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ange, Florian(1875~1938). 초대 대구교구장(大邱敎區長). 주교. 한국명 안세화(安世華). 1875년 프랑스의 로렌(Lorraine) 지방에서 태어났으나 1870년 독불전쟁(獨佛戰爭)으로 로렌지방이 독일에 점령되었기 때문에 파리로 이주해 살았다. 1893년 파리대학 문과를 졸업하고 철학과를 다시 이수하였으며,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을 전공한 다음 1898년 졸업과 동시 사제서품을 받고, 곧 임지인 한국으로 떠났다.
그해 10월 6일 서울에 도착한 그는 우선 조선말과 풍속을 익힌 다음 1899년에 부산(釜山)본당 신부로 임명되어 첫 포교사업에 정진하였다. 그러나 그의 학덕겸비의 고매한 인품은 그가 부산에 내려 온 지 불과 1년도 못되어 즉 1900년에 서울 용산신학교 교수직을 맡게 되었다.
신학교에서 6년간 봉직하면서 내국인 사제 양성에 정진 하던 차, 1906년 10월 19일에 <경향신문>이 창간되자 그 경영과 편집을 맡아 개화기의 애국 계몽운동에 앞장섰으나, 불과 4년 만에 한일합방(韓日合邦)으로 일제의 탄압이 심해져 폐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특히 ‘법률문답’이란 고정란을 통해 민중과 공직자들에게 많은 혜택을 유익을 주었고 이로 말미암아 찬사와 신뢰 때문에 편집 책임자인 드망즈 신부의 사회적 영향력은 아주 컸었다.
<경향신문>의 창간과 더불어 부록으로 <보감>도 발간하여 교리와 교회사에 대한 지식과 함께 사회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알려, 교인들의 신앙과 새생활을 교도하는 데 큰 공을 남기었다.
1911년 4월 8일. 서울교구에서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이 분할되어 대구교구가 신설되는 동시에 드망즈 신부가 대구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이에 따라 드망즈 신부는 6월 11일 명동성당에서 주교성성식을 갖고 6월26일 대구로 부임하여 교구 창설의 중임을 맡게 되었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부임한 지 5년 만에 대구교구는 교구관리소, 신학교대성당 증축, 수녀원 등 주요 시설을 모두 갖추게 되었다. 이에 날로 교세가 확장되어 1919년에 로마 교황청을 방문하였고, 이때 대구신학교의 두 학생을 함께 데리고 가 로마 우르바노대학에 유학시켰다.
1925년에는 로마 교황청에서 거행된 조선 순교자 79위의 시복식에 참석하였고, 1928년에 중병을 얻어 고국에 돌아가 치료와 요양으로 3년을 체류하다가 1930년 11월 11일에 다시금 조선에 돌아왔다. 그러나 이미 나이가 연로하여 날로 늘어나는 교세를 전담키가 어렵게 되자, 오래전부터 계획해 오던 전라북도를 1931년 5월 감목대리구로 설정하고 김양홍(金佯洪, 스테파노) 신부를 초대 감목대리로 임명하였는데, 1937년 이 지역이 지목구(知牧區)로 설정됨으로써 최초의 방인교구를 탄생시켰다. 바로 이 해는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었으므로 주교 공의회는 교리서 문제에 있어서, 우선 전국에 통일된 교리서의 필요성을 느껴, 새로운 통일된 교리서 편찬을 위한 5교구위원회가 설치되고 그 위원장에 드망즈 주교가 임명되었다. 드망즈 주교는 2년 동안 교리서 편찬작업에 전심하여 1934년에 간행을 보게 되었다.
1934년 10월 31일에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받아 그의 36년 걸친 조선교구에서의 헌신적인 봉사와 대구교구 설창에 대한 절대적인 공로를 보상받았다. 1933년에 전라남도지방을 애란(愛蘭)의 골룸바노 외방전교회 신부들에게 전교를 전담케 하여 1937년 4월 15일 대구교구로부터 광주교구를 분할 독립시켰다.
이와 같이 드망즈 교주는 신설된 대구교구를 맡아 불과 25년 만에 대구교구와 전주, 그리고 광주의 3개 주교구로 이를 나누어야 할 만큼 크게 성장시키는데 온갖 정력을 다한 끝에 1938년 2월 9일에 대구에서 선종하였다. 조선에 입국한 지 40년 동안을 전교에 힘쓰다 63년를 일기로 선종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