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본당2 [한] 利川本堂

수원교구 소속 본당. 이 본당은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주보로 1941년 남곡리본당에서 분할되어 그 해 7월 4일 박동헌(朴東憲, 마르코) 신부가 초대 본당신부로 부임하였다. 박동헌 신부는 남곡리본당에 재임 중 신자가 불과 몇 명밖에 안 되던 이천읍을 왕래하며 천주교를 개척, 그의 열성으로 교세가 늘어가자, 교구에서는 1940년 장래에 대비하여 이천읍 중리(中里) 241-1번지에 740평의 교회부지를 사 놓았다. 박 신부는 부임하던 해 11월에 성당대지 안에 있는, 수백년 전부터 이천부자와 군수가 살던 한옥을 사서 성당으로 개조하여 임시본당으로 삼았다.

본당 창설 당시의 관할지ㅣ역은 이천국과 광주군 도척면(廣州郡 都尺面) 일부로 공소는 12개소에 신자 총수는 812명이었다. 본당회장은 홍숙(洪塾, 마르코). 1941년 12월 24일 제1차 회장피정이 개최되고 청년회도 조직되었다. 1944년에는 1,072명으로 교세가 신장하였다. 이 본당은 기초를 다진 박동헌 신부가 1948년 2월에 떠난 뒤, 장금구(莊金龜, 크리소스토모) 신부가 부임하여 그해 4월에 성당을 증축하였다.

교세의 확장으로 1950년 4월에는 여주본당이 여기에서 분할 독립하고, 6.25동란으로 성당이 전소되어, 1953년 2월 창전리(倉前里) 산 9의 3번지에 새 부지를 마련, 성당과 사무실을 신축하였다. 사제관은 1954년 1월 김유룡(金裕龍, 필립보) 신부가 부임하여 지었다. 1958년 6월에는 광주(경안)본당이 이 본당으로부터 분리되어 독립하였다. 1959년에 창전리에서 지금의 위치로 다시 이전되고, 현 성당의 낙성기도 가졌다. 1963년 신원식(申元植, 루가) 신부가 파견되었으며, 본당 사제관도 완성되었다. 1980년에는 두 수녀가 파견되었으며, 본당 사제관도 완성되었다. 1983년 현재 신자총수는 1,527명이며 공소는 14개소.

초대 본당신부인 박동헌 신부 이후 이 본당을 맡아 온 신부는 다음과 같다. 2대 장금구, 3대 이계선(李啓先, 레오), 4대 김유룡, 5대 박지환(朴址煥, 요한), 6대 정욱진(丁旭鎭, 토마스), 7대 신원식, 8대 장근실(張根實, 비오), 9대 하한주(河漢珠, 요한), 10대 백명기(白明基, 마르코) 신부, 그리고 현주임신부로 있는 11대 윤석원(尹錫元, 요셉) 신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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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본당1 [한] 伊川本堂

전(前) 춘천교구 소속으로 강원도 이천군 이천면 개하리에 소재한 침묵(沈黙)의 본당. 강원도 이천에 선교사가 정착한 것은 1892년의 일로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로(Rault, 盧) 신부가 염산리(簾山里)에 정착한 것이 시초였다. 당시의 신자수는 900여명으로 이천에서 산 하나 너머에 있는 신계 · 곡산 지방까지 전교하였다. 그 뒤 뒤테르트르(Dutertre, 姜) 신부가 전교하였고, 1896년에는 이천 포내(浦內) 본당을 분할하였고, 1908년에는 염산리에서 이천읍 내의 개하리(開下里), 속칭 망답(望沓)으로 본당을 이전하는 한편, 그해에 ‘경천애국’(敬天愛國)을 교지(校旨)로 한 명의학교(名義學校)를 설립하였다. 1909년 당시 이천본당은 공소수가 이천군에 20개, 평강군내에 11개 등 총 31개로 늘었고, 신자수도 2,000여명으로 증가하였다. 1915년에는 김윤근(金允根, 요셉) 신부가 황해도에서 부임하여 1925년까지 주임신부로 재직하면서 1919년 28간의 한옥 성당과 20간의 사제관을 신축한 외에도 청년회, 애련회, 루르드회, 소년조배회 등 많은 단체를 조직, 활동하게 하여 본당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22년 당시 이천 본당의 관할 공소는 이천면에 3개, 용포면(龍浦面)에 3개, 산내면(山內面)에 4개, 학봉면(鶴鳳面)에 2개 등 모두 12개였다. 김 신부의 후임으로 피숑(Pichon, 宋), 이보환(李普煥, 요셉) 신부 등 여러 신부들이 이어졌고, 1928년에는 일시 폐지되었던 이웃 포내본당 지역을 겸하여 관할 한 적도 있다. 이 본당은 교통이 불편한 산간벽지에 위치한 까닭에 교구장의 방문이 없다가 1936년 11월 16일 서울교구장 라리보(Rarribeau, 元) 주교의 사목방문이 이루어져 200여명의 신자들이 견진성사를 받았다. 1937년 신자수는 1,220명으로 1939년 4월 25일 춘천지목구가 설정됨에 따라 이에 편입되었으나, 1945년 광복 후 38도선의 설치로 침묵의 본당이 되었으나, 1945년 광복 후 38도선의 설치로 침묵의 본당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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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원] Egypt

아프리카 대륙의 북쪽에 위치한 고대 문명 발상지의 하나. 애급이라고도 불리며 현재의 국명은 이집트아랍 공화국이다. 국토 100만 1.449 km2, 인구 4,167만명(1982년 추계)인 이 국가에는 16만명의 가톨릭 신자가 15개 교구 199개 본당을 이루고 있다(1982년 현재).

이집트는 구세사에서 다양한 역할을 하였다. 고대에 유복했던 이 땅은 굶주린 성조들이 몸붙여 살던 곳이요(창세 12:10). 패전한 이스라엘인의 피난처이자(예레 42~) 예수께서 피신한 곳이기도 하다(마태 2:13). 막강한 국력을 자랑하던 이집트제국은 일찍이 히브리인들을 억압하기도 했으나(출애 1장-13장) 제국의 세속적인 영화가 이스라엘인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다윗왕(2사무 20:23-26)과 솔로몬왕(1열왕 4:1-6)은 이집트의 정치제도를 모방하였고, 사마리아(호세 7:11)와 예루살렘(2열왕 17:4)은 위기에 처했을 때 이집트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문화의 고장으로 모세가 교육받은 곳이며(사도 7:22) 우상숭배와 마술의 고장으로 이스라엘을 유혹하였다(예레 44:8). 야훼께서 출애급을 단행하실 때 이집트를 벌했으나, 이집트가 회개하고 당신을 섬기도록 섭리하신다(이사 19:16-25).

그리스도교의 공동체가 2세기 이전에 에집트에 존재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그러나 성신강림 때 사도들의 설교(사도 2:10)를 들은 사람 중에는 이집트인이 포함되어 있고, 마르코가 알렉산드리아 교회를 세웠다는 전승을 통하여 짐작할 수 있을 분이다. 2세기 말엽 이집트 교회는 굳건한 조직을 갖춘 모습으로 역사에 나타나며 이 시기에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데메트리오(Demetrius, 189~231)의 활약이 컸다. 셉티무스 세베루스(Septimus Severus) 황제 및 데치우스(Decius, 249~251) 황제의 박해를 견디어낸 이집트 교회는 칼체돈 공의회(451년) 이후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디오스코루스(Dioscorus)의 그리스도 단성론이 이단으로 배격되기도 했으나 글레멘스, 오리제네스 등 지도자를 배출하면서 번성하였다. 3세기 성서가 번역되고 테베를 중심으로 수도원이 발달하였는데 예로니모가 쓴 테베의 바울로의 일생(Vita pauli)과 아타나시오가 쓴 안토니오의 일생(Vita Antonii)를 통하여 당시 수도자들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이집트는 642년 이후 아랍의 지배를, 1517년 이후에는 터키의 지배를 받았으며 그간 혹독한 박해로 3,000여개의 교회가 파괴되었고 참된 신앙의 자유는 1882년부터 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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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조 [한] 李之藻

이지조(1565~1630). 중국 명(明)나라 말기의 문신. 천주교인. 세례명 레오. 자는 양암(凉菴), 호는 양암거사(凉菴居士) · 양암일민(凉菴逸民). 항주(杭州)에서 출생. 서광계(徐光啓, 1562~1633), 양정균(楊廷筠, 1577~1627)과 함께 중국 천주교의 3대 지주(支柱)로 추앙받는다. 1594년 거인(擧人), 1598년 진사(進士)가 되고 이어 남경(南京)의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이 되었다. 서학(西學)과 천문 · 지리 · 역산 · 수학 · 군사 · 치수(治水) · 종교 · 철학 · 이학 등 다방면에 관심을 갖고 연구했고 1603년 리치(Matteo Ricci, 중국명 李瑪竇, 1552~1610)의 ≪천주실의≫(天主實義)를 간행하고 이어 1605년 역시 리치의 <혼개통헌도설>(渾蓋通憲圖說)을 개역(改譯)하였으며 리치를 도와 한역서학서의 저술과 간행을 도왔다. 1610년 중병에 걸리자 리치의 권유로 성세성사를 받았고, 이듬해 부친이 사망하자 항주로 낙향하여, 트리고(Nicolas Trigault, 중국명 金尼閣, 1577~1628), 카타네오(Lazarius Cattaneo, 중국명 敦居靜, 1560~1640) 등과 함께 항주를 개교(改敎)시키는 한편 양정균에게 전교, 그를 입교시켰다. 1613년 태복사소경(太僕寺少卿)이 되어 조정에 한역서학서의 간행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고 ≪동문산지≫(同文算指)의 한역(漢譯)에 참가하였다. 1616년 남경에 교난이 일어나자 천주교인의 보호에 힘쓰고 서광계(徐光啓)의 청으로 마카오에서 서양총포를 구해와 난(亂) 진압에 공헌했으며 1621년에는 감독군수광록사소경(監督軍需光祿寺少卿) 겸 관공부수청리사사(管工部水淸吏司事)가 되어 자신이 직접 총포를 제작하는 한편 마카오에서 대포를 들여와 국방강화에 힘썼다. 1629년 서광계와 함께 ≪숭정역서≫(崇禎曆書)의 간행에 참여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이듬해 사망하였다.

이지조는 서관계, 양정균과 중국 천주교회의 초석을 다진 인물로서, 항주지방의 교회를 창설하는 한편 한역서학서의 간행에 참여, ≪천주실의≫, ≪기인십편≫(畸人十篇), ≪성수기언≫(聖水紀言), ≪직방외기≫(職方外紀), ≪동문산지≫ 등의 서(序)를 남겼고, 스스로도 ≪환유전≫(-有銓), ≪명리탐≫(名理探) 등을 저술하여, 천주교의 중국전파 및 동양전파에 큰 공적을 남겼다.

[참고문헌] 方豪, 中國天主敎史人物傳, 香港公敎眞理學會, 香港,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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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연 [한] 李止淵

이지연(1777~1841). 문신. 천주교 박해자. 자는 경진(景進), 호는 희고(希谷), 본가는 전주(全州). 공조참판(工曹參判) 의열(義悅)의 아들. 1805년 증광문과 을과(增廣文科乙科), 1806년 문과중시 을과(文科重試乙科)에 각각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고 주서(注書)를 거쳐 경연관(經筵官)이 되었다. 그 뒤 도승지(都承旨)와 형조 · 이조 · 호조판서를 지내고 1837년 우의정에 승진 이듬해 실록정 총재관(實錄廳總裁官)으로 ≪純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고, 이해 영의정 이상황(李相璜)과 좌의정 박종훈(朴宗薰)이 사직하자 홀로 정승의 지위에 있었으며 조인영(趙寅永) · 조만영(趙萬永) 형제 등 풍양조씨 세력과 결탁, 대왕대비 김씨(大王大妃金氏)를 비롯하여 천주교에 대해 호의적인 안동김씨 세력을 공격하기 위해 1839년 기해박해를 일으켜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 모방(Maubant, 羅) 신부, 샤스탕(Chastan, 鄭) 신부와 많은 천주교인을 사형시켰다. 그러나 이해 말 우의정을 조인영에게 빼앗기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전임되었다가 1840년 대사간 이재학(李在鶴), 대사헌 이희준(李羲準) 등에 의해 정권을 독점했다는 탄핵을 받고, 함경도 명천(明川)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시호는 문익(文翼) 저서로 ≪희곡유고≫(希谷遺稿)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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