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무일도(聖務日禱)의 첫 정시과(定時課). 우리나라에서는 야과경(夜課經)이라고도 하였다. 자정 직후부터 이른 아침까지 바쳐지던 기도였으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개혁 때 독서의 기도(Office of Reading)로 바뀌었다. 독서의 기도는 3개의 시편(詩篇) 귀절과 2개의 독서(讀書)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기도가 끝나면 바로 아침기도가 이어진다.
조과1 [한] 早課 [라] preces matutinae [영] morning prayer [관련] 아침기도
성무일도(聖務日禱)의 아침기도(laudes, matutinae)와는 별개의 기도로, 매일 아침 교우들이 바치던 기도. 1864년 초간 이후 1972년까지 한국 교회의 공식 기도서로 쓰였던 ≪성교공과≫에 그 기도문이 수록되어 있다. 조과에는 제1양식과 제2양식이 있는데, 제1양식은 성호경(聖號經), 오배례(五拜禮), 천주경(天主經), 성모경(聖母經), 종도신경(宗徒信經), 고죄경(告罪經), 관유하심을 구하는 경, 대회죄경(大悔罪經), 도우심을 구하는 경, 사하심을 구하는 경, 호수천신송(護守天神誦), 성교회와 중인(衆人)을 위하여 외는 경, 야소성명도문(耶蘇聖名禱文), 성모를 찬송하는 경, 천주십계(天主十誡), 성교사규(聖敎四規), 봉헌경(奉獻經) 등의 순서로 되어 있고, 제2양식은 제1양식에서 대회죄경, 도우심을 구하는 경, 성교회와 중인을 위하여 외는 경, 성교사규 등의 부분을 뺀 것으로 제1양식보다 조금 간략하게 되어 있다.
조과는 1972년 ≪가톨릭기도서≫가 간행되면서 이름이 아침기도로 바뀌었고, 순서도 매우 간략화되어 성호경, 주의 기도, 봉헌경을 포함한 5개 부분으로 축소되었다. (⇒) 아침기도
조건 세례 [한] 條件洗禮 [라] baptismus conditionalis [영] conditional baptism
천주교에 입교하려는 자에 대하여 그가 과거에 세례받은 사실이 있는지, 또는 유효하게 세례를 받았는지 의심스럽고 이를 성실히 조사하여도 그 의문이 풀리지 않을 때 그에게 조건부로 베푸는 세례. 세례 예식 중에 ‘당신이 세례를 받을 만하면’이라는 조건을 전제하나 그 뜻은 ‘당신이 세례받은 적이 없다면’ 혹은 ‘당신이 받았던 세례가 유효하지 않다면’이라는 의미이다.
세례의 사실에 대한 의심은 기아(棄兒)를 발견하여 세례 주고자 할 때에 발생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며, 세례의 유효성은 세례집권자가 교회의 지향에 따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물을 사용하여 세례를 주었는지, 세례 수령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며 세례 받고자 하는 지향을 가졌는지 등에 관하여 문제된다. 역사상 세례의 유효성은 세례집권자의 성덕이 세례에 미치는 영향을 중심으로 논의되었으며, 3세기 치프리아노 주교와 스테파노 1세 교황과의 논쟁에서 비롯하여 4세기 초엽 도나투스 열교 사건을 거치면서 확립되었고 콘스탄츠, 피렌체, 트리엔트 등 공의회를 통하여 집권자의 성덕이 성사의 유효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음이 확인되었다. 그러므로 비가톨릭 교회에서 세례받은 자는 그 세례가 원칙상 유효하므로 세례수령자나 집권자의 의향, 세례예식의 봉행 등에 있어서 의심할 만한 합리적인 이유가 없는 이상 조건세례를 받아서는 아니된다(교회법 869조 문항 참조). 세례의 유효성이 의심되어 조건세례를 베푸는 예로는 의식불명 상태에서 임종대세를 받은 자가 의식을 회복했을 때 조건 대세를 받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조강 [한] 趙綱
조강(1832∼1869). 순교자. 세례명 마태오. 충청도 진천(鎭川) 출신. 원래 그의 집안은 경기도 광주(廣州)에서 대성(大姓)을 이루고 살았는데 조부(祖父)가 남인학자(南人學者)들과 교유(交遊)하면서 천주교에 입교한 관계로 1839년 기해(己亥)박해가 일어나자, 교우촌을 찾아 피신한 곳이 진천 배티[栢谷里]였고 1866년까지 3대에 걸쳐 이곳에서 살았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진천에서 잡혔으나 포졸들이 한 눈을 파는 사이 도주하여 경기도 용인군 죽산 용천리(竹山 湧泉里) 마을로 피신하였는데 그 이듬해에 아내와 나이 어린 동생과 함께 다시 잡혔다. 그의 동생 조종(趙綜)은 나이가 어려 석방되었지만, 문전걸식을 하면서 3개월 동안이나 옥에 갇힌 형과 형수에게 얻어온 밥을 갖다 주었으므로, 옥리들도 감탄하여 어린 것을 잘 돌보아 주었다고 한다. 조강은 1869년 8월 27일(음) 아내와 같이 죽산에서 참수 치명하니 그의 나이 30세였고 그의 아내 서(徐)씨는 27세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