현실사회의 모순에 대한 자각과 실학파의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에서 내재적(內在的)으로 발동된 데 특성이 있는 역사 전개였다. 다만 그것이 신앙을 제외하고는 조선사회에 정착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조차도 유교적 집권세력에 의해 금압(禁壓)되어 마침내 그 맹아가 삼제되어 근대화의 거센 역사적 조류를 형성하지 못하고 질식해 버렸다. 서학에 대한 금압은 먼저 서학의 이적 측면 즉 그리스도교적 종교와 윤리에 가해졌으며 마침내는 이(理)와 기(器)를 일체적으로 금압하는 전면 탄압으로 치달았다. 즉 천주교 박해의 열도(熱度)는 마침내 서학의 종교윤리적 측면만이 아니라 과학·기술의 측면에까지 일체적으로 사학시(邪學視)하는 개념으로 확대되어 조선 서학의 질식을 초래케 된다. 정치적 차원의 쇄국(鎖國)과 사상적 차원의 척사(斥邪)가 표리일체가 되어 강행되는 금압과 박해는 1801년부터 1870년까지 광포스럽게 자행된다. 이러한 박해로 1만여명의 순교자를 낳게 하는 인명의 살생을 보았으나 천주교의 뿌리를 뽑지는 못하였고, 오히려 서학의 질식과 서학적 근대문명의 맹아를 문질러 버리는 역사를 이끌어 조선왕국으로 하여금 오랜 전근대(前近代)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9세기 전반의 격렬한 천주교 박해의 벽위운동(闢衛運動)은 천주교에 대한 대항논리(對抗論理)로서의 ‘숭정학 · 벽사학'(崇正學 · 壁邪學) 의식의 경직만이 아니라, 서학이라는 서구적 이질문화체계의 거부와 말살을 위한 대외봉쇄(對外封鎖)의 위정척사(衛正斥邪)로 확대 심화되어 마침내는 외국 성직자의 잠입활동과 침략적 외세의 접근이라는 국제적 긴장에서 어양론적 양이운동(禦洋論的 攘夷運動)으로 격화되었고 이런 가운데 서학의 연구와 수용은 압쇄되었으며 서학적 근대문화의 맹아도 자라나지 못하고 삼제되었다. (⇒) 실학 (李元淳)

[참고문헌] 李元淳, 朝鮮後期 實學者의 西學意識, 歷史敎育, 제17집, 1975 / 李元淳, 明淸來西學書의 韓國思想史的意識, 韓國天主敎會史論文選集, 第1輯,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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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품 [한] 敍品 [라] ordinatio [영] ordination

안수에 의해 주교, 사제, 부제를 임명하는 것. 주교는 서품식을 통해 이들에게 다른 사람들을 축성할 수 있는 은총과 영성적인 힘을 부여하며 이렇게 임명된 사람들만이 ‘성직자’로 간주된다.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연령에 도달한 모든 세례받은 남자는 품을 받을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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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본당 [한] 西浦本堂

1931년 평남 대동군 임원면 동포리(平南 大同郡 林原面 東浦里)에 창설되어 1950년 폐쇄된 평양교구 소속 본당. 1931년 평양(平壤) 본당 내에 있던 교구청이 서포(西浦)로 이전되면서 본당으로 창설되어, 대동군의 북부지역과 평원군(平原郡)의 동부지역을 관할하며 남산리(南山里), 택암리(宅巖里), 석암리(石巖里), 학산리(鶴山里) 등의 공소를 두었다. 초대 주임신부로 김성학(金聖學, 알렉시오) 신부가 부임하여 1934년 10월까지 사목하면서 교세신장과 전교에 힘쓰는 한편 1934년 소의학원(昭義學院)을 개설했고, 1934년 이후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 전까지는 메리놀회 신부들이 주임신부로 사목하였다.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평양교구 내의 모든 메리놀회 성직자들이 일제에 체포 구금되자 서포본당은 교구청을 인수한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지도 신부들이 사목을 담당했으나 1950년 5월 14일 북한 공산정권의 탄압으로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가 해산되고 지도신부인 이춘근(李春根, 라우렌시오) 신부가 순안(順安)으로 피신해 감으로써 본당도 폐쇄되었다. 서포본당의 신심단체로는 부인회, 여자청년회, 소년회, 가톨릭운동연맹 지회, 교회유지회 등이 있었고 이외에 1934년 개설되어 이듬해 폐쇄된 4년제 소의학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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