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us(?~96?). 성인. 축일 2월 6일. 초기교회의 주교(主敎), 증거자(證據者), 성 바울로의 제자이며 수행자. 양친은 그리스인(갈라 2:1-5), 안티오크(Antioch, 현재 터키령)에서 태어난 것 같다. 사도행전에는 그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성 바울로의 서한에는 그에 관한 정보가 많이 보인다. 바울로에 의해 개종(改宗)(디도 1:4), 두 번 고린토 교회로 파견되었다. 바울로를 따라 크레타섬에 전도를 갔다가 나중에 교회를 조직하기 위해 그 곳에 남아 있었다(디도 1:5). 후에 바울로는 그를 니코폴리스(Nicopolis)로 소환(디도 3:21), 다시 달마티아로 파견 하였다(2디도 4:10). 전설에 의하면 디도는 그 후 크레타섬에서 주교로 여생을 보내고 93세에 별세했다고 한다. 유해는 고르티나(Gortyna)에서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에 옮겨졌다. 디도는 결단력 있고 유능하고 열심한 신자였으나 원만한 성격도 있었기 때문에 바울로는 그를 말썽 있는 곳에 파견하곤 했다고 한다. 디도서(書)는 성 바울로가 주교인 디도에게 보낸 서한이다.
디다케 [그] Didache
① 디다케는 ‘가르침’ 이란 뜻을 지닌 그리스어이며, 성서에 기록된 계시 내용의 교훈적인 부분 혹은 그러한 측면을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아울러 가르치는 직무를 수행하는 교회의 역할과 교도권의 행사를 가리키기도 한다.
② 사도시대 직후에 저술된 문헌. 본래의 제목은 ‘12사도를 통해 제민족(諸民族)에게 전달된 주님의 가르침’이자만 간단히 ‘12사도의 가르침’ 또는 ‘디다케’로 불리어진다. 이는 당시 보급되거나 실천되고 있는 전례문헌들을 모아서 저술한 것으로, 교회규율에 관해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자료이며, 초대교회 때 ‘교회의 규범’이나 ‘교령’의 전형적 역할을 한 것이다.
이 문헌이 있었다는 것은 옛날부터 알려진 사실이었다. 벌써 기원후 300년에 제1장부터 제 6장까지가 라틴어로 번역되었고 그 밖에도 부분적으로 아시리아어, 아라비아어 등으로 번역되고 교부들의 저서 속에 인용되었다. 그러다가 1873년 니코메디아의 대주교 브레니오스(Bryennios)가 예루살렘의 희랍 대주교관 도서관에서 1056년에 작성된 디다케 전문이 씌어 있는 희랍어 수사본을 발견하였다.
디다케는 대체로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두 개의 길, 즉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에 대한 묘사, 둘째 세례 · 고해 · 성체 등 성사에 관한 가르침, 셋째 성직자에 대한 언급이 그것이다. 그 안에는 윤리적 계명과 당대에 사용되던 전례의 기도문을 인용한 전례에 관한 여러 가지 지침, 그리고 그리스도와 교회와 세상 종말에 관한 가르침을 내포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디다케는 초대 교회 신자들의 생활과 신앙을 잘 묘사해서 전달하고 있다.
디다케의 저자는 미상이며 저술된 지방은 시리아(Syria)임이 거의 확실하고 저술년도는 기원후 60년에서 4세기까지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콰스텐(Quasten)과 그 밖에 많은 학자들은 100년에서 150년 사이를 저술년도로 보고 있다. 디다케의 내용을 보면 사도시대의 글이 아님이 확실하다. 사도들은 교회의 생활을 유태인들의 관례에 따라 실천했는데 유태인들이 월요일과 목요일에 재를 지킴에 반하여 디다케에는 수요일과 금요일에 재를 지킨다. 그밖에 그 저술시기가 사도시대 이후라고 볼 수 있는 요소로는, 디다케가 침수식 세례만이 아니라 이마에 물을 붓는 세례를 인정하고 또 신약시대의 ‘예언자’의 직책이 약화되는 것을 쇄신하려는 노력을 들 수 있다. 한편 사도시대로부터 가까움을 지적해 주는 내용도 있다. 전례에 대한 묘사가 단순하고 간략하다. 세례는 흐르는 물에서 주는 것이 원칙이고 이마에 물을 붓는 방식은 예외이며, 아직 신앙고백을 한 신경의 흔적이 없고 신약성서의 정경목록도 확정되지 않고 있는 점 등이 주목된다. 따라서 디다케는 사도시대 직후의 문헌이라 할 수 있으며 100년부터 150년 사이에 저술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드브레 [원] Devred, Emile Alexandre Joseph
Devred, Emile Alexandre Joseph(1877~1926). 서울교구 보좌주교. 한국명 유세준(兪世俊). 1877년 1월 7일 루쿠르(Roucourt)에서 태어나 1898년 9월 15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간 그는 1899년 9월 23일 사제품을 받고 1899년 11월 15일 임지인 한국으로 출발하였다. 그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원주(原州)본당의 3대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6년간 전교에 전념함으로써, 강원도 지방의 교세신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에 이웃 풍수원(豊水院)본당 신부와 협의해서 1904년에 용소막(龍召幕)본당을 새로 탄생시켰다. 1906년에는 드망즈(Demange) 신부가 경향신문사 사장으로 전임되자 그의 후임으로 신학교를 맡아 정성껏 신학생들을 돌보았고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그는 군복무를 위해 프랑스에 돌아갔으나 그 동안 제2의 조국인 한국을 잊지 않고 때때로 장문의 편지를 써 보내 동료와 제자들을 걱정하였다. 그가 다시 한국에 돌아왔을 때 뮈텔 주교는 모든 성직자들의 의견을 들은 다음, 드브레 신부를 계승권을 지닌 그의 보좌주교로 추천, 교황청의 승인을 얻었다. 이에 1921년 5월 1일 주교성성식을 갖고 이후 5년 동안 서울교구 지도서를 출판하는 한편 1866년 병인박해 때의 순교자들의 시복을 위한 자료수집 등 한국 교회 발전을 위해 많은 공적을 남기고 1926년 1월 17일 갑자기 졸도하여 그 이튿날 깨어나지 못하고 선종하였다.
드망즈 [원] Demange, Florian
Demange, Florian(1875~1938). 초대 대구교구장(大邱敎區長). 주교. 한국명 안세화(安世華). 1875년 프랑스의 로렌(Lorraine) 지방에서 태어났으나 1870년 독불전쟁(獨佛戰爭)으로 로렌지방이 독일에 점령되었기 때문에 파리로 이주해 살았다. 1893년 파리대학 문과를 졸업하고 철학과를 다시 이수하였으며,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을 전공한 다음 1898년 졸업과 동시 사제서품을 받고, 곧 임지인 한국으로 떠났다.
그해 10월 6일 서울에 도착한 그는 우선 조선말과 풍속을 익힌 다음 1899년에 부산(釜山)본당 신부로 임명되어 첫 포교사업에 정진하였다. 그러나 그의 학덕겸비의 고매한 인품은 그가 부산에 내려 온 지 불과 1년도 못되어 즉 1900년에 서울 용산신학교 교수직을 맡게 되었다.
신학교에서 6년간 봉직하면서 내국인 사제 양성에 정진 하던 차, 1906년 10월 19일에 <경향신문>이 창간되자 그 경영과 편집을 맡아 개화기의 애국 계몽운동에 앞장섰으나, 불과 4년 만에 한일합방(韓日合邦)으로 일제의 탄압이 심해져 폐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특히 ‘법률문답’이란 고정란을 통해 민중과 공직자들에게 많은 혜택을 유익을 주었고 이로 말미암아 찬사와 신뢰 때문에 편집 책임자인 드망즈 신부의 사회적 영향력은 아주 컸었다.
<경향신문>의 창간과 더불어 부록으로 <보감>도 발간하여 교리와 교회사에 대한 지식과 함께 사회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알려, 교인들의 신앙과 새생활을 교도하는 데 큰 공을 남기었다.
1911년 4월 8일. 서울교구에서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이 분할되어 대구교구가 신설되는 동시에 드망즈 신부가 대구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이에 따라 드망즈 신부는 6월 11일 명동성당에서 주교성성식을 갖고 6월26일 대구로 부임하여 교구 창설의 중임을 맡게 되었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부임한 지 5년 만에 대구교구는 교구관리소, 신학교대성당 증축, 수녀원 등 주요 시설을 모두 갖추게 되었다. 이에 날로 교세가 확장되어 1919년에 로마 교황청을 방문하였고, 이때 대구신학교의 두 학생을 함께 데리고 가 로마 우르바노대학에 유학시켰다.
1925년에는 로마 교황청에서 거행된 조선 순교자 79위의 시복식에 참석하였고, 1928년에 중병을 얻어 고국에 돌아가 치료와 요양으로 3년을 체류하다가 1930년 11월 11일에 다시금 조선에 돌아왔다. 그러나 이미 나이가 연로하여 날로 늘어나는 교세를 전담키가 어렵게 되자, 오래전부터 계획해 오던 전라북도를 1931년 5월 감목대리구로 설정하고 김양홍(金佯洪, 스테파노) 신부를 초대 감목대리로 임명하였는데, 1937년 이 지역이 지목구(知牧區)로 설정됨으로써 최초의 방인교구를 탄생시켰다. 바로 이 해는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었으므로 주교 공의회는 교리서 문제에 있어서, 우선 전국에 통일된 교리서의 필요성을 느껴, 새로운 통일된 교리서 편찬을 위한 5교구위원회가 설치되고 그 위원장에 드망즈 주교가 임명되었다. 드망즈 주교는 2년 동안 교리서 편찬작업에 전심하여 1934년에 간행을 보게 되었다.
1934년 10월 31일에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받아 그의 36년 걸친 조선교구에서의 헌신적인 봉사와 대구교구 설창에 대한 절대적인 공로를 보상받았다. 1933년에 전라남도지방을 애란(愛蘭)의 골룸바노 외방전교회 신부들에게 전교를 전담케 하여 1937년 4월 15일 대구교구로부터 광주교구를 분할 독립시켰다.
이와 같이 드망즈 교주는 신설된 대구교구를 맡아 불과 25년 만에 대구교구와 전주, 그리고 광주의 3개 주교구로 이를 나누어야 할 만큼 크게 성장시키는데 온갖 정력을 다한 끝에 1938년 2월 9일에 대구에서 선종하였다. 조선에 입국한 지 40년 동안을 전교에 힘쓰다 63년를 일기로 선종한 것이다.
드게트 [원] Deguette, Victor Marie
Deguette, Victor Marie(1848~1889). 조선교구 선교사, 한국명 최동진(崔東鎭). 그의 동료 신부였던 프와넬(Poisnel, 朴道行) 신부에 의하면, 그는 사제서품을 받고는 수년 동안 자기 교구 내에서 봉사하다가 1875년에야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1년간 수련한 후, 평소의 소원이던 한국으로 파견되었다고 한다. 당시 그것은 순교를 하라는 부름이나 다름없었는데, 1876년 2월 27일 프랑스를 떠나 만주에 도착하자, 때마침 3명의 신부를 거느리고 다시 한국으로 들어가려는 리델(Ridel, 李福明) 주교를 만나 짐을 풀 사이도 없이 그 이튿날 주교와 블랑(Blanc, 白圭三) 신부와 함께 배를 타고 한국으로 향하였다. 도중에 세 사람이 함께 입국하기란 더욱 어렵다는 조선교우의 말에 따라, 주교를 중국으로 다시 가게 한 다음, 남은 두 사람만이 항해를 계속하여 5월 10일 밤에는 서울에서 약 4㎞쯤 떨어진 곳에 상륙하는데 성공하였다. 서울에 들어오자마자 병석에 눕게 되어 그 이듬해에 건강을 되찾아 용인(龍仁)지방으로 내려가 성사를 집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곧 거처가 관현에게 알려져, 그는 충청도 지방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는 동안, 리델 주교가 두세(Doucet, 丁加彌),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를 데리고 다시 한국에 들어왔다는 소식과 곧 이어 다시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연이어 듣게 되었다.
1878년 6월에 주교가 풀려나 중국으로 추방됨을 계기로 박해가 일시 멈추는 듯하자, 그는 은신처에서 빠져나와 전교활동을 계속하였는데, 곧 체포되는 몸이 되고, 서울로 압송되어 3개월 동안 감옥에서 신음하다가 9월에 중국으로 추방당하였다. 만주에서 리델주교와 다시 만나 한나자전(韓羅字典)에 착수하다가 1881년에 일본 나가사끼(長崎)로 건너가, 한국 선교에 필요한 교회서적 인쇄에 종사하였다. 1883년 블랑 주교의 요청에 따라 다시 한국에 들어가, 강원도지방의 전교를 맡아 1889년까지 6년간 이천(伊川), 원산(元山)을 근거지로 하여 교세 확장에 힘썼다. 한때 호조(護照)를 핑계로 박해를 받아, 원산을 떠날 뻔 하기도 했으며, 1889년 4월 주교의 명에 따라 서울에 올라온 그는, 그 동안 쇠약해진데다가 장티푸스까지 겹쳐, 끝내 치유치 못하고 4월 29일 선종하였다.
[참고문헌] Relation de la Captivite et de la delivrance de M. Deguette, Paris 1880 / Compte Rendu, Societe des Missions-Etrangeres, Pari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